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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46)-폭풍전야의 동아정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09/12 [18:09]

대한정통사(46)-폭풍전야의 동아정세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09/12 [18:09]

 


[플러스코리아타임즈 = 안재세]  광무황제를 중심으로 대한국인들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안에도, 대한국과 동아시아를 둘러 싼 열강의 힘겨루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에 의하여 대한국에서 가장 유리한 외교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정부 내의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의견차이로 인한 동아시아 정책에 있어서의 난맥상으로 인하여 그 좋은 기회를 계속 유지하는 데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신흥강국인 명치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여, 대한국보다는 만주에서의 패권확립에 주력하는 데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아관파천 직후인 서1896년 2월 14일에 고종이 웨베르와 스페예르에게 러시아의 재정적 도움 및 조선군을 위한 조직적 훈련 등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측은 그 요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고종을 실망시키고, 또한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에 대해서 회의적이던 친일적 관료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서1896년 5월 14일에 웨베르와 소촌 사이에 이루어진 소위 ‘서울의정서’에서는 러시아의 우월한 위상을 반영해서, 친로내각에 대한 일본 측의 동의와 조선주둔 왜군 1,000명 한도 내에서 러시아군도 주둔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된 6월 3일에 러시아 수상 위테와 이홍장 사이에 열린 ‘노청 비밀동맹’에서는 조선의 영토적 통합을 보장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와 같은 무렵인 6월 9일에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산현 사이에 이루어진 소위 ‘모스크바 의정서’에서는 일본 측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누어 각자의 세력권으로 하자는 안건을 제출한 데 대해서 러시아가 거절했다. 대한국에서 대관식 축하사절로 참석한 궁내부특진관 민 영환은 로바노프에게 재정과 군사 방면의 원조를 요청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대한국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있던 프랑스의 씨에드 피브스 리유(Ciede Fives Lilles)상사(商社)는, 비밀리에 조선에 대한 차관제공을 제의하며 ‘홍콩 및 상해은행’ 회사가 서울에 지점을 설립하려 했다. 이에 놀란 위테는 노청은행(Russo-Chinese Bank) 간부인 포코티로프를 서울에 보내어 조선의 지정상태를 조사하고 차관교섭을 맡도록 했다.

 

그에 따라서 포코티로프는 조사를 마친 8월에 ‘다른 나라들이 대한국을 경제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즉각 실행해야 한다’고 보고했으나 위테는 주저했다. 같은 8월에 러시아는 스트렐비프스키 대령을 서울에 파견하고 10월말에는 귀국하는 민 영환과 함께 푸티아틴 대령이 인솔하는 러시아 교관단을 파견하여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대해서만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고종은 러시아로부터의 차관교섭이 지연되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던 중, 국민적 여망을 감안하여 아관파천 1년만인 서1897년 2월에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했다. 고종과 러시아 측과의 미묘한 갈등을 눈치 챈 명치일본 외상 대외(大隈)는 환궁 직후 고종에게 모스크바의정서를 보내어 고종을 더욱 실망시켰다.

 

고종이 일본에서 들여온 국가채무를 갚아 버리려고 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의 차관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명치정부는, 친일적인 총세무사 브라운을 움직여서 조선의 국고금으로 일본채무를 갚도록 했다. 따라서 고종은 더이상 다른 차관을 급히 도입해야 할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 측에 차관을 요구할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차관공여에는 난색을 표명한 러시아도 조선의 재정을 장악하는 일만은 중요시했으므로, 서1897년 9월초에 서울에 온 러시아 고위 세리(高位稅吏) 알렉세프는 세관관리 상태를 파악한 결과 브라운이 공금을 유용(流用)한 증거를 포착해서 브라운을 몰아내고, 11월 10일에 그 자신이 탁지부의 고문 겸 총세무사에 임명되어 마침내 조선의 재정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6월말경부터 무라비요프가 위테 대신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맡으면서부터 러시아의 관심사가 만주진출에 쏠려갔는데, 그에 따라서 조선에 대해서는 명치일본에 양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국이 선포된 지  3개월 후인 서1898년 1월에는 무라비요프를 방문한 러시아주재 일본공사 임동(林동)에게 대한국에 관해 새로이 협상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에 대해서 명치일본측은 2월 16일에 ‘훈련교관은 러시아 측이, 재정고문은 일본이 맡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2월 22일에 러시아어 통역관이던 김홍륙에 의한 광무황제 독살미수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대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는 한편 친일파들은 더욱 득세하게 되었다. 스페예르는 3월 7일에 이르러서 ‘대한국이 러시아의 원조를 필요로 하는 지의 여부’를 대한국정부에 문의했는데, 대한국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주장에 호응해서 3월 12일에 ‘러시아의 사관이나 고문은 불필요하다’고 통고했다. 이에 대해서 이미 만주경영에 우선권을 두기로 한 러시아 측은 명치일본에 대해서 ‘러시아는 여순·대련을 조차하려 하며, 대한국의 국내문제에는 관심없다’고 통보하고는 3월 27일에 실제로 여순을 점령해 버렸다.

 

그러는 한편 4월 12일에는 대한국에 파견한 훈련교관 및 재정고문을 철수시키고 한로은행을 해체하는 한편, 강경파인 스페예르 대신에 온건파인 마티우닌을 공사로 교체하는 등, 만주점령에 대한 명치일본 측의 우려와 경계에 대한 보상적인 조처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서 4월 25일에는 로젠-서(西)협상을 통하여 대한국의 경제 및 사회운영에 관한 한 명치일본측에 대폭 양보함으로써 왜족의 한반도진출 야욕을 부채질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러시아 측은 특히 명치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보다 태평양쪽에 주력할 것을 희망하여, 서1898년 5월 1일에 발생한 미군의 필리핀 공략이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태평양에서의 패권다툼에 있어서 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는 등 일본의 남진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급변에 가장 주목한 자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2세였다. 노불동맹(露佛同盟)으로 압박을 받고 있던 독일 측은 러시아의 주력을 동아시아에 돌리도록 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외교적 활동에 여유를 얻고자 했으므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긴장관계를 조장해서라도 두 나라간의 전쟁을 유발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자 했다.

 

러시아로서는 만주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을 노리고 있던 중, 서1900년 여름에 청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자 16만 대군을 만주에 파병했다. 이에 대하여 왜족은 왜족대로 8월말에 대한국을 점령하려 시도했는데, 노일간의 전쟁을 바라고 있던 빌헬름2세는 그러한 정보를 영국과 러시아 양측에 통보했으나, 러시아 측이 명치일본에 대하여 화해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만주점령에 의해 서1901년 초에 열린 노청협상(露淸協商)이 결렬되는 등 청국과 러시아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갔다.

 

  빌헬름2세는 러시아 세력의 확산을 우려하는 열강의 분위기를 이용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고자 서1901년 3월 18일에 주영참사관(駐英參事官) 에카르트슈타인을 시켜 영·일·독 삼국동맹을 제의했다. 에카르트슈타인은 주영 일본공사에게 대한국점령을 부추김으로써 왜족의 야욕을 북돋았으나, 협상이 본 궤도로 들어 가려 하자 러시아를 적으로 만들고 싶은 의향은 없었던 그 자신은 슬그머니 협상에서 빠져 나왔다.

 

카이저의 의향이야 어쨌든 간에 세계 최강국인 영국이 자신들을 도울 용의가 있음을 알게 된 이등박문은 서1901년 11월 말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대한국이 일본에게는 사활문제’라고 전제하고 '일본이 대한국에 군사적으로 개입할(즉, 침략할) 권한'을 러시아 외상에게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등박문은 러시아와의 협상을 계속 추진하고자 했으나, 계(桂;가쓰라) 수상과 소촌(小村;고무라) 외상은 러시아를 만주에서 철수시키기 위한 영일동맹을 추진했고, 서1902년 1월 30일에 드디어 영일동맹이 이루어졌다. 한편 러시아는 청국과 서1902년 4월 8일에 만주철병협약을 맺어서 만주주둔 러시아군을 일단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양국간 협약에 따라서 10월 8일에 1차 철병을 단행한 러시아 측에서는 강경론이 다시 크게 대두되면서 서1903년 4월에 실시해야 할 2차 철병을 미루고, 압록강변의 용암포에서 벌목을 하며 진지구축을 기도했다. 이에 대하여 광무황제는 왜족에게도 같은 지역에서의 벌목을 허가해 주는 등 두 나라로부터 불필요한 의혹을 사서 양국간 분쟁에 대한국이 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는 한 편, 양국간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시국외중립(戰時局外中立)'을 비밀리에 추진해 갔다.

 

  러시아 측은 5월 20일 이후 길림과 봉천 방면에 있던 러시아군을 남하시켜 요양과 해성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량과 군마를 징발하고 본국에서도 병력을 수송해 오는 등 만주확보 의지를 더욱 구체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8월에는 여순에 극동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청국의 주권을 침해했으므로 청국 측에서는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그에 응하지 않고 버텨 나갔다.

 

그처럼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 싸고 노일 두 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서1903년 8월 12일에는 러시아주재 공사 율야(栗野)가 러시아 측에 ‘대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러시아정부는 10월 3일에 ‘위도 39도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자’고 제안했고, 명치일본 측은 ‘대한국 국경 남북 50키로미터를 중립지대로 하자’고 맞제안하는 등 서기 1904년 초까지 양국간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양국은 전쟁을 향해 치달아 갔던 것이다.      

            

* 대한국을 둘러 싼 열강의 막후교섭 내용

 

  일제의 대한국침략 야욕에 대하여 적절한 국제적 견제가 이루어지고, 구미열강들이 진정으로 대한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고 있었다면 제 아무리 간교한 일제라 한들 조선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광무황제께서 많은 이권들을 서구 열강들에게 넘겨주신 것은 청일전쟁이후 조선 자체의 역량으로는 이미 막아내기 어렵게 되어 버린 일제의 음흉한 침략야욕을 서구 열강들의 힘을 빌어서 견제해 보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다. 즉, 서구 열강들이 대한국에서 얻게 되는 일정한 정도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일제를 견제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자력만으로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힘에 겨운 상태였기 때문에 자위력을 키우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도 서구 열강의 힘을 빌리는 이양제왜(以洋制倭)의 전략은 필요했다. 광무개혁으로 일컬어지는 국정의 일대 쇄신을 통하여 내정을 튼튼히 가다듬으면서 방위력을 증강하려는 것이 광무황제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세계정세는 광무황제나 애국지사들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 당시 세계 최강대국임을 자랑하던 영국과 태평양지역에서 새로운 강대세력으로 떠오르던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저들의 국가적 이익을 보다 더 확대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전략에 따라서 동아시아에 있어서 최대의 위협세력으로 여겨졌던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막기 위한 모든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크리미아전쟁과 아프카니스탄전쟁 등에서 영국등 서구세력에 패배하여 부동항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던 러시아는 마지막 남은 출구인 태평양지역에서만은 기필코 부동항을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따라서 그들은 대한국의 동해안과 청국의 요동반도 등을 이용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더 이상 강대해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던 서구열강들은 부동항 확보를 위한 러시아의 노력을 무산시키려는 동일한 희망을 갖고,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데 있어서만은 하나로 결속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이 일제의 승리로 끝난 후 일제의 괄목할 만한 군사력에 주목하게 된 영국과 미국은 대한국에 대한 이권을 두고 일제와 다투는 대신에,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전초기지로서 일제를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국에서의 일제의 입장을 두둔해 주고 그 대신 저들의 이권이 크게 걸린 청국과 태평양지역에서의 저들의 이권에 대해서는 일제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후진국으로서 국력이 과히 충실하지 못했던 러시아로서도 또한 일제와의 직접 충돌을 원치는 않았기 때문에 대한국에 대하여 일제와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공동관리를 하는 정도로 만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만은 대한국에 대하여 시종일관 사활적인 집착을 가지고 독식하고자 벼르고 있었던 것이니, 동상이몽의 국제정치 역학관계하에서 모든 정세는 대한국의 자주독립에 점점 불리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서의 청국에 대한 일제의 우선권을 인정하며 청일전쟁을 마무리 지은 마관조약 이후 노일전쟁 전야에 이르기까지 약 10여년간 대한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열강들 상호간의 공개적·비공개적 협잡(소위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4230년(서1987) 10월 12일 대한국선포 이전까지는 ‘조선’ 국호 사용, 선포 이후는 ‘대한국’ 국호 사용)

    

  1. 조선문제에 관한 노일 양국간의 ‘웨베르-소촌<小村:고무라>협정’

 

              = 서울각서(覺書)        -서기1896년 5월 14일 조인

  : 이 각서는 아관파천에 당황한 일제가 당장은 무력으로 러시아를 꺾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조선에 대하여 러시아와 권익분배를 도모한 끝에 이루어 졌다. 이 때 일제는 러시아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세력균형을 시도하여 대한국의 내각교체를 기정사실로 인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일제에게 불리한 것이 되었고, 이때부터 일제는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하는 군비확장에 돌입한다. 또한 이 협정에 따라서 서울·부산·원산에 서로 같은 수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2. 청로밀약(淸露密約)                -서기1896년 5월 22일 조인

 

   :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이 그 나름대로 일제의 대륙침략을 막는 데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고 시도한 조약이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두 나라 대표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일제 및 기타 세력의 배제를 전제로 하여, 시베리아 철도의 만주횡단을 위한 ‘동청철도’부설 밀약을 맺게 되었다.

    

  3. 조선문제에 관한 노일 모스크바의정서

 

   =로마노프-산현<山縣:야마카타>협정) - 서기1896년 6월 9일 조인

   : 같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서 러시아와 일제간에 이루어진 협정. 일제는 일전의 ‘서울각서’에서 약화되었던 입지를 강화하고자 러시아에 대하여 ‘조선 38도선 분할론’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했는데, 결국 조선에서의 일제의 권익에 대한 부분적 인정과 일제군대의 제한적인 주둔까지 합의하게 된 협정이다.

 

즉, 조선의 재정에 대해서 노일양국이 공동으로 조언하고 공동으로 차관공여를 하기로 하여 경제분야에 있어서 온갖 횡포를 총동원해서 20여년간 어거지로나마 확보했던 일제의 우위가 손상되었다. 또한 두나라 중 다른 한 나라의 동의가 없이는 조선에 출병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출병시에는 양국 군대의 행동범위와 양국 군대사이의 중립지역 설치를 사전에 협의하도록 하여 일제의 야욕에 큰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 러시아황제의 대관식에 조선 측에서는 민 영환을 파견했는데, 이 때 러시아는 조선 측의 요청에 대한 회답형식으로 고종의 안전에 대한 도의적 보장·조선군 훈련을 위한 고급장교파견·차관공여·재정및 군사고문의 파견 등을 약속하여, 일제의 침략을 외교적 방법을 총동원하여 막아내고자 하던 조선의 위정자들을 대단히 고무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나친 한반도 진출욕심은 조선인들에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많은 반발을 일으켜서 한반도 대신 만주 쪽으로의 진출에 주력하게 되었고, 서기 1898년 3월 27일에는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함으로써, 다른 열강들을 따돌리고 만주에서의 우선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게 되었다.

    

  4. 대한국문제에 관한 노일의정서(로젠-서<西:니시>협정)

                                      -서기1898년 4월 25일 조인

   : 구미열강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고 일제에 의한 대한국지배를 외교적으로 도와 준 결과 이루어진 협정이며, 러시아는 그에 따라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한국에서의 세력다툼이 일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지워 졌고, 구미열강의 협조로 자신감이 생긴 일제는 가상적국 러시아에 대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대외적 입장표명은 ‘대한국을 바라지는 않지만 대한국이 다른 나라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도 원치 않는다. 특히 일본이 발판을 갖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만일 일본이 대한국점령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곧 러시아에 대한 전쟁원인(즉, 선전포고)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5. 영일동맹조약                      -서기1902년 1월 30일 조인

 

   : 영국은 청국에서의 권익을, 일제는 대한국에서의 권익을 서로 인정하고 쌍방간에는 침략전쟁을 하지 말자는 조약이며, 이는 영국이 자랑하는 소위 ‘신사도(Gentlemanship)’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국제적으로 대표적인 선례로 남게 되었다.

    

  6. 노일간의 한반도분할 논의

 

   1)서기 1898년 일제의 제의 : 북위 38도선 기준으로 남북 분할(친로정책의 영향) : 대한국이 수립되면서 대한국정부에서 친로정책을 추진하자 당황한 일제는 러시아에게 몰래 38도선을 경계로 각각의 세력범위를 나누자고 제안한 적이 있으나 한반도 전역에 대한 세력확장을 꾀하던 러시아측에서 거부함

 

   2) 서기 1902년 러시아의 제의 : 북위 39도선 기준으로 남북분할(영일동맹 영향) : 영국의 강력한 지원을 약속한 영일동맹이 성립하자 기세가 등등해 진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추진하자 러시아 측에서 전쟁을 피하려고 39도선을 세력범위로 하자고 한 발 물러났으나, 이번에는 일제가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거부함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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