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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로마, 강력한 해상제국 백제

백제가 강력한 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진짜 배경은?

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03/27 [11:21]

아시아의 로마, 강력한 해상제국 백제

백제가 강력한 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진짜 배경은?

윤복현 기자 | 입력 : 2008/03/27 [11:21]


[역사논단]
고구려의 정복군주가 광개토태왕이라면 백제의 정복군주는 바로 마한을 백제에 복속시킨 근초고왕이다. 그런데, 어떻게 근초고왕시절에 갑자기 백제가 강성한 고대 국가로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일제가 일본서기기록에 근거하여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이며, 일본과 고대 백제와의 관계는 무엇이였는지 이제부터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진실을 하나하나 추적해 보도록 하자.  
 
고대 중국 문헌들을 보면 백제는 쥐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골칫거리 국가로 묘사되어 있으며, 대륙백제가 멸망했을 때 썩은 이 빠진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십제]에서 한반도 남서부와 중국대륙 동남부 지역을 지배한 강력한 해상제국 [백제]로 발전한 진짜 배경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는 온조로 인식되고 있는데, 고대 중국문헌과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종합해 보면 백제는 중국대륙의 비류백제와 한반도의 온조백제가 통합하여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형 비류와 동생 온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추모의 두 아들이지만, 혈통적으로 따지면 비류는 소서노와 부여계 소태의 아들이며, 온조는 고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온조백제의 초기 수도로 알려진 한반도의 한강변 하남 위례성과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인 동명성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숭산’이라는 지명이 중국대륙 하남성 지역에 존재하는 이유 또한 연나라(전연)과 만주에서 전쟁을 벌이던 비류백제가 대패하여 한반도 온조백제와 합류하여 강성해진 후에 중국대륙에 진출하여 세운 성과 사당이라고 보아야 맞다.
 
비류백제세력과 합류하기 전 50개국으로 구성된 마한의 진왕의 양해를 얻어 마한지역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온조백제는 세력이 강성하지 못했다. 한반도자체가 본래 단군조선시대 3조선(한) 중 마한에 속한 지역이였기 때문에 단군조선 해체후에 북방의 단군조선유민들이 많이 유입되어 들어오게 되었고, 진한의 진왕세력 또한 마한지역에 들어와 전통성을 인정받아 마한을 대표하는 왕으로 인정받아 한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온조백제 또한 초기에 마한의 동맹국에 불과했다. 그러나, 북방의 비류백제가 합류하게 되면서 백제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이후 마한지역의 지배세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백제의 성장를 고대 중국문헌과 삼국사기, 그리고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먼저 KBS역사 스폐셜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만, 백제가 중국대륙의 동남부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경영했다는 명백한 근거들을 알아 보기로 한다.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 사람들은 우리나라 백제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를 사용하고 명절 때는 강강술래 놀이를 한다.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킨 백제인 흑치상지는 필리핀(당시의 "왜")에서 태어난 22담로 중 한 가문 출신으로 밝혀졌다. 중국에 거대한 백제세력이 있었다는 증거다.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신동아 1997년 11월호] 
  
 


 

위 사진자료가 증명하듯이 19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하남성) 수도 정주에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고대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백제’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러한 흔적은 고대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황하강 남쪽 하남(河南)의 숭산에서 만난 「백제」라는 단어. 그 옛날 온조 백제인들은 한강 이남의 땅을 역시 「하남」이라고 불렀고, 그 왕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 하남 위례성 인근에는 중국의 숭산과 똑같은 한자 이름을 가진 숭산도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풍납토성내 궁터발굴현장. 2008년 3월부터 그 동안 발굴비용과 지역민들과의 충돌문제로 중지된 발굴작업이 국립 문화재 연구소와 한신대 발굴팀에 의해 재개된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발견당시 국가의  수도성이 아니라, 개인의 성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수도성에 버금가는 엄청난 유물들과 유적지들이 발굴됨으로써 초기 온조백제의 수도성임이 드러났다.

풍납동 토성에서 발굴된 초기 백제유물 청동초두. 백제문화의 상징인 백제향로에서 보여주는 여성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청동초두 또한 백제향로처럼 제사용 용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수막새-초기 백제시대 유물에는 다수인들이었던 마한문화의 흔적도 혼합되어 출토된 유물들고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한강지역인 풍납동의 풍납토성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부]라는 한자가 기록된, 풍납토성 내부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3세기 중반 이후 백제와 교류했던 서진(西晉)∼동진(東晋)대의 도자기류 등은 3세기 중국화폐인 오수전을 바탕으로 도안하여 새긴 오수전문(五銖錢文)도기들과 함께 궁성터와 연못 등 한신대 국사학과팀의 발굴작업을 통하여 초기 백제왕궁임이 명백한 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고, 흙으로 지은 토성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은 본래 백제인들이 쌓은 성이라기 보다는 한반도 마한인들의 성을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와 합류하면서 강성해진 백제가 서해와 중국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인 한강을 수도로 정하면서 마한인들의 성을 초기 백제성으로 삼았거나, 당시 다수계층에 속한 마한인들의 축성법으로 쌓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들은 내용에 있어 초기 백제인들과 마한인들의 문화가 혼합된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또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통합으로 강성해진 백제의 중국대륙 진출은 황하의 남쪽을 의미하는 하남」과 산(숭산)이 한반도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우리가 배운 역사 지식으로는 중국 하남성 숭산 인근에 백제라는 이름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건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고대 4국을 한반도에만 규정해버린 일제 식민사관의 주입과 세뇌에서 오는 혼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중요성을 각성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숭산과 가까운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0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615~682년)의 묘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이 모두가 우연의 일치일까?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壯族自治區) 일대에는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서 전남지방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서낭당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광서 장족 자치구(광서성) 성도 (省都)인 남녕(南寧)시 와 백제향(鄕) 사이를 오가는 버스도 있다.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

 


향소부곡(鄕所部曲)은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한 특수한 지방하급 행정구획이다.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奴婢·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이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장족자치구 사람들의 명절 지내는 풍속은 고대한국 마한사람들(한반도 사람들)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들은 정월 보름과 단오절을 최대의 명절로 경축하고 있다. 장족의 민속춤인 「삼현춤」을 출 때는 춤꾼들이 둥근 원을 그리는 가운데 춤을 이끄는 남자가 삼현금으로 반주하면, 그밖의 사람들은 박자에 따라 노래하고 춤추면서 원을 줄이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하면서 긴 소맷자락을 내 젓는다. 이 춤은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마한편에 나오는 강강술래와 흡사한 것이다. 후에 마한을 지배한 백제가 마한의 문화와 풍습을 계승했음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중국대륙과 동남 아시아까지 전파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위 사진자료가 증명하듯이 백제향(鄕)에서 영업중인 삼륜 택시에도 백제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다.

1997년 10월경 한국의 소장파 사학자가 10년간의 연구끝에 「대륙(중국) 백제」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문을 정식으로 발표, 고대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간 백제의 「요서 진출설」(한반도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에 진출했다는 학설) 등이 학계에서 제기되긴 했으나, 이 논문은 한반도 백제 세력이 아닌 또 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내에 존재했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KBS 방송팀에 장족자치구에 존재하는 백제의 흔적을 알려주기도 한 이도학(李道學·40)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1984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91년 한양대에서 백제사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줄곧 대륙백제의 존재를 파헤치기 위해 몰두해온 학자다. 그의 학설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치밀한 논리 전개로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그의 학설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반론은 제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씨의 논문은 『새로 쓰는 백제사』(푸른 역사 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사의 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부제로 달고 나온다. 이씨는 이 책을 펴내면서 『이제 우리는 백제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그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제사 상식에 비추어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백제를 잘못 알고 있었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마저 자아낸다. 일단 이 박사의 논증을 참고 삼아 백제사의 미스터리 세상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한반도 온조백제와 합류이전의 만주의 비류백제에 관하여 알아 보면,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자치통감> 영화 2년 정월 조) 식민사관에서 보면 부여와 백제는 도저히 서로 싸울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식민사관적 인식에 기인하는 혼란의 문제로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선입관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한반도 남쪽에 있는 백제가 어떻게 북만주에 있을까 하는 인식적 혼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객관적이지 못한 역사인식과 역사왜곡과 조작행위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가 되는 것이다.


위 <자치통감>기록은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그러니까 비류백제는 대륙에서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나라에 대패한 비류백제세력이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온조백제와 합류하는, 한반도의 지배세력이던 마한을 점령하고 일본열도까지 정복하여 칠지도를 하사한 백제의 정복왕이라고 일컬어지는 근초고왕 시기(비류백제가 전연에 대패한 시기인 기원후 343년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를 배경으로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급성장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킨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 이래로 우리 사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백제」라는 이름은 아마도 「고구려」를 의미하는 오기(誤記)일 것이라고 간주해왔다. 혹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백제의 해상진출과 관련지어 「요서 경략설」(遼西經略說)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이므로 해상진출과는 어울리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 이어서 다음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송서> 백제 조)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백제(비류백제)와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후한서> 건광 원년 조). 두 기록 역시 식민사관적 인식으로 보면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다. 즉,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냐고 말이다. 이도학씨는 앞에서 인용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만주 땅에 백제(비류백제)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중국학계에서 정사(正史)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간에 베낀 것이 아니고 계통이 다른 백제 관찰기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파기하고 처음에서부터 역사를 연구하는 마음가짐으로 역사를 봐야 한다.


중국 대륙의 백제가 중국 역사가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은 4세기 중반의 일이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륙의 비류백제는 지금의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부여를 서쪽의 전연(前燕) 근처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 요동지역의 강자인 전연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3년 경으로 짐작되는 전연과의 전투에서 대륙 백제는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거니와, 바로 이 때문에 비류백제가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한국측 역사서에도 대륙 백제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 기사는 우연찮게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꼽힌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의 비류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도학씨의 해석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비류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된다. 당시 한반도 온조백제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낙랑국이 버티고 있어서 서로 교류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중국은 5호16국 시대의 대혼란이 개막되었고, 그 파장은 고구려에도 미치게 된다. 고구려가 서쪽지역에 국력을 집중하는 틈을 타 만주의 백제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이후 중국측의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그렇다면 4세기 중반에 만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와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백제국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양자는 국호가 동일하니 만큼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백제 건국사에는 두 사람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못박듯이 말한다. 이것은 중국대륙에 존재하고 있던 비류백제의 실존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주서> 백제조)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수서> 백제 조)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한원> 백제조)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으며, 비류의 아버지로 볼 수 있는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또한 온조백제보다 군사력이 강성한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와 합류하면서 비중면에서 온조백제의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결국 비류백제계와 온조백제계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고 추정할 수 있고,  부여계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백제 왕족들의 성씨도 ‘부여’씨로 변경했다고 볼 수 있으며, 부예계의 적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고구려와 치열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벌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한 근거로는 사실 백제 왕들은 한결같이 부여씨(扶餘氏)를 씨성으로 삼고 있다는 점과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뉘며, 모두 부여계 출신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와 백제 왕들이 참혹하게 죽이면서까지 동명성왕을 시조로 삼는 고구려와 백제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이유는 바로 부여계의 적통임을 내세운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 때문이다.

1천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동명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도학씨는 백제국왕은 왕성인 몽촌토성에서 검단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의식을 집전하였으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중국대륙에 진출한 백제가 중국 황하강 남쪽 하남성 지역에 숭산을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도학씨에 의하면 이처럼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세력이 온조계이며, 만주쪽 백제는 비류계 세력이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후에 어떻게 결합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가 같고 부여계라는 동일한 혈통과 동명성왕이라는 동일한 시조의식때문이였을 것으로 본다. 또한 전연에 대패한 비류백제는 정착지가 필요했고, 세력이 미약한 온조백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비류백제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도학씨의 견해또한『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데서 짐작되는 종가격인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 석촌동 고분 . 고구려 계통의 돌무덤이 토착민의 흙무덤과 결합하여 새로운 백제의 무덤양식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몽촌토성에서 떨어져 있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돌무지 무덤과 흙무덤이 함께 있다. 3호분은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은 돌무지 무덤으로, 바닥에 흙을 깔고 위에 돌을 층층이 쌓아서 계단 모양으로 축조한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다. 3호분은 규모가 커서 백제 최고 지배층인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4호분은 내부를 흙으로 쌓고 밖에 돌을 쌓아 보강하는 축조 방식을 써 3호분과는 다른 무덤양식을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을 통해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만주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고고학)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앞 시기의 묘제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 아닌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 비류백제의 온조백제합류를 증명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시기는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백제가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강력한 정복국가로 변신한다. 이후 백제 조정에 등장하는 유목국가의 직제인 좌·우현왕제라든지, 북방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는 「어라하」「건길지」같은 왕의 호칭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와 함께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 모든 역사적 기록이 대륙백제(비류계)와 한반도 백제(온조계)의 결합을 강력히 시사하며, 백제의 한반도 지배와 서해를 거점으로 산동.요서.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하게 되는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와의 단일대오와 성장에서 남북한 통일의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교훈삼을 수 있다.


백제의 중원 정벌 , 백제부흥의 주역 필리핀 출신의 흑치상지


한반도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해상을 장악함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백제는 먼저 황해의 많은 도서를 부속 영토로 하였다. 백제 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한 강화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서남해안에 사람이 사는 15개의 섬은 모두 백제의 행정지배를 받으면서 기항지 역할을 했다.이곳을 토대로 한 백제의 해외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

[구당서(舊唐書)-백제전(百濟傳)]을 보면 “백제의 영역은 바다건너 월주(越州)를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가우리(高句麗)의 국경, 남쪽으로는 왜국(倭國)에 이르렀다. 백제는 동,서 두곳에 서울을 두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최치원전(崔致遠傳)]에 따르면 “백제는 전성기에 오(吳), 월(越), 연(燕), 제(齊), 노(魯) 나라를 모두 장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언급한 나라는 모두 중원대륙에 있던 나라들이다. 백제가 중원대륙 깊숙이 침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서(周書)의 백제전에 보면 “동진(東晋) 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 나라(奈羅) 때까지 백제는 양쯔강 양쪽을 다 점령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따르면 “금주(錦州), 의주(義州), 애춘(愛瑃)을 포함한 지역은 다 백제의 강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볼때 백제(밝지)는 서쪽의 로마제국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대해양 제국이었음이 명백하다.

비류백제와 통합하여 강성하여 마한지역(한반도)을 정벌하여 지배한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큰구수)왕때가 바로 백제의 중국대륙 정벌의 전성기라고 할 것이다.서기 375년, 고구려(가우리)와의 대전에서 연전 연승한 근구수(큰구수)는 방향을 중국대륙으로 돌리고 중국대륙의 백제군과 본국의 신군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최강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정벌한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큰초고)왕의 태자  근구수(훗날 근구고왕). 근초고왕은 369년경 한반도 지역인 마한과 대방(帶方)을 병합했고, 그해 9월에는 진을 치고 있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의 군대를 크게 물리쳐 5천여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고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 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백제 근초고왕 자신이 백제를 당당한 자주국으로써의 황제국으로 내외적으로 선언한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백제가 근초고왕 시대부터 비로소 강성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또한 371년 국왕이 친히 태자 근구수와 함께 3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평양성(平壤城)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 사람으로 왕의 말의 말굽을 상하게 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 온 사기(斯紀)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인 적기부대(赤旗部隊=붉은 깃발부대=삼족오 부대)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수입하여 일본에 전하였다.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해서 학문을 전파하는 등 외교적 수완도 발휘하였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 하였다. 그의 여러 차례에 걸친 영토 확장으로 백제의 왕권(王權)은 점차 전제화(專制化)되었으며, 그 결과 부족연맹의 세력을 누르고 부자상속(父子相續)에 의한 왕위계승이 시작되었다.

마침 연(燕)나라의 모용(慕容)씨가 진왕(秦王) 부견(符堅)의 90만대군을 맞아 고전하니 동맹국 백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륙진출을 노리던 큰구수는 이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나라와 연합하여 유주(지금의 북경)로 진격하였다. 큰구수는 90만의 진나라 군대를 격멸하고 유주를 백제(밝지)의 영역으로 편입, 요서(遙西), 진평(晋平) 2군(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진(秦)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양자강 유역의 진(晋)나라와 싸웠는데,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기회를 엿보던 큰구수는 진(秦)나라에게 옛 동이족의 영역 청구땅(산동반도)을 요구하였지만 진이 거절하자 무력을 동원하여 청구땅을 다물하였다. 연전연패로 쇄약해진 진나라는 더 이상 백제에 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결국 밝지의 근구수(큰구수)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남쪽에 있던 또 다른 진나라도 큰구수와 싸워 대패하니 중원에서 감히 백제에 도전할 나라는 없게 되었다. 이제 큰구수에게 걸리적거리는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본국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백제(밝지=밝은 땅)가 대륙 평정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 가우리가 밝지를 공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을 점령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거기다 바로 다음해 11월에 큰구수의 아버지인 큰초고왕이 붕어(崩御)하자 태자의 위치에 있었던 큰구수는 눈물을 머금고 중원정복의 원대한 꿈을 뒤로한 채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이도학씨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씨는 백제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존재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라고 말한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하남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여기서 백제가 부여씨의 왕족 중 누군가를 흑치(필리핀)에 봉했다는 것은, 흑치가 백제 해상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막강한 해상교역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조선술은 당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실제로 백제는「방(舫)」이라고 표현되는 대형 선박을 이용하였고, 488~490년에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북위와의 해전(海戰)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상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백제의 선박은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나 있었다.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구다라선(百濟船)」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선박을 가리키는 「구다라선」은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지역을 지배한 백제


백제는 광범위한 해상력을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까지 진출하게 된다. 백제가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 기간(475~538년)에는 남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한 때였다. 당연히 백제의 남중국에 대한 거점 확보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송서>는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였는데,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郡) 진평현(縣)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양서>에서는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였는데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라고 씌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이다.



그러나 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많은 문제다. 진평군과 백제군은 과연 어디일까. 중국 복단대학 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위치 추정을 인정한다면 백제가 해상항로와 관련하여 중국 복주시 지역에 설치한 진평군은, 이곳을 둘러싼 유송(劉宋)과의 갈등으로 인해 3년만에 폐지되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유균인(劉鈞仁)의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진평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진평은 현 이름인데, 진(晉)나라가 설치하여 광주(廣州) 울림군에 소속시켰고, 남송(유송을 가리킴)과 남제도 그대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광서(廣西) 경계에 있었다』 바로 여기가 백제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광서 장족자치구 창오현 일대인 것이다. 이어서 백제군에 대해서는 『백제는 지명인데, 광동 흠현 서북쪽 1백80리에 소재하였고, 터가 있는데 오문과 계림 2성의 경계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광서 장족자치구내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진평군이 설치된 지역은 북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팥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팥 문화는 한반도와 백제가 진출한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문화의 공유를 발견하게 된다.게다가 이 지역과 인접한 운남성에서 김병호박사가 이끈 <중앙일보>탐사팀이 우리 민족 고유의 지게를 발견한 것도 우연의 일은 아니다. 탐사팀은 운남성의 첩첩산골인 호도현을 지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인 나시족 처녀들이 지게에 나무를 져 나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게는 한국민족의 독창적 발명품으로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운반도구다. 한국식과 모양 하나 다르지 않은 지게를 바로 나시족 여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진평군에 대한 어느 기록이 맞든 간에 이들 지역이 백제군과 더불어 해변이거나 해변과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말의 대유학자인 최치원이 지은 <상대사시중장>에서는 『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1백만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 했는데, 그 오월지방과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도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중략)

또한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전한다. 백제 정복왕 근초고왕 맏아들인『(백제)근구수 왕이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야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과 부씨의 진을 정벌,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성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232쪽)


'담로'로 대변되는 아시아 해상제국 백제의 통치지역 - 당시 백제가 동남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백제는 중국의 해안지방만이 아니라 대륙내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강역으로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대 백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그리고 중국의 동남부지역과 동남 아시아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해상제국으로써 서양의 로마제국과 맞먹는 위대한 한민족사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왕이 태자를 대리하여 마한정벌에 군대를 파견한 왜왕에게 감사의 표시로 하사한 칠지도(왜왕의 위치=백제 태자의 위치에 불과한 백제 위성 국가에 불과했음을 칠지도에 기록된 내용이 증명하고 있다)

백제 근초고왕시대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신공황후가 왜군을 한반도를 침략하여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과 신라를 정벌하고 점령한 한반도 남부지역을 백제에 선물로 주었다.”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인데, 이러한 내용은 연대도 360년이나 앞선 내용으로 온조백제초기인 온조왕 시대의 내용으로 연대적으로 벌써 모순이며, 당시 문화적으로나 정치.군사적으로도 미약했던 <왜>가 백제의 상국인양 기록된 것도 모순인 것이다.
 
신공왕후와 관련된 임나일본부설의 역사적 사실은 근초고왕이 마한(한반도)을 정벌할 때, 마치 미국이 이라크 파병을 한국에 요청한 것처럼, 백제가 왜에 요청한 왜군이 백제의 마한정벌에 참여한 내용이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물은 근초고왕이 참여한 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왜왕에 하사한 ‘칠지도’다. 즉, ‘칠지도’에 표기된 핵심내용은 “제후왕에게 하사한다”는 ‘공공후왕’(功公) 이다. 칠지도를 하사한 존재도 근초고왕이 아니고, 근초고왕의 아들인 태자다. 즉, 당시 왜왕은 레벨상 백제 태자와 맞먹을 만큼 백제보다 국력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당시 왜는 백제의 왕족들이 파견되어 왜문명을 발전시킨 백제의 분국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또한 일본천황이 꽃을 바치는 것을 '공화'(功花)라고 하는데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 서기668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 땅의 백제 사람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써 끊어 졌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다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일본의 백제사람들에게 백제는 본국이였다. 서기 670년 일본열도에서 백제인들은 '일본'이란 국호로 새로 태어난다. [일본서기] 등의 역사서 또한 대륙과 한반도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일본열도 중심의 역사관으로 수정편집한 나머지, 후대 일본 역사가들에게 혼란을 주고 [임나 일본부]설을 주장하는 등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임나일본부설]의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일본역사서 [일본서기]가 왜곡편집된 진짜 이유는 당나라와 신라의 동맹으로 멸망한 백제가 신라를 갚아야 할 원수로 생각하면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고 한반도와 인연을 완전히 끊고 연대까지 상향조정하고 자신들의 조상들을 대상으로 하극상하면서까지 일본중심주의로 역사를 집필하다보니 세월이 흘러 후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역사해석에 혼란을 가져오고 뒤죽박죽 왜곡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열도 전역에서 출토되는 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한반도 지역의 유물들과 거의 같고, 고분 등 무덤양식들이 한반도 지역의 무덤양식들과 같다는 것이 왜곡된 내용들을 바로 잡아 주고, 최근에는 아끼히토 일본천황이 일본천황가는 백제왕족의 후손들임을 공식 고백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역사학자들은 양심에 따라 백제멸망직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백제인들의 관점에서 편찬한 나머지 후대에서 왜곡조작되는 수단으로 전락한 일본서기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있어 일본역사학계의 자위적인 해석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상황이라는 대전제아래 한중일 문헌비교와 고고학적 유물들을 근거로 객관적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야 일본 또한, 쥐나처럼 역사왜곡을 통하여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임을 경고하고 강조하는 바이다. 과학의 발전은 역사인식에 있어서도 더 이상 개인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관점과 입장만을 내세운 나머지 주관적인 해석과 이해로 전락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덕왕릉]일본서기에 의하면 인덕천황(仁德天皇)은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아들이다. 그는 즉위 후 오사카(難波)에 있는 高津宮으로 천도하였다. 인덕왕릉의 무덤양식은 아래 사진이 증명하듯이 강변에 위치한 백제의 초기 무덤양식임을 알 수 있다.




▲ 일본의 전방후원분 보다 더 큰 규모의 것을 비롯해 약 10개가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풍납동.몽촌토성이 고구려 장수대제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기 전까지 한성백제의 수도성이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일본의 응신.인덕왕릉이 백제무덤양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일본의 야마토 정권을 세운 일본의 '응신천황'은 침류왕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하여 아신왕을 왕위에 복귀시키는데 지원하였으나,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한 이후 일본에 야마토 정권을 세우고 백제문화와 학문를 집중적으로 수용하여 지금의 일본을 있게 한 일본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집트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과 함께 세게 3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일본에 존재하는 열쇠모양의 거대한 응신천황릉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응신천황릉과 인덕천황릉에서 북방유목민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이유는 역시 광개토태왕의 한반도 남부지역[당시 동복.각배 등 북방유목민들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김해.경주지역 등 남하한 북방 유목민족(훈족.흉노계열)이 지배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당시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마한인들(북방 유목민들이 지배층이였던)의 세력의 흔적을 의미한다 하겠다. 일본의 씨름인 스모 등은 모두 중국문헌에 힘이 세었다는 마한 사람들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료]단군3조선의 하나인 마한(한반도),그리고 마한50개 국 하나였던 백제

단군조선은 본래 진한(만주.몽골.연해주),마한(한반도),번한(산동.요서) 등 3조선으로 분할통치되었으며, 진한은 대단군이 3조선의 군사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었고, 마한.번한은 대단군의 혈족들인 부단군이 통치하였다. 이후 한반도 지역인 마한만 존재하고 번조선의 멸망과 함께 진한 또한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이후통치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번조선과 진조선의 왕족들은 마한지역인 한반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마한의 왕들로 통치하게 되며, 번조선과 진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동하여 진한과 번한을 세움으로 한반도 3조선(한)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이 한반도 3조선에 대한 고대 중국문헌의 기록들을 가지고 중국대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오류를 민족사학자들이 간혹 보이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조에 <처음에 조선왕(하북성 창려에 수도를 두었던 번조선)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그 무리 수천인을 이끌고 해로로 달아 마한을 쳐 이를 이기고 자립하여 한왕이라 하였다. 그 후 준왕의 후사는 끊기고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며, 우리 나라 고서인 삼국유사 마한조에도 기록하기를 <위지에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라 하였는데 이 여러 고문헌은 다 준왕이 쥐나인 위만에게 쫓기어 남쪽의 한(마한)의 땅에 와서 한왕이 되었다는 기사를 말하고있다. 다만위지에는 준왕이 남래하여 처음으로 마한국을 세웠다고 하였고 후한서에는 준왕이 남래하기 이전에 그 곳에는 이미 마한이 있었다고 한 점이 약 간 다른 점이다. 내용 중[해로를 따라, 바다를 건너]는 중국대륙에서 바다를 건넜다는 의미로 본래 단군의 3조선 중 마한에 해당하는 한반도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한전(韓傳)]에는 마한 50여국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백제도 그 중의 1나라로 적혀 있다. 백제가 마한에게 복속한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 때이다. 즉 하북성 창려를 수도로 삼고 있던 번조선이 번조선지역에 정착한 쥐나인 위만세력의 쿠테타로 멸망당한 후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번조선을 통치한 기자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번조선으로 와서 정착했는데, 덕이 많아 번조선의 왕으로 삼았다)'이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마한(한반도지역)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토착민들의 공격을 받아 기준왕은 죽고, 대장군 탁의 인솔하에 한수(漢水=한강) 이남으로 남하한 무리들[번조선 준왕의 후손들의 성이 그래서 청주한씨
氏다]은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무리들을 평정하여 나라를 세웠다. 마한연맹체는 본래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전통 민주공화정의 제도에 따라 마한 사람으로 왕을 추대했고, 한반도를 통치할 마한의 단군으로서 추대된 왕을 진왕(辰王)이라 했다. 그런데, 마한의 단군에 해당하는 진왕은 백제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전체를 통치하는 부족국가의 최고 맹주였다. 따라서 단군3조선 연방 중 한반도 지역에 속한 마한은 해체된 번조선의 마지막 단군 준이 도피한 지역이며, 진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를 계승한 해모수의 북부여와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운 지역으로 단군조선의 전통성의 명맥을 유지한 성스러운 땅이라고 하겠다. [윤복현]

[마한 50여 국:'읍'단위정도로 보면 된다]원양국(爰襄國), 변수국(弁水國) 또는 모양수국(牟襄水國)?, 상외국(桑外國) 또는 상수국(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國) 또는 우휴모록국(優休牟國)?, 신분활국(臣活國) 또는 신분첨국(臣沾國)? 또는 신분고국(臣沽國)? 또는 신책첨국(臣沾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高誕者國), 고리국(高離國),노남국( 怒藍國), 월지국(月支國) 또는 목지국(目支國)?, 자리모노국(咨離牟盧國) 또는 자리모노국(資離冒盧國)?, 색위건국(索謂乾國), 고원국(高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또는 막로비리국(莫盧卑離國)?, 점리비국(占離卑國) 또는 고비리국(古卑離國)?, 신첩국(臣疊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또는 지침지구로국(支侵支狗盧國)?, 비리국(卑離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離鞠國) 또는 고만치리국국(古滿致離鞠國)?, 염로국(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또는 매로국(邁盧國)?, 벽비리국(卑離國) 또는 군비리국(群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또는 구사조단국(臼斯鳥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또는 우반국(友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노국(捷盧國) 또는 정노국(挺盧國)?, 모노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랍국(古臘國) 또는 고랑국(古國)? 또는 고즐국(古櫛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邪國), 원지국(爰池國) 또는 해타국(奚他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관련 보도자료] 3월부터 백제 초기 왕성,풍납동 토성 발굴재개

 2000년 한성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왕성의 제사 터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遺構·건축물의 구조를 보여 주는 흔적)가 발견됐으나 재개발 사업 때문에 중단됐던 풍납토성 경당지구(서울 송파구 풍납동) 발굴이 8년 만에 재개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 박물관은 27일 “2000년 중단된 뒤 흙으로 덮어 놓았던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을 3월 3일 다시 시작한다”며 “발굴은 3개월여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풍납토성 가운데에 있는 이곳은 1999년 발굴이 시작된 뒤 백제 왕실의 제사 터로 보이는 ‘여(呂)’ 자 모양의 건물(길이 16m, 너비 14m), 제사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말뼈, ‘대부(大夫)’란 한자가 적힌 토기, 중국 동진에서 제작된 대형 도자기가 발굴돼 초기 백제의 종묘로 추정된 곳이다. 학계는 이런 성과를 토대로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도읍지가 유력하다고 해석해 왔다.

이번 발굴 책임을 맡은 권오영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당시 마무리하지 못한 제사 건물 터, 중국 도자기의 보관 창고, 제사 터 남쪽의 왕실 연못 추정지 등을 집중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발굴을 통해 제사 건물의 정확한 연대, 형태, 성격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못 추정지의 경우 백제 별궁의 연못이었던 충남 부여군 궁남지(사적 135호)와 비슷한 성격의 왕궁 연못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풍납토성 발굴과 주민들의 재산권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 태스크포스팀에서 5층 이하로 건축이 제한된 풍납토성 일대의 건축을 7층까지 허용하도록 바꾸는 방안을 논의하자,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 등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들이 이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경당지구 개발과 더불어 지난해 6월 길이 21m, 너비 16.4m에 이르는 육각형 모양의 대형 건물 터가 발견된 풍납토성 미래마을지구의 발굴도 3월 재개된다. 이곳은 경당지구의 서쪽에 있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풍납토성 중앙과 서쪽을 아우르는 도로 유적을 집중 발굴할 계획”이라며 “도로의 전모가 드러나면 왕성 규모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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