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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4) -떠나가는 밀사들(1)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9/01 [16:30]

대한정통사(64) -떠나가는 밀사들(1)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9/01 [16:30]

[플러스코리타임즈=역사 안재세 전문위원]  을사늑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기 위하여 헐버트를 미국에 밀사로 파견함으로써, 미국정부로 하여금 일제를 적극 견제할 수 있도록 요청하기로 한 광무황제는, ‘특명전권’자격을 요구한 헐버트의 의견을 심사숙고한 끝에 단순한 ‘문서전달자’의 자격만 부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가 친서를 소지한 사실이 밝혀지면 간악한 일제는 그를 암살할 것이 뻔했으므로, 공식적인 절차를 요하는 특명전권에 임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헐버트의 안전을 고려하여 취해진 그와 같은 조처가 차후에 또다른 문제를 야기할 줄은 미처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며, 설령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우선은 미국에 밀사를 파견하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에게 보낸 황제의 친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뮤지컬 '밀사'. 촛불처럼 위태로운 대한제국의 한 가운데 선 이위종 열사 재조명     © 편집국

 

“‥1883년 이래 미국과 대한국은 우호적인 수교를 맺어 왔습니다. 대한국은 미국정부와 국민으로부터 호의와 동정의 징표를 많이 받아 왔습니다. 미국사절들은 항상 대한국의 복지와 진보에 대하여 몸소 동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교사들이 파견되어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진보를 아직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외국세력의 정치적 음모 때문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실수 때문입니다.

 

  노일전쟁초기에 일본은 그들에게 우리의 국토와 항구, 그리고 기타 자원을 이용하고, 그들의 육·해군작전을 원활케 하는 동맹관계의 수립을 요구했습니다. 그 댓가로 일본은 대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복리와 존엄성을 보장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요구를 따랐고 우리의 의무에 충실했으며 우리가 약속한 바를 모두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약 러시아가 승리했더라면 우리가 일본의 동맹국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러시아가 대한국을 점령·합병했을지도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그 조약에 명시된 자기들의 입장을 포기할 것을 제안하면서 대한국의 보호통치를 선언했는데, 이는 1904년의 조약에 담긴 그들의 약속을 전면적으로 파기하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우리가 간청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국 국민을 위해서입니다. 노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들을 기꺼이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이 필요한 개혁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전반적으로 생활조건을 향상시켜 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순수한 의미의 개혁이 시도되지 않았으며, 우리 국민들이 속고만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일본의 보호통치가 초래할 가장 치명적인 폐해는 대한국인들이 생활개선을 위한 모든 의욕을 잃게 되리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다시 독립을 찾게 되리라는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고, 그 과정을 견디게 만들 수 있는 민족감정의 박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민족이 사라지게 되면 절망만이 남을 것이며, 일본과 손을 잡고 충심으로 그리고 기꺼이 일하는 대신에 지난날의 증오만이 강화될 것이며, 의심과 원한만이 초래될 것입니다.

 

대통령각하!

  그러한 문제에는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들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 추진력이며, 개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민족간에 있어서도 친절·동정·관용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각하의 생애의 특징이 되었던 그 넓은 아량과 냉철한 판단으로 이 문제를 유념하시고, 일의 무거움을 따지시어 이토록 어려운 시대에 살아 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각하께서 조리있게 도와 주실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조국이기도 한 미국의 ‘양심’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헐버트는, 광무황제로부터 위임받은 대한국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주한미국공사 모르간에게 협조를 구해서, 외교우편랑 편으로 친서를 발송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 조치는 그로서는 결정적인 실수가 되고 말았으니, 루즈벨트와 마찬가지로 ‘친일파’인 모르간은 그러한 사실을 미국무성에 보고하면서 헐버트를 ‘한국에 편향된 인물’로 기술함으로써 미국무성으로 하여금 헐버트를 경계토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친서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된 미국무성은 오히려 친서의 접수를 지연시키면서 일제가 늑약을 성립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는 작태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랑스러운 조국’의 속셈을 알 길 없었던 헐버트가 워싱턴에 도착한 날은 11월 17일이었고, 그 시간에 대한국에서는 일제의 강압하에 늑약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헐버트는 곧 친서를 접수시키려 했지만 국무성관리들은 바쁘다고 핑계대면서 수일간이나 회신을 미루었다. 다급해진 헐버트가 직접 루즈벨트를 집무실로 찾아갔으나 비서는 ‘국무성을 통해서 공식 외교교섭을 하라’고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미국무성장관인 루트와 접견이 이루어진 것은 루트가 이미 늑약체결이 이루어졌음을 일제로부터 연락받은 후였다. 미국의 협조를 간절히 기대하던 대한국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한 채 미국무성은 11월 24일에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하도록 전문을 보내는 한편 주미대한국공사 김 윤정에게도 그 사실을 통보하였다(주미대한공사관은 이 완용의 훈령에 따라서 12월 16일에 미국측에 철수를 통보하게 됨). 교활한 루즈벨트는 이미 11월 25일 전에 황제의 친서를 읽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25일자로 루트에게 ‘협조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었는데, 루트는 같은 날 같은 내용을 헐버트에게 통보했다.

 

  한편 미국의 협조를 간절히 기대하던 황제는 늑약이 기어코 강제되자 즉각 그것이 무효임을 세계 각국에 밝히기 위해서 11월 26일에 헐버트에게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발송시켰다.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아래 최근 한일 양국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바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산동성의 지부에서 타전된 그 긴급전문에 의하여 새로운 임무를 받은 헐버트는 이 전문을 12월 11일에 국무성차관에게 전달했지만 이미 ‘국제정의를 포기한’ 미국측에서는 이것마저 묵살해버렸다. 헐버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나중에 다음과 같은 회고록을 남긴 바가 있다.

 

“나는 (미국)대통령이 (광무황제의) 친서를 열렬히 환영할 것으로 추측했기 때문에 친서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회답은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여러가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으나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친서를 가지고 국무성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바빠서 만나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대한국이 사경에 직면하여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한미양국은 수호조약의 약속이 있다는 것과 양국의 공사관이 서울과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얼마 후 나는 이런 조치가 단순한 부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 황제친서의 거부는 분명히 미리 계획된 것으로 여겨졌다.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었다. 국무성당국자로부터 내일 오라는 말을 듣고 이튿날 다시 찾아갔으나, ‘바쁘니까 내일 오라’고 거절당했다. 나는 백악관으로 달려가서 면회를 청했다. 그러자 (대통령의)비서가 나와서 단도직입적으로 그 친서의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국무성에 가서 적당히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또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내가 면회허가를 받은 전 날, 행정부는 대한국의 조정과 백성들은 일본정치에 대하여 만족하고 있다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성명서를 접수하였다. 황제의 친서가 아직 행정부에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은 이미 행정부가 충분히 알고 있는 처지였다. 그리고 주한 미국공사관에는 철수명령을 타전하고, 대한국의 조정과는 일체의 통신연락을 두절해 버렸다. 이런 일이 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나에게 면회가 허가되었던 것이다..”

 

  황제는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한 이외에 주불공사 민 영찬에게도 ‘미국으로 급히 건너 가서 외교교섭을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밀 훈령을 내린 바 있었다. 황명을 받들고 그 즉시 미국으로 건너 간 민공사는 12월 7일에 자신에게는 ‘특명전권’자격이 없음을 솔직히 통고하면서 ‘황제의 뜻을 전달하고자’ 루트와의 회담을 신청하였다. 그에 대하여 루트는 주미대한공사관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지 3일만인 12월 19일자로 답신을 보내어 ‘어떠한 협조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통보하였으며, 친절하게도 같은 통보를 일본공사에게도 따로 보내었다.

 

  이리하여 헐버트와 민 영찬을 통하여 전개되었던 대미교섭은 미국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며, 그래도 ‘정의로운 미국’이기만을 철석같이 믿고 계셨던 광무황제께는 완전히 고립무원에 빠지는 듯한 절망감만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대한국 측의 협조요청을 거부한 미국 측에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즉, 미국측의 공식입장은 우선 헐버트나 민 영찬공사가 황제의 특명전권 위임없이 ‘비공식적으로’ 외교교섭을 벌이려 했고, 일본에 대해서 비밀로 해달라는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또한 일본과 이미 체결한 4237년(서1904) 2월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하여 대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보호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4238년(서1905) 11월 17일에 양국간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일본 측에 ‘자발적으로’ 이양되었으므로, 한미수호조약상의 ‘선위조처’조항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나중에 유수한 국제법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그러한 미국측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아전인수격의 해석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의 비밀협약(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을 때 ‘전권을 위임받은 바 없는’ 육군성장관 태프트로 하여금 역시 일본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바 없는’ 일본수상 가쓰라와의 밀약을 성사시킬 임무를 수행케 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들의 ‘자격없는 관리’들의 비밀외교는 인정하고, 대한국 측의 같은 노력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미수호조약에 의거한 미국의 우호적 태도에 기대를 걸었던 대한국인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단기4238년(서1905) 12월 4일까지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공사가,

 

“열강들의 모종의 개입을 기대했던 대한국인들은 쓰디쓴 분루를 삼키고 있다.”

라고 한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다.

 

  헐버트와 민 영찬을 통한 대미교섭에 별다른 진전이 없게 되자 뭔가 일이 뒤틀려져 버린 것을 직감하신 황제는 곧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통하여 새로운 외교교섭을 시도했다. 알렌은 일제의 침략노선에 비교적 비판적이었고, 대한국의 독립주권을 인정하는 데 지속적인 호의를 보여주고 있었으므로, 미국과의 외교교섭에는 그가 적격자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즉 황제는 알렌이 노일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4233년(서1900)에 황제에게 ‘대한국의 독립이 위협당하면 미국과 기타 조약국들이 중재(仲裁:by their good offices)를 통해서 대한국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한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한 애매한 외교적 용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마치 미국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서 대한국의 독립을 지켜줄 것처럼 해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국으로서는 노일전쟁시에도 미국정부를 신뢰하고 있던 관계로 중립선언을 한 후 일단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신뢰는 결코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일을 진행해야만 하는 관계로 알렌에게도 밀사를 통하여 밀지를 내렸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서술된 또 하나의 밀지는 4238년(서1905) 11월 22일과 30일 사이에 미국회사(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의 서울지점 소속 변호사인 엘리오트에게 전달되었다. 밀지를 받은 엘리오트는 11월 30일에 서울을 떠나서 상해로 가서 거기에 체류하고 있던 사주(社主)인 콜브란에게 밀지를 하명받은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들은 의논을 거쳐서 샌프란시스코의 본사에 있는 동업자 보스트윅에게 암호전문을 발송하여 그 밀지를 전달하기로 했고, 전문으로 발송이 불가능한 자세한 내용을 적은 서신과 다음과 같은 몇가지 주요문서들을 보스트윅에게 전달하였다.

 

1. 루트에게 보내는 박 제순 외부대신 명의의 협조요청 서한 사본

2. 황제의 밀사가 구술한 을사늑약 체결 전말의 기록

3.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공사관에 보내는 암호 훈령문

4. 황제의 어새가 찍힌 백지(각국 주재공관에 보내어 암호훈령에 적힌 늑약에 대한 황제의 공식입장을 한문으로 적어 친서를 만들어서 각국의 국가원수에게 전달할 때 사용하도록 만든 문서) 등

 

  밀명을 띈 엘리오트와 콜브란은 곧 일본 고베로 건너 가서 ‘미국인’에게 그 문서들을 모두 전달하였으며, 문서를 전달받은 ‘미국인’은 다음 해 1월 4일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보스트윅에게 그 문서들을 직접 전달하였다. 그 문서들 중에서 특히 외부대신 박 제순이 ‘황제의 명에 의하여 보낸 서한’임을 밝힌 서신은 조약에 사용된 문구인 ‘억압과 불의’를 들면서 그간의 일제침략상을 상세히 밝혀 대한국이 당한 주권침해상태를 알리고 ‘선위조처’를 요청했던 것이다(그러나 이들 문서들은 적어도 미국공사관에는 전달되지 못했고 다른 나라 공사관에서도 접수되었는지의 여부는 잘 안 알려지고 있다). 상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전송된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는 영향력과 명망이 있는 법률가를 고용하여 최근 사태의 해결에 미국정부의 조력을 얻고자 희망하신다. 일본은 지난 달 대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설정하려고 부당하고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였고, 또 의정부나 황실을 매수하였다. 따라서 그 조약이란 황제나 제국신민의 허가를 얻지 않은 것인 바 불법이다. 나아가서 황제께서는 열강이 이 사태의 진상을 즉각 조사할 것과 미국,영국,일본의 공동보호를 요청하고자 하신다. 공동보호는 일본정부가 단독제안한 보호권을 대신할 것이다. 황제와 신민은 세 나라의 공동보호에 동의할 것이다.

 

  보스트윅은 알렌과 협력하여 영향력있는 법적 조력을 구하도록 하명받았다. 본사 한성지점으로부터, 황제께서 부담하실, 소요비용 1만불을 보스트윅에게 송금할 것이다. 서울지점(엘리오트와 셀던)은 사태 전모를 명백히 밝힐 문서를 작성하여 보스트윅에게 보낼 것이다. 상해에서 수신된 전보와 같이 며칠 전에 보낸 문서는 이미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 전문을 받는 즉시 보스트윅은 알렌 전 공사와 상의하여 조력할 것을 또한 하명받았다. 그가 동부로 갈 수 없으면 알렌을 샌프란시스코로 불러야 한다. 알렌과 보스트윅의 조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스트윅으로부터 서한을 전달받은 알렌은 황제의 밀지대로 곧 임무에 착수하였으나 ‘영향력과 명망이 있는’ 변호사는 선뜻 나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변호사에게 지급될 보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가나 법률가 중에서 루즈벨트의 의지에 반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용기있고 정의로운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알렌이 해임되었던 것도 그가 루즈벨트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던 것과 무관하지 않음). 4개월간 밀명을 추진하던 알렌은 마침내 4239년(서1906) 2월 19일자로 황제에게 ‘부속문서의 대부분이 법률적 효력이 없어서 사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서 ‘밀지봉행이 불가능함’을 알리고 그동안 사용했던 비용 500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모두 되돌려 보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알렌은 일단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알렌이 유독 미국대통령에게 전달될 친서만 일본에 알리지 말고 비밀리에 전달해달라는 요청에 의혹을 품은데다가, 만일 실패할 경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령 그가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해서 미국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사되었을 가능성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으며, 황제의 뜻대로 ‘청문회’가 열렸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영될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또한 그처럼 미국이 침묵할 때 다른 나라들이라고 별다른 조처를 취할 가능성도 없었다. 이리하여 광무황제가 미국인들을 믿고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비밀 외교교섭도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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