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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70), 밀사로서 자결을 해야 했던 검사,외교관 리준선생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12/20 [16:40]

대한정통사(70), 밀사로서 자결을 해야 했던 검사,외교관 리준선생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12/20 [16:40]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일제와 친일간신배들의 농간에 의하여 엉터리 칙명이 조작되고 있는 동안에도 리준, 리상설, 리의종 세 밀사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대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받기 위하여 불철주야 각국 대표들을 만나며 평화회의에서의 발언권을 얻기에 노력하고 있었다.

 

▲ 특사 리준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그러던 중 7월 14일에는 평화회의장에서 교전조규(交戰條規) 및 중재재판제도(仲裁裁判制度) 등에 대하여 각국 대표들 간에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각 열강들의 세력과시와 국가이익이 첨예하게 걸린 토론은 쉽게 결론이 날 수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결국 별과위원회에 회부하여 조정하기로 결정되어 회의는 잠시 휴식상태에 들어갔다. 밀사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의장에게 발언권을 요구하였고, 넬리도프의장은 밀사들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 주었다. 발언자인 이 준은 단상에 올라서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표한 후, 일본의 비행에 대하여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저는 대한국 황제의 밀조를 가지고 온 밀사입니다. 우리 황제폐하께서 제게 밀조를 내리시고 제가 밀사로 오게 된 그 동기와 그 사정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깊은 양해와 동정을 구하는 바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세계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궐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대한국은 예로부터 독립국가로서 동양 여러나라들 간에 교류하여 왔으며, 서기 1882년에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격식도 갖추었고, 그 후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우호의 관계를 맺어 온 것입니다. 우리 대한국은 일본보다도 먼저 만국우정회의(郵政會議)에 참가하는 등 독립국으로서의 국격을 갖추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영일동맹을 맺고 노일전쟁에 승리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대한국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하였습니다. 그 조약에 대하여 대한국 황제폐하와 참정대신이 강경하게 반대한 바 있으나 매국적 대신들과 짜고 비밀리에 협잡으로 체결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무효한 조약을 내세워 대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에 간섭한 것인데, 그러한 조약을 믿고 각 나라가 대한국에서 공사관들을 철거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 후 일본은 백만의 육군과 해군으로 대한국을 협박해서 대한국의 정치·경제·풍속·제도·법률 등 모든 것을 함부로 파괴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수 년도 못 가서 대한국은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우리 대한국은 비록 약소국이라 하나 4천년의 역사와 2천만의 국민이 있으니 어찌 저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완전독립을 위해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분투할 것입니다‥

 

우리 대한국은 열강에 비하면 대단히 약소한 나라입니다만 일찍이 자주 독립을 상실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 일본은 우리나라를 탄압하고, 우리 황제폐하를 협박하고, 우리 민족을 기만해서, 신성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대한국과 일본사이의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고치지 않고서 세계평화나 동양평화 등을 논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저는 감히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야욕을 지금 물리치지 않으면 동양평화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고,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준의 열렬한 웅변은 일제전권 가등을 제외한 대부분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펼쳐졌다. 이 준은 일생일대의 모든 정력을 기울여서 각국 대표들에게 조국의 현실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넬리도프 의장이 갑자기 이 준의 발언을 중지시키고는 대한국황제로부터 왔다는 답신을 발표했다. 그것은 이등과 이완용의 합작품인 사기적 전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의장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한국황제폐하는 밀사를 특파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셨다고 합니다.” 라고 알렸던 것이다.

 

매국노도당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밀사들은 의장의 발표를 듣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는데, 약삭빠른 일제대표들은 그 기회를 타고 의장에게 즉시 밀사들을 퇴장시키라고 요구했다. 이 준은 의장에게 기왕에 하던 발언을 잠깐만 더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밀사들의 입장을 딱하게 여긴 넬리도프 의장은 일제대표들의 발악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발언을 허락했다. 그러자 이 준은 미리 준비해 간 대한국의 항의서를 미국전권인 쇼트에게 전달하고 발언권회수를 중지하도록 간청했다. 항의서를 받은 쇼트는 그 내용을 워싱턴에 보내서 문의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미국이 대한국에 대해서 호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의장과 미국전권의 호의에 힘입어 발언을 계속할 수 있게 된 이 준은 다시 연설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저는 우리 황제폐하께서 보내셨다는 답전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밀조를 받들고 왔음은 천지신명이 알고 있습니다. 저 답전은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친일주구배 간신들과 일제가 위조한 것이거나, 이등이 우리 황제폐하를 협박하여 만들어 낸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저 답전은 결코 우리 황제폐하의 뜻이 아님을 선언하는 바이며, 그러므로 저는 우리 황제폐하의 밀사자격을 버리지 아니하고 간단히 본론을 종결짓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악행은 만고에 그 유례를 듣지 못했던 것으로서, 그 수단의 교활함과 그 방법의 악독함에는 누구나 놀랄 것입니다...우리 대한국이 당하고 있는 일을 강건너 불보듯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이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사단을 조직해서 대한국의 실정을 잘 살펴 세계평화의 적을 제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대한국의 자주독립을 도와서 세계 여러나라의 당당한 일원으로 함께 나아가도록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열변을 토해 온 이 준은 굳은 결심을 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 밀사일행에 대해서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신 의장과 미국전권 및 각국 대표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세계 각국이 하루바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도록 비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이 한 몸을 희생하여 우리 대한국동포들이 모두 무도한 일제에 항거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나라를 위하여 그 생명을 바칠 결심이 있음을 실제로 보이려 하는 바입니다.”

 

이 준은 이와 같은 최후의 비장한 말을 마치고는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온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비장감이 감도는 연설에 어리둥절한 각국 대표들이 설마하고 있는 가운데, 이 준은 연설대위에 선 채로 웃옷을 펼쳐 제끼고는, “대한독립만세! 세계약소국가만세!”하고 크게 외친 후 단숨에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조국애에 불타는 열사의 신성한 붉은 피는 연단과 회의장 앞에 흩뿌려졌으며, 각국 대표들은 그러한 대한국 밀사 이 준의 돌발적이고도 애국적인 행동에 모두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의장내에 있던 경호원들도 놀라서 연단으로 달려왔고, 옆에 있던 이 상설과 이 위종 두 밀사들도 당황한 가운데 급히 이 준열사를 부축했으나 이 준열사는 심한 출혈로 이미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두 사람은 북받치는 슬픔을 참을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이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참석자들과 각국의 보도원들은 숙연한 가운데 이 준 열사의 목숨을 바친 애국심에 말없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불세출의 애국자이자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지이기도 했던 이 준 열사의 시신과 함께 조국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된 이역 수만리의 두 밀사는, 우선 헤이그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매장을 한 후 위령제를 지내기로 하였다. 이 준 열사의 애국심에 경탄을 금치 못한 각국 대표들은 서로 의논하여 조의금을 거두었고, 두 밀사는 그 돈으로 묘지를 얻을 수 있었다. 위령제에는 넬리도프 의장을 비롯한 많은 외국대표들이 참석하여 이준열사의 위국충절을 기렸으며, 넬리도프 의장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 대한국밀사 이 준선생의 영혼은 영구불멸할 것이다. 바라건대 대한국이 어서 완전 자주의 독립국이 되어 이 유해가 고국에 돌아가 묻힐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준 열사의 명복을 비는 각국 대표들의 애도와, 남아 있는 두 밀사의 오열 속에 위령제는 끝났다. 두 밀사는 묘 주위에 철책을 세웠고 묘 앞에 대리석으로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적힌 비석을 세웠다.

 

“李 儁

1858년 대한국 북청(이전 함경도 동남부 삼개지역 삼살(三撒). 현 하바로프스키 3개지역 일대)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공화국 헤이그에서 순절하다”

 

열사의 이름은 이 상설이 썼고, 이 위종은 영문으로 그 내용을 적었다. 대한매일신보(7월 19일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어서 열사의 순국사실을 보도했다.

 

‘의사자재(義士自裁)

전 평리원검사 리 준씨가 현재 만국평화회의에 대한국특파원으로 전에 간 사실은 사람들이 다함께 알고 있는 바이어니와, 어제 동경에서 온 전보에 의하면 리 준씨가 충분(忠憤:충성되고 분노함)한 지기(志氣)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의 사신들 앞에서 뜨거운 피를 뿌려 만국을 놀라게 하였다더라.’

 

또 황성신문(7월 19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이씨자살설

금번 해아만국평화회의에 이 상설·이 준·이 위종씨 등이 참여코자 하다가 거절을 당하였다함은 본보에 이미 게재했거니와, 다시 들은 즉 세 사람 중에 이 준씨는 분노와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배를 갈라 자살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同友會)에 왔다는 설이 있더라’

 

대한매일신보(7월 19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도 실린 바 있다.

‘극구비분(極口悲憤)

해아에서 자살한 이 준씨 부인이 남편이 자살한 소식을 들은 후로 음식을 전폐하고 산발하고 까무라쳐 유혈이 낭자하며, 세번이나 기가 막혀버리거늘 어제 여자교육회에서 일제히 가서 위로하고 여러 가지로 달래건대 부인이 말하기를 나라가 없어도 살 수 없고 가장이 없어도 살 수 없으니 백번을 생각해도 살 길이 묘연하다고 했다더라’

이 준 열사의 자결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많은 외국인들도 열사의 충혼을 기렸으니, 당시의 청국대총통 원 세개도 다음과 같이 이 준 열사의 애국충정을 기렸다.

 

‘근만 일성 이 준선생(謹輓 一醒 李儁先生)

부흉천혈시심진 장절편경천하인 만리혼귀미고국 천가루새곡충신 기연처자난명목 위보군왕불유신 대의당당현일월 천대응결이제린

(剖胸濺血示心眞 壯節便驚天下人 萬里魂歸迷故國 千家淚洒哭忠臣 豈緣妻子難瞑目 爲報君王不有身 大義堂堂懸日月 泉臺應結夷齊隣)

- 가슴을 갈라 피를 뿌려 마음의 참 것을 보이니

장한 절개에 문득 천하의 사람들이 놀랐어라

만리에 혼이 돌아오며 고국이 희미하고

일천개의 집에서 눈물을 뿌려 충신을 곡하노라

어찌 처자를 위하여 눈감기를 어려워했으리

군왕께 갚음을 하니 몸을 두지 않았도다

당당한 대의가 일월과 같이 높았으니

천대에서 응당 백이 숙제의 이웃을 맺었으리 - ’

 

이 준 열사의 위령제를 마친 두 밀사는 열사의 뜻을 이어서 계속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하기로 하고 국제협회를 찾아가서 각국 대표들을 다시 만나면서 대한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이 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에 자신의 열렬한 애국심을 실어서 많은 연설을 했으며 구미각국 대표들의 큰 호응을 얻어내었다. 7월 20일에 그가 한 연설을 들은 미국전권 쇼트는 대한국의 항의서를 긍정적으로 접수했으며 워싱턴정부에 의사를 묻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확정해 버린 바 있는 미국정부로부터 대한국에 대한 협조를 얻어내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밀약이 성립된 것을 알 길이 없던 두 밀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국의 ‘양심’에 호소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밀사들의 눈부신 활약에 당황한 일제는 각국 대표들에게 밀사들을 비방하고, 또한 엄청난 자금살포와 뇌물로 각국대표들 및 언론 등을 매수하여 저들에게 유리하게 여론을 유도해 갔고, 이미 영일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영국 또한 결국에는 일제의 편을 들고, 본질적으로 열강들의 힘겨루기회의에 불과했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다른 열강의 대표들도 일제와 그 본질상 생리가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밀사들의 노력은 마침내 아무런 긍정적인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밀사는 만국평화회의에 기대하는 것보다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각국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양심적인 지지를 호소하는 외교전략을 펴기로 하고 헤이그를 떠났다. 그것은 적수공권, 고립무원의 밀사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선의 방책이기도 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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