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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86]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9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7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22 [11:50]

[홍익인간 7만년-186]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9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7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22 [11:50]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예국(濊國)의 시조는 여수기(余守己)이다. 즉 단군왕검 천왕(天王)이 서기전2333년경 백두산의 동쪽에 우수리강을 포함하는 우이(于夷)지역에 여수기(余守己)를 봉한 나라로 천후국(天侯國)이 된다.

 

[삼한관경 내 제후국 (天君國, 天侯國)]

 

(7) 예국(濊國)

 

1) 시조 및 연혁

 

예국(濊國)이라는 말은 물과 관련된 나라로서, 동해(東海)에 접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예국은 지금의 백두산 동쪽으로 두만강 유역을 포함하여 단군조선의 대륙과 일본 본주(본주, 혼슈)와의 사이에 있는 동해에 접하는 나라가 된다. 예(濊)라는 말은 깊은 바다라는 말이며, 경우에 따라 예(穢)라고 적는 것은 예(濊)와 같은 소리로 적은 것이 된다.

 

여수기(余守己)는 지방행정 담당인 구가(狗加)의 직을 수행하였다. 구가(狗加)는 치안과 형벌을 담당하여 지금의 내무부와 법무부에 해당한다.

 

예국은 단군조선의 동보(東堡)의 역할을 한 나라인데, 동쪽은 서쪽처럼 전쟁이 빈발하는 지역이 아니므로 일반 제후로써 봉하고 특별히 한(韓)을 봉하지 아니한 것이 된다.

 

예국은 후대에 두만강 남쪽으로 한반도 중북부의 동쪽 해안지역까지 팽창하였는데,  특히 이를 동예(東濊)라고도 불렀던 것이 된다.

 

신라의 석탈해왕은 동보(東堡) 유배인(流配人)의 후예라 하는 바, 동보는 바로 예국이 담당하였던 것이며, 지금의 일본 땅이 되는 삼도(三島) 중에서 북해도(北海島, 홋가이도)와 본주(本州, 혼슈) 중 북동지역이 동보의 관할에 속하였던 것이 되고, 구주(九州, 큐슈)와 본주의 남서지역은 마한(馬韓)의 관할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2) 강역

 

동쪽으로는 동해(東海) 바다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옥저(沃沮)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동쪽 해안가가 되며, 북쪽으로는 숙신(肅愼)에 접한다.

 

즉 예국의 영역은 대체적으로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두만강 유역을 포함하여 우수리강을 넘어서 연해주를 거쳐 동해(東海)에 이르는 지역이 된다.

 

3) 역사

 

예국은 서기전2333년경부터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내려 왔으며, 북부여 시대를 거쳐 고구려 초기인 서기55년경 고구려 제6대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때 동예(東濊)가 고구려에 복속하기까지 약2,400년간 존속한 것이 된다.

 

(8) 개마(蓋馬)

 

1) 시조 및 연혁

 

개마국(蓋馬國)의 시조는 주인씨(朱因氏)이다. 즉 단군왕검 천왕(天王)이 서기전2333년경 백두산의 남쪽의 양이(陽夷) 지역에 주인씨(朱因氏)를 봉한 나라로 천후국(天侯國)이 된다.

 

개마(蓋馬)라는 말은 "개말, 개멀" 또는 "해말, 해멀"의 표기가 되는데, 원래 해마루 또는 해머리(白頭)라는 말을 이두식으로 적은 글자가 되며, 해마루는 흰마루와 같은 말이고, 흰머리산이 되는 백두산(白頭山) 지역은 개마지역이 되는 것이다. 해마리의 해(解)가 음운변화로 변음이 되어 개(蓋)로 적힌 것이 된다.

 

주인씨는 배달나라와 단군조선 시대에 선악(善惡)담당인 양가(羊加)의 직을 수행하였으며, 양가는 학가(鶴加)라고도 하였고 계가(鷄加)라고도 하였던 것이 되는데, 선악 즉 교육(敎育)과 교정(矯正)을 담당하였다. 양가(羊加)는 지금으로 말하면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부 와 악행을 교정하고 처벌하는 법무부 또는 사법(司法)기관에 해당한다.

 

2) 강역

 

백두산 남쪽에 개마고원이 있는데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된다. 개마의 남쪽은 마한(馬韓)의 직할지이며, 마한의 수도는 한반도의 평양(平壤)인 백아강(白牙岡)이다.

 

개마국이 백두산의 남쪽에 있어 마한의 관할에 속하였는지 명백한 기록이 없어 불명이나, 위치상으로 볼 때 압록강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되어 마한(馬韓)의 관할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역사

 

고구려 초기인 서기55년경에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였는데, 아마도 이 이전에 지금의 백두산 지역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개마국(蓋馬國)이 또한 고구려에 복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옥저와 동예처럼 서기전2333년경부터 서기55년경까지 약2,400년간 존속한 것이 된다.

 

(9) 옥저(沃沮)

 

1) 시조 및 연혁

 

옥저국(沃沮國)의 시조는 선라(仙羅)인데, 제2대 단군부루 천왕(天王)이 서기전2240년경 지금의 압록강 북쪽 지역에 걸쳐 봉한 나라로서 천후국(天侯國)이 된다.

 

옥저(沃沮)라는 말은 물과 관련되는데, 지리적으로 보아 압록강과 관련되어 붙여진 명칭이 된다. 옥저를 와지 또는 가시 등으로 읽어 가섭원(迦葉原)과 같은 말로 풀이하기도 하나, 가섭원은 갓벌이라는 말로서 수풀이 우거진 벌판이라는 말이 되어 지금의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되고, 옥저는 압록강 유역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옥저의 저(沮)라는 말은 물이 있는 비옥한 땅이면서 압록이라는 큰 강이 막고 있는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가 된다.

 

2) 강역

 

옥저는 동압록(東鴨綠) 즉 지금의 압록강의 북쪽 지역으로서, 북쪽과 서쪽으로는 부여(夫餘)에 접하고, 북동쪽으로는 숙신(肅愼)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예국(濊國)에 접하며, 남쪽으로는 압록강 건너 마한(馬韓)과 접하는 것이 된다.

 

3) 옥저후 불리지

 

고주몽의 아버지 불리지(弗離支)는 본명이 고모수(高慕漱)로서 일명 해모수(解慕漱)이며 황손(皇孫)이라고도 하는데, 황손이라 함은 북부여 시조인 원래의 해모수(解慕漱) 즉 대해모수(大解慕漱)의 증손자인 것을 가리키며, 북부여의 제후인 옥저후(沃沮侯)로서 고두막 천왕 시절에 한(漢)나라 도적을 물리친 공으로 옥저 땅에 봉해졌던 것이 되고, 서기전80년경 지금의 요하가 되는 서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河伯)의 딸이던 유화(柳花)를 만나 부모의 허락없이 관계를 맺었다가 사후에 혼인허락을 받았던 것이 된다. 옥저후 불리지의 아들인 고주몽은 서기전79년생이다.

 

4) 북옥저, 서옥저, 동옥저, 남옥저

 

옥저(沃沮)의 땅은 넓어서 동서남북의 옥저로도 불리는데, 북옥저(北沃沮)는 부여(夫餘) 땅인 상춘(常春)과 동부여(東夫餘) 땅인 길림(吉林)과 숙신(肅愼)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땅이 되고, 서옥저(西沃沮)는 압록강 하류의 북서 지역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지역에 접하는 것이 되며, 동옥저(東沃沮)는 동쪽으로 예국(濊國)에 접하는 것이 되고, 남옥저(南沃沮)는 압록강 유역에 해당하는 땅이 된다. 

 

북옥저라는 나라는 서기전27년에 고구려에 망한 것으로 기록되며, 동옥저(東沃沮)는 후대에 동예(東濊)처럼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팽창하였다가 서기55년경 고구려 제6대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때 동예와 함께 고구려에 복속한 옥저가 될 것인 바, 서기전2240년경부터 서기55년경까지 약2,300년간 존속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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