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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합심하여 동북공정 파쇄해야..

동북공정의 파쇄(破碎)법은 우리 역사의 남북시대를 돌아봐야 나온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7/10/08 [14:42]

남북이 합심하여 동북공정 파쇄해야..

동북공정의 파쇄(破碎)법은 우리 역사의 남북시대를 돌아봐야 나온다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7/10/08 [14:42]
며칠 전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긋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역사상 우리의 남과 북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이번 기회를 빌어 알아보고자 한다.

  1. 고구려(북) 와 백제ㆍ신라(남)의 남북시대와 삼국시대

신라인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건국연대가 BC57, 고구려가 BC37, 백제가 BC18로 나와 있다. 신라의 건국 연도가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년도에 비해 빠르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인지라 그리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 시대를 남북 시대로 보는 것은 무리라 할 수 있으나, 신라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실 고구려ㆍ백제보다 훨씬 늦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즉위하는 AD540 전까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일단 최초의 남ㆍ북간의 본격적인 대립은 해양강국 대륙백제를 이룩한 백제의 13대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16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본다. 이때부터 본래는 형제 국가였던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벌인다. 

13대 근초고왕, 14대 근구수왕 시대가 백제의 전성기였으므로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16대 고국원왕, 17대 소수림왕은 적수가 되지 못하고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백제의 전성기가 지나고, 백제 16대 진사왕과 17대 아신왕과의 내부 왕위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지자 고구려의 18대 고국양왕은 많은 성을 백제로부터 빼앗는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19대 광개토태왕이 등극하면서 저울추는 급격히 고구려로 기울게 된다. 광개토태왕은 관미성에서 대륙백제의 수군기지를 격파하고, 수년 후 반도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으로 부터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는다. 또 신라 지방을 침범한 왜구를 소탕하여 신라를 도와주기도 한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격해 백제 21대 개로왕을 죽이고,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유업을 이어 받아 가장 넓은 고구려 땅을 이룩한다. 백제는 24대 동성왕 때가 제 2의 전성기로 고구려의 장수왕ㆍ문자왕과 팽팽히 대립하며,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에게 잃었던 요서 백제를 회복한 왕이기도 하다.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삼국시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신라가 고구려ㆍ백제에 비해 너무도 많이 열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24대 진흥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 신라의 전성기를 열어 영토를 최대로 넓힌다. 진흥왕은 남쪽에 창녕, 서쪽에 북한산, 북쪽에 황초령ㆍ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운다. 

2. 신라와 발해(699-926)의 남북국 시대

필자는 일단 신라의 의한 삼국통일이란 단어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 왜냐하면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영토 확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라의 29대 무열왕 김춘추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 들인다. 결국 당나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고(660년), 고구려까지 무너뜨리는데(668년), 신라가 기여를 많이 하나 실제로는 얻은 것이 거의 없다. 당나라에게 이용만 당한 것이다. 나중에 신라까지 삼키려는 당나라에 대항해 영토를 넓히기는 하나 고구려의 옛 땅은 차지 못하고 백제의 땅만 차지한다.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과 원산을 잇는 선으로 국한되면서 곧 고구려의 후예들이 발해를 세운다. 이를 신라의 단순한 영토 확장으로 봐야지 어찌 삼국을 통일한 통일 신라 시대라 할 수 있겠는가!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란 영웅이 나타나 699년 발해를 세워, 발해와 신라는 남북국
▲ 발해의 영토    
시대를 연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도로 다 찾고 오히려 영토를 더 넓혀 중국으로부터 海東盛國으로 불리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고, 남쪽의 신라와도 큰 반목 없이 지낸다. 

얼마 전 남북간의 두 정상이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합의를 했듯이, 발해와 신라는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실로 오랜만(300여년)에 찾아 온 남북 화해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신라시대 말기 신라의 땅은 신라ㆍ후백제(892년)ㆍ후고구려(901년)의 후삼국시대로 다시 갈라진다. 918년 왕건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고, 926년 해동성국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935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바치고, 936년 후백제가 항복해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3. 고려와 신라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1115-1234)와의 남북국 시대

936년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했으나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발해는 요나라에 의해 망하고, 그 땅에는 발해의 소속이었던 말갈족이 여진으로 있으면서 요나라에 소속되어 자치적으로 지방정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여직(生女直)은 임금을 太師라 불렀다. 

▲ 금나라 영토    
여진족은 나중에 金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그 金나라의 시조는 신라 귀족의 자손인 김준으로 그 후손인 金태조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게 된다. (아골타는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金태조 아골타는 조상의 나라인 신라를 슬기롭게 흡수한 고려를 매우 후하게 대했고 한 번도 침범을 하지 않았다. 金태조 아골타는 요나라를 무찌르고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하며 황제의 위에 오른다.

金나라는 고려와는 같은 민족끼리라 아주 친하게 지냈으나, 중국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전쟁을 많이 했다. 1127년 중국의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개봉을 점령하고 송나라 황제인 徽宗과 欽宗을 연행해 金태종 앞에 무릎을 꿇린다. 金태조 아골타의 동생 태종은 휘종에게 昏德公, 흠종에게는 重昏侯라는 칭호를 내리는데, 이 칭호는 두 황제가 얼마나 혼미한 황제인가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치욕적인 수모는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중국 왕조인 宋나라의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써 9대 168년(북송시대)을 이어오던 송나라는 망하고 흠종의 후손이 남송시대를 연다.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인 金나라는 중국 대륙의 북쪽 반을 지배하다가, 몽고에서 일어난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4. 조선과 후금(청나라 1616-1912)과의 남북국시대

조선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에 새로운 국가를 세웠으나 옛 고구려ㆍ발해ㆍ금나라의 영토를 수복하지는 못했다. 명나라((1368-1644)는 원나라(1279-1370)제국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접수했으나 만주 지방까지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다. 만주 땅은 금나라 이후 절대 강자가 없어 주인 없이 버려진 땅이었다고 하나, 그곳에는 실제 주인인 여진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물론 누루하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국가라는 형태를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여진족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땅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대국으로 숭배하는 중화를 침범한 오랑캐 金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지 않았다. 같은 민족인 金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 청의 태조 누루하치 
이 금나라 땅이었던 만주 땅에 아골타 이후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 민족이 세운 쥬신제국의 마지막 영웅인 淸(後金)태조 누루하치이다. 


누루하치는 함경도 종성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로 중국 발음으로는 아이신줴러이다. 그의 성은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金태조 아골타를 계승하는 신라의 후예이다. 바로 우리 민족의 후예인 것이다. 

그는 조선족 출신인 이성량 장군(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 장군의 아버지)과의 숙명적 만남이 있어 그의 가신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의 추천으로 명나라의 좌도독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게 되며,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 경제력은 누루하치의 만주 정권에 엄청난 힘이 된다.

누루하치가 요동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조선에 동포애를 느끼고 있던 누루하치는 조선에 “부모님의 나라에 쥐새끼 같은 왜적이 쳐들어와 3만의 군대를 보내겠으니 왜적을 격퇴한 후 같이 명나라를 도모하자”는 요지의 친서를 보내나 명나라의 사대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 조정에 누루하치의 파병 제의는 거절당한다. 

결국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보내고 그에 따른 군량과 군수물자의 보급에 주력하다 보니 누루하치의 발호를 견제할 틈이 없어 누루하치는 욱일승천의 힘을 기르게 된다.

1616년 1월 누루하치는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요녕성 신빈현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역사상으로는 후금(後金)이라 칭한다.

누루하치는 八旗軍을 창시해 무적의 군대로 육성한다. 1년 후 누루하치는 명에 선전포고를 하고 무순, 요양(고구려 당시 평양성) 등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요하를 건너 요서를 공격한다.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인 山海關(고조선의 최후 수도, 요서 백제의 수군기지인 관미성)을 넘으면 바로 명나라 수도인 북경이다.
 
그러나 산해관의 전초기지격인 영원성을 지키는 원숭환 장군의 포격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결국 죽게 된다. 누루하치의 죽음으로 900여 년간의 평화로웠던 우리 민족끼리의 남북 관계는 깨지게 된다.

아들인 청태종이 즉위했을 때가 양면외교를 폈던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했다. 청태종은 명나라를 도모하기 전 배후의 위협을 없애고자 두 차례나 남쪽 조선을 침범한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태종은 1636년 국호를 대금(大金)에서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조선과의 兄弟之國을 군신의 관계로 바꾼다. 그러한 그도 역시 山海關을 뚫지 못하고 애 태우다가 죽어 간다.

명나라에서는 李自成의 반란이 일어나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매달아 죽음으로서 명나라는 1644년 문을 닫는다. 山海關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吳三桂는 李自成에게 투항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중 애첩 陳圓圓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고는 당시 청나라 섭정왕인 예친왕 도르곤에게 구원 요청을 한다. 즉 그는 청의 힘을 빌려 李自成을 격퇴하려 했으나 오히려 청에게 중원을 내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청태종의 아들 순치제 1년 청나라는 북경을 점령하고 천도를 단행하여 명나라를 잇는 중국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우리 민족에 의해 중국 대륙인 중원이 다시 지배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환웅님이 중국 섬서성 서안 남서쪽 태백산(해발 3,767m)에 강림하시어 섬서성 西安에 神市를 열어 배달국을 개국하시고, 고조선 초기에 중원을 지배한 이후 중국 대륙 전체를 우리 민족이 지배한 적은 없었다. 

물론 고조선 후기와 고구려, 대륙백제, 발해, 금나라, 후금 등이 중국 대륙의 일부를 지배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중원을 우리 민족이 지배하고, 청의 전성기인 강희제ㆍ옹정제ㆍ건륭제 시절에는 명나라 시절의 중국의 땅보다 2배나 넓혀 오늘날의 국경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인 청나라 황제들은 지금까지 한족의 황제들이 해왔던 일보다 훨씬 열심히 그리고 창의적으로 일해 현재 중국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계승하여 중원을 지배함으로서 그전까지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었던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자연스럽게 편입되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허황된 이론으로 우리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집어넣으려 하고 있다. 그 목적은 물론 북한 땅을 중국 땅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남북 두 정상이 만나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상호 협력해 나감으로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 목표를 잃을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우리 민족의 남북 시대를 정리해 보면서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어떻게 무력화 시켜야 하는지를 밝혀 놓았다. 이제 이 일을 국가와 학회가 나서서 해야 할 것이다.

예똥 07/10/08 [16:09] 수정 삭제  
  김씨나라 금나라 썰이.. 사실인감유??
누루하치 07/10/08 [23:20] 수정 삭제  
  청나라 황족의 성인 愛新覺羅는 중국 문화혁명 후 김씨로 개명되었다.
애신(아이신)은 여진말로 金이고, 각라(쟈뤄)는 族이란 뜻으로 金族 즉 김씨란 뜻이다.
윤복현 07/10/09 [02:00] 수정 삭제  
  중국=>쥐나(변방이란 의미..중국이라고 했을때는 쥐나문명과 서양문명의 근원이 되는 고대 한국문명의 터전인 한반도을 의미한다할 것입니다..지형적으로도 그렇습니다)/고구려=>고구리(혹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가우리..예컨대 고구려는 고씨 가우리/발해=>대진국/졸본성=>홀본성 등으로 고쳐 표현합시다...쥐나족의 사서에 나오는 예맥이니 동호니 말갈이니 여진이니 숙신이니 하는 용어들은 쥐나족들이 지역구분상 자신들이 부르기쉽게 표현한 것 뿐입니다..굳이 나누어서 부르자면 한인족,한웅족,단군족(쥐나사서에 청동기문명의 주역인 예맥족으로 표현됨),곰족으로 표현한 것이 좋을듯 하니다.조상이 같은 한민족이니 가능한 우리민족의 주체적인 용어들로 사용하도록 합시다.동북공정을 얘기하면서 쥐나의 사서에 기록된 표현이나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한다는건 동북공정을 돕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내용 잘 보았습니다..
서승원 07/10/11 [15:01] 수정 삭제  
  중국드라마 강희왕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명말청초 한끗발 차이의 판단으로 우리의 역사가 뒤집어지고, 그 치욕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살아서 꿈틀대는 것을 보면서 전율까지 느낍니다. 청태종(황태극)을 거의 짐승에 가깝게 묘사했던,예를 들면 청나라 황제는 뱀을 하루에 한마리씩 식사로 먹는다는둥, 사대주의자들이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미혹 시킨것은 지식인으로서 범죄 행위였다고 생각 합니다.
그에 비하면, 광해군이 비록 폐위되기는 하였으나, 우리의 국력을 너무 잘 알고, 사대부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내 속이 다 타들어간다라는 절규에 가까운 광해군의 모습을 생각하면 당시의 지식인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학자들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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