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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우병우, 연산군의 역사를 음미해야 한다.

[편집위원장 칼럼]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정권의 미래는 매우 불행하다.

임두만 | 기사입력 2016/08/31 [16:43]

박근혜-우병우, 연산군의 역사를 음미해야 한다.

[편집위원장 칼럼]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정권의 미래는 매우 불행하다.

임두만 | 입력 : 2016/08/31 [16:43]

 임두만 편집위원장 = 2016년 8월 29일, 우리는 두 가지 매우 특기할만한 사건을 목격했다. 우선 대통령 스스로 공약으로 제시하여 설치했던 특별감찰관실의 1대 특별감찰관인 이석수 감찰관이 자신의 감찰로 인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면서 사의를 밝혔다. 그리고 또 하나, 자타공인 대한민국 제1의 언론사 조선일보의 송희영 편집인 겸 주필이 사의를 표명, 일선 퇴진했다.

 

 

 

특별감찰관의 탄생 목적은 대통령 측근 실세나 친인척의 비리수사를 검찰이 할 수 없으므로 ‘특별한 직책의 감찰관’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 감찰관이 대통령 측근 실세에 대한 자신의 감찰업무 때문에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어 찍혀나갔다.

 

조선일보는 지난 한달 여 대통령 최측근으로 청와대의 모든 권력 중심이라는 우병우 민정수석과 파워게임을 했다. 우 수석 처가가 거액의 상속세 연체금을 피하기 위해 게임회사 넥슨의 김정주 회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수백억대 땅을 넥슨에 매매했고, 여기에 우 수석이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폭로하며 우 수석 퇴진몰이에 앞장을 섰다.

    

그러나 이 같은 조선일보의 세몰이에 청와대는 ‘부패한 기득권세력’이란 방어벽을 치고 전면전을 불사했다. 그 끝이 현재 송희영 주필의 퇴진이다.

 

물론 송 주필의 퇴진은 자신의 잘못된 행보가 낳은 업보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폭로이기는 하나 송 주필은 앞서 대우조선해양의 남상태 사장 연임로비 과정에서 수억 원 대의 호화여행 로비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 실세 언론인으로 경제계 전반까지 물밑에서 로비를 통해 인사권까지 쥐고 흔들었다면 이는 징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2016년 8월 29일은 이 땅 최고 권력에게 도전한 핵심적이자 의미있는 두 명의 또 다른 권력자가 동시에 퇴진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 말해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와 일전을 치른 ‘양사(兩司)’의 두 거목이 결국 최고 권력자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찍혀나간 날이란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는 당분간 박근혜 권력에 대항하거나 간언할 누구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이제 이 정권에는 이정현 같은 ‘예스맨’만 남아 ‘일치단결’을 외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이 정권과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국가와 민족, 백성들에게 유익한가? 역사는 유익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절대 권력이 ‘간언’과 ‘간쟁’을 불편해 하고 억압한 뒤, 더한 절대 권력을 휘둘렀을 때 나타난 결과는 처참했다. 헌정사 70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이미 끝을 알려줬으며 조금 더 들어가면 조선시대 대표적 폭군이었던 연산군이 알려주고 있다.

    

폭군 연산은 간언을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재임 중에 그 시대 유일한 언로인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까지 혁파하거나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조정과 왕실 내에 반대파를 압살하고 ‘예스맨’만으로 자신의 주변을 채웠다. 그 결과는 곧 중종반정이었다.

    

서기 1506년(연산군 재위 12년) 음력 9월 2일, 폭군으로 패도정치를 일삼는 연산을 축출하기 위해 거병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의 쿠데타군은 훈구파의 신료들로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던 신수근, 임사홍 등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들은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중종반정의 성공이었다.

    

반면, 쿠데타군이 왕궁을 장악한 그날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 연산군은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뒤 궁궐 근처 한 민가에 숨었다. 하지만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곧 체포되었다. 그리고 체포 즉시 압송되어 폐위 된 뒤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왕이 유배된 뒤 애첩 장녹수 등 후궁들은 종로, 남대문 등 저자거리에서 투석 사형당했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교동도로 이배된 패주 연산은 교동도 유배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 6일, 역질 화병 등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기록은 병사인데 사망 후 세간에선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어떻든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1세였다.

    

연산군, 그는 왜 이런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국가와 민족, 백성과 역사보다 그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수에 정치적 목적을 뒀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연산은 곧바로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양사(사헌부 사간원)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 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선왕이자 연산의 부친인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추숭 시도를 반대했다. 연산은 이런 사림파의 태도에 이들과 척을 지기 시작했다.

    

이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반대파를 능멸하고 맹목적 충성파만 중용했다. 기록된 왕조실록은 연산 재위 12년을 숙청의 피로 얼룩진 시간들이었다고 쓰고 있다. 패역한 왕에 의해 죽어나간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살아있는 반대파는 죽이고, 죽은 반대파들은 시신을 끌어 내 부관참시했다. 패역도 그런 패역이 없다. 여기에다 연산은 조선시대 언론이었던 3사(三司)를 폐지했다.

 

당시의 3사(三司)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말한다. 사헌부(司憲府)는 중앙 행정부를 감찰하고, 관리를 규찰하며 종친(宗親)과 문무백관의 잘못이 있으면 탄핵을 주관했다. 또 국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극간(極諫)하는 것을 본령(本領)으로 삼았다. 어쩌면 오늘 날의 특별감찰관이 사헌부 대사헌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헌부와 함께 양사로 불리는 사간원(司諫院)은 왕에 대한 간쟁(諫諍)을 주 임무로 하는 기관이다. 간쟁(諫諍)이란 왕이 잘못 행하는 정사에 대해 간절한 마음으로 왕의 옳지 못한 일을 말하여 잘못을 고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언론이 대중적이지 않을 시기에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며 이 기관의 수장을 대사간으로 불렀다.

    

이들 양사 외에 홍문관(弘文館)을 3사의 하나로 부른 것은 왕에게 역사적 자료를 공부하게 하므로 절대군주이지만 왕이 패역정치를 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홍문관 대제학은 왕궁 서고에 보관된 도서와 자료를 관리하고 공부하면서 역사적으로 정치를 연구하고 군주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왕의 물음에 답하는 직제였다. 조선시대는 이들 3대 기관을 언론3사라고 칭했다.

 

대신들은 왕이 이 3사의 언론을 막는 것을 폭군의 대명사로 쳤다. 그런데 연산군은 이 3사를 폐지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훈구파를 중용하면서 사헌부를 축소하고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렸으며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했다.

 

귀찮고 번거롭다 하여 경연도 축소하고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시켰다. 이후 연산군 곁에는 훈구파의 임사홍 같은 간신들만 남았다. 이에 사후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연산은 왕의 칭호도 복원되지 못하고 폭군 연산으로 남아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복위되었고, 광해군 또한 재평가의 반열에서 그의 개혁과 북방정책을 높이 평가받고 있으나, 연산은 패역한 폭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는 이처럼 냉철하다.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박근혜는 취임 후 줄곧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에 천착했다. 이 정권에서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직 후보자들에게 야당 국회의원들은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고 묻는 것이 일상화다. 이미 교과서에 쿠데타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 정권 핵심들에게 다시 물어야할 정도로 대통령은 부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연장선이 검인정이던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 정권의 인사는 ‘돌려막기’란 말이 일상화다. 인제를 널리 찾아 쓰는 것이 아니라 연산이 훈구파만 중용했듯이 ‘진박’만 중용한다. 곁에서 충성했더라도 간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내침을 당한다. 이후 그들은 탈박이 되고 비박이 되고 원박이 된다. 김무성 유승민 이혜훈 진영 전여옥...한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던 사람들이지만 지금 이들은 철저하게 내침을 당한 모습으로 있다.

    

주변에는 충성파 외엔 없으며 그 충성파를 비판하면 ‘정권 흔들기’라며 정면 대응에 나선다. 작년의 ‘비선실세 국정개입’이라는 정윤회 사건에서 찍혀나간 사람은 조웅천 비서관이며, 작금의 우병우 파문에서 찍혀나간 사람은 이석수 감찰관이다. 그래도 문고리 3인방이라는 사람들은 끄덕없이 온존한다. 곳곳에서 박정희 복원사업이 일어나고, 특별한 곳에서는 ‘박정희神’이 되기도 한다.

    

연산이 폐비윤씨의 복권과 추승으로 자신의 정치를 망치고 나라를 망친 것은 팩트다. 연산이 간언하는 사림파를 내치고 고개만 끄덕이는 훈구파를 중용했던 것도 팩트다. 그리고 그 끝은 앞서 기록했듯이 재위 12년 후 쫓겨나 낙도에서 병사한 것도 팩트다. 물론 그가 아끼던 훈구파와 애첩들, 그리고 자식들까지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도 팩트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가 다시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나라 곳곳은 신음소리만 난무한다.

    

누리과정 예산 표류로 흔들리는 영유아교육, 초등 1학년이면 선행학습에 빠져야 하는 사교육 멍에를 진 소년 소녀들, 대입이란 도그마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도록 하는 청소년들, 취업난이 아니라 ‘헬조선’를 말하는 젊은이들, 인구절벽을 경고해도 출산에 관심 없는 젊은여성들...서오정을 걱정하는 중년들, 갈 곳 없어 떠도는 실버세대들....말 그대로 1%를 제외한 전 국민들의 신음소리는 전국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도 1%는 이대로만 영원히를 노래한다. 지금도 강남은 아파트값 폭등을 우려한다.

    

그런데 권력자는 간언과 간쟁을 막고, 충성파만 중용하므로 돌려막기 인사가 대세다. 얼마나 썩었으면 음주운전 단속 총 책임자가 음주사고를 내고 그것을 은폐한 사람일까? 그래도 당사자는 고개 몇 번 끄덕이고 임명장을 받고, 이를 임명한 사람은 이게 무에 잘못이냐고 눈을 부라린다.

    

연산의 패역을 방치하며 자신의 권력을 탐했던 훈구파의 거두 임사홍은 중종반정의 성공 뒤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으나 사형 후 20일 뒤,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는 2중 죽음의 당사자로 남았다. 임사홍만이 아니다 이미 죽은 그 아들 임숭재는 연산의 채홍사를 자임한 자로서 전국의 미녀를 연산에게 상납, 연산의 색욕을 채워준 자다. 그런 그는 아비가 부관참시를 당할 때 같이 부관참시를 당했다.

    

과거의 역사에서 현실을 읽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충신은 간언을 잘하는 사람이다. 어진 통치자는 간언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종을 대왕이라고 칭하고 연산을 군이라 칭하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면 현 정권의 미래는 두렵기만 하다. 이정현, 우병우, 문고리 3인방...그들의 책무가 지금 매우 무겁다. 박근혜 정권, 어디로 가는가? 5년은 영원한 세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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