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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 논란과 임나일본부 실체

광개토태왕은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키고 나가 일본열도를 정복했다

문화부 | 기사입력 2008/03/20 [13:15]

광개토태왕비 논란과 임나일본부 실체

광개토태왕은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키고 나가 일본열도를 정복했다

문화부 | 입력 : 2008/03/20 [13:15]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중국 지린 성 지안 시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이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고 전하며,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가 1.5 m이고,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는 아직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을 나누어진다.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첫째 부분은 묘비 제 1면 1행에서 6행까지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이다. 묘비 및 연호에 관한 마지막 부분은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과 관련한 비문내용을 보면...() 안의 말은 보충 설명이다.

[395년 기사(영락 5년, 을미년) : 영락(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추정됨) 5년, 그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 6,700 영(營)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며 돌아왔다.

396년 기사(영락 6년, 병신년) : 백잔(百殘. 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에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 이후로 백잔이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 백잔을 치고, 나가 신라 또한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발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중략) , 종고로성, 구천성,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왕이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아신왕)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백 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398년 기사(영락 8년, 무술년) :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의 토곡에 보내 순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으며, 이로부터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했다.

399년 기사(영락 9년, 기해년) :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앞서 396년 기사에서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불렀으므로, 여기서의 노객은 신라 왕인 내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400년 기사(영락 10년, 경자년) :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내용 훼손으로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404년 기사(영락 14년, 갑진년) : 14년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훼손) 늘어선 배 (훼손)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없이 많았다.

407년 기사(영락 17년, 정미년) : 17년 정미년에 보병,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훼손)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개갑(鎧鉀) 1만여 개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자기계를 획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를 격파했다.

410년 기사(영락 20년, 경술년) :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동명성왕)의 속민이었으나 중도에 베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거국적으로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그리고 (훼손) 을 바쳤다. 왕의 은덕이 모든 곳에 미치자 환국하였다. 또 그때에 왕의 교화에 감화되어 관군을 따라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등이 왔다. 왕은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촌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비문내용 중 ‘신묘년조’논란은 영락 6년(396) 기사에 실린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시작된 논란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 부분의 내용은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후에 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기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등장하였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는 위 기사의 주어를 "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이래로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현재 주류,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 역사학자 대부분의 해석이다.


일제가 비문을 훼손했다는 흔적을 뚜렷히 볼 수 있다. 정확한 비문의 해석은 "신묘년이후로 백잔(백제)이 조공을 바치니 아니하니 백잔을 굴복시키고 나가 신라까지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정확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벌였던 백제와 고구려와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해해야만 해석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나아가 이후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가 비문 자체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하였고,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하여,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비문조작설은 부정하면서, 두 가지의 비문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제 공격을 위한 광개토대왕의 정당화작업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민족주의 역사가들에 의한 해석은, 광개토대왕이 본거지인 요동 지방에서 백제의 도성이 있는 한강 지역을 바로 공략하기 위해 수군을 동원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평양과 하평양 논란’이다. 주류 사학계에서는 그동안 현대의 평양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흉노의 전조에서도 초기에 '평양성'을 주요 본거지로 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현대의 평양과 고구려의 평양이 반드시 같을 이유는 없다는 설 역시 제기되고 있다.

영락 9년 기사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엿다. 왕은 하평양을 순시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박영규는 여기서 "王巡下平壤"라는 구절이 "왕이 아래로 내려가 평양을 순시했다."라고는 절대 해석될 수 없다면서, 동천왕이 247년에 도읍지로 정한 평양이 요동 지방에 있으며,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순시한 '하평양'이 현대의 평양이라고 주장하였다.

▲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적통 고구려의 후손들로 천손민족 대한민국 황실을 국가적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도 민족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검토할 문제라고 본다.
 
광개토태왕이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지난 1986년 경상남도 합천군 성산리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수물 일곱개의 거대한 봉분과 천여기가 넘는 소형고분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지역 수장들의 공동무덤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5세기의 고분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철로 만든 갑주류였다. 군사들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견고한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철제 말 투구, 그리고 말에게 입힌 갑옷 조각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유물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부산 복천동 11호분은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지역수장의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도 옥전고분에서 출토된 갑주류와 똑같은 모양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천동 고분에서는 철제투구외에도 철제 목 가리개와 그리고 말 엉덩이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해답을 발견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벽화였다. 벽화속에 그려진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목가리개는 두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정확이 일치했다. 역시 고구려 군사가 타고 있는 말 투구, 꼬리장식도 유물의 모양과 똑 같았다. 이 유물들은 틀림없이 고구려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벽화속의 화살통 장식을 그대로 떼어낸 것처럼 가야의 고분에서 똑같은 무늬의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갑주가 한반도 남부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도립 박물관장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문(勳積碑文)에 나온 서기 400년 경자년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의 남정(南征)에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는냐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는 5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다.그렇다면 당시 신라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충청북도 중원군 입석리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곳에 고구려인들은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희미한 비문 속에 두나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신라토내 당주, 이것은 신라에 주둔해 있는 고구려군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렇게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 백제 정복군주 근초고왕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일본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일본열도는 백제왕족들의 직접 통치지역
 
이번에는 ‘임나 일본부’설에 대해 문제를 논하기로 하자. 먼저 일본을 왜 ‘왜’라고 하는지부터 알아 보면, '일본의 고문서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타난 인명과 씨족명을 보면 천황, 황녀, 황자 등이 위[倭]라는 인명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씨족명(氏族名)으로 "倭"를 쓰는 것은 밝지[百濟]에서 온 위한치[倭漢直]를 중심으로 위화사[倭畵師], 위마사부조[倭馬飼部造], 위군[倭君] 등으로 "倭"를 쓰는 인명이나 씨족명은 모두 천황가(天皇家)와 밝지[百濟]에서 온 씨족들에 한정되어 있다. "倭"라는 글자가 지명(地名)으로 쓰일때는 율령시대의 대위국[大倭國]인 지금의 나라[奈良]현을 가리켰고, 후세의 야마또향(大和鄕)인 지금의 천리(天里)시 등이다.' 倭의 일본식 발음은 와(わ)인데 大和의 "和"도 "倭"와 같이 "와"로 발음된다. 결국 큰 위[大倭]나 큰와[大和]는 다 같은 발음의 같은 뜻이다. 倭= 濊(예-중국식발음은 wei)=倭=于台=上. 大和=대화는 대(大, 큰), 화(와, 倭, WEI, WUI, WAH) = 왜족으로 대동통일(大同統一)을 뜻한다.

일제가 조작한 광개토태왕비문 내용을 보면, “영락대왕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 (내용 훼손으로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

▲  백제문화의 정수 - 백제 향로
[일본서기]의 내용에 근거하여 왜(일본)는 신공황후가 사망한 A.D 247년에 일어난 내란으로 야마대연맹이 와해되자 구태백제는 일본열도를 통치함에 있어 백제왕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맹왕(聯盟王) 통치체제를 버리고 소국분립(小國分立) 통치체제로 일본열도를 직할통치하였다.


이 소국분립 통치체제는 A.D 390년에 백제가 대화 지역에 응신조(應神朝)를 세울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시기 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는 수십 개의 백제계 소국에 각 담로왕(담魯王)을 보내었다. 그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에 일본천황에 관한 역사가 적혀 있지 않고 백제왕에 관한 역사 즉 백제 근구수왕, 근초고왕, 침류왕의 즉위와 사망에 관한 사실이 연도가 120년 인상된 채 신공황후기에 짜깁기 되어 있다.

이는 A.D 247년 신공황후 사망후부터 A.D 390년 응신천황 즉위 시까지 천황공백기를 감추고 천황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응신천황의 즉위시기를 연도를 120년 앞당겨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어 놓았기 때문에 신공황후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 사이에 일어난 사실도 연도를 120년 인상하여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55년(A.D 255년) (근)초고왕 사망(A.D 375년)하다.」[참고:255=375-120.]

「신공황후 56년(A.D 256년) (근)구수왕 즉위(A.D 375년)하다.」[참고: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전 왕이 죽은 다음 해를 다음 왕의 즉위 년도로 보기 때문에 256년으로 적혀 있다.]

「신공황후 64년(A.D 264년) (근)구수왕 사망(A.D 384년)하다.」

「신공황후 65년(A.D 265년) 침류왕 사망(A.D 385년)하다. 왕자 아신(=아화.아방)이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AD 391년 광개토 태왕이 약관 17세의 어린 나이로 태열제에 등극하였는데, 양국에 있어서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지역적 상황과 백제와의 악화된 외교 상황(조부 고국원왕의 죽음)에서 서로 간의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한바탕의 충돌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한반도에 아신 태자와 다시 온 응신 왜왕은 진사왕과의 전쟁보다도 먼저 신라가 조공관계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신라 정벌을 선언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사절을 보내 실성 왕자를 질자로 하여 군신관계를 맺고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 광개토 태왕(이하 호태왕)은 근초고왕 최전성기에 있었던 백제국이 온조계와 비류계간의 왕권 주도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는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정세 판단하에서 신라와의 군사협정을 통해 외교적 명분도 얻게 되자 조부 고국원왕의 복수도 겸해 백제와의 한판 전쟁을 결심한다.

한편, 백제 침류왕의 아들 아신태자는 왜에 같이 있었던 백제 왕족인 응신과 연합해 숙부 진사에게 잃었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진사왕을 공격한다. 결국 아신은 백제의 왕이 되고 응신은 왜왕이 된다. 그러다가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고 아신왕은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태왕에게 항복하고, 응신은 왜로 도망가고 광개토태왕이 정벌을 한다. 차후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응신은 405년에 야마토왜(大和倭)를 세워 일본의 고대국가 기원이 된다. 이 응신이란 인물이 현 일본 국민들이 추앙하고 있는 응신천황이다.

왜(일본)의 응신조(應神朝)는 대화(大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이다. 백제는 A.D 247년에 야마대연맹이 와해된 후 백제왕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맹왕 통치체제를 버리고 소국분립(小國分立) 통치체제로 일본열도를 직할통치하다가 A.D 386년에 고주몽고구려의 태자가 된 담덕(談德)이 온 힘을 집중하여 백제 공격을 준비하자, 이에 다급해진 구태백제는 고주몽고구려 방어에 일본열도왜를 이용하기 위하여 A.D 390년에 대화(大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소국연맹체인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이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혀 있으나, 응신천황기 3년조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기(辰斯王紀) 8년(A.D 392년)조 사실이므로, 응신천황이 즉위한 해는 A.D 390년이다.

「응신천황 3년(일본서기년도 A.D 272년 실제년도 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니),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니), 석천숙니(石川宿니), 목도숙니(木도宿니)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紀角宿니)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이 시기 백제가 응신조(應神朝)를 九州에 세우지 않고 대화 지역에 세운 것은 구태백제가 야마대연맹을 복속시킨 후 백제계 이주민들이 이주 여지가 거의 없는 九州보다 이주 여지가 많은 本州의 이세, 대화 등지로 대량 이주함으로써 이세, 대화 등지가 백제계 이주민들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응신조는 건국 후부터 구태백제를 보좌(補佐)하였는데, 구태백제는 A.D 391년에 응신조 왜 무력을 배경으로 신라를 위협하여 신라왕자 미해(美海)를 인질로 받아 신라를 복속시켰다. 그 후 A.D 399년에 응신조 왜는 구태백제를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가 다음해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고, 그 때부터 A.D 479년까지 대마도에 세워진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았다.

A.D 400년에 광개토왕은 대마도(對馬島)를 점령한 후, 이어서 대화왜(伊), 구주왜(倭) 무리들로부터 항복을 받고,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정(聯政)을 설치하여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는데 이를 임나연정이라 한다. 이 임나연정은 A.D 479년까지 존속하였다.

위 임나연정의 임무는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고, 임나연정 시기 구주왜와 대화왜는 임나연정왕(任那聯政王)에게 복속하였다.
송서(宋書)에 의하면 임나연정의 초대 왕은 찬(讚)이다.

그 뒤 임나연정왕 진(珍)은 송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A.D 443년에 임나연정왕 제(濟)는 송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 작호를 받았고, A.D 451년에 다시 송으로부터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왜국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A.D 462년에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나 반고주몽고구려계가 승리하였다. 이때부터 임나연정은 고주몽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으로 변하였고, 고주몽고구려는 임나연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 해 왕세자 흥(興)이 송(宋)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난 연도가 A.D 464년으로 적혀 있고, 사신을 보낸 상대국이 오국(吳國)으로 적혀 있다. 이 시기는 양자강하류에 송(宋)이 건국되어 있을 시기이고, 송서(宋書)에 왜왕 흥(興)이 송(宋)에 사신을 보낸 연도가 A.D 462년으로 적혀 있으므로,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나 제(濟)가 퇴진하고 왕세자 흥(興)이 즉위한 연도는 A.D 462년이다. 이 시기 일본서기 연도는 실제보다 2년 늦어져 있다.

일본서기에는 A.D 465년에 기소궁숙니(紀小弓宿니) 등이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기소궁숙니 등이 모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사실이 A.D 463년조에 적혀 있다. 이때도 일본서기년도와 실제년도간에 2년 차이가 난다.

A.D 478년에 임나연정왕 무(武)가 송(宋)에 사신을 보내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7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작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하여 송으로부터 백제를 빼고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작호를 받았다.
A.D 479년에 축자(筑紫)의 안치신(安致臣), 마사신(馬飼臣) 등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고주몽고구려를 쳤으나 고주몽고구려 수군에게 패배하였다.

송서(宋書)에는 이때 고주몽고구려 수군(水軍)과 싸운 주역이 무(武)로 적혀 있다. 이때 축자(筑紫)의 안치신(安致臣) 등이 임나연정왕 무(武)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은 A.D 479년까지 구주왜가 임나연정에 복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임나연정은 이 전쟁에 패배한 후 와해되었다.

A.D 502년에 양(梁)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무(武)는 양나라로부터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는 작호(爵號)를 받았다.

무(武)는 임나연정의 마지막 왕이므로, 양서(梁書) 문구를 언뜻 보면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武)가 A.D 502년에 양나라로부터 정동장군 작호를 받은 것은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 A.D 487년에 대마도가 백제에 점령당하였는데, 그 후 A.D 501년에 일어난 백제왕실의 내분으로 백제가 대마도를 돌볼 틈이 없자 무(武)는 그 틈을 타서 A.D 502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정동장군 작호를 받은 것이다.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부터 대마도왜(對馬島倭), 구주왜(九州倭), 대화왜(大和倭)는 각 독립세력이 되었다.

A.D 487년에 대마도(對馬島)의 기생반숙니(紀生磐宿彌)가 고주몽고구려와 통교하여 삼한(三韓)의 왕이 되어 백제의 동로(東路)를 막으려 하다가 패배하여 대마도는 백제에 점령당하였다.

A.D 487년에 대마도를 점령한 백제는 다시 구주왜와 대화왜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대화 지역에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인 인현조(仁賢朝)를 세웠다. 이 인현조도 응신조(應神朝)처럼 백제를 보좌하였다.
 
▲ 일본에는 고대 백제와 일본열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증명하는 수 많은 백제지명들이 존재한다
 
일본은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인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을 가지고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고 해석을 하는데,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의 왕족들이 직접 통치하여 상국 백제와 형제국이나 다름없고, 문명을 전해준 강국 백제를 상국으로 떠 받들고 있는 상황인데, 백제를 지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열도에 일본국을 건국하고 편찬한 [일본서기]
29대 킨메이(欽明) 條에 보면 [임나일본부]에 관련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1) 킨메이(欽明) 2년 7월에는 ‘일본부 하내직이 왜와는 별도로 신라와 통했다.’
2) 킨메이(欽明) 5년 2월에는 ‘일본부는 안라에 대한 왜의 계획을 백제.신라에 가서 들었다.’
3) 킨메이(欽明) 5년 3월에는 ‘일본부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아 오직 그들만을 따른다’
4) 킨메이(欽明) 9년 4월에는 ‘일본부가 안라를 위해 고구려와 내통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즉,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해주는 [대마도]다.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라는 광개토태왕비문 내용은 바로 [대마도]를 포함하여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내용처럼 일본부가 왜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안라국왕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안라국왕]이란 당시 왜(백제계)의 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말로국(末盧國)에서 일기국(一岐國)까지 거리가 천여리, 일기국(一岐國)에서 대마국(對馬國)까지 거리가 천여리, 대마국(對馬國)에서 구야한국(狗邪韓國 : 김해 방면)까지의 거리가 천여리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축자국(筑紫國)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곳은 대마도(對馬島)이다. 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적혀 있는 임나(任那)의 위치(位置)와 일치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본기(欽明天皇本紀)]에는 통틀어 임나(任那)라고 하고 세분(細分)해서는 합해서 10국이라고 적혀 있다.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이므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고대에 대마도(對馬島)에는 10국이 있었다.  

[일본서기]에 보면「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A.D 562년) 춘 정월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일서에 말하였다. 흠명천황 21년(A.D 560년)에 임나가 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고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손국, 임례국 합하여 10국이다. 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二一年任那滅焉總言任那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高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日本書紀 欽明天皇紀 23年條  

임나연정(任那聯政)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 한반도의 백제지역과 신라지역을 복속(服屬)시키고, 복속지(服屬地)를 통제(統制)하기 위하여 A.D 400년에 요지(要地)에 있는 10국으로 만든 연립정부(聯立政府)이다. 이 연정(聯政)의 치소(治所)는 임나(任那:대마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연정(聯政)을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부른다. 대마도(對馬島)를 뜻하는 임나(任那)와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뜻하는 임나(任那)는 의미(意味)가  다르므로 꼭 구별(區別)해야 한다. 

한단고기(古記)에 의하면 영락(永樂) 10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임나(任那:대마도)를 점령한 후 이(伊:대화왜), 왜(倭:구주왜)의 무리는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對馬島)를 점령(占領)한 후 곧 항복(降伏)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마도(對馬島)는 왜(倭) 견제(牽制)에 있어 전략적(戰略的)으로 아주 중요(重要)한 위치(位置)에 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임나(任那:대마도)의 전략적(戰略的) 중요성(重要性)을 알고 임나(任那)에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두고 수군(水軍)을 주둔(駐屯)시켜 왜(倭)와 백제(百濟) 간의 통로(通路)를 통제(統制)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이 설치한 이 임나연정(任那聯政)은 A.D 479년에 멸망하였다.

A.D 501년에 대화왜가 무령왕(武寧王)을 지원하여 동성왕(東城王)을 몰아낸 후부터 대화왜와 백제와의 관계가 역전되어 대화왜는 종전까지 종주국으로 섬기던 백제를 노골적으로 무시하였고, 백제는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A.D 527년에 계체천황(繼體天皇)이 모야신(毛野臣)을 임나(任那)에 보내어 신라에 패한 바 있는 남가라(南加羅)와 록기탄(록己呑)을 회복하여 임나(任那)에 합치고자 하였으나, 구주왜 축자국조반정(筑紫國造磐井)의 방해로 중단하였다.

이는 신라가 구태백제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대마도 내 소국인 남가라, 록기탄을 점령하자 시류(時流)에 민감한 구주왜가 구태백제의 후국(侯國)인 대화왜(大和倭)에서 이탈하여 신라 편에 붙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구주왜는 A.D 522년경부터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백제가 일본열도왜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 후부터 구주왜가 백제나 대화왜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A.D 528년 11월에 계체천황(繼體天皇)은 장군 물부추록화(物部추鹿火)를 보내어 반정(磐井)을 토벌하였다. 이 토벌이 성공한 후 계체천황(繼體天皇)은 추록화(추鹿火)에게 독자적으로 축자(筑紫) 서쪽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 구주왜 정부는 대화왜 정부와 별도로 수(隨), 당(唐)에 사신을 보내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A.D 552년에 백제를 통하여 불교가 전해졌다.

A.D 554년에 흠명천황(欽明天皇)이 백제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화왜(大和倭) 군사를 한반도로 보냈으나 신라에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대화왜(大和倭) 군사가 가라(加良)로 적혀 있다.


A.D 587년에 불교가 수용되었다.

A.D 603年에 12계(階)의 관위(冠位)를 만들었고, A.D 604년에 쇼오토쿠 태자가 17조 헌법을 만들었다.

A.D 607년에 대화왜는 수(隋)에 사신을 보내었고, 같은 해 구주왜도 수(隋)에 사신을 보내었다.

구당서(舊唐書) 일본전(日本傳)에는 왜국전(倭國傳)과 일본전(日本傳)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고 "日本國은 倭國의 別種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수나라가 일본열도왜를 구주왜와 대화왜로 구분하고 있다는 뜻이다.

수서(隋書) 왜국전(倭國傳)을 보면, A.D 607년에 왜왕(倭王) 다리사북고(多利思北孤)가 수황제(隨皇帝)에게 보낸 국서 내용에 "日出處의 천자가 日沒處의 천자에게 서신을 보내노니..후략"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구주왜왕(九州倭王)이 천자(天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구주왜(九州倭)가 대화왜(大和倭)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수서 왜국전에는 왜왕(倭王)의 후궁(後宮)이 6-7백명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구주왜왕의 세력이 강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A.D 646년에 대화왜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하여 중국의 정치 및 경제체제를 도입하였다. 이 대화개신 이후 대화왜(大和倭)는 점차 중앙집권체제로 변하였다.

구주왜는 A.D 648년(貞觀 22年)에 당에 사신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당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중지되었다. 이는 구주왜의 세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  민달천황과 의자대왕 혈통도.  552년 백제는 구주 영토의 지배를 공고히 하여서 성명대왕의 왕자인 민달천황을 구주백제왕으로 내보낸다. 571년 일본을 다스리던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서거하자 민달천황이 구주로부터 건너가서 왜국 천황이 되었다. 민달천황은 이복동생인 추고천황과 결혼하여 일본의 황후로 세웠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에 백제라는 지명을 붙였다. 구주에 이어서 대화까지도 백제와 병합하려는 것이었다.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이 백제왕 선광(善廣)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백제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이는 민달천황이 백제왕가 혈통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그러나 실제 밝혀지는 족보에는 의자대왕의 작은 할아버지가 민달천황이다. 민달천황은 누나카라후토타마시키(渟中倉太珠敷天皇)라고도 하는데 백제 성명대왕의 차자다. 성명대왕의 이름이 명농(明穠)이다. 당시 구주에는 백제 대왕과 왕자들을 위한 둔창(屯倉)이 있었으니 농왕(穠王)의 둔창이 농창(穠倉)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일본말로 누나쿠라(渟中倉)인 것이다.민달천황은 [흠명천황기]에서 552년에 황태자가 되었는데 [민달천황기]에서는 568년에 황태자가 되어 서로 기록이 다르다. 앞에 552년 기록은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으로서 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뒤에 568년 기록은 일본 천황 황태자로 보면 맞다. 그렇다면 568년에 흠명천황은 실제 천황에서 물러난 것이 되고 그때부터 민달천황이 오사카를 통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A.D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A.D 662년에 대화왜가 보낸 백제부흥군마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백제관리와 지배층이 일본열도로 대량 이주하였다. A.D 670년에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었다. A.D 698년부터 구주왜의 연호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로 보아 일본국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A.D 698년경이다. A.D 710년에 나라(奈良)에 대규모인 인위적인 수도를 만들었다. A.D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고, A.D 720년에 한반도와 인연을 끊는 차원에서 열등감을 감추기위해 짝이 맞지 않는 왜곡된 역사를 담고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본래 조선땅이던 대마도와 관련하여『환단고기』에 자고로 구주, 대마도는 삼한에서 나누어 다스린 삼한 분치지역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가 나뉘어 3가라가 되었으며 좌호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 가라는 고구려, 계지 가라는 백제에 속한다 하였다.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와 유사한 고대 일본의 신대문자.고대 일본열도는 도래한 한국인들의 거주지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구주(九州)에는 원래 토착민인 왜(倭)가 살고 있었는데, 단군조선 때는 3조선(한) 중 한반도의 마한(馬汗)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마도,일기도,구주는 왕검조선 때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하였다. 왕검조선 때는 각 한(汗)간의 관할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한(辰汗)이나 번한(番汗)의 관경에 속한 지역에 살던 무리들은 함부로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한 대마도, 일기도, 구주 등지로 이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기왕검조선 때 송화강 유역에 살던 섬야노(陝野奴)가 무리를 이끌고 마한(馬汗) 몰래 구주로 이주하여 천왕(天王)을 칭하였다가 B.C 723년에 왕검조선의 사벌단제가 보낸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가륵단제 무신년(B.C 2173년)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송화강 유역 만주 동부 지방)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에 섬야노(陝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대마도.일기도.구주 지칭)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사벌단제 무오년(B.C 723년)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熊襲:고대에 구주 熊本에 근거지를 둔 나라)을 평정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위 섬야노가 소잔명존(素잔鳴尊)으로, 언파불합이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彦波렴武노草葺不合尊)으로 각 적혀 있고, 소잔명존이 부모 2신 또는 여러 신들에 의하여 천원(天原:소잔명존이 이주했던 구주 熊本 방면 지칭)에서 쫓겨 난 후 위원중국(葦原中國:本州의 山口縣.島根縣.廣島縣 방면. 왕검조선 때 本州에 있는 위원중국은 馬汗의 관경에 속하지 않았다.)으로 가지 못하고 근국(根國:이주하기 전에 살던 나라)으로 갔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임나연정을 설치했던 대마도가 본래 한국땅이라는 사실은 대마도 출신 문장가 강수도 자신이 임나 출신이라 한 적이 있고,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은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으로 고려말기에 국가기강이 크게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웅거하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또 이 황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 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관계로 비유하고 해마다 정초에 내리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해 대마도가 충성을 다해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안 정복은 '대마도는 우리의 부속도서로 신라,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도로 대해왔다.

그리고 <여지승람>에는 옛날 경상도 계림 땅에 예속되었다고 하였으며,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도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하였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증거물이 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벌한 알은 마땅히 속도를 꾸짖은 방책이었다'고 했다.

<증보동국문헌비고>에는 '지금 비록 일본의 폭력으로 그들의 땅에 강제 편제되었으나 본래는 우리나라 동래에 속했던 까닭에 이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의 고사에 많이 있어 아울러 기록한다'고 하고 '섬 안의 남자들의 언어와 부녀자들의 의복이 조선과 같았다.

대마도인들이 왜를 칭할 때는 반드시 일본이라 하였고, 일본인들도 그들을 일본 왜와는 크게 차별하여 대우하였으므로 대마도민 자체가 일본에 예속된 왜로 자처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말 국운이 쇠약한 틈을 타 1869년 소위 「판적 봉환」이라는 정책아래 이즈하라 번으로 편제되었다가 1877년 나가사키 현으로 편입된 대마도가 조선 영토임을 보여주는 지도로는 <소라동천(小羅洞天)>이라는 세계지도와 부속지도인 <동국 조선 총도>, <강원도도>, <경상도도>가 남아 있어 역사의 진실을 고증하고 있다.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13세기 말의 일본 책인 '진대(塵袋)' 제 2권)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
 
다음은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의 관반인 노라가도로가 한 말이다.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1488년 명나라 동월이 황제(영종)의 명을 받아 작성한 `조선팔도총도'에도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자세히 표기돼 있다.
 
일본이 점유한 대마도를 찾기위한 노력은 해방과 함께 시작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하 내각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9일 재차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2월 17일에 열린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도 입법의원 허간용(서북도 관선의원) 외 62명은 대마도를 조선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에 넣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폭주로 연기되다 회기가 종결됨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했다. 정말로 아쉬운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이같은 관점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논리로 대응하자. 역사에 해답이 있다.




성훈 08/03/20 [16:02] 수정 삭제  
  참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삼국(고구려,백제,신라)가 존재할 당시의 왜는 대륙의 남부 광동성과 남지나해상의 섬(대만, 해남도, 필리핀)에 근거를 두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박창범교수에 의해 과학적으로 입증됩니다. 따라서 경상도 가야 지방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로 입증됩니다.
송나라가 왜에게 작위를 내린 것은 왜가 대륙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현 일본열도에 있는 왜와 송이 교류할 이유도 없고, 중국 사서에 숱하게 나오는 왜와 왜구가 현 일본열도에서 갔다는 이론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따라서 저는 사서에 있는 대마도를 대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의 본부는 해남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고대의 대마도와 근세조선시대의 대마도는 다릅니다)
여하튼 이런 잠 이외에는 아주 좋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독자 08/03/21 [05:26] 수정 삭제  
  (송나라가 왜에게 작위를 내린 것은 왜가 대륙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현 일본열도에 있는 왜와 송이 교류할 이유도 없고, 중국 사서에 숱하게 나오는 왜와 왜구가 현 일본열도에서 갔다는 이론은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고대인들은 해상항로에 매우 밝았습니다. 그리고 고대에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국제항로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해상권을 장악했던 백제가 한반도를 상실했다 하여도 일본열도로 나라를 옮긴 이후에도 여전히 그 영향권을 행사했다면 대마국이 대만이라는 주장도 연구해볼만 합니다...또한 대마도와 대만의 공통점은 [일본서기]기록처럼 북쪽이 바다입니다.그런데, 일제시대 당시 동아시아 전역을 유린한 일제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거나 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대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충분히 그 당시에 대마국을 대만이라고 내세웠을 것이고 지금도 주장하지 않겠습니까?.. [일본부]란 용어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당연히 '일본'이란 국호를 정한 백제의 멸망이후 기록내용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안라국에 복속된[일본부]는 대마도일 가능성이 높다 보여집니다. 물론,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은 [광개토태왕비문]까지 조직한 것으로 보아 역시 거짓임은 당연하겠죠..

고대 동아시아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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