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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성공하면 ‘자유’, 실패하면 ‘죽음’

[증언] 탈북자 군인 일가족 사선(死線)을 넘나든 필사의 北 탈출記

임은향 기자 | 기사입력 2008/03/24 [00:59]

[충격]성공하면 ‘자유’, 실패하면 ‘죽음’

[증언] 탈북자 군인 일가족 사선(死線)을 넘나든 필사의 北 탈출記

임은향 기자 | 입력 : 2008/03/24 [00:59]
“독한 술 먹여 아들 잠재우고,
아내에겐 독극물 지니게 했다“

박씨 “38선 넘는데 6년…눈만 감으면 온통 머릿속엔 탈북생각뿐”
北 주민들, 남한은 살아서 못가면 죽어서라도 가고 싶은 희망의 땅


시사주간지 <사건의내막>은 지난 510호에서 북한 인민군 간부 출신 탈북자 두 명의 증언을 통해 베일에 가려졌던 북한의 실상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이들 탈북자들의 증언대로라면 사회주의라는 미명 아래 북한 주민들의 존재나 인권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60년 동안 오로지 군사시설 확충과 유지를 위해 모든 체제가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1990년도 전후로 살길이 막막해진 북한 주민들이 살아온 터전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20년째 수많은 탈북자들이 제3국을 거쳐 또는 38선을 가로질러 목숨을 건 한국행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북한 고위지도층 인사들의 탈북과 망명이 잇따르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안한 현실을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내막>은 전 인민군 대위 출신 박명호(44)씨 일가족 4명이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기까지의 긴박했던 25시간의 리얼스토리를 생생하게 들어봤다.

“어린 아들의 손에 단도(短刀)를 두 자루씩 쥐여줬다. 아내에겐 독극물을 지니게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아들과 나는 끝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고 아내는 북한 경비정에 발각되는 즉시 자결하기로 한 것이다.”

박 대위는 신라 병사들의 손에 처자식이 죽임을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어 직접 목숨을 거두고 전장으로 향했던 계백장군의 일화를 떠올리며 당시 자신도 같은 심정이었다고 피력했다. 탈북 당시를 회상하던 그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맴돌았고, 우리는 어느새 2년 전 황해남도 옹진군 서해리의 해안가로 향해 있었다.

성공하면 ‘자유’, 실패하면 ‘죽음’

2006년 4월25일 밤 12시가 가까운 시각, 박 대위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배에 올랐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6시간 가량을 달렸을까, 날이 밝아오면서 눈앞에 경비정이 발견됐다. 박 대위 일가족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단 몇 초 사이에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는 그는 ‘일단 가족을 살리고 보자’는 결단으로 배를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악몽 같았던 그날의 탈북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했다.

약 한 달 후, 기다리던 안개가 짙게 끼기 시작했다. 쉽게 걷힐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박 대위는, 예전처럼 바다 위에서 날이 밝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낮에 탈북을 감행하기로 했다.

5월24일 오후 1시, 점심시간에 노동자들이 모두 식사를 하러 간 사이 해안가는 고요했다. 박 대위 일가족은 또다시 준비된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두 아들에게 잠수복을 입혔다. 발각될 시, 두 아들을 바다에 던지고 자신과 아내가 배로 그들을 유인해 최악의 경우 아이들만은 살리고자 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배에 올라 한 시간을 달렸을까, 전날 수리한 부분에 이상이 생겼는지 배에 조금씩 물이 차기 시작했다. 배를 운전하던 박 대위는 큰아들에게 물을 퍼내게 하고, 눈이 좋은 아내를 뱃머리에 세워 사방을 살피게 했다. 새파랗게 겁에 질려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막내를 본 박 대위는 술독을 가져와 독한 술을 한 그릇 떠 막내에게 먹게 했다. 당시 14살이었던 막내아들은 술을 받아 마시고 12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안개를 뚫고 어디선가 큰 배가 나타났다. 단속함대였다. 물을 퍼내던 큰아들은 사지가 마비된 듯 얼어버렸고, 아내는 독극물 뚜껑을 열려고 했다. 박 대위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단속정이 약 500m 떨어진 배를 먼저 단속하던 틈을 타 최고 속력으로 주행했다. 재빨리 암초 뒤에 숨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 극도의 긴장을 달랬다. 그리고 망망대해에서 나침반 바늘을 180도에 맞췄다.

다시 항해가 시작됐다. 아내가 겁에 질렸는지 눈앞에 시커먼 물체만 나타나면 방향을 돌리라고 손짓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반복됐다. 박 대위는 초조함을 이겨내고자 출발하면서부터 10kg 가량의 술독을 들이켰으나 전혀 취하지 않았다. 북쪽과 멀어질수록 파도는 점점 거칠어졌고 생각지 못한 위기들이 닥쳐올수록 삶에 대한 희망마저 점차 사라져갔다.

나침반에 의지한 채 달려오다 새벽 2시경, 막내가 깨어났다. 막내는 어두운 바다를 두리번거리더니 ‘남쪽바다’라고 외쳤다. 박 대위는 술이 덜 깬 막내가 잠결에 헛소리를 한 줄 알았다. 그러나 바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흔적들을 보고나서 그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38선을 넘어 꿈에 그리던 남쪽에 도달한 것이다. 4명의 가족은 북을 떠나 14시간 만에 비로소 서로를 마주봤다. 박 대위는 나침반 바늘이 140도를 향하도록 힘차게 방향을 꺾었다.

시간이 흘러 날이 밝아올 무렵, 아내의 눈앞에 남쪽 해군함이 발견됐다. 박 대위는 아내의 손짓에 따라 재빨리 커다란 암초 뒤로 배를 숨겼고 시동을 끈 채 숨을 죽였다. 해군에게 발견되면 남한 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그대로 북송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위기를 모면하고 오전 11시, 나침반 바늘이 130도를 가리켰다. 암초들이 많아질수록 육지와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꼈다. 서서히 시동을 끈 채 노를 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탈북 24시간 만인 5월25일 낮 1시, 멀리 희미하게 산봉우리 하나가 보였다. 아내가 가판대에서 급하게 내려오더니 “산에 나무가 많은 걸 보니 남쪽 섬이 분명해요”라고 말했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배를 움직여 섬 뒤쪽에 도달했다. 그때, 주위를 살피던 큰아들이 ‘이상한 괴물이 있다’고 속삭였다. 섬을 올려다보니 푸른 풀밭에 머리에 뿔이 난 검정색 개가 뛰어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박 대위는 “나중에 알고 보니 흑염소였지만 북한에는 흑염소가 없다보니 당시 그것이 뭔지 알 길이 없었다”며 웃어보였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배가 육지에 닿자 일가족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박 대위는 ‘저 괴물이 뭔지는 모르나 덩치가 작아서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을 육지로 올려 보냈다.

배고픔에 지친 큰아들이 밥을 지으려는 듯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우려 했다. 박 대위는 연기가 나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판단, 급하게 막아섰다. 그리고 20년 간 군 생활을 해왔던 것을 바탕으로 한국 군인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해안선을 이용해 모든 경계를 뚫고 38선을 넘어왔으니 남쪽 해군들이 자신들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밥을 지어 먹다 육지에서 걸리면 육군 역시 곤란해져 자신들을 질타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쪽에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일단 다시 배에 올라 잡히더라도 배에 있다가 잡히자고 가족을 설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섬 주변에 인적이 없어 발각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박 대위는 가족들을 배에 남겨둔 채 혼자 육지에 올라 사람을 찾았다. 노인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북한에서 배운 ‘남조선 사람을 만났을 때 행동지침서’대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바이’ 대신 ‘어르신’이라는 남한 말을 구사했다. “어르신, 여기가 어딥니까”하고 묻자 노인은 이상한 행색 때문인지 대답하지 않고 아래위를 훑어봤다.

박 대위는 혹시나 노인이 자신을 간첩이라고 의심할까봐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가족들과 여행을 하다 떠내려 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어딘지만 알려주세요.” 그러자 노인은 배 쪽으로 가 가족들을 확인했다.

노인은 그제서야 경계를 풀며 “여기는 OO도라네. 대한민국, XX시, **군, OO도!”라고 또박또박 큰소리로 말해줬다.

순간, 배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육지로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 다 같이 눈물을 쏟으며 ‘만세’를 외쳤다. 박 대위는 “그때 ‘만세’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고,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며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알고 보니 그 노인은 마을 이장이었고 박 대위의 행색을 보고서 이미 북쪽에서 온 것을 눈치 챈 듯 보였다. 박 대위가 이장에게 북에서 왔음을 시인하면서 경찰에 신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멀리서 오토바이를 탄 경찰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박 대위에게 어떤 경위로 남으로 오게 됐는지, 무기 소지 여부 등을 묻고 해군에 연락을 취했다.

해군이 도착하기 전, 이장은 마을사람들을 불러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게 하고 근처 식당으로 안내했다. 따뜻한 밥과 국을 대접받고 난 후 해경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반가울 리 만무했던 해경들은 예상대로 난감해하며 연행해갔고, 국정원을 거쳐 마침내 자유의 땅에 정착하게 됐다.

박 대위 일가족의 탈북과정은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자유에 대한 갈망, 과감한 시도, 모험과 가족애, 생사의 갈림, 위기, 스릴과 긴장, 그리고 해피엔딩. 다행스럽게도 인간다운 삶을 찾아 나선 그들의 모험 끝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탈북을 시도하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이 모두 자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제3국이 아닌 38선을 선택했을 때, 북한군에 붙잡히거나 강제북송될 시 총살을 피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수많은 탈북자들이 강제북송 되어 고초를 겪었다.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넘어가자’는 움직임이 있을 정도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지금과 달리 살 길이 열릴 것이니 조금 더 참다가 가자’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형식적인 관계유지 차원에서 겉도는 대북지원이 아닌, 북한주민들의 인권확보를 위한 노력이 보다 절실하다고 박씨는 거듭 강조했다.

“울창한 숲을 보고, 
굶어죽지 않겠구나 생각”


박명호씨는 OO도 마을사람들을 만났을 당시 재미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불안함과 배고픔에 지친 박씨 일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들을 식당으로 데리고 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자 아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배로 달려갔다는 것. 그러고는 2kg 정도의 쌀을 어깨에 지고 나타났다. 북한은 밥을 얻어먹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난 후 쌀을 지불하는 원칙이 있었기에 남한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내가 고마운 마음에 배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쌀을 가져온 것. 마을사람들과 박씨 일가는 서로를 마주보고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다음은 박명호씨의 일문일답.

기자 : 북한은 어렸을 때부터 세뇌교육을 통해 남한에 대한 의식이 확고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모두 이끌고 탈북을 감행했던 무슨 계기가 있었을 텐데.

박 대위 : 2000년도로 기억한다. 북한은 다 같이 먹지를 못해 힘들 때였는데 우연히 남한 방송을 본 적 있다. 남한에서 전국을 돌며 주민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상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에서 본 남한의 주민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순간 ‘저곳이 남조선이라면 내가 알던 곳과 너무 다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무대 뒤로 산을 봤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산에 갈 때 삽이나 톱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 잘라서 쓸 나무란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괭이를 가지고 가 남아있는 나무뿌리라도 캐서 겨우 살아가곤 한다. 그때 결심했다.


‘남조선으로 가자. 저곳으로 가면 내 식구들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산에서 움막을 짓고 나무로 땔감을 하며 밭농사를 지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겠다’고. 하지만 아내가 반대했다. 도망가다 공안당국에 걸리면 다 같이 죽을 텐데 왜 그런 모험을 하려 하냐며, 굶어 죽어도 고국에서 죽고 싶다고 나를 막았다. 아내를 설득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지난 6년 동안 눈만 감으면 ‘탈출’을 소재로 한 영화 한 편을 썼다. 내 머릿속 영화의 주인공은 제대로 된 삶과 자유를 위해 죽음을 감수했고 어떤 경로에서든 가족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기자 : 북한의 세뇌교육에 대해 궁금하다. 남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구체적인 사건이 있다면.

박 대위 : ‘남조선은 생지옥이다’고 교육받았고 40년간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80년대 초반이었다. ‘남조선에서 배고픈 주민들이 대거 모여 폭동을 일으켰다’며 북한 당국이 평소 끊어놓았던 전기까지 공급해 텔레비전을 보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이 볼 때 남한의 군대가 젊은 노동자와 여성, 노인들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때리거나 연행해갔고, 배고프다며 우는 아이들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북한 당국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남조선은 생지옥 그 자체였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방송을 몇날 며칠 반복해서 보고 있자니 조금씩 이상한 것을 느꼈다. 노동자들의 옷이 너무 말끔했고 배고파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기엔 노동자들의 얼굴에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으며, 잘 닦인 길과 차들이 우리가 알던 남조선의 실상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뒤늦게 방영을 중단했고 일부 처참한 사진들만 공개했다. 사실, 그때 이미 주민들은 남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기 시작했고 하나 둘 독재정권을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 때 남한에 대한 환상이 현실이었음을 깨닫고 자유와 희망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자 : 아까 ‘남조선 사람을 만났을 때 행동지침서’가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박 대위 :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을 통해 남한사람들과 북한 주민들의 접촉이 생기자 당국에서 펴낸 책이다. 혹시라도 남쪽의 기자나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 스스로 생각해서 답하지 말고 그 지침서대로 대답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양의 아파트는 보이는 면만 말끔하게 칠해놓고 뒤쪽은 타일이 덕지덕지 붙은 채 지저분하다. 그것을 보고 남한 사람들이 ‘북한 아파트는 왜 보이는 한쪽만 칠해놓고 안 보이는 곳은 저러냐’고 물으면 ‘동무는 왜 앞에만 넥타이를 매고 뒤로는 안 맵니까. 당연히 보이는 곳이 앞쪽이니 단장을 잘하는 것이고 뒤는 신경을 덜 쓰는 게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는 게 정답이다.(웃음)

기자 : 탈북하다 북송되면 어떤 고초를 겪게 되나.

박 대위 : 시기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 보위부로 끌려가 3달 간 열물(쓸개즙)을 토할 때까지 조사를 받는다. 남한 사람과 주고받은 대화부터 숨소리 한 번 낸 것까지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끝나면 강연회에 끌려 다닌다. 북한 당국에서 늘어나는 탈북자들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탈북자들에게 강연을 시킨다.

‘남한 정부는 탈북자를 안받아준다. 다시 북송시키니 나처럼 괜히 탈북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시기를 잘못 만나거나 죄질이 나쁠 때는 시범게임을 당한다. 쉬운 말로 본보기가 되는 것인데, ‘가족단위로 승선할 수 없다’는 선박단속법을 지키지 않거나 중요한 규정을 어기면서 탈북을 계속 시도하면 본보기용으로 공개처형을 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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