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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89]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12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10-[삼한관경 내 제후국 (天君國, 天侯國)]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27 [14:57]

[홍익인간 7만년-189] 단군조선 군후국(君侯國)의 역사 12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군후국(君侯國) 10-[삼한관경 내 제후국 (天君國, 天侯國)]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27 [14:57]

 

[홍익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낙랑국(樂浪國)의 시조는 단군조선 천왕족인 고불가(固弗加)이다. 즉 서기전1237년에 제23대 아홀(阿忽) 천왕이 숙부(叔父) 고불가를 봉한 나라로서 천군국(天君國)에 해당한다.

 

(14) 낙랑(樂浪)-낙랑홀(樂浪忽)

 

1) 시조 및 연혁

 

 

낙랑(樂浪)이라는 말은 물결치는 강이 있는 땅으로 풍족한 곳임을 나타내는 것이 되는데, 실제 위치상으로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의 동서지역에 걸친 군(郡) 단위 크기의 나라가 된다.

 

낙랑홀(樂浪忽)의 홀(忽)은 고을을 뜻하는 말이 되는데, 지금의 군(郡) 단위 크기에 해당하는 땅이 되고, 단군조선 시대에는 군(君)에 해당하는 임금이 다스린 것이 된다. 군(郡)이라는 글자가 군(君)이 다스리는 땅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2) 강역

 

낙랑국은 발해만 북쪽 지역에 소재하였는데, 구려(句麗)와 번한(番韓) 사이에 위치한 것이 되는 바, 즉 북쪽으로는 구려(句麗)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번한(番韓) 직할지에 접한 것이 된다.

 

낙랑의 중심지는 패수(浿水, 난하) 중류 지역으로서, 서쪽에 소재한 고하(沽河)의 동쪽에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패수(浿水) 건너에 있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서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한편, 서기전281년경에 연나라 진개가 번조선과 경계를 삼은 곳이 되는 만번한(滿番汗)은 고하(沽河)와 패수(浿水) 사이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낙랑에서 보면 남서쪽에 있는 것이 된다.

 

여기 낙랑(홀)이 서기전108년에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이 되었는데, 낙랑이라는 명칭은 원래 있었던 단군조선의 지명에서 나온 것이 된다.

 

또, 한사군에 속하는 임둔군(臨屯郡)은 낙랑군의 동쪽으로 진번군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지금의 요하 서편으로 발해만 유역에 위치한 것이 된다. 진번군(眞番郡)은 원래 단군조선의 진번국(眞番國) 자리가 되며, 이 진번군의 남쪽 발해만 유역에 임둔군이 위치한 것이 된다. 현토군(玄兎郡)은 낙랑군의 서북쪽에 위치한 것이 되고, 구려국 땅의 중남부지역이 된다.

 

소위 한사군은 요동반도 서쪽에 모두 있었던 것이 되고, 그 군(郡)의 명칭도 원래 있었던 단군조선의 지명, 국명에서 나온 것이 된다.

 

3) 후대의 역사

 

낙랑국(樂浪國)은 단군조선 후기의 초기가 되는 서기전1237년에 시작되어 내려왔으며, 번조선(番朝鮮) 말기인 서기전195년에 낙랑 출신의 최숭(崔崇)이 배에 보물을 가득 싣고 떠나 마한(馬韓)의 수도인 대동강의 왕검성에 도착하여 나라를 열어 낙랑이라 하였던 것이 되는데, 이 최씨의 평양 낙랑국은 서기37년에 고구려 제3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에게 망하였다. 단군조선의 낙랑국은 서기전1237년부터 서기전195년까지 약1,040년간 존속한 것이 된다.

 

서기전194년에 번조선(番朝鮮)을 차지한 위만(衛滿)의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이후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을 침공하였으며, 심지어 서기전118년에는 서압록인 지금의 서요하를 건너 해성(海城)의 이북 50리까지 차지하기도 하였다가 서기전115년에 패퇴되어 물러갔던 것이다.

 

서기전108년에 위씨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할 때, 번조선(番朝鮮)과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토(玄兎)의 땅이 함께 한(漢)나라가 차지하는 바 되어 소위 한사군이 설치된 것으로 되는데, 이때 북부여 졸본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동명(東明)이라 칭하며 의병을 일으켜 북부여의 부흥(復興)을 꾀하여 한(漢)나라 도적들과 전쟁을 벌이니, 소위 한사군 땅의 백성들이 호응하여 들고 일어나, 이에 한사군은 유명무실하게 토착인 자치제로 시행되었던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서기전108년에 낙랑군이 설치되고 서기전107년에 현토군이 설치되었다 하면서 진번군과 임둔군에 관하여는 설치연도에 관한 명백한 기록이 없는데, 낙랑군과 같은 해에 설치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후 서기전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낙랑군에 합쳤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진번군과 임둔군이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북부여에 접수된 것을 윤색날조한 것이 된다.

 

이후 소위 사군(四郡)은 고구려와의 격전지(激戰地)가 되어 북중국(北中國)의 영역과 고구려(高句麗)의 서쪽 영역으로서, 상호간 동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을 겪으면서, 서기313년 고구려의 제15대 미천제(美川帝)가, 북중국의 낙랑군(樂浪郡)과 서기204년에 공손강이 낙랑군을 나누어 그 남방에 설치하였던 대방군(帶方郡)을 완전치 축출하고 현도군을 정벌함으로써, 사군(四郡)의 역사는 이후 발해만 유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5) 고죽(孤竹)

 

1) 시조 및 연혁

 

고죽국(孤竹國)의 시조는 기록이 없어 불명이나, 후대에 나타나는 기록을 보건대 묵태씨(墨胎氏) 또는 묵씨(墨氏)가 될 것이다.

 

고죽국은 서기전2267년경에 봉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순(舜)이 서기전2284년경에 천자(天子)로 즉위하면서 임의로 설치하였던 유주(幽州)를 폐하고 단군조선의 직할영역에 편입시키면서 고죽국을 봉한 것으로 된다.

 

고죽국은 최소한 서기전1766년 이전에 이미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고죽국의 임금이 군(君)으로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 일반 제후가 아닌 군(君)이 봉해진 것이 확실한 바, 아마도 단군천왕의 아우나 아들 아니면 공(功)을 세운 인물이 봉해진 것이 될 것이다.

 

또는, 고국죽의 왕족의 성씨에 검을 흑(黑)이라는 글자를 가지는 묵(墨)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기전7197년경 남방의 인도지역으로 분거하였던 흑소씨(黑巢氏)의 일파로 보이는 현족(玄族), 즉 흑수(黑水)가 되는 흑룡강 유역에 정착하였던 현이(玄夷)의 출신이 봉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글씨를 쓰는 용구인 먹(墨)을 제조하던 전문가 집안의 출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기전1766년에 번한(番韓) 소전(少佺)이 묵태(墨胎)를 보내어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하였다고 기록되는데, 이 묵태가 곧 고죽국의 임금인 고죽군(孤竹君)이 되는 것이며, 후대에 백가(百家)의 한 사람인 묵자(墨子)는 고죽국의 후예가 되는 셈이다.

 

2) 고죽(孤竹)의 뜻

 

고죽(孤竹)이라는 말은 외로운 대나무가 아니라, “곧대” 즉 “곧은 대나무”라는 말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되며, 곧은 “대나무와 같은 곧은 절개”를 나타내는 글자가 된다. 고대중국 역사에서 나타나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가 주무왕(周武王)에게 효충(孝忠)에 관하여 설파한 것은 곧은 절개(節槪), 의(義)와 무관하지 않다.

 

산동지역에 있었던 래이(萊夷)가 즉묵(卽墨)의 후예라고 하는데, 이 즉묵은 곧 절묵(節墨)이고, 절묵은 죽즉묵(竹卽墨)이며 이는 절개, 묵씨를 나타낸 글자가 되어, 고죽(孤竹)의 묵씨(墨氏)임을 나타낸 것이 된다. 즉 래이(萊夷)는 고죽국의 후예가 되는데, 고죽국의 위치로 보아 전성기 때 산동지역에 진출한 것인지 아니면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에 망한 고죽국의 후예들이 산동지역에 이동한 것인지가 분명치는 않다. 다만, 절묵이 고죽국의 유민(遺民)들의 나라라면 서기전650년경 제(齊)나라 환공(桓公) 시대에 망한 고죽국의 백성들이 제나라에 의하여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된다.

 

3) 강역

 

고죽국(孤竹國)은 대요수(大遼水)인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중하류와 유수(濡水)가 되는 지금의 탁수(涿水)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는데, 동쪽의 바다는 발해만으로서 동해(東海)라 하며, 동쪽으로는 번한(番韓)과 접하고, 멀리 북동쪽에는 낙랑이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은(殷) 왕족 기자(箕子)가 망명하여 정착한 태항산(太行山) 서쪽의 서화(西華)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연(燕)나라에 접하며, 북쪽으로는 구려(句麗)와 접하는 것이 된다. 

 

한편, 서기전665년에 제환공(齊桓公)이 정벌하였다는 영지(令支)와 서기저651년에 제환공이 산융의 침공을 받은 후 정벌하였다는 이지(離支)는,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고죽국의 수도에서 보면 북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는데, 영지성(永支城)이 유수(濡水)가 되는 지금의 탁수(涿水)의 최상류에 위치한 것이 되고, 고죽국의 수도는 영지성의 남동쪽에 있는 것이 되어 탁수의 중하류 지역에 소재하였던 것이 된다.

 

4) 후대의 역사

 

고죽국은 서기전665년경에 제(齊)나라와 연(燕)나라의 침공을 받은 적이 있고, 서기전651년에도 제나라와 연나라의 침공을 받은 바 있는데, 아마도 서기전650년경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연나라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고죽국은 서기전2267년경부터 서기전650년경까지 최소한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고죽국이 망한 후에는 고죽국의 백성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번조선(番朝鮮)이나 진조선(眞朝鮮) 또는 마조선(馬朝鮮)까지 들어가 산 것이 된다. 특히 번조선 땅에 출토되는 고죽방정(孤竹方鼎)은 고죽국의 왕족 등 지배층이 나라가 망한 때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가져온 것이 될 것이다.

 

또, 고죽국의 유민(遺民)으로서 남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중국내륙의 동이(東夷)로서 내륙8이에 속하는 산동지역의 래이(萊夷)가 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래이(萊夷)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를 연구하면 고죽국의 유민(遺民)의 나라인지, 아니면 고죽국의 분국(分國)인지 또는 청구국(靑邱國)의 분국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중국의 기록으로 보면 고죽국의 유민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강성할 때 본국의 인접지역에 세워진 분국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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