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대한정통사(50)야수의 본색

일제침략의 노골화와 유태자본의 세계정책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10/28 [17:27]

대한정통사(50)야수의 본색

일제침략의 노골화와 유태자본의 세계정책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10/28 [17:27]

 

 

 

 

야수의 본색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일제는 러일전쟁을 벌이면서 위선에 찬 한일의정서를 강제함과 동시에, 그 의정서에 의하여 대한국에 대해서 막무가내적인 내정간섭을 자행하는 한편, 대한국인들을 저들의 필요에 따라서 강제징발하고 살인적으로 학대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며, 또한 전쟁광란에 소요되는 대부분의 물자들을 대한국으로부터 갈취하면서, 대한국 전체를 불법적으로 저들의 병참기지화하였다.

 

그러한 흉악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일제는 막대한 군대와 현병과 경찰 등을 대한국에 투입하고, 일제육군대장 장곡천(長谷川:하세가와)을 사령관으로 하는 사령부를 서울에 둔 대한국주둔군을 편성하였고, 군용철도구역 및 전신선 등을 대상으로 하는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

 

그 내용인즉,

 

‘군용전선 및 철도에 해를 끼치는 자는 사형에 처함’

‘상기 사실을 알면서도 감추는 자는 사형에 처함’

‘촌락 안에 가설되어 있는 군용전선 및 철도의 보호는 부락민의 책임으로 함’  등의 8개항이 중심이 되었는데, 그러한 군율은 9월에 이르러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적용되었으며, 그 외에도 무기나 탄약이나 군수품에 대한 가해자에게도 적용한다는 포고령을 내려 한반도 전체를 거대한 수용소처럼 만들고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노일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다음 해 1월에는 대한국정부의 치안경찰권까지 박탈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및 정치활동에 대하여 탄압을 가하고, 일제의 징발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저들의 악랄한 군율을 적용하였는데, 추가된 군율 19개 항은 적용범위가 광범위하고 적용방식이 애매하기 짝이 없어서 적용되지 않는 행위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대한국은 이로써 노일전쟁 기간동안 일제의 강제하에 완전히 창살없는 감옥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러시아에 비하여 국력과 수송력 등이 크게 뒤지는 일제는 당장에 전투에 필요한 무기나 탄약 등만을 간신히 확보하여 댈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군량미나 기타 비품 등을 주로 현지에서의 조달로 충당하려 하였다.

 

따라서 노일전쟁중 대한국인들에 대한 일제의 수탈은 극에 달해서 일제군대가 지나간 지방에는 식량일체를 강탈당하였음은 물론, 심지어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위시하여 가축들이 모두 징발당하여 주민들이 기아에 시달렸고 더이상 농사를 지을 수도 없어서 농지가 황폐화되는 등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일제의 대군이 집결했던 평양이북의 평안도 일대의 참상은 최고조에 달하여 유리걸식하는 사람(즉, 거지)들이 대거 발생하였다.

 

  일제는 경의선만은 자력으로 건설해보려던 대한국의 정책을 완전히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경의선부설권을 강제로 얻어내기도 했는데, 그에 따라서 철로연변의 광대한 땅을 수탈하고 주변의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철로공사를 강행했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하루 세끼 식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만을 지급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것마저도 노동력청부를 맡은 친일매국도당 일진회가 중간에서 착복하였으니, 그렇지 않아도 살인적인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참상은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거기에다가 일제는 철도부설을 구실삼아서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던 많은 왕릉과 고분들 및 역사유적들을 마구 훼손하거나 도굴하여 일본으로 훔쳐가 버렸는데, 그 중에서도 고구려시대의 귀중한 문화재들은 이 때 가장 큰 손실을 입고 사라져갔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의 후원에 힘입어 노일전쟁에서 다소 우세를 점칠 수 있게 된 일제는 공공연히,

 

"우리는 만주를 반환할 것이라는 중국에 대한 약속은 지킬 것이다. 일본정부는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해서 그것을 이행하고자 했다. 대한국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대한국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한국을 보호해야만 하겠다. 한반도는 일본이 오래전부터 관계를 맺어 온 지역이고, 또한 기후가 좋아서 우리 국민이 이주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라고 강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일제의 날강도적 행위와 적나라한 침략야욕은 문명한 대한국인들로부터 크나큰 분노를 자아냈으니, 의정부참찬(고위직 국무위원)이던 왕산 허 위는 그러한 일제의 작태를 명백한 침략행위로 인식하고,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전국 방방곡곡에 발송하여 그 실상을 고발하는 한편, 일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대일항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방금 한일간의 교섭은 동방 안위의 분기점이다. 진실로 마땅히 호의를 두터이 하고 진심으로 상부상조한 연후에야 동방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어 러시아인의 병탄을 면한다는 것은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한국도 바라는 바이다.

 

다행히 일본황제가 깊은 생각으로 원대한 것을 도모코자 만리에 출병하여 그 노고를 꺼리지 아니하고‥우리의 독립을 공고히 하려 하니, 이는 진실로 우리 대한국이 가장 감동하던 바로써 동아시아의 안전은 실로 이 전쟁에서 성취될 것이라 하였더니, 어찌된 일인지 사신(使臣)된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음인지 의정서가 결정된 지 이삼일이 채 안되어 그 취지를 변혁하여 매국간당들과 서로 결탁해서 우리 황제를 위협하고 우리 국권을 빼앗으며 우리 전국의 이익을 빼앗아 저들 손아귀에 넣지 않는 것이 없다.

 

  정부대신을 쫓아내는 권한까지 간여하니 뇌물수수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관청뜰이 저자를 이루었다. 저들이 좋아하는 자는 비록 간사한 무리라 하더라도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하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공정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도 갈아 치우도록 하여 우리 황제의 유신정치를 방해하며, 저들의 병졸과 인민들이 행한 난폭한 짓은 러시아인의 탐악하고 잔인했던 것에 비해 더 지나침에도 불구하고 방치하고 막지 아니하니, 소위 공고히 보존한다는 약속이 이렇단 말인가?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우리 삼천리 강토를 병탄하고 우리 이천만인의 생명은 어육이 될 것이다. 비록 러시아인이 동양에서 그들의 뜻을 폈다 하더라도 그 화가 이 지경에까지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도둑이 이웃에 들어갔다고 하여 대신 그 도둑을 쫓아주고, 그 공을 빙자해서 그 집 가산을 다 빼앗는다면 그 집 주인은 도리어 도둑에게 빼앗긴 것보다 못할 것이다. 현재의 정세가 어찌 이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대한국은 비록 피폐하다고는 하나 이천만 인구가 한 마음으로 분통함을 생각하고 의기를 격렬히 일으켜, 죽음의 땅에서 삶을 구하고, 망할 때에 보존을 도모한다면 어찌 우리가 연약하다고 근심할 것이며, 저들 일본이 강하다고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비록 기운이 다하고 힘이 부쳐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당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꼼짝 않고 앉아서 죽거나 머리를 오무린 채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저들 일본인들의 탐폭한 행동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지만, 이제 그 대강을 아래에 나열하여 십삼도 동포에게 통고하노니, 원컨대 여러 군자들은 목정에 하루 편안할 것을 구하지 말고, 협력분발하여 우리 종사(宗社)를 공고히 하고 우리 생령을 안보케 하여, 천하만방에 수치를 면하게 하라!”

 

  허 위의 격문을 접한 전국의 애국적 인사들은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산발적으로 궐기하기 시작했는데, 왜공사는 크게 당황해서 외부(외무부)에 곧 조회하고 협박하여 허 위 등 관련자들을 엄하게 다스리도록 요청하고, 4238년(서1905) 1월초에 왜군과 순사 등을 파견해서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격문을 압수하였다.

 

대한국의 현직 고위관리인 허 위가 반일투쟁에 앞장서는 것을 우려한 일제는 허 위를 헌병대에 구금한 후 대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1월 8일에 그의 직위에서 사임시킨 후 일단 석방하긴 했으나 엄중한 감시망을 펴서 행동의 자유를 속박했다. 그가 워낙 고위직 관리였기때문에 간악한 일제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허 위는 2개월간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시피 했으나, 광무황제는 그의 충정을 깊이 헤아려 3월 2일에 황제의 가장 측근 직책인 비서원승으로 임명했다. 황제는 그와 같은 충신들과 함께 구국의 방략을 모색하려는 뜻을 내 비친거나 다름없었으니 일제는 크게 경악하였고, 때마침 한일의정서에 반대하고 일제를 배척하는 구국상소를 올린 최 익현등과 허위가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어거지로 뒤집어 씌워서 3월 11일에 일제헌병대에 가두어 버렸다. 왜구들은 최 익현등 몇 명은 이틀 안에 일단 석방시켰으나 허 위는 4개월동안 가두고 회유와 협박을 되풀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 위가 끝내 굴복할 기미가 안 보이자 할 수 없이 7월 13일에 일단 석방은 시켰으나, 왜헌병 두 명을 딸려서 고향인 경상북도 금릉군으로 강제귀향시키고 철저히 감시토록 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봉쇄해 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허 위는 그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비밀리에 곽 종석·현 상건·이 학균·유 인석 등의 애국지사들과 여러가지 방법을 통하여 상의를 거듭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해 갔다.

    

* 국제자본집단의 세계정책

 

  전쟁, 특히 장기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전쟁에 소요되는 자금의 동원능력에 있다고 할 때, 노일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일제를 일방적으로 지원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으므로, 당시의 세계적인 자본의 흐름 및 그와 연관된 소위 ‘국제자본집단의 세계정책’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는 물론이지만 노일전쟁 당시에도 세계적인 자본의 흐름을 논할 때 유태인자본가들을 빼고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기135년경 로마제국에 의하여 유태인들의 마지막 저항이 처절하게 진압된 후 로마당국에 의하여 고향을 등지고 천팔백여년간 전 세계를 정처없이 떠돌게 되었던 방랑민족 유태인들! 그들은 유럽중세의 기독교적 봉건사회 속에서 ‘예수 크리스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어이없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그들을 다시 고향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줄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끈질긴 생존을 이어 왔다.

 

유럽봉건사회의 질서 속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일자리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무 기능이나 지식이 없는 유태인들이 할 수 있는 농노로서의 고된 노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름대로 물욕(物慾)을 억제하는 엄격한 면이 있었던 중세적 기독교사회에서 ‘불로소득사업’이었기에 가장 천시당하던 금융업(주로 고리대금업)이었다.

 

그 중에서 농노화된 유태인의 생활은 농노들 중에서도 더욱 비참한 것이었으나,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태인들은 일반적으로 상류사회의 유럽인들보다도 훨씬 높았던 민족고유의 교육열을 통한 탁월한 지적능력과 금융업(및 상업)을 통한 우월한 재력에 의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그들은 무식한 기사나 영주들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왕들의 재산관리까지도 도맡아 하면서, 유럽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급성장해 갔던 것이다.

 

  유태인들이 그들의 능력을 보다 더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사건은 다름아닌 ‘산업혁명’이었다. 중세를 통하여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유태인들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금력으로써 토지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공장들을 대거 소유함으로써 산업혁명의 견인차가 됨과 동시에, 대규모의 자본이 필요한 공업화 정책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던 근대유럽국가들의 정책에 힘입어서, 어렵지 않게 전 유럽의 금권(金權)을 한 손에 거머쥘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모든 나라의 재정관리에 있어서 유태인들은 깊숙히 관여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산업혁명이후 잦았던 유럽국가간의 상호분쟁에 쓰인 전쟁용자금의 주요한 공급원이 되면서 유태인들의 세력은 막강하게 성장해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태인들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곱게 봐 주지 않는 유럽인들도 늘어갔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중세기를 통하여 박해해 오던 유태인들로부터 보복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사로 잡힌 결과, 유태인들에 대한 배척의식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러한 반유태주의(Anti-Judaism)는 반셈주의(Anti-Semitism)라고도 했는데, 즉 유태인을 중동지방의 셈족의 한 갈래로 취급하여 야만족으로서 멸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짙게 깔렸던 대단히 인종차별주의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결과 봉건질서와 유태인에 대한 제도적 압제장치로부터 일순간에 풀려날 수 있었던 유태인들은 당연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사상운동에 많이 나서게 되었는데, 자본주의 사상의 선구자들은 물론 자본주의적 폐해를 개혁하고자 등장한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공산주의 사상의 선구자들도 대부분 유태인출신의 혁명가들이었음은 잘 알려지고 있다.

 

  서기 1860년경부터 크게 대두한 유럽지방의 반셈주의는 이러한 유태인들의 사회진출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반셈주의의 와중에서 유태인들은 유태인들대로 그간 축적되어 온 자신감과 재력을 바탕으로 옛 선조들의 땅이었던 가나안지방에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촉진시킨 사람은 맑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유태인 사상가 ‘모세스 헤스’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서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에프의 유태인의사였던 ‘레온 번스카’가 유태인의 ‘자주해방’을 부르짖으며, “유태인은 메시아를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지만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유태인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뒤를 이어 발생한 ‘드레퓌스사건’을 취재하던 유태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쯜’이 유태인의 미래청사진을 제시한 ‘유태인국가’를 저술하는 한편,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회 세계시오니스트 회의를 신호탄으로 하여 국가건설의 실무에 착수함으로써 유태인들의 가나안 이주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세계시오니스트 회의에는 유럽지방의 유태인들뿐만 아니라 미주대륙에서 이미 막강한 금권집단으로 성장한 미국의 유태인들도 대거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러시아에서는 유태인들이 주로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농노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서기 1881년에 이르러 맑스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청년들이 봉건사회를 타파하려는 혁명적 목적의 일환으로 러시아황제 알렉산더 2세를 폭사시키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위 ‘포그롬’이라고 불리우는 유태인 대박해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

 

포그롬의 기본노선은 유태인중 1/3정도는 ‘물리적으로 제거(즉, 학살)’해버리고, 러시아의 정책에 순종하는 1/3정도는 농노로 부려먹기 위해서 살려 두고, 1/3정도는 추방해 버린다는 무자비한 것이었으며, 황제살해에 대한 본보기적인 보복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포그롬을 피하려고 러시아의 유태인들은 대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일부는 동유럽지방으로 가고 다른 일부는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유태인 수십만명은 물밀듯이 오스만터어키의 지배하에 있던 가나안지방(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어 유태인국가 건설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태인을 박해하는 러시아왕국을 아예 통째로 무너뜨리려는 복수심에 불타는 유태인들도 많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구미각국의 유력한 유태인자본가들의 재정적 도움을 비밀리에 받아 가면서 봉건질서 타도를 명분으로 내걸고 혁명(소위 ‘직업혁명가’그룹)에 종사하였고, 구미의 자본가들로 이루어진 다른 유태인지도자들은 구미각국을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재력을 십분 활용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러시아를 파멸시키려고 하였다. 즉, 자본주의후진국으로서 국가재정이 보잘 것 없던 러시아가 막강한 유태인자본가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 제일의 육군병력을 자랑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직접전쟁을 원치 않았던 구미각국의 유태인자본가들은 ‘대리전쟁’을 치루어 줄 적절한 후보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대륙침략 야욕에 불타고 있던 일제야말로 그들로서는 안성맞춤의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러시아보다도 재정이 더욱 빈약하기만 했던 일제는 고교(高橋:다까하시)재무상의 구미제국 순방을 통하여 영국의 로스차일드재벌과 미국의 야곱 시프재벌로 상징되는 국제 유태인 자본가들로부터 무한정한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안심하고 노일전쟁에 돌입할 수 있게끔 되었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 보성녹차마라톤대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열정의 레이스 시작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