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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 다큐물 "제4의 제국"의 착오!

[역사 칼럼] KBS 1TV 역사스페셜< 제4의 제국>을 보고나서...

홍순주 위원 | 기사입력 2008/03/24 [14:45]

KBS 역사 다큐물 "제4의 제국"의 착오!

[역사 칼럼] KBS 1TV 역사스페셜< 제4의 제국>을 보고나서...

홍순주 위원 | 입력 : 2008/03/24 [14:45]
▲  최인호 작가가 쓴 제4의 제국 책표지    © 플러스코리아
최근 KBS에서는 한`일 고대사의 연결고리를 파헤치는 시도로 김해시의 후원으로 최인호 작가와 함께 <제 4의 제국> 역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광개토 태왕과 가야계 인물로 추정한 응신(일본서기 제 15대 천황)과의 정치 군사적 관계를 TV 방송 최초로 다룬 까닭에 화제를 불러 모을 수 있는 획기적인 시도이었다. 한편 TV 방영 이전에 고교 선배 되시는 최인호의 역사 소설 <제 4의 제국>을 읽으면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있었던 가야 제국의 실체에 관하여 뜻깊은 수준의 역사 및 유물에 관한 지식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를 세운 고대 민족이 일본인이 표현하는 도래인이든 동경대 에가미 교수가 주장했던 북방 기미 민족설이든지 간에 최종적으로 AD 4C말에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침공으로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쫓겨 간 고대 한국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국내 사학계에서는 식민사학의 여파로 연구가 터부시되어 언급조차 안돼왔고 TV 등 언론 방송에서도 취급조차 안되다가 갑자기 역사 학자도 아닌 소설 작가를 통해서 한일 고대 역사의 의문을 밝히려는 시도를 왜 이제서야 시도하려 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도 들었다. 

왜냐하면 1974년에 조선일보 역사 칼럼에서는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제목으로 김성호 선생이 위의 광개토 태왕의 백제 침공에 의한 비류백제계 응신의 왜열도 도피 및 야먀토 왜국의 건립의 역사적 내용을 국내 최초로 광개토 태왕 비문 해석을 통해 이미 이론적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인 회장으로 봉사하는 '잃어버린 한국 고대사 연구회'에서는 2003년 9월에 교육인적자원부의 후원을 받아 <고대한일 역사전개의 올바른 방향성 검토>라는 주제로 위의 내용을 가지고 학술대회를 치른 바 있으나 중앙일보 등 몇개 신문을 제외하고 언론에서 주요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학술 대회에서 본인은 기조논문에서 그간 30여 년 연구해서 독자적으로 밝힌 역사적 사실을 발표한 바 있었는데, 한 개의 백제국 내에서 북부여(해모수 계열) 온조 백제계와 졸본 부여(우태와 소서노 계열) 비류 백제계의 양 세력 혈통 간 초기 왕권 주도권 과정에서 심한 갈등과 쟁취적 역사적 사건이 있었음을 파악하였다.

특히 온조계 제 13대 근초고왕이 선왕인 비류계 제 12대 계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탈취하였을 때(중국 사서에서는 당태종이 대륙백제의 역사를 말살 시도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모용수가 세운 전연이 부여족을 침략한 기사로 위장), 계왕의 후손인 진정 및 응신 등 비류계 백제 세력이 대륙 백제를 장악한 근초고왕에게 밀려 AD 350년경을 전후로 하여 한반도로 도피해 들어와 공주를 중심으로 전남 및 가야 지방을 석권한 역사적 사실과 계왕의 친손자인 응신이 후일 AD 396년 광개토 태왕의 침공에 밀려 왜열도 근기지역으로 도피해서 야마토 왜(大和倭)를 세워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의 천황으로 나오는 사실 (기존 사학계에서는 대륙백제와 일본으로 간 비류 백제를 인정하지 않아 한반도에 있었던 온조 백제국 하나만을 인정하여 고대 비류계 백제인들이 왜열도로 망명해서 일본의 고대 국가인 야마토 왜를 세운 사실은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현 국내 사학계에서 이를 금기시 한다)등의 연구 결과를 주장한 바 있으며 그후 이를 문화 콘텐츠로 공론화 , 대중화하기 위하여 광개토 태왕 관련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한 있다. 

최인호 작가의 소설 제4의 제국과 역사 닥큐 방송을 보고 위의 김성호 선생의 비류 백제설과의 차이점을 지적해보면 먼저 일본 야마토 왜국을 오사카, 나라 등지에 세웠던 응신 천황이 최인호 작가의 경우 제 4의 제국 가야인으로 나오는 반면에 김성호 선생은 졸본 부여계 비류 백제인으로 보고 있고, 왜열도로 도피하는 역사상의 시기도 전자는 AD 400년의 종발성 전투로 보는 반면 후자는 AD 396년(광개토 비문 병신년 기사)에 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으로 기습하는 웅진성(현 공주) 전투로 보고있다.

또한 양자의 공통적인 인식은 일본 왜열도로 도피 이주해 간 고대 도래인은 중국 대륙에서 시작되어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 지방을 점거하고 있다가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침공을 받고 일본으로 도망 간 한국계 기마민족이라는 점에 있다.

한편, 제 4의 제국 소설을 읽어보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일본으로 약 일백만 명의 가야인이 왜열도 큐슈로 이동해 간 것을 밝혔고 그 역사적 증거로 김해 지방의 대성동 고분 군을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교수의 기마 민족 이동설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대성동 13호 고분의 주인공이 왜열도 오사카 근기 지방까지 진출하였던 숭신이라는 가야계 인물이라고 추정을 해 놓은 것으로 에가미 교수는 숭신을 AD 4C 말 응신세력이 왜열도로 가기전 AD 4C 초에 이미 이주해 들어 간 가야계 천손 민족으로 보았으며 일본서기에서는 외래 정복왕인 제 10대 숭신(崇神) 천황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역사 닥큐에서는 몇가지 역사적 의문점이 도출되는데 첫번째로 AD 400년 고구려 광개토 태왕이 임나 종발성에 있었던 가야 왜 연합군을 격파한 역사적 사건 이전에 무슨 이유로 대성동 고분의 주인공 가야계 숭신 왕은 왜열도로 이주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고,

두번째로는 가야 민족 이동의 주된 원인으로 여기에서는 고구려 군의 가야 침입을 주목하지만 만일 가야 민족 이동을 주도했다고 하는 인물인 응신(應神)이 애초부터 한반도 현지에서 살았던 토박이 가야인이었다고 간주한다면,

동경대 에가미 교수가 주장하는 대륙으로 부터 한반도로 내려와서 가야를 정복하고 왜열로 진출한 북방 기마 민족의 정체는 누구이며 고분 안에 나타나는 부여식 후장과 순장 풍습의 형체와 북방 민족 계열의 거대한 신체를 지닌 왕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닥큐만 본다면 북방 민족은 고구려로만 볼 수 밖에 없지만 고분 안에 피장된 순장 등의 내용물을 검토한다면 이들은 중국 대륙에 있었던 부여인들이었으며 AD 4C 중엽부터 5C 초까지 역사적 시대를 연계하여 고려해 본다면 근초고왕 시절의 대륙 백제인 들이었을 것이다.

즉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온조계(북부여 족) 제 13대 근초고왕은 AD 346년 선왕인 비류계(졸본 부여 족) 제 12대 계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게 되는데 여기서 온조계 세력에 밀린 비류계 계왕의 후손들 진정(眞靜)과 응신(應神) 세력이 중국 요서 백제 지역에서 한반도로 AD 350년 경 들어오게 되고 이들 졸본 부여계 세력이 웅진(현 공주)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의 선주 세력인 가야인들을 공격하여 정복하게 되자 일부 가야인들은 이들 비류 백제계 세력에게 항복하여 동화되거나 나머지 이에 항거하는 가야인들은 이들을 피해 왜열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또한 한반도로 도피해 와 가야 지방을 점거하면서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계속 저항하던 비류 백제계 진정, 응신 지배세력은 제 일차로 AD 368년 근초고왕의 명을 받은 근구수 태자에게 밀려 가야인와 함께 왜열도 큐슈로 도피하고, 제 이차로는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 태왕에게 패하여 응신 세력이 자신의 본거지 왜열도 근기 지방으로 달아나 AD 405년 나라 지방에서 강원궁을 세우고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만 하는 역사적 인물로서 쟁점이 되고 있는 응신(應神, 일본서기 제 15대 천황으로 이름은 호무다로 성씨찬씨록 眞씨의 시조)은 백제 제 12대 계왕의 친손자로서 AD 4C 중엽 아버지 진정(眞靜)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 태자에 패하여 대륙에서 한반도로 도피해 온 졸본 부여계 비류 백제인으로서 이 다큐와는 달리 토박이 가야인이 아니라 졸본 부여인이었고 에가미 교수가 애매모호하게 지적한 북방 기마 민족이었던 것이다.

 가야인들은 고구려 태왕의 공격이전 수십년 전에 이미 북방 기마 민족으로 표현되는 비류 백제계 진정과 응신 세력의 공격을 먼저 받아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의 아버지인 진정이 아라사등(阿羅斯等)과 동일 인물로서 아라 가야왕으로 나온다.

그래서 AD 400년 종발성 전투에서는 가야와 왜 연합군이 즉 가야인과 야마토 왜로 표현되는 졸본 부여계 비류 백제 정부의 연합 세력이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 백제계 세력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와서 현지 가야를 정복하여 가야 왕으로서 외래 지배 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 가야 세력과 겹치게(Overlapping)되어 결과적으로 이 닥큐에서는 응신을 토박이 가야인으로 착각하였고 이들 제4의 가야제국인들이 일본으로 간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금관 가야국에서 초대 김수로 왕처럼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나 귀지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문시 되었던 그리고 현지 가야 지방을 정벌한 에가미 교수의 북방 기마 민족의 정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북부여인)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계왕 세력인 진정과 응신으로 대변되는 대륙 백제인(졸본 부여인)이었으며 AD 350년 경 이들에게 패하여 왜열도 로 이동한 첫번째 가야 세력이 숭신 왕 계열의 가야 민족이라고 추정되며,

AD 396년 경 고구려 광개토 군이 웅진 백제의 응신 비류 세력과 한성 백제의 아신 온조 세력을 침공하였을 때 비류 백제계 당시 응신 왜후왕이 자신의 지배아래 있었던 가야인들 함께 두번째로 왜열도로 이동하게 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침공으로 인한 왜열도로 도피하여 일본의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왜국을 건설한 지배 계층은 한반도 거주 가야인이 아니라 대륙에서 온조계(해모수계 북부여인) 근초고왕에게 쫓겨와 가야 세력을 석권한 비류계(우태, 소서노계 졸본부여인)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현 역사 자문위원
윤복현 08/03/24 [16:02] 수정 삭제  
  [홍순주 위원 :금관 가야국에서 초대 김수로 왕처럼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나 귀지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문시 되었던 그리고 현지 가야 지방을 정벌한 에가미 교수의 북방 기마 민족의 정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북부여인)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계왕 세력인 진정과 응신으로 대변되는 대륙 백제인(졸본 부여인)이었으며 AD 350년 경 이들에게 패하여 왜열도 로 이동한 첫번째 가야 세력이 숭신 왕 계열의 가야 민족이라고 추정되며, AD 396년 경 고구려 광개토 군이 웅진 백제의 응신 비류 세력과 한성 백제의 아신 온조 세력을 침공하였을 때 비류 백제계 당시 응신 왜후왕이 자신의 지배아래 있었던 가야인들 함께 두번째로 왜열도로 이동하게 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침공으로 인한 왜열도로 도피하여 일본의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왜국을 건설한 지배 계층은 한반도 거주 가야인이 아니라 대륙에서 온조계(해모수계 북부여인) 근초고왕에게 쫓겨와 가야 세력을 석권한 비류계(우태, 소서노계 졸본부여인)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동감합니다. 최인호씨의 역사추적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백제멸망 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일본의 입장에서 연대를 상한조정하면서까지 역사를 왜곡하여 편찬한 일본서기의 진실을 당시 백제와 왜와의 관계성을 배제시킨채 추적한 건 그야말로 소설이였다고 봅니다. 이러한 최인호씨의 4제국 가야를 mbc에서 역사드라마화하기위해 최인호씨와 계약을 했다고 하니 또 한번 mbc가 역사왜곡에 동참하고 있다 봅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위협이 되었던 대륙의 비류백제가 전연[전연(前燕 337년~370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선비족 모용황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연(燕)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4개나 되기 때문에, 제일 첫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전연이라고 부르며 구별하였다.]에게 패한 후에 남하하여 근초고왕시절 한반도 온조백제와 통합하면서 갑자기 강성해진 백제의 역사적 배경이 이해되야 하며, 비류.온조백제계의 통합으로 불거지는 권력투쟁과 거기에서 밀려나는 세력들의 안착지가 되는 일본열도상황이 이해되야 합니다. 비류.온조백제 또한 북방민족이고, 한반도 남부의 지배세력 또한 북방유목민들이다 보니 동복.철갑옷.제기그릇 등의 유물들이 얼마든지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 출토될 수 있습니다. 백제세력보다 먼저 일본열도로 이주한 마한인들[김해지역 등 변한으로 구분되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지배층인 북방유목민들(김해지역=편두풍습을 한 훈족 계열/경주=흉노계열)을 포함한 한반도 사람들)들이 바로 의 실체라고 볼 수 있고, 그 다음 이동한 백제세력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이들 마한세력들을 지배한 세력이라 보아야 겠지요..또한 대륙과 한반도,그리고 일본열도를 지배하고 발전시킨 주체는 바로 북방민족이였다는 사실이고..온조.비류백제와 일본열도와의 관계성,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진실에 대해서는 차후 개인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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