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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엽의 인물탐구] 이진삼 전 육군 참모총장

최종엽 | 기사입력 2017/01/14 [17:45]

[최종엽의 인물탐구] 이진삼 전 육군 참모총장

최종엽 | 입력 : 2017/01/14 [17:45]

 

[최종엽의 인물탐구전 육군참모총장 이진삼 장군

 

신년을 맞아 방배동 이진삼 장군댁을 찾았다. 응접실에서 만난 노장군의 첫마디는 “나라가 걱정이야, 국가 안보도 문제고‘ 라며 긴 한숨을 토한다.

 

1967년 북한은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전 후방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 하는 만행을 자행,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특히 21사단 부연대장 관사를 습격 전 가족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 하는 행위에 울분, 응징 보복만이 적의 만행을 잠재우는 길이라 판단 적진에 뛰어 들어 3차 에 걸쳐 적 33명을 보복 사살 응징한 투철한 사생관과 사명감을 가진 군인 중 군인이다.

 

△ 당시 정치적 상황은?

 

그해 3월 조선노동당 제 4기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남한 정부를 전복 하는데 총력, 무장공비를 전 후방으로 침투시켜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전군에 하달한데 따른 것이다.

우리는 당시 북한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였으며 베트남 파병으로 전선이 취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이 66년과 67년에만 150여회에 걸쳐 이어졌다. 

 

△ 당시 작전은 상부의 지시였나?

 

당시 방첩부대장( 윤필용 준장) 이 1군사령관 서종철 대장과의 통화 내용을 듣고 분개, 응징보복을 자청했으며 방법은 생포 공비 중 전향자를 선발 훈련하여 타격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러나 윤필용 장군은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결사 반대했었다.

 

△ 전향의 진실성을 믿었나.

 

사실 윤필용장군의 만류도 적지에서 나를 쏘고 북으로 도주하면 개죽음이라는 개연성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 적을 가장 잘 아는 전향 공비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 이라 판단했으며 준비기간 동안 신뢰감 형성에 많은 노력을 했었다.

 

△ 생존 확률이 매우 적은 위험한 게임인데

 

그렇다. 당시 상황으로 생존 확률은 10%미만으로 죽을 각오로 임했다. 군인이 가장 행 복한 순간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 아닌가. 

 

 

△ 가족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가?

 

왜 없겠나. 당시 막내 출산을 앞둔 상황이었으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 안위 보다 국가에 대한 사명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로 나 자신을 선택 했을 뿐이다.  

 

△ 지금 우리의 안보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된 상태에서 대북 문제를 바라보는 안보관에 시각차가 존재하는 것은 큰 문제다. 따라서 세계열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요인도 있어 전략적 협력관계를 잘 이용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정치권과 지식층의 안보의식이다. 지금은 국가 안보의 재 정의가 필요 한 때다.

 

일문일답에 이어 다음 회 에서는 침투사건을 시리즈로 소개 한다.  

 

- 이진삼 장군 약력 - 

  • 국회의원 

  • 육군참모총장 

  • 체육청소년부장관 

  • 1군사령관 

  • 3군사령관 

  • 21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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