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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군대의 전쟁승리 원동력은 과학

'최강의 강철국가'였던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개마무사

이종호 | 기사입력 2008/03/15 [03:35]

고구려 군대의 전쟁승리 원동력은 과학

'최강의 강철국가'였던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개마무사

이종호 | 입력 : 2008/03/15 [03:35]
▲   화기 출현 이전에 유행된 팔진법
고구려가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갖고 있는 고구려 나름대로의 노하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양국은 전투 방법부터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의 전투 비법이 축적되어 있었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비장의 전투 기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기원전 1028년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백대, 용사 3천명, 갑사 4만5천명을 거느리고 위수를 따라 동쪽으로 출발하여 맹진(孟津)에서 여러 부락과 연합한 후 은나라 주왕(紂王)을 공격했다고 사마천은『사기』에서 적었다.

당시의 전쟁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주례(周禮)』에 의하면 병사 5명을 오(伍)라고 하고 5오를 1량(兩), 4량을 1졸(卒), 5졸을 1려(旅)라고 하였고 5려를 1사(師)이라고 하며 5개의 사를 군(軍)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1량(兩) = 25명, 1졸(卒) = 100명, 1려(旅) = 500명, 1師 = 2천500명, 1군 = 1만2천500명이 된다. 근래 사용되는 여단(旅團)이나 사단(師團)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중국의 전투는 주로 전차전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차 1대에 보병이 30명씩 호위하였다. 이 때 사용된 전차(戰車, 또는 兵車)는 크게 공격용 전차인 치차(馳車)와 수비용 전차인 혁차(革車 : 가죽전차)로 나눠진다. 치차는 공차(攻車) 또는 경차(輕車)라고 하는데 대개 경차 1대에서는 말이 4필, 갑사 3명, 병졸 72명이 따라다녔다. 혁차는 수차(守車), 또는 중차(重車)라고 하는데 혁차 1대에는 4마리의 소와 25인의 병졸이 따랐다.

▲  한나라 때 사용된 전차 
이 당시의 전쟁들은 대부분 전차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주로 전차가 거동하기 편리한 지역을 전쟁터로 선택했다. 그러므로 주로 넓은 평원이 있는 곳에서 국경지대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당시의 전쟁을 ‘강장지사'(疆場之事, 국경의 일)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에 들어서자 철기의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보병들에게도 질이 좋은 무기들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질 좋은 철기는 무기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당시에 주력 무기는 강한 쇠뇌(弩)였는데 사정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한(漢)나라의 경우 6백보까지 쏠 수 있는 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산악 작전이나 경사지 등에서 전투를 할 수 없는 전차전보다는 보병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보병들이 밀집대형으로 화살을 발사할 때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하던 전차 진영(車陣)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405년, 단구(亶丘) 전쟁에서 ‘전차 2천대를 노획하고 3만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보병은 인원만 많다면 산악지나 구릉지, 평지 등 전쟁터에 제한을 받지 않으므로 전쟁터의 범위가 넓어지고 작전을 펼치기가 유리했다.

▲  한(漢)군의 공격 방법. 궁수가 전면에 서서 공격군을 먼저 공격한 후 보병과 기병이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의하면 위나라(조조의 위나라가 아님)에서는 보병을 선택할 때 ① 세 가지 물건으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했고, ② 12석(石)의 힘을 가진 쇠뇌를 쏘는 것은 물론 쇠뇌살 50수를 등에 질 수 있고 ③ 무기를 휴대한 채 3일간의 식량을 짊어지고 하루 1백리 길을 달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즉 이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정규 무졸(武卒)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당시 보병이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는 춘추전국 시대까지 기병(騎兵)이 단독 병종으로 편성되지 않고 전차병과 혼합작전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차츰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자 기병이 독립 병종으로 발전하지만 그래도 기병은 고작 5천 필~1만 필에 불과했다. 중국의 장점은 장병 수이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각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관료기구도 발전하였고, 초모제도(招募制度)를 실시하면서 경쟁적으로 국방을 강화했으므로 십만 명의 병력은 보통이었고 한 전쟁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형태는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국경에 관문을 만들어 방어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평소에 대병력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이 침공해올 때에 한해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자 보병전 위주로의 전투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지형에 따라 성을 방어진지로 삼아 공격군으로 하여금 소모전을 펼치게 하므로 당연히 성(城)의 공격과 방어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군대가 상주하고 정(亭, 변경의 토담 위에 설립된 감시용 건축물)이나 장애물 등이 건축되고 봉화 설비도 갖추면서 성이나 요새를 서로 연결한다. 이것이 유명한 만리장성의 시원이다.

▲  한국의 각궁(15세기), 한국의 전통 활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자 전쟁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곧바로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국된다. 진나라의 전투 방법을 계승한 한나라는 전략 전술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나타낸다. 유명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한 초한전(楚漢戰)을 보면 조직과 지휘 면이나 보급 문제가 매우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번의 전투가 전체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대치와 수비, 공격 등에 대한 다양한 전술이 구사된다. 이것은 전쟁터가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어서 여러 방향에서 하나의 전략적 목표를 중심으로 작전이 수행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이 사용한 대규모 보병전은 가장 작은 단위 부대인 소대(小隊)의 경우에 앞줄에 궁병(弓兵) - 창병(槍兵) - 칼과 방패를 가진 보병(步兵) 등의 순서로 정렬했다. 이것은 일단 화살로 공격해오는 적을 공격하여 예봉을 꺾은 후 계속하여 적들이 공격해오면 창병들 간의 교전을 벌인다. 상황에 따라 밀집 보병이 투입되어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이때 대규모 보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진법(陣法)이 사용되었다. 진법이란 전쟁시 병력 배치의 방식을 말하는데 진법 가운데는 팔진법(八陣法)이 대표적인 것이다. 64개의 소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적과 교전을 할 때는 정면과 측면을 지키는 부대로 나머지는 예비 병력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팔진법은 사령관이 군대의 정중앙에서 중군(中軍)으로 전체 병력을 지휘하는 것으로 이 중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개의 방향과 북동ㆍ북서ㆍ남동ㆍ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두는 병력 배치법이다.

『삼국지』에는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고안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전부터 운영되던 진법이다. 그것은 제갈공명 이전에도 팔진법에 대한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여하튼 팔진법은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전투병과 지원팀이 매우 효율적으로 짜여 있어 최적의 공격 및 방위 진형이라고 알려져 있다.
 
▲ 티벳(토번),만주.몽골.쥐나 동남부 지역.시베리아.연해주 한반도.일본열도를 지배했던 고구려 광역도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  중국 계림 이강의 물소,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도 발견된다. 한식궁은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이다.

▲ 개마무사와 방패, 고구려는 질 좋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적들과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고조선 강철' 최강국가 발돋움 원동력 -> 고구려의 강력한 철갑부대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군과 부여를 계승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즉,고조선 영역에서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률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고광록』에 의하면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있다.

단군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써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로 하여금 기마술에 있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케 하는 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탔다고 볼 수 있다. 말 타는 기술이 수준급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상대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 데 능하다’고 적혀 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온달장군의 아내인 평강공주는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일렀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말사육의 실제적인 기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일상 생활화했음을 암시해 준다.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전쟁을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은 이와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  마케도니아의 밀집 장창대. 창이 워낙 길어 5열째 병사들의 창까지 대열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들이 구사한 삼각형 밀집방형진은 평지에서 벌어진 고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 안악 3호분 개마무사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 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단원은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 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훈족의 기마 전투 장면. 훈족의 궁수가 자신을 추격하는 게르만 창기병을 향해 몸을 틀어 화살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훈족의 그림이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런 밀집대형도 로마군단의 변형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

로마군은 그리스 대형에 맞서기 위해 먼저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투창병을 내세웠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투창은 끝이 무겁기 때문에 그리스 진형의 앞 대열에서 장창을 사용하더라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투창병들이 방진의 앞 대열과 중간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사이, 키가 작은 로마 군병들이 작은 단검을 들고 방진 밑으로 침입하여 공격한다. 이 때문에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의 주력군이 돌진하여 방진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은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소대형과 백인대 등의 작은 부대로 구성된 집합체로 이들의 역할과 간격을 적절히 배치해 마케도니아의 밀집대형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의 승리는 아무리 견고한 방진이라도 침착하게 맞선다면 이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에 따라 변형 작전을 구사하였고 후대에는 귀갑형(거북형)이라는 유명한 밀집대형을 발명한다.

그러나 이들 귀갑형도 100전 100승을 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  천마총 마구 전시물.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일반적    
 
가야는 고구려 활의 위력을 몰라서 패배했지만 중국은 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병의 약점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러한 기병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해 기병들은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다 화살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군마의 부상은 기병에 치명상을 주므로 고구려가 개마로 말의 외부를 감싸도록 해 부상을 방지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궁수를 동원하더라도 활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개마무사의 장점이다. 개마의 효용성은 궁수가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미터이고 절대 살상거리는 3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일단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 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화망을 뚫기만 하면 궁수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궁수들이 개마무사들에게 집중해 화살로 공격하더라도 한두 번밖에 화살을 발사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기병은 5미터나 되는 창을 갖고 있으므로 궁수나 보병과의 간격이 20~30미터 거리로 좁혀지면 기병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개마무사가 화살을 피하는 순간 이미 궁수에게 다가와 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가야는 고구려의 위력을 간과해 패망했지만 중국의 경우 고구려와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즉 궁수의 역할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또 다른 방비책을 준비하곤 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지만 화살망을 뚫고 중장기병이 공격해 오면 20~30미터 정도의 저지선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해 함정에 빠지도록 한다.

▲  [브레이브하트]의 한 장면. 거리가 좁혀진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하는 것은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했기 때문이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의 중장갑기병이 돌진하자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해 대비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장기병의 경우 장갑력은 강하지만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진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진격이 저지되면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나 준비된 기병들이 역으로 공격에 나선다. 중장기병이 육박전에 휘말리게 되면 오히려 패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개마무사에 대한 중국의 대비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경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병은 대체로 중무장하지 않고 말의 기동력과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하는 임무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연합하더라도 보병 밀집 대형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경기병대는 주로 맥궁으로 무장한 후 적군의 궁수와 보병을 상대로 활을 발사해 적진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임무를 갖는다. 맥궁의 사정거리가 중국 활보다 긴 것은 물론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했으므로 어느 장소에서건 재빠르게 화살을 발사하고 빠지는 데 적격이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경기병대가 공격해오면 이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체력을 소모해야 하므로 대형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만약 적진이 완강해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경기병대는 무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이럴 때 고의적으로 후퇴하는 위장술을 겸용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공격해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집요한 매에 당해 낼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수비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면서 약점을 보이면 준비된 개마무사가 출동해 승부를 결정짓는다. 훈족(흉노)이 막강한 로마군을 비롯한 게르만 족을 격파한 비법은 바로 기동력을 기반으로 공격과 후퇴를 번갈아 가면서 승리할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는 데 있었다.

중장기병대와 경기병대는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출동해야만 전투 효과가 배가되므로 군의 체계에 따라 중장기병과 경기병대 숫자를 조정했다.

고구려보다 후대이기는 하지만 금나라는 아예 기병대 자체를 20명의 중장기병과 30명의 활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섞어 편제했다. 고구려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를 운용했을 것으로 임용한 박사는 추정했다.

중장기병대는 다른 병종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선발된다. 말과 갑옷이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군마는 소처럼 여물을 먹이지 않고 반드시 생초나 곡물을 먹여야 한다. 더구나 기마술을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장기병은 전쟁에 나갈 때에도 종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마무사의 장점은 철이지만 철의 약점은 녹이 잘 쓰므로 갑옷을 매일 닦아주고 기름 치고 조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중장기병대는 보병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 대 1 정도이며 또한 중장기병을 전체 기병의 40퍼센트(금나라를 계상) 정도로 설정한다면 전체 병력의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튼 고구려는 기병과 보병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고구려가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무모하게 개마무사 등 최정예 부대들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당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력부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할 만큼 최첨단 군수품으로 무장했고 적절한 작전을 구사하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장병들의 전투력 즉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뜻한다. 개마무사가 승리의 보증수표였음은 의미한다.

<개마무사는 철기 생산이 확보돼야>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해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개마무사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기병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또는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했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마무사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들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  훈족(흉노)의 공격. 기동력 있는 기마병의 공격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죽음과 파괴를 상징할 정도로 그 위용을 떨쳤다.  ⓒFrank Frazetta 작품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뉘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됐다.

성질이 다른 철을 만드는 기본 제련 방식은 유사하다. 과거에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로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쯤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괴련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고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쇠를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것은 쇠의 금속 성질 때문이다. 쇳덩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네모, 육각형, 오각형 등 모양만 다양한 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런 조직들이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두드리는 동안 괴련철 속의 규소 등 이물질이 압출되고 조직이 치밀해진다. 그리고 이물질 중 배출되지 않는 것도 조직 안에 고루 분산되므로 조직이 균일화되고 전체적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한 가열된 괴련철을 숯에 넣으면 숯의 탄소가 철에 흡수돼 자연스레 철의 표면은 적당한 탄소를 함유한 괴련강(塊鍊鋼 : wrought iron)이 되며 이를 침탄법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쇠의 날과 등의 두께를 달리하면 쇠의 성질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쇠의 색깔이 황혼 빛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안쪽 날부터 시작해 등 부분까지 순간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반복했다. 날 부분은 갑작스레 담금질하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날 부분은 강하게 만들고 가운데와 등 부분은 약하지만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칼은 칼의 표면 부분만 탄소가 함유된 강철이고 그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므로 칼을 사용함에 따라서 표면의 강철은 부서지게 되고 칼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사리 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점이다.

▲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적통 고구려의 후손들로 천손민족 대한민국 황실을 국가적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도 민족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검토할 문제라고 본다.

* 글/이종호 과학저술가
*사진.그림 편집/윤복현

* 참고문헌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에 관해」, 이진수,고구려연구회 논문자료, 2003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김성남, 수막새, 2005
「고구려를 다시보자(2) 벽화로 본 고구려」, 이태호, 동아일보, 2004.03.22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 아침, 2007

[음악자료] 아!고구려
성훈 08/03/16 [10:00] 수정 삭제  
  고구려는 고수 고당 전쟁을 통해 그 작전의 위대함이 들어납니다. 특히 방어 작전은 월등합니다. 북경에서 진황도까지 이어져 있는 연산산맥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 지형을 이용한 작전에 매번 중국을 천하통일한 수나라 당나라가 말려 듭니다. 호구 즉 호랑이 아기리 같은 곳에 적을 집어 넣고 한 방에 적을 격퇴시키는 작전이지요.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나 양만춘장군의 안시성 전투가 그것이지요. 즉 방어할 때는 호구작전이고, 공격할 때는 기병을 이용한 치고 빠지는 전법입니다. 중국의 어벙한 장군들은 고구려의 치밀한 이 작전을 감히 흉내도 못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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