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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 의전보다 일정 중시하는 시진핑 주석

중국시민 | 기사입력 2017/01/19 [18:41]

[타산지석] 의전보다 일정 중시하는 시진핑 주석

중국시민 | 입력 : 2017/01/19 [18:41]

며칠 전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귀국하면서 인천공항에 높은 급의 의전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식이 나왔을 때, 의전비서관 출신이니까 의전에 신경 쓰기 마련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반 전 총장은 평민화 행보를 보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차표구매기에 만원 짜리 2장을 넣으려다가 실패하는 등 평민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어 예상효과를 보지 못했다. 워낙 의전은 예행연습이 필수인데, 평민화 행보는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는지 반 전 총장과 그의 팀이 너무 쉽게 여기고 덤벼들었다가 망신을 자초한 셈이다.

 

예전부터 한국의 대통령 외국방문보도들을 보고 들으면서 의전에 너무 집작하는 걸 이상스레 여겼다. 2013년에 박근혜 “대통령”이 영국에 가서 영국 여왕과 함께 마차를 타는 게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라고 언론들이 떠드는 등. 한국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보도일지 모르겠는데, 중국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거나 누구와 함께 어떻게 움직였다 정도로 보도하지 파격적이라거나 굉장히 높은 대우라는 따위를 강조하는 기사들을 보고 들은 적 없어서이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까 어떤 보도가 꼭 더 낫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고 필자의 감수를 솔직히 전할 따름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몇 해 전의 영국방문이 재조명 받고 박근혜 “대통령”이 하루 묵을 장소에 어떠어떠한 물건과 시설들을 설치하게 했다는 등 내막들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지금까지는 영국, 프랑스, 독일 방문에서의 기이한 행동들이 어느 정도 공개됐는데, 더 많이 드나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지난 해 9월의 G20회의는 국제요인접대경험이 적은 중국의 지방도시 항저우(杭州 항주)에서 열렸던 만큼 박근혜 “대통령”의 화장용 첨단시설(?) 배치가 한결 요란했을 텐데, 중국의 특성상 구체적인 내막들이 근간에 공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뭔가 갑질하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중국이 참으로 편한 나라다. 별 지랄을 다 해도 적당히 덮어감춰주니까.

 

워낙 중국인들이 남의 체면을 살려주는 전통이 있는데다가, 특히 외교관련문제들은 중국공산당이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하여 정보를 엄격히 통제하므로 불미스러운 일들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 전직 외교관들도 보고 들은 것들을 제멋대로 쓸 수 없는 게 중국이다. 필자가 타산지석 첫 편에서 거든 책 《예빈관 배후의 외교풍운(礼宾官背后的外交风云》(스촨인민출판사, 2016년 2월 초판 1쇄, 286쪽, 사진)은 띠지에 “외교필회 권위 심사(外交笔会权威审读)”라고 적혀있는데(띠지를 벗기고 찍은 사진에는 나오지 않는다), 외교필회(펜클럽과 비슷할까)는 정부기관이 아니지만 성원들이 모두 수십 년 경력을 가진 노외교관들이라 높은 안목으로 할 소리 안 할 소리를 가려내는 모양이다.

 

▲ 예빈관 배후의 외교풍운(礼宾官背后的外交风云》(스촨인민출판사, 2016년 2월 초판 1쇄, 286쪽)     © 자주시보, 중국시민


중국 전직 외교관들이 쓴 글과 책들이 진상규명애호자들에게는 좀 재미가 떨어지겠지만, 한국에서처럼 책이 나온 뒤에 숱한 쟁론이 벌어지는 현상은 피할 수 있다. 지난해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이 출판된 뒤 갑론을박이 벌어지면서 정쟁에 이용된 것 같은 사건이 중국에서는 생겨날 리 없다.

 

누구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선을 지키면서 이제는 말해도 괜찮다는 내용들을 알리는 게 중국 전직 관원들의 글들이나 책들인데, 일정한 예비지식을 갖고 보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정보들을 발견하고 지어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일화들이라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저자 우더광(吴德广, 오덕광, 1938~) 중국외교부에서 오랫동안 예빈관(의전관)을 맡으면서 숱한 일을 보고 들었는데, 경제합작협의서에 중국 주석과 외국 수반이 서로 상대방의 위치에 서명하는 바람에 밤중에 다시 서류를 작성해 다시 사인했다는 따위 실수 바로잡기 일화들도 재미있지만, 필자는 의전의 규격과 파격에 주의를 돌렸다.

 

1984년 미국 대통령 레간(레이건)의 중국방문에 앞서 미국 측은 선발대를 여러 번 보내 복잡한 요구들을 제기했는데, 중국 측에서 안전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도(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교류역사가 증명하다시피 중국의 보위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경호팀은 반신반의하였고 심지어 요원을 주방에 보내어 중국요리사의 요리제조를 감독하겠다는 요구까지 제기했다. 중국 외교부 부부장 한쉬(韩叙)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되어 “미국 대통령에게 대접하는 음식들을 우리 영도자들도 든다”고 대꾸하니, 미국 측도 너무 과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더 거들지 않았다 한다. 실제로 레간 본인과 아내 낸시는 중국의 연회들에서 식도락을 즐겼으나, 댜오위타이(钓鱼台,조어대, 낚시터) 국빈관에 들어있을 때에는 중국 측이 준비한 음식들을 먹지 않고 백악관의 요리사가 따라와서 준비한 음식들만 먹었다 한다.

 

그번 방문에서 특이한 점은 워낙 중국 측에서는 레간이 어디로 가든지 당당하게 정문으로 드나들도록 배치했는데, 미국 측 안전관이 항상 곁문이나 쪽문으로 드나들겠다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안전책임자가 이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대통령에게 실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으나, 미국 요원은 괜찮다고, 우리 대통령은 이미 곁문으로 드나드는데 습관됐노라고 응대했다. 하여 베이징에서는 레간이 초대회 참석차로 창청호텔(长城饭店, 장성반점)에 갈 때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호텔 남쪽의 차고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장식한 시멘트 복도를 거쳐 양쪽에 주방과 창고, 봉사일꾼 사무실들이 늘어선 후방봉사시설구역을 통과해서 나중에야 로비에 이르렀다. 그리고 산시성(陕西省)의 시안(西安, 서안)에서는 어느 시장을 참관하기 전에 레간은 미리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 이유를 우더광은 1981년 레간이 워싱턴에서 저격당한데서 찾았다. 본인과 낸시가 긴장해난 건 물론(뒷날 낸시가 레간이 움직일 때마다 어느 점성술사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게 알려져서 큰 파문이 일어났다) 안전요원들도 신경이 곤두서다나니 대통령이 곁문으로 드나든 게 이해는 된다만 보기는 참 흉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의전 가운데서 제일 보기 좋았던 것은 연도환영이었다. 국빈과 중국영도자가 함께 무개차를 타고 수많은 시민들의 연도환영을 받으면서 거리를 따라 움직이는 장면들이 20여 년 거듭 나타났는데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줄이기 시작해 드디어 끊었다.

 

1975년 4월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라 어린 필자는 우선 기록영화에서 장면을 보았고 후에는 베이징에서 온 부모의 옛 동료한테서 연도환영에 참가하여 무개차를 탄 김일성 주석과 덩샤핑 부총리를 실제로 본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다.

 

지난해 말에 우더광의 책을 보면서야 알게 되었다만, 당시 연도환영은 특례였다. 1970년대 초에 연도환영의식을 취소하기로 결정지었는데 저우언라이 총리는 외국손님들에게 이렇게 4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로 군중들이 견디기 어렵다.
둘째로 외국손님 특히 남방손님들이 견디기 어렵다. 지난 달 네팔 수상이 베이징에 도착한 날에 큰바람이 불었는데 무개차에 탄 그는 옷도 얇게 입다나니 내 보기에는 얼어들었다.
셋째로 보통 승용차를 타면 군중들과 거리를 두는 모양새다.
넷째로 우리 측의 영도자들이 나이가 많아져서 역시 몸을 조심해야 된다.

 

그런 결정을 지은 다음 1972년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파키스탄 신임 대통령 부토가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중국과 파키스탄의 특수한 관계를 감안하여 연도환영을 조직했으나 공교롭게도 1월 30일 밤에 큰 눈이 내리고 이튿날에는 센 서북풍이 불어 군중, 국빈과 영도자들의 건강을 고려해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토가 도착한 후 저우언라이 총리는 부토에게 연도환영제도가 이미 없어졌음을 알려줬는데, 부토가 아랫사람을 시켜 베이징을 떠날 때 보충해주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했다. 중파친선을 과시하고 외부의 오해를 없애자는 이유로. 하여 2월 2일 부토가 인민대회당에서 고별연회를 베푼 다음 저우언라이 총리는 찬 바람 속에서 부토 대통령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인민대회당 동쪽 문에서부터 톈안문(天安门, 천안문) 광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서서히 동창안거리(东长安街)를 따라 비행장으로 향하면서 연도환송하는 군중들에게 인사했다. 부토는 굉장히 만족해 거듭 감사를 드리면서 방문이 완벽하다고 평했다. 1972년 2월 2일에 중국영도자가 마지막으로 외국손님과 함께 거리를 따라 멀리 이동한 사례가 생겨난 것이다.

 

1975년 4월 18일 김일성 주석의 공식방문에서는 두 나라의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고려하여 연도환영을 조직했는데, 김일성 주석은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로 움직여 톈안문 광장에서 멀지 않은 베이징역에 도착했으니까 비행장을 상대로 하던 먼 거리 연도환영은 아니었다. 중국 측은 톈안문 광장에서 수 만 명을 조직하여 생화와 채색깃발들을 들고 길 양쪽에 늘어서서 환영하게 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가 병이 심해 입원한 상황이라 부총리 덩샤오핑이 나서서 김일성 주석을 역전에서 맞이하여 승용차를 타고 광장에 이르러 무개차를 갈아타고 천천히 광장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군중들과 만났다.
필자의 인상에는 김일성 주석이 무개차를 타고 군중들을 만난 마지막 국빈인데 정확한지 모르겠다.

 

중국은 대외교류가 늘어나 연간 국빈방문이 수십 회를 넘기면서 의전절차를 간소화하자는 주장이 힘을 입어 1980년 8월에 중앙에서 외교부의 보고를 비준하여 국빈환영의식을 비행장, 역전이 아니라 인민대회당에서 거행한다고 규정했고 비행장과 역전에는 외교부 부부장 등 관원들이 나간다고 정했는데, 몇 해 후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할 때에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과 실제 1인자인 덩샤오핑이 다 베이징역전에 나가 맞이했고, 1989년 6. 4사건(톈안먼사태) 뒤에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여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을 때에도 중국의 핵심지도자들이 다 역전에 나갔으니, 역시 이례적인 의전은 존재했다. 특히 뒤의 방문에서는 덩샤오핑이 파격적으로 기차에 올라가서 김일성 주석과 한참 얘기한 다음에야 김일성 주석이 차에서 내려와 환영의식에 참가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990년대에는 국빈과 중요한 외국손님들의 중국방문이 연간 100회를 훨씬 넘기면서 의전절차가 간소화되는 한편, 일정배치는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한동안 중국에서는 대개 오전에 1회, 오후에 1회를 배치하는 게 통례로 되었고 기껏해야 저녁에 1가지 내용을 보태는 정도였는데, 우더광의 회억에 따르면 덩샤오핑이 1978년 10월에 일본을 방문하면서 몇 시 몇 분 몇 초까지 규정한 일본의 빽빽한 일정을 찬양하면서 우리가 더는 느릿느릿해서는 안 된다고 잃어진 시간을 빼앗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단다.
외국인들의 중국방문일정배치도 중국영도자들의 출국방문일정배치도 변화를 가져온 덴 아마 덩샤오핑의 입김이 작용한 모양이다.

 

2016년 6월에 시진핑 중국 주석이 세르비아, 폴란드, 우즈베크를 방문했는데, 중국인들이 주목한 건 현지시간 6월 17일에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자 첫 일정으로 1999년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연맹을 수십 일 폭격할 때 1999년 5월 8일 미군의 “오폭”으로 파괴된 중국대사관 옛 터에 찾아가 희생된 3명의 중국기자들에게 조의를 표한 것이다.

 

▲ 열사기념비에 화환을 진정하는 시진핑 주석     © 자주시보, 중국시민

 

시진핑 주석은 그 자리를 찾은 첫 중국 국가수반으로서 그 행동의 저의를 분석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미국에 대한 어떤 뜻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그런데 시 주석의 그 번 방문은 일대일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고 방문국들과의 친선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 것이다. 일정이 하도 빽빽해 텔레비전에서는 잠깐잠깐 보여주는데 그쳤고 문자보도들도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다는 식으로 스쳐지났는데,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이며 중앙판공청 주임인 리짠수(栗战书, 률전서)가 중국공산당의 창건기념일 7월 1일에 즈음하여 중앙판공청에서 한 보고를 보면 새삼 놀랍다.

 

“우리 이처럼 큰 나라에서 하루 동안에 처리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총서기와 기타 중앙영도동지들 가운데서 어느 분인들 명절과 휴일에 편히 휴식할 수 있겠는가? (판공청은) 흔히 밤 11시, 12시가 되었는데도 영도동지들에게 문건을 보내드리곤 하고, 밤 11시, 12시가 되었는데도 영도동지들이 결재하여 돌려보낸 문건들을 받곤 한다. 이번에 출국방문한 총서기는 세르비아에서 이틀 밤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도합 49시간 체류했는데 17건의 활동에 출석했고, 폴란드에서는 39시간 체류에 이틀 밤이 포함되었는데 13차례 활동에 출석했으며, 우즈베크에서는 72시간 미만 체류에 사흘 밤에 포함됐는데 36차례 활동에 출석했다. 흔히 이른 새벽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밤 9시, 10시가 돼야 숙박 장소로 돌아왔는데, 점심에도 휴식하지 못하고 서류들을 심열, 결재하고 일상정무를 처리해야 됐다. 출발할 때는 항상 비행기가 평평히 날기 시작하면 곧 사업을 포치했고 귀국도중에서도 비행기에서 총화회의를 소집했다.(我们这么大一个国家,一天有多少事要处理啊!总书记和其他中央领导同志哪一位能在节假日好好休息啊?往往都是晚上十一二点了还往领导同志处送文件,晚上十一二点了还收到领导同志处退出来的批件。这次总书记出访,在塞尔维亚包括两个晚上休息时间,共停留49个小时,出席了17场活动;在波兰停留39个小时,包括两个晚上,出席了13场活动;在乌兹别克停留不到72小时,包括三个晚上,出席了36场活动。往往都是一大早开始,晚上九十点钟才回到住地,中午也不休息,还要批阅文件、处理日常政务。出发时,一般都是飞机起飞平稳后就开会部署工作,回程途中,也是在飞机上开总结会。) ”

 

며칠 전 중국의 한 언론은 “4년에 40만 킬로미터, 이건 한 사람의 장정이 아니다(4年40万公里,这不是一个人的长征)”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시진핑 집정 후 4년 동안에 5대륙의 50개 나라를 방문하였는데 비행거리가 40만 킬로미터를 초과해 지구를 10바퀴 돌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글은 “4년에 40만 킬로미터, 이건 그 한 사람의 장정이 아니다. 이건 한 민족의 한 국가의 장정이다.(4年40万公里 不是他一个人的长征,这是一个民族、一个国家的长征。)”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한국에서는 중국이 미국 사드의 한국배치를 반대하면서부터 시진핑 주석에 대한 부정적인 설들이 언론들에 오르내리고 걸핏하면 누가 시비어천가를 부른다는 식으로 비꼬던데, 시진핑 주석이 부패척결에 나서서 숱한 탐관오리들을 잡아낸 등 이미 해놓은 일들과 일대일로구축을 위해 기울이는 노력들을 중국인들이 보고 듣기 때문에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주변 4강에다가 북한까지 합쳐서 모두 마초(강한 남자)들이 집권했는데 한국은 어쩌냐는 걱정이 나왔던데, 시진핑 주석의 경우 그저 강한 남자만이 아니라 수십 년 째 밑바닥에서부터 한 걸음씩 올라가면서 일을 많이 하는 습관이 몸에 뱄고 또 스스로 알아서 신속히 판단하고 결정을 짓는 게 본능에 가까운 제일인자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습관이라 한다. 시키는 일은 잘 하는 것도 일종 습관이고,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것도 습관이며, 대낮에 잠을 자거나 머리를 다듬는 것도 습관이고, 밤중에도 사태보고를 받으면 제꺽 판단해서 결정을 짓고 해결조치를 추진시키는 것도 습관이다. 행정경험이 없던 사람이 고위직에 올라 일을 잘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도 드무니까, 현명한 선택인즉 행정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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