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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50]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03

제23대 아홀(阿忽)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1/14 [09:53]

[홍익인간 7만년-150]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03

제23대 아홀(阿忽)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1/14 [09:53]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1237년 천왕의 숙부(叔父)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였다.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낙랑홀(樂浪忽)에 봉하다]

 

고불가(固弗加)는 색불루(索弗婁)의 아우이다. 고불가, 색불루로서 불(弗)자를 돌림 이름으로 쓴 것이 된다. 불(弗)은 뿌리(本), 벌(原), 뿔(角) 등의 이두식 표기가 된다. 여기 불(弗), 또는 불루(弗婁)는 뿌리(本, 根)를 가리키는 표기로 보인다. 불루(弗婁)와  단군왕검의 태자였던 부루(扶婁)의 이름 글자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단군왕검의 넷째아들로서 막내인 부여(扶餘)라는 이름이 벌(原)판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는 바, 불루(弗婁) 또는 부루(扶婁)는 벌(原)이라는 뜻보다 뿌리(本)로 풀이되는 것이다.

 

낙랑홀은 후대의 소위 낙랑군(樂浪郡) 자리가 되며, 고불가(固弗加)는 고불(固弗)의 가(加)로서 새로운 집안(家)을 시작한 것이 된다.

 

[고을나(高乙那)를 신도후(神島侯)에 봉하다]

 

서기전1237년경에 태자 연나(延那)의 아우 을나(乙那)를 신도후(神島侯)에 봉하다.

 

아홀 천왕이 숙부 고불가를 낙랑홀 임금으로 봉하면서 작은 아들 을나를 지금의 제주도(濟州道)가 되는 신도(神島)의 제후로 봉한 것이 되는데, 직위로 보아 군(君)에 해당된다. 즉 제주(濟州) 고씨(高氏)의 시조는 고을나(高乙那)인 것이며, 단군조선의 종실이 되고, 후대 고구려 고씨와 같은 씨족인 것이다.

 

[은나라를 정벌하다]

 

서기전1237년 천왕께서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군(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사가 은(殷)나라 땅에 여섯군데의 읍(邑)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결정을 보지 못하므로,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웅갈손은 단군조선 진한(眞韓)에서 파견된 장수가 되고, 남국군(藍國君)은 남국의 임금이며, 웅갈손의 군사와 남국의 군사가 연합하여 은나라 땅을 정벌하여 6읍을 설치하였던 것을 웅갈손과 남국 임금이 관망하면서 은나라 사람들의 동태를 살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갈팡질팡하면서 혼란속에 있으므로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쳐부수어 마무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웅갈손(熊乫孫)과 남국군(藍國君)의 군사가 정복한 은나라 땅의 6읍은 남국의 서방이나 서남방이 되는 산동지역의 서쪽 지역이 될 것이다. 

 

[신독(申督)의 반란진압과 환궁(還宮)]

 

서기전1237년 가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서기전1250년 신독의 반란으로 색불루 천왕이 백성들과 함께 이궁(離宮)인 영고탑(寧古塔)으로 피난하였다가 대를 넘겨 13년째인 아홀 천왕 때인 서기전1237년 가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환궁하였던 것이며, 반란자 신독의 무리로서 포로가 된 자들을 석방하였던 것이다.

 

[엄(淹), 서(徐), 회(淮)를 봉하다]

 

서기전1236년 을유년(乙酉年)에 남국군(藍國君) 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0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합쳐 이르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으로, 영고씨(盈古氏)를 서(徐) 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각각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기풍을 우러러보며 겁을 먹고 감이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남국과 청구국과 구려국의 임금은 일반 제후(諸侯)가 아닌 군(君)으로서 단군조선의 천군(天君)에 해당한다. 그 외 고죽국, 진번국, 부여국의 임금도 군(君)이다. 몽고리의 임금을 한(汗)이라 하나 천왕의 아우가 봉해졌으므로 군(君)에 해당하게 된다.

 

남국과 청구국과 구려국과 몽고리국의 군사가 연합하여 은나라를 공격하였는데, 회대(淮岱)지역 즉 대종(岱宗)인 태산(泰山) 지역에서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회수(淮水)에 이르는 지역을 정벌하여 각각 제후를 봉한 것이다. 

 

엄국(淹國)은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엄이(淹夷)라 하는 나라이며,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것이다. 태산지역이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노(魯)나라 또는 제(齊)나라에 속하게 된 때에 엄국이 축소되거나 망한 것이 된다.

 

서국(徐國)은 산동지역의 남방에 위치한 나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서이(徐夷)라 하는 나라이며, 후대 주(周)나라를 압박하여 36국(國)의 종주(宗主)가 된 서언왕(徐偃王)이 다스리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서기전1236년에 세워져 서기전512년 오(吳)나라의 합려왕에게 망하기까지 725년의 역사를 가진다.

 

회국(淮國)은 서기전2267년에 도산(塗山)회의가 열렸던 회수 지역에 서기전1236년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회이(淮夷)라 하는 나라이며, 서기전221년경 진시황의 진(秦)나라에 망하기까지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이다.

 

부도지(符都誌)에서 부루씨(夫婁氏)가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히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번성하게 되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여기서 부루씨는 곧 색불루 천왕의 후대 시기의 천왕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운해족은 황하 이남의 산동지역의 황족(黃族)과 남족(藍族) 및 회수(淮水) 지역의 남족(藍族) 등 내륙의 소위 동이족(東夷族)과 양자강 유역의 적족(赤族, 南蠻)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서기전1285년에 즉위하자마자 그해 11월에 직접 은(殷)나라를 정벌하였고, 서기전1266년에는 서남방의 빈기(邠岐)의 땅을 점령하여 여(黎)라는 제후국을 세웠으며, 이후 아홀 천왕 때인 서기전1237년과 이듬해에 대대적으로 은(殷)나라 땅을 공략하면서 엄(淹), 서(徐), 회(淮)라는 제후국을 산동지역과 회수(淮水)지역에 걸쳐 세우면서, 하(夏)나라의 대를 이은 은(殷)나라를 통제하고 통합하려는 차원에서 전초기지로 삼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미 이도(異道)가 번성하여 단군조선의 정치문화제도에서 벗어나, 은(殷)나라도 하나라의 제도를 답습함으로써 독자적으로 폐쇄정치를 하고, 이후 주(周)나라를 거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말마암아 이탈(離脫)이 심화되고 고착화되어 더 이상 되돌리기에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이 된다.

 

춘추(春秋)시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주(周)나라는 천자국(天子國)으로서 단군조선을 천왕(天王)의 나라인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주나라의 제후국들은 주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신 정치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춘추시대 이후 패권주의(覇權主義)가 남발하면서 종주국(宗主國)인 주(周) 조정을 무시하게 되고,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아예 스스로 천자(天子) 즉 왕(王)이라 칭하면서 전쟁을 일삼게 되니,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후 진시황의 출현으로 주(周)나라 땅이 평정되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요순하은주(堯舜夏殷周)의 상국(上國)이던 단군조선의 후계국을 상국(上國)이 아닌 전쟁으로 차지하려는 정벌(征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왕도(王道)와 인도(人道)가 사라진 말세(末世)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이후에는 신제자(臣弟子)의 나라였던 고대중국(古代中國) 땅에서 일어난 나라들이, 군사부(君師父)의 나라였던 고대한국(古代韓國)을 오랑캐나 미개인으로 날조함으로써 그들의 종주(宗主)이자 스승(師)이자 조상(祖上)을 업신여기는 패륜아적(悖倫兒的)인 족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고탑(寧古塔) 천도(遷都)를 건의하다]

 

서기전1233년 무자년(戊子年)에 마한(馬韓) 여원흥(黎元興)이 명을 받고 진조선(眞朝鮮)의 도읍인 백악산아사달에 들어가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간하였는데, 천왕이 마한(馬韓)과 번한(番韓) 및 오가(五加)들을 불러서 불가하다며 따르지 않고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서기전1280년에도 신지(臣智) 육우(陸右)가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한 적 있었으며, 47년이 지난 서기전1233년에도 마한(馬韓) 여원흥이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나, 천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태자 연나 즉위]

 

서기전1162년 기해년(己亥年)에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서기전1285년 이후 단군조선의 천왕의 대를 거의 태자가 이으면서 그냥 아들로서는 3분이 잇게 되는데, 전기 단군조선에서는 우가(牛加) 7분과 양가(羊加) 2분이 천왕으로 즉위한 것으로 된 것과는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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