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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위상과 한민족 연방

동방족의 터전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민족 연방시대 열어야..

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02/06 [03:21]

한반도 위상과 한민족 연방

동방족의 터전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민족 연방시대 열어야..

윤복현 기자 | 입력 : 2008/02/06 [03:21]
[역사논단]한반도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고대 우리 동방족(동이)들의 활동 영역이였던 쥐나대륙의 '북경',일본열도의 '동경',동남아 지역의 '남경',티벳지역의 '서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도 바로 동방족의 터전인 한반도가 인류문명을 태동시킨 어머니 땅이며, 한반도에서 발원한 동방족(동이)이 만주를 중심으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분산되어 위대한 한민족의 문명을 개척하고 전파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 분산되어 있는 우리 동방족들이 한반도를 무역과 정보의 중심지로 삼고 역사인식에 대한 공유를 전제로 문화적 교류와 경제협력 등으로 하나되어 위대한 한민족 연방시대를 열어 나갈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주성과 주체성과 창조성과 개방성이 강했던 우리 한민족의 시대적 비젼이기도 합니다. 

▲ 인류문명이 태동한 동방족의 터전 한반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들과 유물들의 분포 지역


 

▲  이집트 티우왕조의 제기용 그릇문양(왼쪽). 한국의 일목삼신어 부적문양(가운데) 서로 동일한 문양구조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하단 사진은 티벳지역의 피라미드 모습


[관련자료]천지인 합일 사상으로 흰옷입고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인디언들

한반도가 우리 동방족(한반도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본의 침략주의와 미국과 소련(러시아) 등 서양 제국주의의 무력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지 반세기가 지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과거처럼 조선(朝鮮)과 한(韓)의 두 나라가 되었지만 조상 대대로 원래는 만주를 포함하여 남북이 하나로 뭉쳐진 단일민족입니다. 즉 '동이'(東夷)라고 불리워졌던 우리 동방족(한반도 사람들)이 그 근원인데, 동이는 쥐나대륙의 중원에서 보아 해뜨는 동쪽 민족, 즉 과거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비롯하여 만주와 연해주에 근간을 두었던 대진국(밝해) 지역까지 포함한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지금의 한반도와 북경 동쪽의 요서, 요동, 만주 그리고 러시아 동단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구이(九夷)는 동이와 동등시했거나 또는 동이에서 파생된 민족을 일컫는데, 그 근간을 구환(九桓)의 후예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복희와 치우가 만주에서 산동으로 진출한 이후 산동과 안휘 등의 회대(淮岱) 지역이 동이족이 되어 이들 대부분 복희와 치우의 후손으로 자랑하게 된 것으로, 즉 단군조선 당시 하(夏)의 우왕(禹王)이 나온 이후에 한반도를 포함한 요녕성, 산동성, 안휘성, 절강성 등의 황해 연안 지역이 모두 동이 또는 구이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묘족의 소모리 전통의상


소머리 치우천황 - 소머리강은 북만주 송화강을 의미하는데, 치우천황 세력의 발원지도 송화강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이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단군조선 이전에는 신시(神市) 청구국(靑丘國)이 있었고, 그 이전에 환국(桓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환국 당시에도 구환(九桓)이 있어 지금의 강남(江南) 묘족(苗族)이 구환 가운데 하나인 묘환(苗桓)에 해당합니다. 이 묘족은 지금의 쥐나를 교조주의와 모택동 패거리주의을 청산하고 개방개혁으로 시장경제를 수용하여 쥐나를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킨 등소평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을 치우천황의 후손들이라며 거대한 치우천황상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고 있고, 현재 쥐나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학계와 고대사 교류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이 구이의 근간인 구환의 자취를 살펴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일본 구주, 쥐나대륙의 절강성, 화북성, 사천성, 서장의 티벳, 부탄, 인도 북방의 앗삼, 간다라 지방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상고문화 흔적이 남아 있으며, 북으로는 러시아 동단의 하바롭스크, 몽골 북방, 바이칼 호수, 알타이 고원으로 이어져 그 서쪽 끝이 지금의 이란 고원과 터어키 고원 지대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즉 태초에는 해뜨는 동쪽 끝이 두만강 유역이었고, 해지는 서쪽 끝이 사천성과 이란 지역에 해당합니다. 
 

러시아 남방의 바이칼 지역과 알타이 지역 모두 한대(漢代) 무렵에는 북이(北夷) 또는 북적(北狄)으로 불렀는데, 산해경에서 말하는 쥐나대륙 북서쪽의 숙신(肅愼)과 백민(白民), 그리고 정령국(釘靈國)이 아마도 이 일대에 해당할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사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거의 대부분 유목 민족으로서 수시로 나라를 이리저리 옮겨다녔기 때문에 두만강 유역에 근간을 두었던 숙신과 백민도 한대(漢代) 이전에 서쪽으로 이전하면서 서방에서 동진하던 백계 러시아(Belarus) 민족과 융합하여 알타이 일대에서 안드로노보(Andronovo)와 카라숙(Karasuk) 문화를 이룩하고, 그후 한대(漢代) 들어 현재의 바이칼 호반에 정령국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부산 기장군 지역의 선돌


한반도의 상징 고인돌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알타이와 바이칼 일대에서 발견된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과 유물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특히 알타이를 비롯한 시베리아 전역에서 발견된 모든 석조물과 돌무덤들은 모조리 선돌(立石), 돌널무덤(石棺墓) 또는 그로부터 파생된 둘레돌(護石, 環狀列石) 양식을 보이고 있어 이들 유적 모두 만주와 한반도에서 성행하였던 고인돌(支石墓) 이후에 나타나는 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고인돌은 한반도 황해도에 있었던 군자국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 북한학자들이 고인돌을 황해도 장산곶을 통하여 외지로부터 유입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유럽에서 공부하였던 도유호의 판단 오류입니다. 세계 고인돌의 70%에 해당하는 어마 어마한 무게의 한반도 고인돌들을 유입했다는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일본 학자는 구주에서 세계의 고인돌 양식이 비롯되었다고 말하여 이를 유럽 학자들이 받아들인 적이 있으나, 그의 주장은 자신들의 구주 고인돌만을 근거하여 아전인수격으로 말한 것으로, 지하의 남방식에서 지상의 북방식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 것인데, 구주 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한반도와 인접한 구주 북방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으로 여기게 되었습다. 고인돌은 영국 .인도 등 유라시아 지역과 아메리카 인디언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세계 70%가 분포된 한반도가 고인돌 문명의 중심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식민사관적 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 유라시아 대륙에 분포된 비파 청동검. 한반도에서 비파 청동검이 변형된 세형 청동검



단군족은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알타이 지역에서 만주지역으로 동진한 서이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알타이 일대에서 발견되는 모든 청동기도 사실상 은대(殷代) 청동기 이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은대(殷代) 무렵에 요녕성의 동이와 섬서성, 감숙성의 서이의 영향으로 알타이 청동기가 형성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쥐나문헌들을 보면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급성장한 청동기 문명의 주역을 부여와 고구려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예맥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예맥족의 실체는 당시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고인돌 문명의 주역들인 동이족과 융합하고 청동기 문명과 천제사상 등 고급문명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단군조선을 건국한 단군족은 알타이산맥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동진해온 서이족으로서 단군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군족이 이후 동방문명을 주도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군족도 결국 조상의 뿌리는 동방족입니다. 그리고 고인돌 문명의 주역은 단군족이 만주로 유입되기 전까지 곰족 등 만주와 한반도의 동방족이지, 동진해온 단군족의 문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단군족은 청동기 문명의 주역이였습니다. 이런 점을 쥐나의 사서와 각종 문헌에서도 누누이 말하여 왔는데, 즉 쥐나 화하족(華夏族)의 조상은 동이이며, 북이는 동이에서 파생되었고, 북방과 서방을 주름잡던 흉노족 또한 그 조상을 동이에 두고 있으며, 검(劍)은 만주 동이족인 치우에게서 비롯하였고, 그 후 칼(刀子)이 서이(西夷)의 수인씨(燧人氏)에게서 비롯하였다고 말입니다. 또 북이는 북호(北胡)와 북적(北狄), 즉 동호(東胡)의 후예를 뜻하는데, 동호는 한무제 당시 구려(句麗)에서 갈라져 나간 동이족을 말하며, 이런 과정이 여러번 거듭되면서 동호의 갈래인 돌궐(突厥)이 탄생하여 오늘날의 터어키가 세워지게 됩니다.  

▲ 3조선으로 분할 통치되었던 단군조선의 광역도( 단군조선의 영역은 청동검 분포지역).  단군족이 신성시 했다는 '맥'(쥐나족이 청동기 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을 예족으로 기록한 배경이 된다고 보며, 우리 말의 힘이 빠진 상태를 '맥' 빠졌다고 표현한 배경도 된다 본다) - '맥'의 모습은 남아메리카의 신전에 가면 조형물를  볼 수 있음 (맥시코에서 맥이의 신전 멕시코 유카탄반도 카바. 마야 유적지) 참고로 백제의 본래 이름은 '맥제'다. 쥐나문헌에는 주로 백제를 '맥제'로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태왕비에도 백제를 비하한 표현으로 '백잔百殘'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북방 유목민족이던 단군조선(단족=맥족)의 후손들임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고대 유라시아 .아메리카 대륙사에 있어 고인돌 문명시대를 마감시키고 청동기 문명시대의 주역으로서 한민족를 하나로 통합했던 단군족의 위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학계는 요녕성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 문명의 주역과 한민족을 통합한 건국세력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단군족과 고대 유라시아 대륙사의 관계성을 열린 마음으로 깊이 연구한다면 유라시아.아메리카 대륙의 한민족사를 재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한은 선사 시대에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요. 여러 문헌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남한의 남해안은 쥐나대륙의 절강성과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원래 일본의 구주(九州) 섬 북방과 함께 남이족(南夷族)의 동쪽 끝 영역이었다가 한반도 남해안과 중국 절강성, 일본 구주가 분리하는 시기에 단군조선이 세워지면서 요동(遼東)에 근거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에서 강화도(江華島)의 남이를 정벌하고 마니산(摩尼山, 摩璃山)에 참성단(塹城壇)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한반도의 남북이 합쳐져 북쪽 지역은 청천강 이북까지 단군조선이 영역을 넓히고, 남쪽 내륙은 단군의 후예들이 배달(倍達)의 청구국(靑丘國)을 이어받아 남쪽의 청구국을 세우게 되어 단군조선이 세워지면서 한반도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삼조선(三朝鮮)으로 확충되면서 북쪽으로는 요동의 진조선(眞朝鮮), 서쪽으로는 산동의 번조선(番朝鮮), 남쪽으로는 막조선(莫朝鮮)이 됩니다.  

그리고 산해경을 살펴보면 이때를 즈음하여 한반도 남쪽 해안에서는 환두국(驩頭國)과 대인국(大人國)이 세워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남해안 일대의 여러 풍물과 전설을 참고하면 요순시대(堯舜時代)에 남해안 일대에 대인국과 환두국이 존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환두국이 주도를 하여 남한 지역에는 막조선을 이어받아 마한(馬韓)이 세워지게 되는데, 환두는 곧 마한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후 단군조선의 영역이 황해 연안 전체로 확장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들어서 오월(吳越)이 등장하면서 쥐나가 흥하고 동이가 쇠약해져 은(殷)나라 주(紂)의 신하이었던 기자(箕子)가 동이로 망명하여 당시 북경 동쪽 요서(遼西)에 있었던 번조선(番朝鮮)을 맡아 다스리다가 드디어는 기자 후손이 만주의 진조선(眞朝鮮)까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연왕(燕王) 노관(盧관)이 흉노(匈奴)로 망명하자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이 살금살금 조선의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유후(須臾侯)이자 조선의 왕이었던 기자 후손의 기준(箕準)은 조선의 왕위를 위만에게 던져주고 바다를 건너 마한으로 들어가 한왕(韓王)이 되었으며, 한(韓)의 왕 기준(箕準)이 죽은 다음 왕위는 다시 마한에게 넘어갔습니다. 

▲ 대 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영정-47대 단군 고열가가 정치에 뜻을 두지 않자, 권력을 잡고 국호를 부여로 바꾸었을 뿐 단군조선은 부여와 고구려를 통하여 지속되었다

물론 북쪽의 만주에서는 단군조선이 망해가자 단군 왕실의 후예인 해모수(解慕漱)가 기자 후손들과 약속하여 유민을 모아 부여(夫餘, 北夫餘)를 세우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해모수를 단군이 아니라, 고조선 유민들의 의병장으로 설정한 mbc주몽은 고대사를 왜곡한 사극입니다.

그 후 서이족인 진시황(秦始皇)이 쥐나 내륙에서 동이를 몰아내고 강력한 통일정책을 펼치자 과거 중국으로 들어가 쥐나 각 지역에서 왕족과 귀족이 되었던 동이족들이 진시황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반도로 이주하여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한에서는 이주민들에게 마한 동쪽을 떼어주어 진한(辰韓)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 진한이 점차 성장하면서 마한에서 독립하여 신라(新羅)를 세우게 되었으며, 이들이 과거 대인국(大人國)의 후손이었던 변한(弁韓)과 가야(伽倻)를 흡수하게 됩니다. 그러자 신라의 김씨 왕조(김알지 왕조)에게 밀린 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들어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구주(九州)의 왜국(倭國)을 대신하여 일본(日本)이란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본래 신라는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쥐나대륙에서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난 흉노족 왕족출신인 김알지 세력들이 들어 오게 됩니다. 이 김알지의 후손들이 당시 신라의 왕권을 가진 석씨 왕족을 쿠테타로 몰살시켜 일본 열도로 추방하다시피 합니다.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김알지의 후손 태종 무열왕 김춘추(신라의 모든 관제를 당나라로 바꾸면서까지 친당 사대주의를 유지), 흉노의 전성기 광역도, 서방을 떨게 한 흉노(훈)족.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던 동방족의 배사법 [오른쪽부터]

그리고, 이러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멸망한 백제왕족과 귀족들도 일본 열도로 이주하게 되고 이들 가야인들과 백제인들은 신라를 원수보듯하게 되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없이 한일 양국 모두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근본적인 화해와 해결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신라의 김알지 후손들은 백제계와 가야계인 일본 황실에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일본황실 또한 한반도 침략에 대해 사죄하고 일제하 피해보상을 해 주어야 진정한 동반자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 인물상 토기- 흉노족 석상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소수로 신라건국에 참여한 흉노족 출신인 신라의 김알지 세력들은 피(유전자) 자체가 호전적이고 교활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유전자들이 아직도 그러한 자신들의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해 반성없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민족발전을 가로 막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본래 흉노족이 단군을 호위하는 무사계층이라지만, 서진하였다가 동진해온 흉노족은 조금은 민족의 동질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사례: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기위해 백제와 맺었던 100년간의 동맹도 먼저 파기하고 백제를 선제공격하여 신라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까지 결국 원수지간이 되어 버림)을 가리지 않는 반 민족성을 유지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흉노족의 기원은 [한단고기]에 보면 단군에게 무례하게 반항하다 유배당한 '색정'이라는 신하인데, 그러한 기록만 보아도 상당히 '색정'이라는 사람은 호전적이고 무례한 기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색정이 서방을 두려움으로 내 몰았던 흉노족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예의없이 건방진 사람을 '삭정이 같은 넘'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삭정이'는 흉노족의 조상인 '색정'을 의미합니다. 

▲  한반도에 국한시킨 식민사관의 대부 이병도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 남북 분리에 찬동하였던 일본 학자들이 여론을 주도하면서 남쪽은 한(韓), 북쪽은 조선(朝鮮)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는데, 이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가운데 식민주의와 사대주의 성향의 일부 학자들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진한(辰韓)과 신라(新羅)의 근본을 마한과는 근본이 전혀 다른 중국 바깥의 몽고, 알타이 또는 바이칼 인근으로부터 유입된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북방의 기마민족 대부분은 북이의 동호(東胡)와 말갈(靺鞨)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으며, 따라서 가야와 신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마 문화는 동호의 후예들이 남긴 흔적으로 볼 수 있는데, 흉노 등 동호는 원래 단군조선의 무사계층(武士階層), 즉 왕을 보좌하기 위하여 검을 받드는 귀족 출신이어서 그 후예들이 세운 가야와 신라는 무사 계층이 주도한 만큼 검과 더불어 기마족 특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같은 특징이 알타이 지역과 더불어 과거 서이의 영역이었던 감숙성 일대의 월지(月氏,月支)와 월지의 후예이었던 천산산맥 서쪽의 카자흐스탄 이색(伊塞, 이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호의 근본이 구려이며, 구려는 다시 그 근본이 치우천황이 세운 신시 청구국에 있는지라, 이들 모두 그 뿌리가 동이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쥐나 문헌에서 가끔 중원의 뿌리를 북방으로 말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로지 요서와 내몽고 지역의 요(堯)와 동호(東胡)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경우는 아마도 기후 변화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산해경에 나타나듯이 상고 시대에 쥐나 북방의 시베리아 지역에는 여러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어느 시기에 북방 기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이들 대부분이 쥐나로 들어가거나 또는 유럽 등지의 사방으로 흩어져 결과적으로 지구상의 문화를 일시에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들 북방민족을 한반도 민족의 원류로 말한 문헌은 없으며, 더군다나 고구려 시조의 출신지로 일컫는 북이도 단지 만주 북방의 흑룡강 지역을 일컫는 말일 뿐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고인돌을 비롯한 돌무덤의 양식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즉, 쥐나 사서와 고대 문헌에서는 한반도의 동방족이 북이 또는 남이, 또는 기타 어디든지 외지로부터 유입된 민족이라는 말이 없었으며, 더구나 쥐나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던 한사군(漢四郡)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쥐나를 비롯한 아시아 민족 대부분이 만주와 한반도 동이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누누이 말해 왔으며, 이에 한발 더 나아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비롯한 동이의 여러 문헌에서는 전 세계 여러 민족의 조상이 바로 동이(한반도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왔습니다. 물론 전 세계에 막강한 위력을 떨쳤던 징기스칸의 몽고제국 시대에도 한반도는 인류 기원의 무지개가 피어났던 무지개의 나라, '소롱고'로 부르면서 아시아 대륙 대부분을 병합하여 그들의 휘하에 두면서도 오로지 한반도 만큼은 고려(高麗)라는 독립국으로 존속하도록 하였습니다.  

▲  '소롱고' 라며 한반도를 조상들의 땅으로 생각했던 징기즈칸과  터키(돌궐), 그리고 인도의 무굴제국 [오른쪽부터]

단군세기에서도 몽고(蒙古)의 조상('한단고기'-5대 단군의 동생이 몽고리 칸으로 임명)은 단군 초기에 동이로부터 갈라져 나갔다고 말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고대 12한국영역을 복원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한 몽고리(몽골)의 징기즈칸도 한반도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의미의 '소롱고'라 하여 성스럽게 생각하여 징기즈칸 통치하에서는 한반도를 침범하지 않았고, 인도의 무굴 제국 또한 자신들의 문화 근원을 한반도로 말했었으며,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함께 아우렀던 막강한 오스만 터어키 제국에서도 오로지 한반도 만큼은 자신들의 조상 나라로 확인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단군조선에서 나온 몽골이 한반도를 일컬어 ‘소롱고’라고 했는데, 소롱고는 서리국, 시라국, 아라국과 통하여 본래는 오랑캐를 뜻합니다. 쥐나인들이 동이족을 일컬어 불렀던 오랑캐의 본래 의미는 오색 무지개 빛에 둘러싸여 태초 인류가 된 것에서 비롯하여 무지개가 피어나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 되었는데, 무지개는 곧 금 또는 구리 금속을 뜻하여 결국 금(구리)이 변하여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  무궁화의 원산지 한반도 - '시리아쿠스'라고 불리우는 무궁화의 원산지는 시리아가 아니라, 위 사진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여러 종류의 야생 무궁화들이 자생하는 한반도다.  4천년 전부터 쓰여진 책이라는   고대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을 보면  한반도 중남부에 [군자국]이 있는데 그 나라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궁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君子國 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 해석하면, " 군자(君子: 위대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있는데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격식을 갖춘 모자'를 쓰고 '격식을 갖춘 허리띠'를 두르고, 칼을 차고 다니고,  짐승을 기르고, 큰 호랑이 두마리를 부리는데,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싸우지 않는다. (好讓不爭)  무궁화(薰華草: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무궁화의 원산지는 한반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랑캐는 금성(金城) 또는 금국(金國)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신라(新羅)라는 말도 금국, 즉 쇠나라에서 비롯한 말로, 이 말은 처음 만주 하얼빈에 근본을 둔 진한(辰韓, 眞朝鮮)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진(眞)은 진(辰)과 통하여 신(新)이 됩니다.

▲  머리에 무궁화관 목에는십자가-나중 불교에서 연꽃으로 바꿈(왜곡)  동이족 석가모니의 출신지가 어디인지을 무궁화꽃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 자는 본래 동방족의 상징이다. 서진한 동방족들에 의해 기독교 사상으로 발전하고 기독교의 전유물처럼 인식된 것이다.

상고 문헌에서 말하는 부상(扶桑)은 지금의 금강산(金剛山)의 모체(母體)를 이루었던 청색 용암 기둥을 일컫는 말인데, 인류문명을 태동시킨 꽃같은 무지개가 바로 이 부상에서 피어나는 무지개 꽃을 말함입니다. 즉 처음에는 황해도에 자리한 군자국(君子國)에서 동쪽의 부상(扶桑)에서 피어나는 무지개 꽃을 무궁화라 불렀으며, 이를 후세에는 연꽃으로 불러 불교에서 이를 받아 들여 처음에는 무궁화를 연꽃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지금의 연꽃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고, 만주에서는 무궁화를 모란꽃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이상실 08/02/06 [19:06] 수정 삭제  
  왜놈들이 그간 우리 민족에끼친 해악이 얼만데 이런 무식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천수백년이 지난 과거사만 진실이고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조선인들을 잡아다가 살육하고 노예로 팔아 먹고(훗날 조선인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만 일만이 넘는답니다),
일제강점기에 청년들 잡아다가 총알받이로 만들고, 조선 처녀들 그중에는 현재로 말하면
미성년자인 어린 여자애들까지 성적 착취를 위해 잡아갔던 원수 새끼들이 왜놈들입니다
아직까지도 그 당시 일제 지배세력의 후손들이 지배하고 있는 왜놈들의 나라가 일본 입니다.
일본 황실에 사과,,,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옵니다
왜놈왕은 지금 당장이라도 여건만 되면 암살 할 수 있는 권리가 한국인들에게 있습니다.
그건 절대 죄가 안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이상실 08/02/06 [19:19] 수정 삭제  
  옛 백제 성씨 대부분은 현재 중국 동부지역에 거의 모두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바다를 건너 왜놈들 땅으로 간 백제인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런지 궁급 합니다.
대체로 중국으로 흘러 갔거나 성만 바꾼채로 같은 민족인 신라로 흡수 되었겠지요...
어이상실 08/02/06 [19:40] 수정 삭제  
  옛 백제왕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순수 왜놈들 혈통이란게 나와 있더군요
고대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한국인들은 절대로 신라후손이니 백제후손이니 하면서
같은 한민족끼리 갈라져 싸우면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한민족이 남북으로, 동서로, 사분오열되기를 희망하는 집단이 우리나라 바다 건너에
있습니다.

한일관계 08/02/06 [23:50] 수정 삭제  
  신라의 김알지 후손들은 백제계와 가야계인 일본 황실에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일본황실 또한 한반도 침략에 대해 공식사죄하고 일제하 피해보상을 해 주어야 진정한 동반자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22.. 몽고.한국.일본인들이 유전자 구조는 거의 유사함이 증명되었습니다..원주민들 외에 일본인 대부분이 몽골리안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반도에서 밀려난 한국인들이 일본 열도로 도하했습니다..일본은 가야와 백제인들의 나라입니다.역사적 악연을 해소하지 않으면 한일관계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고구려와 백제도 고대에는 한때 원수지간처럼 싸우기도 하고 신라와 백제도 원수지간처럼 싸우기도 했습니다..다 전쟁의 상흔때문입니다..이제는 한민족 연방차원에서 크게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자료]

몽고인종을 특징짓는 유전자 결합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몽고인종를 규정짓는 특징 중 혈청 중에 있는 Gmab3st 유전자가 있다. 바이칼호 북쪽에 있는 뷰리아트족이 몽고인종 중에서 Gmab3st 유전자가 100명 중에서 52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인은 41명, 일본 본토인은 45명인데 반하여 중국인은 화북(華北)지방이 26명 화남(華南) 지역은 9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반면에 북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 족은 44명이나 몽고인종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전자 연구 결과는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멀어질수록 혈청 중에 Gmab3st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수도 적어지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북방 몽고인종(바이칼인)이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남하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사람들의 유골학적 특징]

한국인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머리 길이가 짧고 그 높이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특히 머리뼈의 높이가 높은 것은 구석기 시대 사람부터 현대 사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집단의 사람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서 머리의 길이는 이마에서 뒤통수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높이는 아래턱뼈 윗부분의 ‘으뜸 점’에서 정수리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머리뼈 길이를 비교해 볼 때 한반도에서 출토된 머리뼈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에 오면서 길이가 매우 짧아진다.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까지 머리뼈는 현대 한국남자보다는 약간 긴머리로 나타나며 신석기시대에 짧아진 머리뼈는 청동기시대에 변화가 없다. 반면에 초기 철기부터 7세기에 걸쳐 발굴된 머리뼈들은 머리뼈 길이가 다시 늘어나다가 현대 한국남자에 오면 길이가 다시 줄어든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커다란 변화는 새로운 유전자의 유입인지 아니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진행된 환경의 변화로 인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본래 한반도 사람들의 특징은 머리뼈의 높이가 높고 머리길이가 짧다고 볼 수 있고, 머리뼈의 길이가 길어진 기간은 북방의 한민족의 한반도 유입과 관계가 깊다 볼 수 있다.

[유전학적으로 분석한 한반도 사람들의 자생성과 독자성]

한민족은 본래 한반도에서 발생해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명쾌하다. 70~100만 년 전 검은모루 유적을 남긴 원인이 력포사람과 덕천사람을 거쳐 승리산 사람으로 발전하였고 조선 옛유형 사람을 거쳐 현대 한국인으로서의 특징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민족의 혈청학적 특징는 사람들의 혈액형과 유전자형들은 인종을 식별하고 각 민족들의 친연관계나 차이들을 확증해주는 중요한 지표로 인정된다. 한민족의 경우 적혈구 혈액형들인 레주스식 혈액형에서 나타나는 항원들의 양성인자 중 D항원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 D항원의 양성인자는 아시아 인종에서는 99~99.5퍼센트, 유럽인종에서는 85%, 아프리카 인종에서는 91% 정도인데 한반도 사람들은 D항원의 양성자가 99.71%에 달한다.

특히 유전자 조성에 있어서도 한민족과 쥐나인들은 흑룡강성의 쥐나인을 포함하여 완전히 다르다. 한민족의 레주스식 혈액형의 유전자는 CDe>cDe>cDE>CDE>cdE의 순위로 작아지는데 반해 흑룡강성 지역의 쥐나인에서는 CDe>cDE>cDe>CDE의 관계로 나타나며 귀주성 지역의 쥐나 사람에서는 CDe>cDE>cde>cDe>CDE의 순위로 나타난다. 이것은 한민족이 쥐나인들과 혈연적 갈래가 서로 다른 집단임을 알려 준다.

또한 켈식 혈액형의 K+ 인자는 유럽인들에게 특징적인 항원의 하나인데 한민족의 켈식 혈액형에서 K항원의 양성인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데 반해 유럽인들은 7~9%나 나타난다. 특히 다피식 혈액형의 지리적 분포는 인종적 차이를 잘 반영하는데 한반도 사람들은 다피식 혈액형의 양성인자가 92%이고 음성인자는 7.83%이다. 반면에 쥐나인들의 다피식 혈액형의 음성인자는 화북지역에서는 4.35%, 상해지역에서는 1.82%, 베이징 지역에서는 0.44%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다피식혈액형의 음성비율이 화북지역보다는 1.8배, 상해지역보다는 4.3배, 베이징 지역보다는 18.1배나 더 많다. 이것은 한반도 사람들의 독자성을 의미하며, 한반도 사람들이 한민족의 원류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이러한 혈청학적 연구에 근거하여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형성된 이래 고유한 혈청학적 유형을 이루고 혈연적 공통성을 발전시킨 민족이므로 20만 년 전에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한반도까지 도착했다는 ‘아프리카 가설’은 전적으로 부정된다.

이를 다시 한 번 이러한 유전학적 근거자료에 따라 정리하면 한국인들은 우리 조국강토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본토기원의 주민집단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외부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순수하게 혈통이 이어져왔다는 의미한다.

어이상실 08/02/07 [01:30] 수정 삭제  
  일본국립유전자협회에서 인정하는 호라이의 단독연구를 근거로 일본인의 구성 비율을 보면 중국계 25.8 %(청구대륙에서 이주한 中國倭), 한국계 24.2 %, 동남아 및 서양인의 혼혈 45.2%, 선주민(아이누) 4.8% 랍니다, 일본 정부에서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본인 구성 비율입니다. 어떻게 한국 및 몽골하고 일본인의 유전자가 거의 비슷한겁니까?
그리고 Gmab3st 유전자가 한국인은 41명, 일본 본토인은 45명인데 반하여 중국인은 화북(華北)지방이 26명 화남(華南) 지역은 9명이란 결과는 어떤 논문을 인용한것 인지요?
그냥 믿거나 말거나 자료 인가요?
일본국립유전자협회의 연구자료를 근거로 보면 Gmab3st 유전자 관련 자료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보여지는군요, 전체 일본인가운데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진 인구비율이 24%정도 인데 일본 본토인(?) Gmab3st 유전자 45는 어떻게 나온 결과 인지요?
일본인 전체 평균 자료를 가지고 계산을 해야지 특정 집단만 별도 선별해서 결과가 이렇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일본 왕실이 백제. 가야계라는 사실은 일본왕실이나 일본정부의 공식입장도 전혀아니고 오히려 절대 부정하고 있죠
대체로 이런 주장은 일본 우익녀석들의 사주를 받은 한국내 친일파들의 입에서 나오는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일관계 08/02/07 [02:42] 수정 삭제  
  한국, 몽고, 일본인들의 유전자 구조가 비슷하다고요????
유전학 연구소 08/02/07 [03:07] 수정 삭제  
 


- 일본 국립 유전학 연구소에서 그려놓은 유전자 구조도와 유전자 분포도를 보면 쥐나대륙의 산동지역과 만주.시베리아.일본은 고대 단군조선의 영역 그대로 우리 한국인들의 영역임을 알 수 있고, 그 후손들임을 알 수 있다(지금의 산동지역이 쥐나국의 땅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까지 쥐나인들이고 규정하면 안되는 것이다..쥐나대륙의 남부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고대 동이족들의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 즉, 일본 본토에 순순 본토인(조몬인=아이누)의 DNA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4.8%에 불과한 것으로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밝혔기 때문이다.이 같은 사실은 일본국립유전학연구소 공식 홈페이지(www.nig.ac.jp) 전자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 협회는 전자박물관의 '일본인의 기원'이라는 코너를 통해, 이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호우라이 사토시 박사의 연구자료를 일본인유래를 알 수 있는 가장 근거 있는 자료로써 공식 채택하고 있다. 그 동안 이와 유사한 내용의 연구들이 있긴 했으나 공신력 있는 일본기관이 공식 확인해주기는 이례적인 일이다.
협회 자료에 따르면 호우라이박사는 미토콘드리아 DNA다형으로부터 일본인의 유래를 밝히면서 일본 본토에는 순수 본토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비율이 4.8%에 불과하고,50%는 한국인, 중국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돼있다고 밝혔다.
보통 인류학적인 면에서 일본인(원주민)이라 함은 죠몽인, 아이누, 류큐인 3집단을 뜻한다.

하지만 이 집단들이 각각 별도의 종족이 아니라 아이누와 류큐인은 죠몽인(본토인)의 후손으로 모두 같은 종족이라는 설도 있다.
어떻든 이들 3종족은 사는 곳이 서로 확연히 다르다. 류큐인과 아이누는 일본열도 남과 북의 끝단 즉 아이누족은 최북단 북해도에 살고 있고, 류큐인은 최남단 오키나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일본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본토(일본에서는 本州라고 부름)에는 죠몽인이라는 원주민이 있다.
日본토에 본토인DNA 보유비율 4.8%불과
그러나 일본인의 유래와 현대 일본인의 구성을 확인하기 위해 DNA를 분석한 호우라이 박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재 일본 본토에는 순수 본토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대부분은 한국, 중국 등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으로 구성돼 있음이 밝혀졌다.

몽고-한국-일본 같은 HLA
일본인 선조 한반도서 건너왔다”…도쿄대 도쿠나가 교수 연구


도쿠나가 교수
인간유전자(게놈) 정보를 이용한 연구 결과 현재 일본 본토에 사는 일본인의 선조 집단이 한반도를 경유한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됐다.

일본 도쿄(東京)대 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도쿠나가 가쓰시(德永勝士·49·사진) 교수는 23일 “최근의 게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인체 백혈구 항원) 유전자군을 동아시아 여러 민족과 비교한 결과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은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이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 내용은 7월 중 도쿄대출판부가 출판할 예정인 ‘공개강좌’ 총서에 수록된다.

도쿠나가 교수는 HLA 유형을 기준으로 일본인 한국인 한(漢)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대만 원주민 등 동아시아 내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키나와(沖繩)인이나 북쪽 홋카이도(北海道) 아이누족보다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까웠다고 밝혔다.

▽연구의 의미=이번 연구는 일본 야요이(彌生)시대(BC 300년∼AD 200년경) 일본인의 형성에 한반도를 경유한 선조 집단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기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주로 유물이나 인골, 혈액형 분포 등을 활용한 그동안의 연구는 한계가 지적돼 왔기 때문에 최신 게놈 연구 결과를 응용한 이번 연구는 ‘뿌리 학설’의 결정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쿠나가 교수는 “HLA는 유전자 결합방식에 따라 이론상 34억쌍 존재할 수 있어 유전자 지표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특정 HLA유전자가 특정 민족에 많이 존재하는 점과 이 유전적 특징이 수천년 이상 존속된다는 점은 이미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연구 내용=일본 본토인에게 많이 나타나는 HLA유전자 형태는 HLA-B52-HLA-DR2. 북 규슈(九州) 지방에서 일본 열도 중앙부를 거쳐 야마가타(山形)현까지 12% 이상 존재했다. 반면 오키나와에서는 2%, 아이누족에서는 1%였다. 중국 남부인에게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반면 몽골인에게서는 5∼8% 나타났다.

이로 볼 때 도쿠나가 교수는 몽골과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 중앙부에 이른 집단이 현재 일본인의 선조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존재(7.0%)하는 HLA유전자인 HLA-B44-HLA-DR13 관련 연구도 흥미롭다.

일본의 기타큐슈(北九州) 지역은 5.4%, 동해에 인접한 후쿠이(福井) 지역은 7.2%, 니가타(新潟)지역은 5.5%, 시코쿠(四國)섬의 경우는 4.0%였다. 반면 오키나와나 아이누족에는 1%에 그쳤다. 이 역시 선조집단이 한반도에서 일본 중앙부로 이동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는 해석했다.

도쿠나가 교수는 ‘인간 게놈 계획과 유전자 진단의 장래’(1999년), ‘몽골계의 지구’(1995년) 등 저서를 냈고, 도쿄대 인류유전학교실은 HLA형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간이 DNA검사법을 10여년 전 개발한 권위 있는 연구기관이다. 현재 이 DNA검사법은 골수은행 등록 등에 폭넓게 응용되고 있다.

▼HLA(human leucocyte antigen)▼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며 100개 이상의 유전자가 밀집된 유전자군. ‘인체 백혈구 항원’으로 불리기도 하며 면역기능을 통제한다.

장기 이식 때 HLA형이 다르면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HLA는 게놈 정보 중 1000분의 1에 불과하나 유전자 지표로서의 가치가 매우 커 당뇨병 고혈압 등 질병을 연구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대상이다.
허접한소리 08/02/07 [13:30] 수정 삭제  
  노빠놈들 나타나는 것으로 부족해 이젠 친일까지 하겠다는 건가?
가끔 의식있다 생각해서 와봤는데 이제보니 일본이 우리민족이라는 글이나 올라오고
참 요상한 사이트일세.
한민족 연방 08/02/07 [18:26] 수정 삭제  
  한민족 연방시대에 있어 공공의 적들은 한국과 일본과 쥐나라는 국가차원을 떠나서 일본제국주의와 같은 침략주의적인 군국주의,박정희.전두환같은 친일숭미 군사독재세력,역사를 왜곡하는 식민사관.동북공정.신라사관...이런 허접한 망나니같은 세력들을 뿌리뽑아야 아시아 전체가 살게 됩니다. 일본과 쥐나와 한국의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지성인들과 손을 잡고 양심과 진실의 기치를 높이 들고 홍익인간 이념이 실현되는 새로운 한민족 연방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한일관계는 상호 사죄와 배상이 전제가 되야 비로소 화해와 협력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어이상실 08/02/07 [20:42] 수정 삭제  
  박창범교수의 연구 결과 일본서기의 천문기록은 실현율이 50%미만인것으로 입증 되었어요
완전 날조 역사서로 말입니다. 한국인들은 거의 다 아는 상식이에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날조사,,,일본서기
또한 일본의 대표적 역사서 대부분이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날조되었죠
일본은 원래부터 역사가 없는 나라입니다. 아니 나라가 아니죠
정말로 역사가 있는 나라가 무엇인지 보려면 조선왕조실록을 보시길,,,

한국, 몽고, 일본이 유전적으로 동일한 국가가 되려면 우선 외양이 비슷해야 되는데
이건 아니쟎어요,,,
한국인의 외모는 오히려 몽골이나 중국 동(동북)부지방 사람들과 거의 비슷해요
감성적인 면까지도 비슷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다고 봅니다.
어이상실님은 08/02/10 [01:17] 수정 삭제  
  꼭 유전자 안 따져도 일본사람하고 한국사람하고 얼굴이 똑 같다는 건 상식이요...일본이란 나라는 고대 고구려.신라.백제.가야 사람들의 기질이 그대로 혼합된 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한반도 바로 옆 일본 사람들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랍니까? 한일관계에 있어 악연과 감정적 근원을 고대사에서 찾아서 풀어야 한다는 게 글 내용인데 너무 극단적 국수주의에 함몰된 듯 합니다..쿠테타로 가야계의 신라 석씨 왕권을 몰살시켜 일본으로 추방(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가야인들이 개척하고 전파한 것입니다)시키고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버린 신라의 김알지 세력이 민족분열세력으로 평가합니다.그래서 신라의 김알지세력과 일본황실(백제)가 역사적 원한을 해소해야 한다는 내용은 아주 근원적인 한일관계개선의 선결조건이라 보는 것입니다...역사를 인식한다는 사람들이 왜 그런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국가주의적으로 대응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일본과 한국이 전쟁이라도 해서 해결해야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라사관주의입니까?..전쟁하면 모조리 파멸입니다..평화적 해결만이 대안입니다.역사를 인식하는 이유는 현실문제의 근원을 찾고 근원적인 해결방안을 찾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극한 국가주의를 내세워 감정과 대립으로 몰고 가려는 세력들 또한 현대판 신라사관이라 보며, 한국과 일본 모두의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알지 후손들은 백제계인 일본황실에 공식 사죄를, 일본황실 또한 대한민국에 공식사죄와 일제하 손해배상을 해야 합니다. 만약 박정희와 김종필이 일제하 피해배상문제를 한일굴욕회담때 일본이 지원한 경제개발비용으로 탕감시켜준다는 국가조약을 국민 모르게 비밀리에 체결했다고 한다면 박정희와 김종필 후손들이 손해배상해야 할 것입니다..다 업보..사필귀정 인과응보가 되는 것입니다.
어이상실 08/02/10 [21:16] 수정 삭제  
  풍속부터 다릅니다
머리모양(조선민족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근거로 고구려시대부터 이미 상투를 했죠), 복식, 과거로 올라갈수록 더욱더 달라요,,,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는 19 세기 말 여러 번 일본에 다녀 갔었다는 데, 그는 두 권의 '일본일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에 대해 언급한 다른 문헌에 의하면 그 책은 거의 일본 여자들과의 성행위의 기록 이라고 한다. 대낮에 떼거지로 배로 찾아온 일본 처녀들과 프랑스 선원들의 선상 난교, 저녁이면 아무 마을이나 찾아가도 반겨 주는 마을 처녀들의 ...... 한 마디로 일본은 서양인들도 이해 못하는 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터키탕'도 '도로꾸 탕'이라는 일본의 매춘 목욕탕이 원조이다. '도로꾸'는 터키를 가리키는 일본 말이다. 어쨌든 일본에서 한때 이 '도로꾸 탕'의 유행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일본의 한 가운데쯤에 닛꼬(日光)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온천과 더불어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이 닛꼬 호숫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호텔과 도로꾸 탕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 많은 도로꾸 탕에서 닛꼬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남성들의 체액의 양을 계산해 보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우스워 보이는 계산이 더 이상 우습지 않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15살짜리 여자 중학생이 가족과 함께 닛꼬에 가서, 아름다운 닛꼬 호수에서 수영도 하며 잘 놀다 갔는데, 덜커덕 임신을 했다. 결백을 주장하는 그 여중생을 검사(?)한 의사는 확실한 처녀임을 보증해 주었다. 결국 닛꼬 호수로 흘러든 뭇 남성들의 정액에 의한 임신 이라는, 화학적,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으로 그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로꾸 탕의 유행에 몰입 했으면, 그 넓은 호수가 '물 반, 정액 반'이었겠는가? 이렇듯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성을 상품화 하는데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 하였고, 유행에 대하여 집단 최면적으로 추종하는 국민성은 그런 새로운 성상품을 폭발적으로 보급, 확대 재생산 하였다.GHQ의 일본 민주화 5 대 지침의 하나였던 「부인참정권 부여에 의한 일본여성의 해방」지침이나, GHQ에 의한 여성단체의 육성 및 활동의 장려, 또 「폐창령(廢娼令)」의 포고 등, 메국에 의한 일본 점령은 여성해방을 가져온 것이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점령이 시작된 1945 년부터 매춘 방지법이 제정되는 1956 년까지의 일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체험은 그와 같은 해방군 으로서의 메군상(美軍像)이나 「해방된 일본여성」이란 여성사상의 일면성, 혹은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다.우리나라에서 매춘을 강요한 일본도 강간과 매춘이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안다는 실토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그런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전일본 국민이 하나되어 천 년 넘게 거듭해온 것이다.점령초기의 혼란이 진정 되어도 메군병사의 성범죄는 끊이지 않아, 오히려 「여자사냥」이라 불리는 집단강간 범죄가 늘고 흉포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성윤리의 이중 기준이 여자에게 엄격히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이 피해를 일생의 오명으로 짊어지고 가게 된다. 당시의 일본 에서도 성폭력 피해는 주위에서 감추는 것이 다반사이고 피해를 신고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마치 난잡한 성문화의 전통을 가진 일본이 아니라, 정조관념을 중시하는 우리나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다.

中國倭 이주 후 일본 에서는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본은 지난 천 수백 년 간 이렇게 살았다.여체를 잘 드러내도록 꽉 동여맨 듯한 기모노의 또 한 가지 비밀은 '속'에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기모노(きもの)를 입을 때 항상 노팬티 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여체의 선에 포인트를 맞춘 이들은 팬티 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아예 생략 했다는 말도 있고, 종족번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 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바쿠후(幕府) 시대 들어 파벌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서 남자들의 씨가 점점 말라가자,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그럴듯 하다.
(기모노는 움직이는 침대…혼욕은 에도시대 환락의 상징, 굿데이, 2003. 3. 10.)

요바이(よばい)란 밤에 애인 침실로 찾아가는 풍속을 가리키는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 결혼은 집안 끼리의 결합으로 성립되는 것으로 결혼 전 남·녀의 성교제는 별개의 문제였다. 과거 성교제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정해 준 남자에게 시집가서 새롭게 부부 생활을 시작한다.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녀보다는 성경험자이길 바라는 경향이 강했다.처녀는 결혼 전에 남자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거나, 신체적·성격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지 않나 의심했다. 이러니 나이 찬 딸을 가진 부모는 밤에 찾아오는 남자 친구가 없을까 봐 걱정 이었다. 요바이는 단순히 미혼 남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과부나 기혼녀, 소박맞은 여자에게 까지 허락되었다.1800 년 이후 일본에는 신앙 행사나 마을 전체 행사를 주관하고 화재나 홍수 등 재난에 대비한 구조와 난파선 구조 등을 하는 일종의 청년회가 있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 청년회가 부락 미혼 남녀의 성문제와 결혼 문제, 요바이 풍속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간혹 딸이 임신 이라도 할까 우려한 부모가 문단속을 엄중히 하면 청년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갖은 행패를 부렸다. 요바이의 근절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 시대에는 국민에게 특별히 수신(修身)을 내세우며 유교적 윤리를 강조했고, 문란한 성풍속을 근절 하려는 정책상의 노력도 있었다. 사회교육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단체에 의한 계몽운동도 전개 되었다. 그러나 마을축제(まつり) 기간 중에는 여지없이 성이 개방 되었다.국가 법률과 민간운동 까지 동원해도 성과가 없던 요바이 풍속은 물질문명에 의한 생활환경의 변화로 자연적으로 소멸되어 갔다.(http://www.paichai.ac.kr/)기모노섹스, 혼욕(混浴), 요바이로 난잡해 질대로 난잡해진 사회에서 여자가 남의 자식을 낳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래서 “가계 계승에 있어서도 혈통에 구애되지 않았다.” 一夫多妻制도 부정 되었으며 서로의 정절을 요구 하지도 않았다.” 제 자식임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모든 아이의 이름은 반드시 모(母)가 지”어야 했던 것이다. “人生의 意義와 理想으로 한 것이 異性과의 性關係, 즉 사랑에 전념하는 것”이 된 것은 中國倭 이주 이래로 日本의 性風俗이다.

이런 전통을 가진 왜구들이 어떻게 같은 민족이라는 건지 이해가 안갑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
신라의 김씨왕조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힘을 빌어 축출한 세력도 알고보면
풍속이 조선민족에 비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퇴폐적인 미개한 족속을 내친거로 볼수도 있겟죠,,,
그리고 백제성씨 대부분은 중국 동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왜 자꾸 백제하고 왜놈왕실을 연관시키려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왜놈들은 지금도 한민족을 치기위해서 독도침탈 책동을 벌이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이 동해를 한국. 일본의 바다도 아닌 "평화의바다"로 이름을 변경하자고 제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한국의 주장을 왜놈들은 거부하고 일본해를 고집 하고 있어요

왜놈들은 한민족의 원수임에 틀림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왜놈들 물건 팔아주면 그 돈이 독도 침략에 사용된다는거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이상실 08/02/10 [21:46] 수정 삭제  
  거기 있는 "야동"의 90%이상이 일제입니다.
이거 아무런 제약 없이 누구나 구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기에 털이 없는 지극히 미성년자의 야동도 구해 볼 수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이런거 왜 단속 안하는지 모르겠네요

한국, 북한에게있어 일본은 재앙입니다, 재앙
신이 내린 형벌 같습니다.
웬수들은.. 08/02/11 [16:35] 수정 삭제  
  "일본은 가야 땅, 한-일 이제 미워말자!"

한국-일본은 뿌리가 하나인 같은 민족, 태양족 후손

▲ 강동민 이사장

도시국가 연합체인 가야(태양민족. 광명의 민족)의 한 부족이었던 신라가 경주 쪽에서 고구려로부터 독립 신라를 만들게 되고, 옛 가야 시대 때 이미 일본 시마네 현 쪽으로 건너가서 살고 있었던 “석탈해”(일본 시마네 현 출생) 가 신라의 2대왕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유리왕 다음으로 왕이 되었다. 이때는 일본 이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땅이었다.
한편 신라는 박. 석. 김 씨로 돌아가면서 임금을 맡아서 하다가 16대 흘해왕 때, 김 나물 왕이 혁명을 일으켜서 왕권을 쥐게 되었고, 석 흘해왕과 아들도 죽임을 당하고 손자 중 하나가 겨우 살아서 일본 시마네 현 이즈모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부터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꼬이기 시작하였다고 나는 본다.
그때부터 신라에 원한을 품은 석씨일족 들의 일본 내에서의 활동은, 신라의 왕이었던 고귀한 신분을 앞세워, 일본 정부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니 자연이 권한이 많아지고 권력을 휘두르고 천황까지도 꿈을 꾸었던, 석씨왕족인 소가일족(蘇家一族)의 300년 영화는, 국무대신 겸 재무장관 직책까지 맡아서, 새 천황들을 옹립 할 때마다 깊숙이 관여 하였고,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못살게 굴며 석 씨 왕권 회복과 신라 왕권 전복의 기회를 노리며 무척 노력하였다.(우리조상이 세운 일본 나라 : 박병식 저 참조)
신라가 반도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문무왕 2년 서기662년 에 석씨왕족의 재산(본피궁)을 몰수하여, 반은 국고에 넣고, 나머지를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준 사실이 있었다. 이는 신라가, 왕좌에서 쫓겨난 석씨왕족이, 백제와 손을 잡고 250년 동안이나 신라를 괴롭혔던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서기 681년 7월 신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자기 시신을 동해 입구에 있는 대석상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하였다. 감은사(感恩寺)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바다의 용이 되어 왜군을 막겠다고 되어 있다 한다. 문무왕의 이러한 유언을 해야 할 이유는, 바로 그의 손으로 모진 박해를 한, 석씨왕족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아야 한다.
조선왕조 선조25년 1592년 임진왜란이 6년간 계속되어 1598년 끝날 때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끈질기게 계속 되었으며, 그 후 일본의 국력이 강해 질 때면 꼭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곤 하였다. 또 한 일제 강점기 35년은 대한제국을 철저하게 짓밟고 괴롭힌 현대사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옛 가야를 흡수한 신라를 미워하고 “님의 나라 (임나: 가야)”를 잃었다는 슬픔과 석씨 왕조의 원한에 찬 보복 이 겹친 업보가 아닐까? 심히 마음이 무거워 짐을 느낀다.
하나님을 “아리랑” 이라고 노래하는 하늘의 직계 자손이며, 스스로 태양이라고 표현하는, 언어가 같고 뿌리가 하나인, 같은 민족, 태양족 후손들의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하나. 언제쯤 끝이 보일까. 양국의 화해 정신과 용서 . 관용 이 꽃 피울 때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서로 미워하지 말자! 서로 용서하자! 서로 사랑하자! 옛 선조들의 홍익인간 정신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강동민

웬수들은 민족을 분열시킨 신라의 흉노족 출신인 김알지 후손들입니다...김알지 후손들은 파렴치한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황실(백제+가야)에 공식사죄하고, 일본황실도 한반도침략에 공식사죄와 손해배상까지 해 주어야 됩니다.. 근원적인 이유를 찾아야 한일문제 해결됩니다....왜 김알지 후손들때문에 무고한 조선백성들과 우리 민족이 서로 싸워야 합니까? 님은 박정희와 김종필이 한일회담때 일제하 피해배상을 무마해준 조건으로 경제개발비를 무이자로 일본으로부터 받았는지나 알아 보세요..그러면 누가 일본군국주의보다 나쁜 넘들인지 나올 거 아닙니까? 누구를 탓해야 할까요? 1차적으로 자기나라의 내부에 있습니다.그리고 조선망하는 것만 보아도 결과적으로 나라망하는거 따지고 보면 다 자기나라하나 관수못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성문화야 각 나라의 풍습에 따른 문화의 반영아니겠습니까? 그런 성문화까지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라의 성문화 얼마나 개방적이였습니까? 말이 개방적이지 유교적 시각으로 보면 개망나니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님이 비난하는 일본의 성문화라면 신라의 성문화부터 비판해야 합니다. 일본이란 나라는 고대 가야.고구려.신라.백제인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나라라고 이해하면 그런 성문화의 역사적 기원도 가야나 신라에서 찾아야 할 맞을 것입니다. 선차적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비난하는 건 역사인식방법의 부재입니다..일본에는 단군숭배풍습과 함께 단군신사도 많고 [나라]와 [오사카]는 고대 백제인들의 정착지며, 백제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백제멸망전까지 백제의 담로(식민지)였음이 일본이 국보급으로 보관한 [칠지도]와[청동거울]이 증명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일본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정착한 사람들은 가야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야인들은 무사들의 나라라는 거 잘 알고 있지요? 일본이 무사의 나라라는 것도 잘 알겠구요? 일본이 신사의 나라는 거 잘 알고 있죠? 고대의 신라또한 신사의 나라였습니다..일본을 이해하려면 먼저 가야나 신라부터 이해하시기를 권합니다..그러면 일본의 성문화도 이해할 것입니다..흉노(훈)의 특징은 편두입니다..가야인들의 무덤에서도 편두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무사들의 나라인 가야의 조상들은 본래 고대 단군조선의 호위무사들이였던 동호족으로 북방 유목민들이였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그리스가 개방적이였듯 가야 또한 개방적이였습니다...서진한 흉노(훈)족 등 동호족이 서양인들이 사는 지역까지 서진하여 서양인들의 문화를 향유하다가 그런 문화를 가지고 다시 호족(흉노)이 다시 동진하여 진시황의 탄압이후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왔다가 김알지 후손들의 패권에 의해 다시 일본으로 밀려나 정착했다면 말이지요...유라시아대륙이 고대부터 초원의 길로 네트워크화되어 있듯이 인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역사와 문화는 주고 받으며 돌고 도는 것입니다. 문제는 가치와 세계관의 문제라고 하겠지요..그건 인류가 환영하는 널리 이롭게하는 홍익인간 이념일 수 밖에 없겠지요?? 민족주의이념이자 세계주의이념인 홍익인간은 다민족 다국가를 포용하고 융합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세계관이지 자기들끼리 좁쌀만 하게 살겠다는 그런 게르만족.유대민족 제일주의같은 국수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어이상실 08/02/11 [19:08] 수정 삭제  
  아래에 삼일신고 전문을 보시기 바래요
왜놈들의 신사문화가 우리 고대 신앙이랑 같은지 양심적으로 평가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저질적인 문화의 원인을 현재의 자신들이 아닌 남의 나라탓이라고 하면 안되요.
신라도 낭가사상(풍류도)라는 의식수준이 지극히 높은 지도이념이 있었어요,,
왜놈들의 요바이, 혼욕, 기모노섹스와는 질적으로 틀린 상급 문화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신라가 그렇게 만만한 나라입니까?

三一神誥 삼일신고(총366자)




제1장 虛空 허공(36자)




帝曰 爾五加衆 蒼蒼非天 玄玄非天

天 無形質 無端倪 無上下四方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

제왈 이오가중 창창비천 현현비천

천 무형질 무단예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무부재 무불용




제(帝)께서 가로대, 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검고 검은 것이 하늘이 아니니라. 하늘은 모양(形,형)도 바탕(質,질)도 없으며, 첫끝도 맨끝도 없으며, 상하사방도 없으며, 텅텅 비고 비어서, 존재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감싸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제2장 一神 일신(51자)




神 在無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 生天

主無數世界 纖塵無漏 昭昭靈靈 不敢名量

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신 재무상일위 유대덕대혜대력 생천

주무수세계 조신신물 섬진무루 소소영영 불감명량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하느님은 위없는 첫 자리에 계시어 대덕(大德,큰 덕)과 대혜(大慧,큰 지혜)와 대력(大力,큰 힘)을 지니시어 하늘을 내시고, 무수한 세계를 주재(主宰)하시며, 많고 많은 만물(萬物)을 만드시되, 미세한 티끌도 빠트림이 없으며, 밝고 밝아 신령하고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소리와 기운으로 원하고 빌면 반드시 친히 드러내시니, 자기의 성(性,성품,본성)에서 씨알을 구하라. 너희의 뇌(머릿골)에 내려와 있느니라.




제3장 天宮 천궁(40자)




天神國 有天宮 階萬善 門萬德

一神攸居 群靈諸哲護侍 大吉祥 大光明處

惟性通功完者 朝 永得快樂

천신국 유천궁 계만선 문만덕

일신유거 군령제철호시 대길상 대광명처

유성통공완자 조 영득쾌락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이니, 천궁(天宮,하늘 궁전)이 있어서 만가지 착함으로 계단을 삼고 만가지 덕으로 문을 삼았느니라. 하나님(一神)이 계신 곳은, 뭇 신령과 모든 밝은이들이 모시고 있어, 지극히 복되고 상서로운 곳이요 크게 빛나고 밝은 곳이라, 오로지 성(性, 성품, 본성)을 트고 공적을 완수한 사람이라야, 하늘궁전에 나아가 영원히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世界 세계(72자)




爾觀森列星辰 數無盡 大小明暗苦樂不同

一神造群世界 神勅日世界使者 轄七百世界

爾地自大 一丸世界

中火震盪 海幻陸遷 乃成見像

神呵氣包底 煦日色熱 物繁殖

이관삼렬성진 수무진 대소명암고락부동

일신조군세계 신칙일세계사자 할칠백세계

이지자대 일환세계

중화진탕 해환륙천 내성견상

신가기포저 후일색열 행저화유재 물번식




너희들은 총총히 널린 별들을 보아라. 그 수가 다함이 없으며, 크고 작고 밝고 어둡고 괴롭고 즐거움이 같지 않느니라. 하나님(一神)께서 뭇 세계를 만드시고 해세계(日世界)를 맡은 사자(使者)를 시켜 칠백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것 같지만 한 알의 세계이니라. 속 불이 흔들려 울리어서 바다로 변하고 육지로 바뀌어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느니라. 하나님(一神)께서 기운(氣)을 불어 밑을 싸고 태양의 빛과 열로 따뜻하게 하시니, 걷고 날고 탈바꿈하고 헤엄치고 심는 온갖 만물이 번식하였느니라.




제5장 人物 인물(167자)




人物同受三眞 惟衆迷地 三妄着根 眞妄對作三途

인물동수삼진 유중미지 삼망착근 진망대작삼도




사람과 만물이 다같이 삼진(三眞, 세가지 참)을 받나니, 생각하면 무리들은 땅에서 미혹되어 삼망(三妄, 세가지 망령된 것)이 뿌리를 내려 진(眞)과 망(妄)이 서로 맞서 삼도(三途, 세가지 길)를 지었다.




曰性命精 人全之 物偏之 眞性無善惡 上哲通

眞命無淸濁 中哲知 眞精無厚薄 下哲保 返眞一神

왈성명정 인전지 물편지 진성무선악 상철통

진명무청탁 중철지 진정무후박 하철보 반진일신




가로되, 성(性,성품,본성)과 명(命,목숨)과 정(精,정기)이라. 사람은 그것을 온전하게 받고 만물은 치우치게 받느니라.

진성(眞性)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인(上哲,으뜸 밝은이)이 통하고, 진명(眞命)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中哲,중간 밝은이)이 알며, 진정(眞精)은 두터움도 엷음도 없으니 하철인(下哲,아래 밝은이)이 보전하니 진(眞,참)으로 돌이키면 하나님(一神)이 될지니라.




曰心氣身 心依性 有善惡 善福惡禍 氣依命 有淸濁 淸壽濁夭 身依精 有厚薄 厚貴薄賤

왈심기신 심의성 유선악 선복악화 기의명 유청탁 청수탁요 신의정 유후박 후귀박천




가로되, 심(心,마음)과 기(氣,기운)와 신(身,몸)이라.

심(心)은 성(性)에 의지한 것으로서 착함(善)과 악(惡)함이 있으니, 착하면 복되고 악하면 화가 된다. 기(氣)는 명(命) 의지한 것으로서 맑음(淸)과 흐림(濁)이 있으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일찍 죽는다. 신(身)은 정(精)에 의지한 것으로서 두터움(厚)과 엷음(薄)이 있으니, 두터우면 귀하고 엷으면 천하다.




曰感息觸 轉成十八境 感喜懼哀怒貪厭 息芬爛寒熱震濕 觸聲色臭味淫抵

왈감식촉 전성십팔경 감희구애로탐염 식분란한열진습 촉성색취미음저




가로되, 감(感,느낌)과 식(息,숨쉼)과 촉(觸,부딪침,촉감)이다. 이것이 굴러 열여덟 경계를 이루니라.

감(感,느낌)에는 기쁨, 두려움, 슬픔, 성냄, 탐냄, 싫어함이요,

식(息,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번개, 습기이요,

촉(觸,부딪침)에는 소리, 빛깔, 냄새, 맛, 음탕, 닿음이니라.

-감(感)은 사람의 심리적 활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감정을 뜻하고,

식(息)은 외부 기의 변화와 관련되어 일어나게 되는 지각을 뜻하며,

촉(觸)은 청각, 시각, 후각, 미각, 촉각, 성적인 감각을 뜻한다.




衆 善惡淸濁厚薄 相雜 從境途任走 墮生長消病歿苦

哲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改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是

중 선악청탁후박 상잡 종경도임주 타생장소병몰고

철지감 조식 금촉 일의화행 개망즉진 발대신기 성통공완시




뭇 사람들은 착함(善)과 악함(惡), 맑음(淸)과 흐림(濁), 두터움(厚)과 엷음(薄)을 서로 섞어서 경계의 길을 따라 마음대로 달리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니라. 밝은이(哲)는 지감(止感,느낌을 그침), 조식(調息,숨쉼을 고르게 함), 금촉(禁觸,부딪침을 금함)하여 한뜻으로 되어가서 망령됨을 돌이켜 진(眞,참)으로 나아가 큰 신기(神機,하느님의 기틀)을 발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어이상실 08/02/11 [19:31] 수정 삭제  
  [웬수들은 민족을 분열시킨 신라의 흉노족 출신인 김알지 후손들입니다...김알지 후손들은 파렴치한 역사적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황실(백제+가야)에 공식사죄하고]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거 아니에요
한국인, 북한인 모두가 민족성씨인 김씨성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한민족 친족으로 따져서 두세단계만 건너 뛰면 민족성씨 김씨와 친족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김씨성 욕하는 놈은 이세상에 왜놈 밖에 없어요,,
김알지 욕하는건 자기 조상을 욕하는거고, 한민족 전체를 욕하는거나 다름 없습니다.
알아두시길,,,
어이상실님은 08/02/13 [17:31] 수정 삭제  
  신라의 김알지 왕조의 파렴치한 반민족 분열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요~~신라의 [화랑세기]보면 신라들의 성의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일본이란 나라는 가야.백제.신라.고구려의 기질이 합해진 혼합민족국가요.그래서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일본가서 구경 좀 보고 글 올리시는게 좋을 듯 하군요..
어이상실 08/02/13 [21:42] 수정 삭제  
  [일본이란 나라는 가야.백제.신라.고구려의 기질이 합해진 혼합민족국가요???]
웃음 밖에 안나옵니다.
아래 적힌 내용이 일본의 진실이에요,,,

上衣를 입지 않는 종족은 많았고 지금도 있으나, 下衣를 입지 않는 민족은 日本이 唯一하다


16세기 明이 그린, 明나라 해안(揚子江 이남 해안)에 출몰하며 노략질하던 倭寇의 모습을 그린 倭寇圖券 속의 倭寇도 下衣를 입지 않고 있다. 다만 왜구도권 속의 倭寇는 엉덩이가 덮이는 上衣를 입고 있다. 하지만 通信使 行列圖나 우타카와 히로시게(歌川廣重)의 판화로 보건데, 倭奴의 상의는 엉덩이가 다 덮이지 않는 짧은 것이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해서 엉덩이 부분을 덮어준 걸로 짐작된다.




1711년 通信使 行列圖는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 이었던 것이다. 倭奴들은 엉덩이도 다 덮이지 않은 상의 하나만 걸치고 거리를 활보했던 것이다.




中國倭의 이주 후 기모노(きもの)섹스, 혼욕(混浴), 요바이(夜這い)라는 문란한 性文化의 이식과 병행하여 日本 男子들은 下衣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래야 여자를 보는 즉시 寸刻을 다투어 기모노(着物)섹스, 混浴, 요바이(夜這い)를 실행에 옮길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남의 나라를 약탈 하면서도 특별히 예의를 갖춰 하의를 갖춰 입지는 않았다. 上衣를 입지 않는 종족은 많았고 지금도 있으나, 下衣를 입지 않는 민족은 日本이 唯一하다.




기모노(きもの) 역시 中國倭가 이주하면서 전수한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은” 華夏의 옷에서 비롯 되었다. 오로지 섹스를 즐기기 위해 고안해낸 옷으로 きもの 자체가 섹스를 위한 일습(一襲) 이라고 한다. 즉 섹스용품을 몸에 걸치고 다니면서 지나가는 남자의 요구가 있으면 언제든지 섹스에 응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 두 개로 나뉘어 있지만 기모노는 넓은 천을 둘둘 감는 식이다. 뭐니 뭐니 해도 포인트는 오비(帶 : おび)다. 복대 같은 넓은 띠인데 저고리의 옷고름과는 달리 배에서 가슴 아래까지를 통째로 감싼다. 이 오비(おび)만 풀리면 기모노(きもの)는 완전 '무장해제'가 된다.




여체를 잘 드러내도록 꽉 동여맨 듯한 기모노(着物)의 또 한 가지 비밀은 '속'에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 전부터 기모노(着物)를 입을 때 항상 노팬티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여체의 선에 포인트를 맞춘 이들은 팬티 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아예 생략 했다는 말도 있고, 종족번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바쿠후(幕府) 시대 들어 파벌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서 남자들의 씨가 점점 말라가자,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그럴 듯하다.




혼욕(混浴)은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쿠라에(枕繪)'라는 당시의 음화에는 남녀들이 뒤엉켜 온천 섹스를 하는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돼 있다. 환락이 극을 이뤘다는 에도 시대의 성문란은 상식을 초월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얘기다. (기모노는 움직이는 침대…혼욕은 에도시대 환락의 상징, 굿데이, 2003. 03. 10.)




기모노 노팬티-번식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기모노가 만들어진 천년 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전쟁이 없었는데, 무슨 사람이 죽어 나가고 보충하기 위한 번식에 열중한단 말인가.




“종족번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 이었다”? “幕府時代 들어 파벌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서 남자들의 씨가 점점 말라가자,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녔다”면 그렇게 태어난, 父가 누군지도 모르는 私生兒가 사무라이가 되고 貴族이 됐다고 스스로 실토하는 소리다. 저 소리는 일부만 사실이다. 日本에는 지난 千年間 父를 확정할 수 없는 私生兒가 넘쳐나긴 했지만, 즐기다 보니 생겨난 결과이지, 번식을 위해 필사적으로 私生兒를 생산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면 파벌간의 싸움을 ‘지체 높은’(? 라이프 2차대전에서 사무라이를 두고 표현한 말이다.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잘 기억해두도록) 사무라이들은 뒷짐지고 종놈 들에게 시켰다는 것인가.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의 존재 의의를 무시하는 결론이다. 아니면 종놈이 곧 사무라이 였다는 것인가. 이 말은 사실이다. 배우자가 낳은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제 자식으로 받아 들여야 했던 것이다.




지난 천년 동안, 日本은 언제나 인구과잉 이었다. 그 결과 언제나 기아에 허덕였다. 高麗와 李氏朝鮮을 침입한 倭寇는 쌀을 우선적으로 노략질했고, 李氏朝鮮과 朝貢貿易할 당시에도 쌀 확보에 혈안 이었다. 2차 대전도 日本이 넘쳐나는 人口를 주체 못해서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西歐의 시각이다. 대량실업과 飢餓에 대한 해결책으로 植民地를 탈취하려 했다고. 실은 日本의 주장을 그대로 읊조린 것이다.




팬티線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팬티를 입지 않았다면, 현대 일본 여자들도 팬티 없이 기모노를 입어야 한다. 기모노(着物)는 中奴의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는 옷에서 발전한 복식이다. 노팬티는 수천 년 된 中奴의 풍습 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中土로 들어가서 옷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이전에는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列島에는 짐승조차 귀했지만, 中土에는 그래도 짐승은 있었을 것이다. 짐승 가죽이라도 안 걸치면 그 추운 곳에서 버텨낼 수 없으니까) 이 당시부터 亂雜한 性文化를 즐기다 보니까 後代에 들어 와서도 속옷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으면서 무슨 옷맵시를 찾고, 팬티線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朝鮮通信使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日本民族은 벌거벗고 舊石器人이나 다름없이 세계를 활보했을 인간들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제술관 신유한이 오사카(大坂)에서 눈여겨 본 것 중의 하나가 그들의 성문화 였다. 그는 통역등 주위 일본인 으로부터 듣고, 직접 본 것을 토대로 40편의 글을 지어 일본인들을 꼬집고 귀국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나의 집 칠보등은, 밤마다 날이 새기까지,

새 낭군은 앞문으로 오고,

옛 서방은 뒷문으로 가네.




(왜 풍속은 반드시 등불을 밝히고 남녀가 잠자리를 한다)




오늘날에도 對馬島에서 朝鮮通信使 行列을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벌거벗고 하지는 않는다.



제가 인용한 글을 부정적으로 보지말고 현재의 일본과 비교해 보세요
비슷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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