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가 없으면 역사 또한 없다. 역사가 시대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쓰여 지듯이, 사료 또한 새롭게 주목 받아야 하고, 사가는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사료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비로소 역사와 만날 수 있게 된다. 역사란 보는 눈이 다르면 비치는 모습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료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의 벽을 허물고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에 이르도록 사료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쳐다보지도 않았던, 일제가 그렇게 말살하려고 했으나 끈질기게도 남아있는, 여러 문헌들에 대한 사료로서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연개소문과 고구려와 수 ․ 당과의 전황에 대한 서술은 전적으로 중국 사적에서 따온 것이라고『삼국사기』에서 밝혔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하나같이 왕을 시해한 포악한 역적이며, 폭정으로 결국은 고구려를 망하게 한 원흉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전황에 대한 서술 역시 철저하게 춘추필법에 의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연개소문에 대한 김부식의 평가가 중국 측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데에 유념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에서 본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단재의「조선상고사」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에 앞서,『태백일사』에서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보자. 『삼국사기』와 다른 부분이 많다.『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 앞부분만 옮겨왔다. 지금 이 史料를 보고 계시는 분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가 궁금하다. ▶『삼국사기』개소문(蓋蘇文)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며 성은 천씨(泉氏)인데 자칭 수중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였다. 외양(外樣)이 웅위(雄偉)하고 의기(意氣)가 호방(豪放)하였다.(중략) ▶『태백일사』낙양(洛陽)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泉南生)의 묘지명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조대기朝代記』에 이르기를,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 하며 성은 연씨(淵氏)이다.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며, 아버지는 태조(太祚)라 하고, 조부는 자유(子遊)라하며 증조부는 광(廣)이라 했는데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특히『태백일사』에는 ‘광개토호태왕’의 치적을 기록한 비가 있다고 했는데, 일제 시대에 만주에서 실제로 비가 발견됨으로써 사실(事實)로 입증되었다. ▶『태백일사』고구려 본기의 내용- “동압록(東鴨綠)의 황성(皇城)에 광개토경대훈적비(廣開土境大勳蹟碑)가 있다.” 『태백일사』고구려본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보자.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儀表雄衛)’하고 ‘의기호일(意氣豪逸)’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緯)로 삼고 하늘을 경(經)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느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 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高成帝)를 내어쫒고 무리와 더불어, ‘고장(高藏)’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寶藏帝)’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성기(成己)’, ‘자유’, ‘개물(開物)’, ‘평등’으로 하고, ‘삼홀(三忽)’을 ‘전(佺)’으로 하고 ‘조의(皂衣)’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벽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上佐平)과 함께 의(義)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金春秋)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고하였으나, 춘추는 종내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한 일이었다.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역사- 그깐거 몰라도 잘 먹고 잘 살아 왔다."라는 인간들을 보면 돌아서서 욕하지만 마음은 아프다. 결국은 추악한 범죄로 연결되기 쉬운 학연, 혈연, 지연을 떠나 순수하고 건강한 만남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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