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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65), 떠나가는 밀사들-(2)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9/06 [18:08]

대한정통사(65), 떠나가는 밀사들-(2)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9/06 [18:08]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전문위원]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밀지들을 밀사들을 통하여 연달아 미국 측에 전달케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이 주한공사관을 제일 먼저 철수하는 등 전혀 기대 밖의 행동으로 나오자, 황제는 더이상 맹목적으로 미국 측의 호의만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을 이미 다 밀사로 보낸데다가, 이미 황제의 밀사파견 정보가 일제 측에도 소위 ‘워싱턴 밀사사건’으로 알려짐으로써 일제의 감시망이 더욱 철저해졌으므로 밀사의 선정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 황제의 밀사 중, 1933년 1월 1일 현정건 선생의 죽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분투와 고난의 일생'이란 제목의 기사로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 편집국

 

  을사늑약 당시에 런던트리뷴지의 기자로 북경에 와 있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는 상해로 여행하던 도중에 대한국의 해관업무를 담당했던 브라운을 만나서 대한국의 실정과 을사늑약의 진상에 대하여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이어서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요코하마에서 전임 주한미국공사였던 모르간을 만나게 되어 다시 그 엉터리늑약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어, 풍전등화같은 대한국의 운명을 둘러 싼 세계적 특종뉴스감인 그 국제적 사기극에 대한 그의 기자다운 호기심은 점점 커져 갔다.

 

  특히 그는 상해에서 광무황제의 밀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브라운과의 연락이 닿아 있었는 듯), 그들은 황제의 신임이 대단히 두터운 전직 고관들이었으며 스토리는 그들을 통해서 대한국의 황궁과 직접 교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묘한 인연에 싸인 채 스토리는 대한국에 발을 딛게 되었고 곧 이어서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황제의 밀사들이 주선했을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 황제의 밀사 중, 이용익 선생     © 편집국

 

  광무황제를 알현하면서 기자다운 촉각으로 황궁을 예의관찰한 스토리는

"황궁은 밀정의 소굴이었으며 황제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비밀경찰의 감시망에 갇힌 채 날마다 암살의 위협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인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정의감에 넘치던 스토리기자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국권회복을 위해서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며 고뇌하는 광무황제의 애국애족 정신에 크게 감동되었고, 광무황제 나름대로는 스토리와의 면담을 통해서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협조를 부탁하는 밀지를 내렸다. 어차피 밀지를 수행할 만한 다른 믿음직한 외국인도 없었으므로 황제로서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스토리에게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토리는 그 후 황제의 신뢰에 충실히 보답함으로써 황제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4239년(서1906) (음)1월 말엽 어느날 어두컴컴한 새벽 4시경에 스토리는 황제의 밀사에게서 국서를 전달받았는데, 여섯 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그 국서의 내용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황제의 승인을 받은 바 없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강력히 주장한 것’

이었으며, 거기에다가

‘세계 열강이 대한국을 공동으로 5년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 것’

이었다.

 

▲ 황제의 밀사 중,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일행으로 간 민영긱 선생     © 편집국

 

열강의 공동보호를 요청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야욕을 국제적 여론을 통하여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인식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던 것이다. 지나간 청일전쟁 이후 유럽열강 삼국의 간섭에 의하여 일본이 일시 점령했던 요동반도에서 철수한 예를 다시 실현해보고자 하는 광무황제의 신중한 복안이 깔려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문서에는 붉은 색의 국새가 찍혀 있었으며, 따라서 그 문서는 황제의 동의가 없었던 을사늑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합법적인 문서였다.

 

  용의주도한 스토리는 만일의 (분실 등)사태에 대비하여 믿을만한 외국인 몇 명을 증인삼아서 복사본을 만들어서 감추어 두도록 한 후, 자신은 원본을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으나 숙소는 이미 검색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위험이 닥쳤음을 느끼고 재빨리 숙소를 빠져나온 후 미국영사와 함께 피신하였는데, 그를 미행하고 있던 일제의 밀정들은 그를 암살하려고 총까지 쏘아대었으므로 그는 급히 제물포항으로 도주하여 노르웨이의 기선에 탔으며, 우여곡절 끝에 청국에 도착한 그는 지부주재 영국총영사 버틀러(O'Brien Butler)에게 국서를 전달했고, 총영사는 그 국서를 북경주재 영국공사에게 전송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신사’라는 영국 측은 영일동맹을 지키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여겼는지 ‘국제사기극의 무효’를 선언하는 대한국황제의 피맺힌 절규에 대하여 도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아까운 시간은 자꾸만 흘러만 갔다. 정작 그 국서의 내용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스토리 자신이 4239년(서1906) 12월 6일에 런던트리뷴지에 국서와 그 관련기사들을 보도한 후였던 것이다.

 

  영국정부 당국의 그러한 무성의한 태도는 이미 예상된 바였으니, 4239년(서1906) 1월 13일에 런던타임즈지가 이미 을사조약이 불법적으로 강제된 것임을 기사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로지 국제 공갈사기단인 일제를 두둔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영국측 태도는 국제도의나 정의와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의 신문기사를 접한 프랑스의 국제공법학자 ‘프란시스 레이’씨는, 국제법상의 갖가지 ‘결격사유’들을 골고루 갖춘 을사조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임을 다음 달인 4239년(서1906) 2월호 국제공법잡지에 명백하게 밝혀서 일제를 곤경에 몰아넣기도 하였던 것이며, 한 패거리였던 영국정부까지도 덩달아 망신살이 뻗쳤던 것이다.

 

  대한국의 운명에 대해서 비정하기만한 열강들의 행태에 대하여 실망을 거듭하기는 했어도, 그렇다고 해서 대책없이 절망에 빠져 있기만 할 광무황제는 아니었다. 늑약전후에 광무황제 특유의 자상한 배려 속에 밀사의 신변을 우려해서 비밀리에 시도했던 외교교섭과, 스토리 등 외국인 밀사들을 통한 국서전달이 밀사들의 국제적 자격여부 문제에 걸려서 진전을 볼 수 없었던 점등이 부각되자, 이번에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공법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시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하되 그에게 특명전권을 위임했던 것이다.

 

  마침 헐버트는 대한국에서의 잡지간행사업과 교과서편찬을 계속하기 위하여 4239년(서1906) 4월중 미국에서 돌아 와 있었다. 황제로부터 다시 무거운 임무를 부여받은 헐버트는 만일 황제의 의도가 알려지게 될 경우에 악랄한 일제의 행태로 보아 황제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리라고 판단하고 머뭇거렸으나, 이미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국권회복을 위하여 열성을 쏟고 있던 황제의 눈물겹도록 외로운 투쟁에 감동되어 황제의 제안을 수락했다. 헐버트에게 내려진 위임장과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친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위임장

“짐 대한황제는 헐버트씨를 따로 특별위원으로 임명하여 우리나라 제국 황실과 정부에 관련된 모든 일을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벨기에 및 청국정부 등 각국과 위임하도록 위임하였다. 차제에 헐버트씨에게 각국에 친서를 전달하도록 하였으며, 각국 황제·대통령 및 군주폐하께서는 그 친서에서 소상히 밝힌 바, 지금 우리 제국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어려운 일을 남김없이 들어주시기 바란다. 각 정부는 우리가 이 일을 장차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에 부치고자 하니, 그것이 공정하게 다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2. 친서(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예)

“대한국 대황제는 삼가 절하며 대러시아 대황제폐하께 글월을 올립니다. 귀국과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지나오며 여러 차례 두터운 우의를 입은 바,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고 있어서 모름지기 정의로운 우의로써 우리를 돌보아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불의를 자행하여 1905년 11월 18일 강제로 늑약을 맺었습니다. 그 일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세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정부 대신이 조인하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며,

  둘째, 짐은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셋째, 정부회의 운운하나 국법에 의거하지 않고 회의를 한 것이며, 일본인들이 대신을 강제로 가둔 채 회의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러한 즉, 이른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일컫는 것은 공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의당 무효입니다.

 

  짐이 우러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짐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응낙치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이번의 불법조약으로 (대한국의)국체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어떤 나라가 짐이 이 조약을 응낙운운하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믿지도 듣지도 말고 그것이 근거없는 일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짐은, 당당한 독립국이 이와 같은 불의스러운 일로써 국체가 손상당하였으므로, 원컨대 폐하께서는 즉시 공사관을 이전처럼 우리나라에 다시 설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이 사건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소에서 공판을 부치려 할 때에 공사관을 우리나라에 설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존할 수 있도록 특별히 유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각별한 관심을 쏟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의 상세한 내용은 짐의 특별위원인 헐버트씨에게 하문하시면 남김없이 밝혀 줄 것이며, 옥새를 찍어 보증합니다. 귀 폐하의 황실과 신민이 영원히 하늘의 도우심을 받기를 엄숙히 축원하며, 아울러 성체 편안하심을 희구합니다.

  대한개국 515년 6월 22일

  1906년 6월 22일

           한성에서 이 경 삼가 올림                     ”

    

  그리하여 특명전권을 위임받고 밀파된 헐버트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대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악착같은 방해공작과 열강의 무관심내지는 비협조적 태도에 의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던 것이다.

  광무황제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세계여론을 불러 일으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으니, 4239년(서1906) 12월에는 밀사를 통하여 ‘브트남 와일’이라는 외국인으로 하여금 상해에서 일제의 흉계를 폭로하는 저서를 출판토록 하기도 했다. 즉, 반일적인 궁중세력(즉, 황제의 최측근들)이 해외에 망명한 이 용익·이 학균·민 영익 등을 통해서 대한국에 우호적인 외국인들과의 협조 하에 공작을 전개했으니,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일제의 야욕을 막아보려는 광무황제와 애국지사들의 노력은 일제의 집요한 방해책동과 국제적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져 갔다.

    

* 전직 고관이었으면서 '황제의 밀사'로 상해에서 외교교섭에 몰두하고 있던 인물들로는 이 용익·민 영익·이 학균·현 상건 등을 들 수 있음. 광무황제는 상당액수의 황실자금을 상해의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예치하여 가장 신임하는 전직 대신에게 관리를 맡기고 있었는데, 특히 전 내장원경 이 용익과 민 영익이 신임받고 있었음.

 

* 스토리에게 전한 밀서 내용의 6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당시 어법대로 옮김)

1. 一千九百五年 十一月 十七日 日使與朴齊純締約五條는 皇帝게셔 初無認許 又 不親押

2. 皇帝게셔는 此條約을 日本이 擅自頒布하믈 反對

3. 皇帝게셔는 獨立帝權을 一毫도 他國에 讓與하미 無

4. 日本之勒約於外交權도 無據온 況 內治上에 一件事라도 何可認准

5. 皇帝게셔는 統監에 來駐함을 無許하고, 皇室權을 一毫도 外人에 擅行을 許하미 無

6. 皇帝게셔는 世界各大國이 韓國外交을 同爲保護하믈 願하시고 限은 以五年確定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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