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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177]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30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08 [11:01]

[홍익인간 177]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30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08 [11:01]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239년 임술년(壬戌年) 4월 8일에 23세이던 종실(宗室)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천왕의 자리에 오르고자 몰래 수유(須臾) 사람 기비(箕丕)와 약속하고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서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단군조선 멸망, 해모수의 출현 -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키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종실인 원래 고씨(高氏)이며, 서기전239년 4월 8일에 23세의 나이로 번조선의 기비(箕丕)와 모의하여 쇠퇴하여 가던 단군조선의 옥새(玉璽)를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처음 웅심산(熊心山)을 근거지로 삼아 기다리다가 하산하여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며, 장당경(藏唐京) 이전의 서울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던 것이다.

 

해모수는 서기전239년 군사를 일으키고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천왕(天王)이 아니라 천왕이 될 자격을 가진 사나이라는 말로서, 천왕의 자제(子弟)라는 말이 된다. 천왕랑(天王郞)은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천지화랑(天指花郞)과 같은 의미가 된다.

 

여기 해모수(解慕漱)는 원래 고씨(高氏)로서 고모수(高慕漱)이기도 하고 북부여 시조로서 대해모수(大解慕漱)라고 하는데, 고주몽의 아버지가 북부여의 제후국인 옥저국(沃沮國)의 제후 즉 옥저후(沃沮侯)이자 일명 불리지(弗離支)인 고모수(高慕漱)로서 고씨(高氏)는 해씨(解氏)이므로 곧 해모수(解慕漱)이기도 하며, 후기 북부여 시대인 서기전59년에 고두막(高豆莫) 단군의 아들로서 북부여 단군이 된 고무서(高無胥)가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므로 소해모수(小解慕漱)라 불렸다.

 

즉, 역사기록상 해모수가 3분이 있는데, 북부여 시조인 대해모수(大解慕漱), 후기 북부여의 단군 고무서인 소해모수(小解慕漱), 고주몽의 아버지인 옥저후 불리지(弗離支)가 있는 것이 된다. 고(高)는 높다는 뜻이며 지상에서 볼 때 높은 것은 하늘에 떠있는 해(解, 태양)이므로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고씨(高氏)를 두고 해(解)로써 성씨를 삼은 것이 된다. 고(高)라는 글자는 높은 성(城)을 나타낸 상형문자가 되는데 그 옛 발음이 호(戶)에 가까워 해(解, 태양)와 상통하는 소리와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 천왕랑이 북부여 수도를 난빈(蘭濱)에 정하다]

 

해모수(解慕漱)는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빈(蘭濱)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광(龍光)의 칼(釰)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종자들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더니 이에 즉위하였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다.

 

웅심산(熊心山)은 상춘(常春) 즉 백악산아사달 또는 여기에 가까이 있는 산으로서 개마산(蓋馬山)을 가리키며, 개마산은 북개마(北蓋馬) 또는 서개마(西蓋馬)로서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산이 된다. 웅심산을 뒤로 하고 궁궐을 지은 것이 되는데, 난빈(蘭濱)이라는 곳은 강가에 있는 것이 된다. 당시 수도가 장당경으로서 중부여(中夫餘) 땅이 되는데 상춘 즉 백악산아사달과 웅심산은 북부여 땅이 되므로 해모수의 나라를 북부여라 하는 것이다.

 

개마산(蓋馬山)의 개(蓋)의 옛 발음이 해(解, 태양)와 유사하거나 음운변화로 인하여 개마산은 해마리산으로서 백두산(白頭山:희마리산)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시대와 북부여 시대에는 해마리산 즉 개마산(蓋馬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서개마(西蓋馬) 또는 북개마(北蓋馬)인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개마산과 지금의 백두산인 동개마(東蓋馬)가 있었던 것이 된다.

 

해모수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던 것인데, 오우관은 단군조선 시대 국자랑(國子郞) 즉 천지화랑(天指花郞)들이 머리를 장식하던 관이며, 측근으로 500인(人)을 두고 함께 오전부터 낮 동안에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정사(政事)를 돌보고, 밤에는 궁궐로 돌아갔던 것이다. 즉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적은 것은 낮에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순방정치(巡訪政治)를 하다가 밤에는 궁(宮)으로 숙소로 되돌아 가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 해모수의 고향이 고리국인데, 여기 고리국은 곧 구려국(句麗國)이며, 구려국은 처음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인 부소(扶蘇)가 봉해진 나라이고, 서기전1285년 이후 색불루 단군 또는 이후 고씨단군의 친족이 봉해진 것이 된다. 해모수(解慕漱)는 고씨 단군의 종실로서 역시 원래 고씨(高氏)인 것이다. 고리(藁離)와 구려(句麗)는 가운데 땅, 가운데 나라, 중국(中國)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단군조선 시대 구려국의 위치는, 지금의 서요하 상류지역에서 서쪽으로 다시 서남쪽으로 태원의 북쪽에 위치한 대동(大同)에 이르는 지역으로서, 북쪽에는 몽골이 있고 서쪽에는 선비와 흉노가 있었으며, 남쪽에는 태항산(太行山) 서쪽이자 태원(太原)의 북쪽으로 은(殷) 기자(箕子)가 망명한 땅인 기후국(箕侯國)이 있었고, 태항산 동쪽으로 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있었으며, 남쪽에 위치한 패수(浿水, 난하) 중류지역에 낙랑홀(樂浪忽)이 있었고, 그 남쪽에 발해만 유역에 걸쳐 번한(番韓) 즉 번조선(番朝鮮)이 위치하였으며, 구려와 번한의 동쪽으로 지금의 요하 서편에 진번국(眞番國)이 있었는 바, 단군조선 전체의 영역으로 보면 동서를 기준으로 동해(東海)와 티벳 또는 청해(靑海) 사이에 위치하여 거의 중앙에 자리한 나라가 된다. 

 

[고열가 천왕께서 오가(五加)들에게 나라를 맡기다]

 

서기전238년 계해년(癸亥年)에 천왕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어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난리를 자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따라주지 않았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쇠퇴하였다.

 

3월 16일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五加)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열성조(列聖祖)들께서 나라를 열어 대통(大統)을 이어가실 때는 덕(德)을 심어 널리 미쳐 오랜 세월 법(法)이 되었으나, 이제 왕도(王道)는 쇠미(衰微)하여지고 여러 한(汗)들은 강함을 다투는데, 짐은 덕이 엷고 겁이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며 방책(方策)을 세워 어진이를 불러 무마시키지 못하여 백성들은 흩어지니, 너희 오가(五加)들은 어진이를 택하여 천거(薦擧)하라” 하시며, 옥문(獄門)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게 하였다.

 

이튿날인 3월 17일에 마침내 천왕 자리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신선(神仙)이 되시니, 이에 진조선(眞朝鮮)의 오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6년을 하다가 마침내 회복하지 못하고 서기전232년에 해모수에게 나라를 넘김으로써,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시작된 단군조선은 2,102년만에 종말을 맞았다.

 

여기서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단군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며, 6년 후인 서기전232년에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던 해모수가 오가(五加)의 공화정(共和政)을 철폐하여 접수함으로써 이에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니 천왕으로 즉위한 것이 되어, 서기전232년에 단군조선이 완전히 망한 것이 된다.

 

서기전238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단군조선은 천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가(五加)의 공화정(共和政)이 실시되었던 것으로, 나라가 없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의 역년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2,102년이 되는 것이다.

 

[해모수 천왕랑의 3월 제천과 연호법(煙戶法) 제정]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호법(烟戶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을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해모수가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한 후, 고열가 천왕이 3월 16일에 제천하는 것과는 별도로 제천행사를 벌인 것이 되는데, 이는 신하의 도리로 보면 반역행위이나,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으로서 천군(天君)의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 된다. 천왕랑(天王郞)은 천왕(天王)의 자제(子弟)로서 천군(天君)격, 천왕(天王)격에 해당한다.

 

고열가(古列加) 천왕이 43대 물리(勿理) 천왕의 현손(玄孫)으로서 후기 단군조선의 종실(宗室)이기도 하며, 해모수(解慕漱)도 원래 고씨(高氏)로서 종실(宗室) 즉 천왕족(天王族)이 되는데, 제44대 구물(丘勿) 천왕의 후손으로서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먼 방계(傍系)인지는 불명이나,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천지화랑(天指花郞)의 자격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단군조선의 멸망 - 해모수가 오가(五加) 공화정치를 철폐하고 천왕(天王)이 되다]

 

서기전232년 기사년(己巳年)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으로 즉위하여 천왕(天王)이 되었다.

 

여기서 옛 도읍은 서기전425년에 수도로 삼은 장당경(藏唐京)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기전238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장당경에서는 오가(五加)의 공화정치(共和政治)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인데, 어진 자를 찾아 세우라는 고열가 천왕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해모수가 군사를 이끌고 장당경에 들어가 오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정을 철폐하고 단군조선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단군조선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합2,102년의 역사를 마감한 것이 된다. 한편, 고열가 천왕이 나라를 내놓은 서기전238년에 사실상 단군조선이 망한 것으로 계산하면 2,096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해모수는 군사를 일으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다가 단군조선의 오가공화정(五加共和政)을 철폐하여 접수하니, 이에 만백성들이 단군(檀君)으로 추대하였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전232년에 해모수는 천왕랑(天王郞)의 칭호에서 나아가 정식으로 본 임금인 천왕(天王)으로 즉위한 것이 된다.

 

천왕(天王)은 천하에 제후를 거느린 천상(天上)의 왕이 되는 것이며, 결국 지방 제후국들의 상국(上國)의 본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때 번조선왕 기비(箕丕)는 해모수 천왕이 인정하여 봉한 비왕(裨王)이며, 그 외 북부여에 속한 제후국들이 많이 존재하였던 것이 된다. 단, 마한(馬韓) 즉 마조선(馬朝鮮)은 마한 맹남(孟男)을 끝으로 더 이상 기록이 없어 서기전323년부터 서기전238년경 사이에 이미 대가 끊기어 망한 것이 된다. 이후 서기전195년에 낙랑홀(樂浪忽) 출신의 최숭(崔崇)이 배를 타고 이동하여 마한 땅의 도성(都城)이던 왕검성(王儉城)에 정착하여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던 것이 된다. 즉 북부여는 최숭을  낙랑왕(樂浪王)으로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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