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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정통사서[한단고기],왜 위서 아닌가?

원본이 존재하고 있으나,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대출불가 도서로 지정하고 있다

박 현 | 기사입력 2010/09/11 [14:25]

한민족 정통사서[한단고기],왜 위서 아닌가?

원본이 존재하고 있으나,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대출불가 도서로 지정하고 있다

박 현 | 입력 : 2010/09/11 [14:25]
▲엄연히 원본이 존재하고 있으나,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대출불가 도서로 지정하고 있다.한민족사에 대한 열등감의 반영이다.속히 [한단고기]를 중심으로 민족사를 정립하고 국사도 재개정해야 한다.민족사 정립은 국민기백과 국운의 상승을 가져오는 에너지다.이를 알고 있기에 동북공정론자들이나 친일사관론들은 위서 취급을 하는 것이다.@편집부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임의로 조작된 책이나 내용이 사실과 어긋나는 책은 독서의 본래 목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그 가운데서 집필 시기나 필자 및 형식 등이 조작된 것을 위서(僞書)라고 한다.그리고 형식과 상관없이 내용이 불순하거나 기록된 내용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곡서(曲書)라고 부른다. 형식에서 거짓을 보이는 위서는 내용 면에서도 곡서인 경우가 많고, 곡서 또한 위서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물론 이 두 측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서일 경우 일단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위서를 판별하는 일은 학문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다.

일찍이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 ~ 1928)는 "중국역사 연구법(中國 歷史 硏究法)"을 지어 위서를 판별하는 표준적인 사례를 밝혔으며, 버나드 칼그렌(Bernard Karlgren)도 "중국고적 변위법(中國古籍 辨僞法, The Authenticity of Ancient Chinese Texts)에서 위서 판별의 방법을 밝혔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대부분 그 이전의 중국 문헌학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다루어오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론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서에 대한 판별은 해당 책자에 따라 방법론이 조금씩이나마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의 상고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몇 종류의 책이 이러한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다. "환단고기"가 그 대표격이다.

"한단고기"는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지은 것을 모아서 계연수(桂延壽)라는 사람이 다시 편찬한 뒤 1911년에 처음 간행했던 기록인데 그 구성은 대개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단군시대 이전을 다루는 "삼성기(三聖記)이고, 둘째는 단군시대의 연대기인 "단군세기(檀君世記)"이며, 셋째는 단군계의 한 갈래인 북부여의 연대기인 "북부여기(北夫餘記)"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단군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평론적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이다.
 
이들 책이 위서 시비에 말려든 것은 우리 상고사가 공백지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담고 있는 내용은 중국의 "사기"나 "상서"에서 보이는 내용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연대기와 함께 중국 한족에 대한 조선족의 우월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민취급하듯)

그 결과 동양사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 책들은 곧 위서 시비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상당한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위서라는 판결 쪽이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문헌을 두루 그리고 깊이 연구하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런 입장이 정설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필자는 같은 젊은이로서 가끔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상고사를 설명하는 처지인지라 그 진위 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아니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이 작업을 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복잡한 방법을 들추어 시비를 밝히는 것은 이 책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다만 그것을 위서로 규정하는 학자들의 표준적인 견해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참과 거짓을 판별해 보고자 한다.

한국 역사 연구회 고대사 분과에서 지은 "한국 고대사 산책"의 다섯번째 주제는 "환단고기 믿을 수 있나"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표준적인 견해들이 두루 나타나고 있다.

첫째,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남생(南生 : 연개소문의 아들)의 묘지명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환단고기"에 나오는데 그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지어진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1923년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만약 남생의 묘지명이 1980년도에 발견되었다면 환단고기는 1980년 이후에나 지어진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1949년에 조작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틀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같은 사례가 있다.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다)의 문제(文帝: 중국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다)인 대흠무(大欽武)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독자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실제로 1920년에 간행된 책 가운데도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찬 발간한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천부경을 인용한 경우가 있다.

[돋보기]

"정신철학 통편"

1920년 북경 정신철학사에서 전병훈이 펴낸 책으로 원래 제목은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이었다. 이책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입수한 경위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동굴 석벽에서 천부경을 보고 1917년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약초를 캐내기 위해 영변의 백산(白山)으로 들어갔다가 천부경을 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묘향산과 백산이 같은 곳임은 "영변군지"가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차이는 문자의 차이일 뿐이다.

전병훈이라는 분이 저술한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1920년 간행)인데 명문당에서 근래(1983년)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적도 있다.물론 이것은 1949년 조작설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 만리장성밖 동북지역은 고대로부터 지나국에서 오랑캐지역으로 취급한 지역이였다. 동북지역은 고대 한민족의 역사활동무대다.그런데, 동북지역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의 젖줄이 되는 홍산문명이 발견되면서 지나 사학계는 충격을 받았고, 지나정부차원에서 이를 지나문명으로 날조하는 동북공정을 진행하게 되었다. 지나인들의 황제의 상징으로 삼는 '용'문화도 '새'문화와 함께 홍산문명에서 나온 것으로 고대 한국인들의 토템문화로 밝혀졌다.@편집부

둘째,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전세계"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와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위서 시비의 좋은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선입견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동일한 지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낙양(洛陽)이라는 지명만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다. 황하의 중류에 있는 중국의 고도 가운데도 낙양이 있으며, 경상도 상주도 그 옛 이름이 낙양이었음을 구태여 예로 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울러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요사(遼史)"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비판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환단고기"의 경우 몇몇 부분은 명백히 편찬자인 계연수가 추가로 서술한 곳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은 독립운동가이며 단재 신채호 등과도 친밀했던 계연수의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단재 신채호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부분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용어를 자신의 시대에 맞추어 개작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 기록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등의 문헌이 전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희귀한 책들을 찾아 모으라고 명령을 내린 조선 세조 때나 성종 때, 명령에 따라 수집한 희귀본 20여종 가운데 "조대기"라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성종 이후 이름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리학에 의한 학문 세계의 순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이나 세조가 불교를 숭배한다고 목숨까지 내걸고 반대하던 성리학의 천박한 추종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기록과 그 기록의 내용을 배타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흔히 "도가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이 같은 기록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지거나 개인 소장가의 장농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이론적 라이벌이었던 윤휴(尹휴, 1617 ~ 1680)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자와 소중화사상을 배격하고 단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 기록이야 어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대사 산책"의 해당 주제 필자는 특별히 숨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찌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지하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숨어서 활동을 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이 비판자의 주장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민족사서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빨갱이 색출보다 훨씬 심했다)

사실상 현재 제기된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주장은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 시비를 붙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자료와 고문헌을 엄밀히 검토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송찬식(전 국민대)씨는 대종교의 교리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위서 시비를 걸었고, 박광용(성심여대)씨는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시비를 걸었으며, 이기백(한림대)씨는 청동기 시대 국가이론을 근거로 시비를 걸었다. 아직도 위서를 주장하는 견해에는 이런 개념 싸움에 그치는 유치함이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문헌을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면, 이런 류의 시비는 그만두고, 역사적 자료를 중심으로 깊이 있고 분명한 근거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박광용씨의 경우 기마종족 연맹의 과거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이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옹호와 연결된다고 하는 주장["역사비평" 10] 까지 내걸고 있으니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경우, 모든 기마종족을 같은 동포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며, 실제 그 시대의 현실이 그와 같았으므로 외형상 대동아 공영권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의 내용은 평등한 민족(종족)연맹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종족의 패권주의적 식민체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의 지식이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그런 논쟁이라면 어떤 비판에도 이 기록의 진실됨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과 함께 나름대로 엄밀한 분석을 거쳐 필자는 이 기록을 사용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현실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것을 사실 규명의 주요한 자료로 채택하는 바이다.[박현/고려대 사학과 졸,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


환단고기가 위서만은 아니라는 30가지 증거들
환단고기는 몇 남지않은 우리의 상고사 기록이기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책이다.

그러나 강단사학에서는 이 책의 시대사항의 사건이나 용어등을 들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위서로 몰고 있다. 

여기서 환단고기의 三聖紀全 上은 신라의 승려인 安含老가 찬(撰)했고 三聖紀全 下는 시대와 행적이 불분명한 元董仲이 지었으며 檀君世紀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 지었고 北夫餘紀는 고려말 학자 범장이 전했으며 태백일사는 이조 연산군과 중종때 학자 이맥이 전한 책을 이조말 일제 점령기에 계연수가 한데 묶어 만든 책인데 당시 인쇄나 영인술이 없어 모두 필사본들이다.

 필사본이란 먼저번 책을 베껴쓰는 것인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자기의 생각이 들어가 본래의 뜻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책을 읽어보면 진실된 귀중한 자료도 많지만 자기 의견으로 가필된 흔적이 너무많아 진본까지도 도매금으로 훼손시키는 僞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이맥의 태백일사 등)


그러므로 이책은 진본과 가필된 부분을 분리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가필의혹이 있는 대표적인 것 한 두가지를 예로 든다. 

 三神五帝本紀 - 王儉氏承徑一周三徑一四之機(삼신오제본기 - 왕검씨는 지름에 3.14를 곱하여 둘레를 만드는 기계로...)단군왕검때 그런 수학 공식이 있었다? 이는 이조중기 연산군때 태백일사를 쓴 이맥도 몰랐던 수학공식이라고 생각되므로 일제초 계연수 선생의 가필로 추정된다. 

三韓管境本記(馬韓世家上) - 昔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爲一年也(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상) - 옛날에 환웅께서는...달력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일년을 만드시고....) 

이 역시 이조중기 이맥의 가필이 아니라 계연수의 가필로 보인다. 아니 환웅시대 그러니까 5-6천년전에 일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 라니....초등학생도 믿지않을 소리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 역사에서 귀중한 것은 이 책속에는 너무나 귀중한 우리의 상고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환단고기가 더러 가필된 부분은 있을망정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를 댄다.

이 증거들은 환단고기 외에는 어디에도 없는 기록이기 때문에 환단고기가 다른 책을 베껴 썻을 수는 없다는 내용들이다.

이 증거들은  '하나 되는 한국사' 등 많은 책을 저술하신 고준환 박사와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그리고 KBS '역사 스페셜' 내용과 필자가 찾아낸 증거들이다. 

1.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단군 50년 (서기전 1733년) 다섯개의 별이 일렬로 서는 五星聚婁현상이 써 있는데 이것을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2.환단고기 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왕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서는 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이는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한 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실증적 가치를 알 수 있다. 

3.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 (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운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고구려를 위하여' 라는 책에 (김병호저) 처음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4.강화도 마리산에 참성단이 있어 지금도 매해 천제를 지내는데 그 기록이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 초대 단군왕검 무오 51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5.환단고기의 단군조선 실재를 보여주는 평앙도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능이 1993년 북한 당국자들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까지 발견되었고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에서 모금 운동까지 하여 북한 당국자와 함께 성역화 하였다. 

6.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장수왕이 즉위하자 建興이라는 년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이 년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光背銘 에 建興五年歲在丙辰으로 나타난다.  광대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대왕은 壬子년인 412년에 붕어하는데 卽位年 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보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바로 병진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建興이 장수대왕의 년호라는 것까지 알 수 있다. 

7.환단고기에는 조대기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太祚이고 조부는 子遊이며 증조부는 廣 이라 서술했다.  이 연개소문의 조부와 증조부의 이름은 환단고기 기록 이외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이 子遊로 나타나고 있다. 

8.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있다. 이는 백제가 현재 캄보디아인 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까지 뒷바침해준다.

9.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조차도 말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환단고기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조선일보 1면등에 투고한 사실이 있다.

10.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위서라는 사실을 육하원칙에 의하여 밝혀야 하는 데 아직까지는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학자가 없다. 

11.갑골문의 귀방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는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환단고기에는 BC1291 년 단군조선 21대 소태단군이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얼마전 출토된 유물 갑골문의 기록에 은나라 귀방정복 사실이 그대로 밝혀저 세상을 놀라게 한 사실이 있다. 

12.비파형 동검  

환단고기에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드넓은 중국 대륙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지금 사실상 고조선만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환단고기의 기록과 그대로 일치 한다. 

13.고인돌  

환단고기에 장묘문화에 자세히 써 있는데 그 모양과 지역이 그대로 일치한다. 

14.청동기 도끼 

중국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 세기 경으로 보이는 청동도끼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 건방중산후"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BC 22 세기부터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단군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 

15.은 도장  

중국 요녕성 대집둔 지역에서 은도장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단군 조선때 삼한중 하나인 번한(番汗)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때  번한( 황하/ 하북성)과 마한 (만주/ 한반도)등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나온 것이다.

16.사내와 곰 석상 

서요하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웅녀인 곰을 토템으로 하는 사내와 곰의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즉 이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홍산유적지에서 갑골문의 초기 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이것은 대체적으로 환단고기 환웅시대와 일치하고 있다.

17.요하는 압록, 난하는 요하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며 지금의 난하가 요수 (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이 밝혀진 근거는 얼마전 발견된 지나의 고지도 지리도인 연산도에 나타나고 그래서 중국삼대 간룡총람 지도에 그것이 올려진 것으로 볼 때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역사서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18. 낙랑군과 낙랑국   

낙랑이란 지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   BC 1767년 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23세 아흘단군이고 특히 BC 195년 낙랑왕 최숭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로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게 되었다. 이를 보더라도 환단고기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기록이고 고대사를 푸는 열쇠가 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 조선왕조의 수서령  

조선 왕조실록에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중국으로부터 왕위를 인정 받아야 하는 세조로부터 그뒤 대비들의 치마폭에 싸였던 허수아비 왕 예종때 중국의 비위를 마추기 위하여 우리의 중국보다 우월한 역사를 말살하는 수서령이 내려졌다.  즉 전국에 퍼져있는 우리 상고사를 가진 자가 있다면 이는 국법으로 처리한다 하였으므로 수 십만권의 우리 역사 서적이 거둬져 소각되는데 그 소각된 목록중에는 환단고기가 인용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다음은 필자의 전공이 우리 ㄱ ㄴ ㄷ ...ㅎ 들이 가지고 있는 뜻을 찾아 우리 뿌리말과 상고사를 밝히는 일이므로 필자가 그간 찾아낸 근거들인데, 이는 사실 가림토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데 이또한 환단고기에만 써있기 때문에 환단고기도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20. 신지녹도문과 창성 조적서 비  

환단고기에는 BC 3897년 초대 환웅께서는 신지에게 글자 만들 것을 명하고 신지는 이에 신지녹도문을 만든다. 그런데 그 녹도문은 태백산(백두산 ? 완달산?) 에 있다는 신지녹도 천부경으로도 나타나지만 평양 법수교 아래 고천문( 필자해독, 이는 천부경이 아님)으로도 나타나지만 중국 산동성의 창성 조석서 비 (창힐이 환웅께서 개국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기록한 견문록)에도 나타난다. 

21. 가림토와 신대문자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 3세 가륵단군께서 삼시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전에 내려오던 유치한 원시한글을 수정하여 가림토를 만들게 하는데 이 가림토는 한자에 눌리어 잡초처럼 버려젔던것을 세종께서 지금의 한글로 재창제하셨는가 하면 일본에도 전해져 훈민정음보가 70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가림토가 구주 신사등에 나나난다. 즉 신대문자(神代文字)란 신들이 쓰시던 문자라는 말로 우리 조상들을 신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이 쓰던 문자를 신대문자라 한다. 

 22. 청동거울

우리 조상을 모신 일본의 이세 신궁에 소장돼있는 청동거울 둘레에 이 가림토 38자가 새겨져 있다. 

 23. 히코산의 환웅개산기록

 환단고기에 - 진(秦)때 한민족인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種島)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일본 신사에는 우리말로 태백산과 같이 희고 크다는 히코산(英彦山)의 환웅 개산기록이 있다.

24. 구자라트 문자  

환단고기에 우리 문화를 수메르 등 중동에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구자라트 문자는 우리 한글과 거의 비슷하다. 

25. 스메르의 말과 우리말의 유사성  

환단고기에 12환국의 하나인 수메르의 말은 우리말과 비슷한 것이 많다. 

슈메르어(발음)[ 뜻]

한국어 발음[단어 뜻]

슈메르발음[단어뜻 ]

한국어 발음[단어 뜻]

아누(Annu)[최고 신]

하느님 [하느님,上帝]

Bad 바드 [ 밭 ]

밭 (Bat) [밭, 田 ]

안 (An) [天]

하늘 (ha)?[ 하늘, 天 ]

Na 나 [나 1인칭]

나 Na [ 나,我 ]

기르(Gir)

길 (Gil) [路]

Ge 그[3인칭 ]

그 Ge [ 3인칭 ]

라 (Ra) [~ 에서 ]

로 (Ro) [ 조사 ]

이 [1 인칭 ]

이 [지시대명사]

아비 Abi [ 아버지 ]

아비 (Bo) [ 夫 ]

Uhma 움마[엄마母]

엄마 Uhma [엄마 母]

니므 Nim [ 님 任 ]

님 (Nim) [ 사람 任]

 

 

26. 스리랑카의 패엽경사 

스리랑카의 패엽경사에 새겨져 있는 글자는 신대문자 구자라트 문자등 가림토와 아주 흡사하다. 

27.단기고사와 단군세기 기록으로 본 증거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12세 단군 아한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우리 원시 한글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과 단기고사에 역시 이같은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만약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단기고사 역시 환단고기를 위작한 사람이 역시 위작한 위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과연 위작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시차를 오가며 무슨 이유로 위서를 썼겠는가?  

28. 가림토와 가림다로 본 증거   

환단고기가 나온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 한글이라는 가림토(加臨土)가 왜 가림다(加臨多)라는 다른 표현도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세종이전 원시한글 존재 유무와 환단고기 진위문제... 더 나가서 일본 신사에 있는 신대문자(神代文字)가 원시한글인 가림토라는 증거까지 나오고 따라서 일본 신사는 우리 조상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이라는 근거까지 나온다.
 

加臨土가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고려 말엽 충정왕때 사람이고 가림다가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연산군때 사람이다.그들은 각자 전해오는 옛 서적을 보고 적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다른것이나 그것을 순 우리말로 풀어보면 가림은 무엇인가 대신한다는 뜻이 있고 土도 땅이며 '다'도 땅이다(다地- 훈몽자회) 따라서 가림토, 가림다는 말을 가름, 대신한다는...즉 글씨라는 순순한 우리 말이다.

이 가림토가 써 있는 기록은 환단고가 뿐인데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위서가들은 가림토건 가림다건 한 목소리를 냈을 것이며 또  자신도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소리를 썼겠는가?  

29. 蘇塗와 山像雄常 으로 본 근거

대저 위서가들이 어떤 목적으로 위서를 쓰려면 독자들이 그 내용을 알 수있게 글을 쓸 것이다.  만약 어떤 독자건 아무도 알 수 없는 글을 쓴다면 그는 정신이상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만두고 글 쓴 사람도 무슨 소린지 모르고 글을 썼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蘇塗와 山像雄常의 정체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이것은 환단고기를 필사한 사람들이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할수 없어 자신이 번역이나 해설해서 쓸 수가 없으니까 그저 원전 그대로 썻다는 증거이다.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박사는 물론 안호상박사까지 모르는 소리라는 것이다.


우선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님의 말을 들어보자 (한단고기 201쪽 참조) 

....전략 "안호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산해경의 기록을 잘라 말하였으니 참고할만 하다. 즉 '北有樹 名曰雄 常先八代帝 於此取之' 라고 雄과 常을 갈라놓고 '북에 나무가 있는데 이를 雄 이라 한다. 늘 앞서는 8대의 임금들이 여기서 이를 취해갔다'로 한 것이다... 중략 .... '산 형상의 웅상을 보게 되었다'(可見山像雄常)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다. 언젠가는 雄常의 참뜻이 한국학에서 밝혀질 날이 있을것으로 기대 한다" 라고 했다.임승국박사님의 참으로 솔직한 표현에 존경이 간다. 

이  蘇塗와 山像雄常의 비밀은 우리 뿌리말로 풀어보면 쉽게 풀린다. 이 山像雄常의 정체에 대하여 자세한 말을 하려면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고조선 유적지에서 나온 청동기 유물 금문 내용 하나만 제시하고 생략한다  

30. 신라 벼슬 각간(角干)의 뜻

환단고기에 가림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을 근거로 우리 한글자음 ㄱ ㄴ ㄷ ...ㅎ 속에 뜻이 있다는 것을 찾아 밝혀 필자는 졸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을 썼다.이는 우리 뿌리말 뿐 아니라 극히 부족한 우리의 상고사도 어느 유물보다 더 확연히 밝혀지고 잘못 변질되고 있는 우리말이나 잘못된 맞춤법등도 바로 잡을수 있다고 했다.여기서는 신라 벼슬인 각간의 뜻 하나만을 예로 쓴다.

角은 뿔이고 干 은 큰 , 칸  이다. 신라때 각간이란 벼슬은 이조때 영의정 처럼 임금 다음으로 높은 벼슬이다.그러다면 왜 각간이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각간은 우리말로 " 뿔큰" 이 된다.  

즉 임금은 뿔이 여러개인 出 자 모양의 왕관을 썼으나 각간을 큰 뿔 하나짜리 관모를 썼다는 증거가 된다.그렇다면 지금 우리말에 " 뿔큰 " 이라는 말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가? " 주먹을 뿔큰 쥔다" , " 화를 벌컥 낸다" 의 뿔큰과 벌컥의 뿌리말이 바로 뿔큰이다. [출처]http://cafe.naver.com/coreavision/310
 
 
 
 
 
 
 
 
 
 
 
 
rudus 10/09/21 [21:41] 수정 삭제  
  http://orumi.egloos.com/2920373
위 글을 보시기를,...............
저문영 10/09/28 [03:06] 수정 삭제  
  죽으면 이문영이 댁 사당이라도 세워 준답니까? 매식자들 같으니.
多勿 10/10/01 [13:42] 수정 삭제  
  환단고기를 위서라는 분들께:

[환단고기]는 한권의 책이 아닙니다.

아세요?

[삼성기], [신시역대기], [단군세기],[북부여기], [가섭원부여기], [환국본기], [신시본기], [마한세가], [번한세가],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 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
이렇게 총 13개의 각기 다른 저작들을 합쳐놓은 저작입니다.

게다가 각기 편찬자가 달라요.
안함로,원동중, 이암, 범장, 이맥 등등이 그들이며,
그 시대는 신라에서 조선 중기에 걸쳐 있습니다.

저 역시 [환단고기의 13 저작들]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관여한 인물들의 역사적 성향에 무척 조심을 해야 한다고 보지요.
이기, 계연수, 최시흥, 이덕수, 이용담, 이유립, 오형기 등, 이들은 모두 [단학회]라는 종교단체 속한 인물들입니다.
잘 알다시피, 또 다른 단군신앙단체인 [대종교]와 [단학회]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부가적으로 [단학회] 창시자인 이기가 바로 [단군세기] 찬자인 이암-[태백일사] 찬자인 이맥의 고성 이씨 집안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계연수가 이기로부터 물려받은 [환단고기의 13 저작들]이 현재의 [환단고기의 13 저작들]과 동일한 지조차 의심합니다.

결정적으로 나는 현재의 [환단고기의 13 저작들]이 이유립의 윤색이라고 봅니다.
계연수는 1911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11년판 이기-계연수의 [환단고기의 13 저작들]은 전해오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현재의 [환단고기의 13 저작들]은 이유립-오형기의 윤색이라고 여기게 되지요.
다음은 저의 생각에 대한 증거입니다.


계연수 ::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을 다하여 옮겨 적었다. 또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마련하여 인쇄에 부쳤다.

무명씨 :: 1979년에 펴낸 한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하다.
이것은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정했을 가능성을 예측케 한다.

저는 현재의 [환단고기의 13 저작들] 중에서 특히 이암의 [단군세기] 부분이 유독 심하게 윤색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윤색입니다.

[환단고기의 13 저작들]을 구성하는 나머지 12권의 저작들은 상대적으로 원본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봅니다.

은 부당합니다.
그저 정도라면 족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13권의 저작 전체가 라고 주장한다면,
그 근거로써 13권 하나하나에 대해서 일일이 을 입증해야만 당연하게도 저는 을 인정할 것 입니다.
이제껏 아무도 그런 입증을 하지 못한 걸로 압니다.
당연하지요.
저자가 확실하게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세조-예종-성종실록에 언급되는 압수서적에 버젓이 이름이 언급되는 저작들을 어떻게 라고 하겠습니까?
草然 10/11/27 [16:09] 수정 삭제  
  한단고기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나온 책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사견이 붙을수 있고 사족이 달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위서라 한다면 < 성경> 이 正書 라는 개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궁금해지는군

수많은 사람들의 손과 입을 거쳐서 영을 받아 쓰여진 성경은 정서라 하고
글을 옮겨 쓰면서 그 시대적 글자나 사견이 약간 섞이면 위서라 단정하는 모순이 대립하는 이상 후세의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다툼 투쟁하는 것외 배울 것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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