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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84]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7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5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21 [17:23]

[홍익인간 7만년-184]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7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5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21 [17:23]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진번국(眞番國)의 시조는 부우(扶虞)이다. 즉, 진번은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세째 아들 부우(扶虞)가 봉해진 나라로서 천군국(天君國)에 해당한다.

 

[삼한관경 내 제후국 (天君國, 天侯國)]

 

(2) 진번(眞番)

 

1) 시조 및 연혁

 

부우는 저가(豬加)에 해당하는 노가(鷺加) 또는 녹가(鹿加)를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진번(眞番)이라는 말은 진한(眞韓)과 번한(番韓)이 겹치는 땅이라는 뜻을 가지는 글자가 되는데, 실제로 진번의 땅은 진한의 관할에 속하는 서쪽의 구려(句麗)와 접하고, 북쪽 및 동쪽으로는 서압록 즉 지금의 요하를 경계로 부여(扶餘)와 접하며, 서남쪽으로는 번한(番韓)에 접하여, 진한과 번한 사이의 땅이 된다.

 

진번(眞番)도 구려처럼 서기전2330년경에 봉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기전118년에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우거(右渠)가 침략하여 해성(海城) 이북의 50리를 잃었을 때에 진번국도 잃은 것이라 보이며, 약2,210년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진번 땅은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가 되는데, 북부여 고두막한(高豆莫韓)의 의병활동으로 한사군 설치는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고 보이는 바, 이는 소위 한사군이 되는 위씨조선 땅이 원래 단군조선의 진조선(眞朝鮮)과 번조선(番朝鮮)의 땅으로서, 그 백성들은 단군조선의 유민(遺民)들인 것이며 고두막한의 의병활동에 적극 호응하였던 것으로 연유한 것이 된다.

 

2) 강역

 

진번국(眞番國)은 서압록(西鴨綠)인 지금의 요하(遼河)의 서편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구려(句麗)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서압록을 경계로 장당경(藏唐京)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여(中夫餘)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발해만 유역의 임둔(臨屯)과 번한(番韓) 직할지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상춘(常春)과 부여(夫餘, 송화강 서쪽)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여(北夫餘)에 접한다. 임둔(臨屯)은 원래 진번(眞番)에 속한 땅으로서 뒤에 나뉘어진 땅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진번국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요하(遼河) 서편으로 대릉하 사이에 위치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서압록(西鴨綠)은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에 붙어 있는 요하(遼河)를 가리키며, 장당경은 지금의 심양(瀋陽, 선양)이며, 임둔은 대릉하 동쪽으로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의 요하 서편에 걸치는 발해만 유역으로서 진번국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한편, 지금의 압록강은 단군조선 시대에는 동압록(東鴨綠)이 된다.

 

3) 진번백제(眞番百濟)

 

진번백제는 진번(眞番) 땅이 위치한 패대지역(浿帶地域)에 있었던 백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패대지역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사이의 땅으로서 번조선과 진번국에 걸치는 지역이 된다. 패수는 지금의 난하(灤河)이며, 대수는 지금의 요하(遼河) 중류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합류하는 강이 될 것이다.

 

진번 땅은 패대지역 중 동쪽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진번백제는 진번 땅과 대수지역이 되는 지금의 요동반도  지역의 서부지역에 걸치는 땅이 되며 수도는 대수(帶水)의 남쪽인 지금의 안산(鞍山)이나 그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즉 진번백제의 백성들이 서쪽으로 패수가 되는 난하의 하류지역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요동반도에 걸쳐 퍼져 살며 활동한 것이 된다.

 

진번 땅은 주로 지금의 요하(遼河) 중하류 서쪽 지역이며, 대수(帶水)는 요동반도의 북쪽의 요하 중류 또는 하류지역에 합류하는 강이 될 것인데, 서기전42년에 소서노(召西弩)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북부여 땅인 졸본(卒本)을 떠나 이곳 패대지역에 이르러 땅을 개척하여 500리(里)의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 된다.

 

소서노의 나라를 어하라(於瑕羅)라 하는데, 요동반도에 있는 지금의 안산(案山) 남쪽으로 500리가 될 것이다. 서기전31년에 소서노가 고주몽 성제(聖帝)로부터 어하라에 책봉(冊封)되어 제후(諸侯, 지방의 王)가 되었다. 어하라(於瑕羅)라는 말은 백제의 왕(王)을 가리키는 어륙(於陸), 어라하(於羅瑕)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어르, 어른(長)”의 뜻이 될 것이다.

 

서기전19년에 소서노가 훙(薨)하고 비류(沸流)가 뒤를 이었으나, 곧 서기전18년에 마한(馬韓) 땅인 한반도의 한강(漢江) 남쪽 위지성(慰支城)을 수도로 삼아 건국된 온조의 십제(十濟)에 합쳐져 백제(百濟)가 되었다. 패대지역의 비류의 나라인 어하라국(於瑕羅國)에 살던 백성들이 후대에 백제가 발해만유역에 설치하였던 진평군(晋平郡)과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될 것이다.

 

온조(溫祚)는 서기전19년에 패대지역의 대수지역인 지금의 요동반도 땅 진번백제를 떠나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남하하여 마한(馬韓) 땅인 한반도의 인천(仁川) 미추홀(彌鄒忽)에 도착하였고, 계속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위지성(慰支城)에 터를 잡고 마한왕(馬韓王)으로부터 땅을 떼어 받아 서기전18년에 십제를 세웠던 것이다. 당시 패대지역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것은 발해만 유역에는 소위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 있어 나라를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추홀은 밑고을(下忽)이란 말이며, 위지성은 웃재 즉 윗재(上城)라는 말이 된다. 위지를 가리키는 위례(慰禮)라는 말은 위지(尉支)와 같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기가 된다. 즉 “위지”는 원래 “위디”라는 발음으로 “윋” 즉 “윗”을 표기한 것이 되고, 위례는 옛 발음이 "위뎨"로서 “윋” 즉 “윗”을 표기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온조는 배를 타고 밑고을인 미추홀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산(漢山) 즉 지금의 남한산(南漢山) 아래에 위치한 하남(河南) 즉 강의 남쪽 지역에 위지성(慰支城)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온조가 백제(십제)를 세울 때 땅을 떼어준 마한왕(馬韓王)은 중마한(中馬韓)의 제9대왕인 계왕(稽王)이며,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때는 서기9년으로 제10대 학왕(學王)이 된다.

 

제1대 마한왕은 서기전194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뺏긴 번조선왕 기준(箕準)으로 1년만에 훙(薨)하고 중마한을 세웠던 탁(卓)이 서기전193년에 제2대 마한왕이 되었으며, 이후 마한은 서기9년까지 이어졌는데, 번조선 출신의 기씨(箕氏) 나라가 된다. 기씨(箕氏)의 마한(馬韓)이 백제에게 망할 당시에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이 각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로 나뉘어졌다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반면, 서기전296년에 번조선의 기후족(箕侯族, 須臾族)에는 기자(箕子)의 후손인 한개(韓介)라는 인물이 이미 있었던 것이 되는데, 이 한개(韓介)는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장당경을 침범하였다가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에게 패퇴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3) 부여(扶餘)

 

1) 시조 및 연혁

 

부여국(扶餘國)의 시조는 부여(扶餘)이다. 즉,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네째 아들 부여가 봉해진 나라로서 천군국(天君國)이 된다.

 

부여(扶餘)라는 말은 벌, 벌판(原)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실제로 부여는 대흥안령산맥의 남동쪽에 위치한 소위 동북평원(東北平原) 지역이 되는데, 지금까지도 부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 되, 심양~장춘~하얼빈~부여의 사이 땅은 만주지역에서도 특히 평원(平原)으로서 벌판 지대이기도 하다.

 

부여(扶餘)는 서기전2330년경에 봉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기전1285년에 시작된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인 백악산아사달이 소재한 땅이다. 즉 부여는 상춘(常春) 즉 지금의 장춘(長春)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된다.

 

부여(扶餘)에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있었던 까닭으로 서기전925년에 상형문자를 간략히 처리한 부예(符隸)와 상형문자의 뜻과 소리로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법(吏讀法)을 개발한 왕문(王文)을 부여(夫餘)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부여가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되기도 하였다.

 

구려(고리) 출신이던 해모수(解慕漱)가 서기전239년 5월 5일을 시작으로 북부여의 웅심산(熊心山)을 거점으로 삼아 북부여를 일으켰으며, 서기전86년에는 졸본 출신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북부여 천왕이 되고, 해부루는 강등되어 제후인 동부여왕이 되었다.

 

동부여가 서기22년에 망한 후 대소왕(帶素王)의 종제(從弟) 즉 사촌 아우가 고구려의 서부(西部)가 되는 연나부(椽那部)에 낙씨(絡氏)로 봉해졌는데, 이후 독립하여 연나라 땅 가까운 백랑곡(白狼谷) 부근으로 들어가 부여(夫餘)라는 국명으로 서기494년까지 존속하다가 고구려 문자열제(文咨烈帝)에 망하였던 것이 된다.

 

2) 강역

 

부여(扶餘)는 동쪽으로는 속말(粟末) 즉 지금의 송화강 건너 숙신(肅愼)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흑수(黑水) 즉 지금의 흑룡강 유역의 현이(玄夷)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옥저(沃沮)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서압록(지금의 요하)에 이르러 진번(眞番)과 접한다. 대체적으로 송화강 서쪽, 요하 동쪽, 요동반도 북쪽이 된다.

 

숙신(肅愼)은 송화강(松花江) 동쪽으로 전기 단군조선의 수도이던 아사달(阿斯達)을 포함하여 우수리강(牛首里江) 유역에 걸치는 나라가 된다. 송화강과 우수리강은 속말(粟末:소말, 소멀, 소머리)이라는 강이 되는데, 우수리(牛首里)라는 말이 소머리(牛頭, 牛首)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로 속말(粟末)과 같은 형식의 표기가 된다.

 

현이(玄夷)는 구이(九夷)의 하나이며, 흑룡강 유역에 사는 피부색이 검은 흑인종 계통이다. 환경에 의하여 체질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서기전7197년경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 사방분거할 때 남방의 인도지역으로 간 흑소씨(黑巢氏)의 일파인지 불명인데, 흑소씨의 일파가 황궁씨(黃穹氏)를 따라 동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서기전2267년경 도산회의가 열리기 이전에 사공 우(禹)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백일기도하던 중에 꿈에서 보았다는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 부루(扶婁)”라고 할 때의 현이(玄夷)는, 현(玄)이라는 글자가 북(北)을 나타내므로 북이가 되고 이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관경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옥저(沃沮)는 압록강 이북 지역으로서, 부여(夫餘)와 숙신(肅愼)의 남쪽에, 진번(眞番)의 동쪽에, 예국(濊國)의 서쪽, 마한(馬韓)과 개마(蓋馬)의 북쪽으로 동압록(東鴨綠)이 되는 지금의 압록강 건너 북쪽에 위치한 땅이 된다. 후대에 옥저는 큰 땅으로서 북옥저, 서옥저, 동옥저, 남옥저 등으로 나뉘어 불리기도 한다.

 

3) 대부여(말기 단군조선), 북부여, 중부여, 새부여(東明),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 서라부여(신라), 남부여(백제)

 

대부여(大夫餘)는 서기전425년 구물(丘勿) 천왕이 중부여(中夫餘) 땅인 장당경(藏唐京)을 수도로 삼고 불렀던 국호이다.

 

북부여(北夫餘)는 서기전239년 해모수가 부여의 북부가 되는 상춘(常春)의 백악산아사달 지역의 난빈(蘭濱)을 수도로 삼았으므로 부른 명칭이 된다.

 

중부여(中夫餘)는 장당경을 중심으로 부르는 명칭이 된다.

 

새부여는 서기전108년에 졸본(卒本)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위씨조선(衛氏朝鮮)이 망하는 것을 보고 북부여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면서 칭한 동명(東明)이 곧 “새밝”, “새발”, “새벌”로서 “새부여”를 나타낸 말인 바, 부여의 부흥을 뜻하는 새로운 부여, 새부여인 것이다. 서기전57년에 진한에서 건국된 신라(新羅)는 처음 사로(斯盧 : 설),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여 “설벌”, “새벌”과 같은 말로서 결국 새부여가 되는 바, 고두막한의 동명(東明)을 신라의 옛 땅이라고도 하는 것이 된다.

 

동부여(東夫餘)는 방향으로 따져 동쪽의 부여라는 뜻으로서 서기전86년 고두막(高豆莫) 천왕(天王)이 해부루(解夫婁) 단군을 낮추어 상춘의 동쪽에 있는 분릉(坌陵, 가섭원, 吉林)에 제후(왕)로 봉한 나라이다.

 

졸본부여(卒本夫餘)는 고두막 천왕의 고향인 졸본(卒本)에다 서기전59년에 고무서(高無胥) 천왕이 수도로 삼은 후, 고주몽이 사위로서 대통을 이어 졸본에서 즉위 하였으므로 부르는 국명이 된다.

 

서라부여 또는 설부여는 서라벌(徐羅伐)과 같은 말로서 고두막 천왕의 북부여 제실녀인 파소(婆蘇)의 아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서기전57년 후삼한의 진한(辰韓)에서 세운 나라인 신라(新羅)의 원래 이름인데, 서라벌, 설벌, 새벌(東明:新原:新羅)이 되며, 서기전108년 고두막 천왕이 처음 칭하였던 동명(東明)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의 동명(東明)을 신라(新羅)의 옛 땅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즉, 신라는 고두막한이 칭하였던 동명(東明, 새벌, 설벌)이라는 국명을 이두식으로 변형하여 사로(斯盧), 서라벌(徐羅伐) 등으로 쓴 것이 된다. 후대에 쓰게 된 신라(新羅)라는 말도 “새벌“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기이기도 하다. 고두막한의 동명(東明)은 “새부여”라는 말로 북부여 천왕의 제후국으로서 한(漢)나라와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북부여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왕(王)을 칭한 나라가 된다.

 

남부여(南夫餘)는 백제가 서기538년에 제26대 성왕(成王)이 사비 즉 지금의 부여(夫餘)로 수도를 옮기고 부른 국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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