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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찾아 온 늘어진 나의 복이다”

<土 曜 隨 筆> 수필가 이현실 ‘아버지의 애인’

수필가 이현실 | 기사입력 2009/01/03 [20:09]

“늦게 찾아 온 늘어진 나의 복이다”

<土 曜 隨 筆> 수필가 이현실 ‘아버지의 애인’

수필가 이현실 | 입력 : 2009/01/03 [20:09]
아버지는 소년처럼 들떠있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 가슴이 설렌다고도 했다. 소식 몰라 애태우던 수 십 년의 세월을 더듬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흘깃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은 너무도 푸르렀다. 새털구름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시월의 하늘은 아기의 눈동자처럼 투명했다. 새털구름. 시월의 하늘은 아기의 눈동자처럼 투명했다.

어디선가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의 친정 나들이였다. 차를 몰고 와서 아버지를 모시고 기꺼이 동행이 되어준 지혜. 그녀는 어릴 적부터 효녀 소리를 듣던 심성이 고운  친구이다.

자동차는 숲속을 달렸다. 길가에 흐드러진 코스모스 꽃들이 서로를 안고 넘어지며 뒤로 뒤로 흘러갔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좁은 농로에는 벼 짚단들이 반듯하게 누워 가을볕을 쬐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풍차가 그려진 건물이라고 했는데·······”

붉은 노을이 노란 은행나무에 걸려있는 이층 건물 앞에 차는 멈추었다.

“아버지, 풍차가 그려진 집이예요. 이곳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저기 ‘좋은세상’이란 간판이 보이네요,”

아버지는 천천히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하오의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때 출입구의 채색유리문 안에서 초로의 노인이 바깥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손을 맞잡고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아서 일까. 깊고 깊은 회한의 우물에서 얼마나 많은 두레박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색한 침묵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자네, 얼굴이 건강해 보여. 이거 원, 소문보단 훨씬 건강하구만”

“예끼, 이 사람, 그럼 내가 자네보다 먼저 갈 줄 알았는가?”

아저씨는 대장암 말기 환자였고 게다가 간에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깡마른 체격에 까무잡잡해 보이는 얼굴에 환자 같지 않는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아저씨의 어깨 너머 문복산의 부드러운 능선에 낙조가 붉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해발 500미터에 위치한 자연휴양지이다. 

완쾌가 거의 불가능한 마지막 단계에서 찾아 온 말기 암 환자들의 식이요법 전문요양원이다. 계곡의 맑은 물과 숲속의 음이온을 마시며 또한 고산지대라 벌레가 생기지 않아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자연식의 야채를 먹는다고 했다.

숙소에는 작은 침대와 몇 권의 책 옷가지가 걸려있다. 마주 보이는 창문으로 울창한 숲이 숨이 막힐 듯 눈에 들어왔다. 뒷산 숲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운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청량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주름진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번지며 말문을 열었다. 어느 날 소동파가 백운선사에게 물었다고 한다.

천당이 무엇이고 지옥이 또 무엇이냐고. 갑자기 백운선사가 주장자(柱杖子)로 소동파의 마빡을 탁! 치고 나서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다. 명색이 공직 자사刺史 있는 관리에게 마빡을 이유 없이 내리치니 소동파가 눈에 불을 켜고 왜 치느냐고 멱살을 잡고 달려들었다. 백운선사가 하는 말이 그게 바로 지옥이다. 화가 나서 눈이 벌겋게 달려드는 그 심정이 바로 지옥이다 라고 했다.

소동파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깨닫는바가 있어서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보라, 엎드려 절하는 마음! 그것이 또한 천당이다라고 백운선사가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순간적인 생각 하나로 천당과 지옥이 뒤바뀌는 것이라고 아저씨는 말을 맺었다. 대궐 같은 자네 집을 두고  혼자 이곳에 머무는 까닭이 무어냐고 아버지가 물어 보셨다.

한 집에 오래 살다보면 눈에 보이면 관심을 가져야하고 귀로 들으면 대꾸를 해야 하니 아무리 마음을 비운다고 애를 써도 피차 피곤한 일이라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만 항상 주고받을 수 없는 게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아가 치밀면 나으려다가 뒤집어지는데 그러면 또 암수치가 올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25%가 넘는다고 한다. 또한 암세포가 1일 500-600개가 매일 생겼다가 DNA가 파괴되어 스스로 치료하고 없어지곤 한단다.  

  다이옥신이 함유된 풀을 먹은 소의 기름기는 암을 만드는 것이라며 바다는 육지보다 100배 이상 오염이 되어있다고 한다. 담백질이 함유된 견과류, 콩이나 땅콩, 호도, 들깨 같은 자연식품을 많이 섭취해야 건강하다며 강조했다.

 아버지가 짓궂게 또 농을 거셨다. 뭐라고 해도 나이 들면 부부밖에 더 있는냐는 물음에 아저씨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가 모처럼 집에 갔더니 우리 집 사람이 흘깃 쳐다만 보고 아무 말도 안하더구먼. 그래 내 물었지. 아, 이 사람아 남편이 시한부 인생 사는데 걱정도 안 되느냐고? 뭐라고 대답한줄 아는가? 내 나이도 이제 팔십이오. 내 몸뚱어리도 아파서 죽겠소. 점쟁이한테 물어보니까 영감 꼬장꼬장 아흔 살 까진 산다고 합디다. 이러는 거야. 허허.”

창밖의 어둠이 점점 짙어오는데 주고받는 두 분의 정담은 끝이 없었다. 오래된 내 기억 속의 아저씨는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맨 늦깎이 법학도였다. 그 분과 아버지는 동네 뒷산에 있던 별장에 방 한 칸을 빌려 공부를 했다.

아버지의 자잘한 속내의며 양말 등을 챙겨 산을 오르내리던 내 어린 시절 두 분에겐 아카시아 꽃 같은 싱그러운 여름 냄새가 났다. 

두 분은 끝내 법학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는 공직으로 아저씨는 교사로  봉직하였다.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우던 젊은 날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꼿꼿한 댓잎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두 분의 모습이 내겐 인주(印朱)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소등을 할 시간이라는 아저씨의 말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신발을 신는 우리의 등 뒤에서 아저씨가 또 한 마디를 던졌다.

“매일같이 예쁘고 젊은 여인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는 것도 내 복이요, 싫은 소리 안 듣는 것도 내 복이요, 보기 싫으면 안보는 것도 내 복이니 늦게 찾아 온 늘어진 나의 복이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저씨와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하루도 안 보면 못살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챙기시던 두 분에게 때때로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아저씨를 일컬어 아버지의 애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실이 서울 올라가더라도 제가 춥기 전에 한 번 더 모시고 올게요.” 

돌계단을 내려오며 쌍가락지 하나를 뽑아 슬며시 친구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수필가 이현실 프로필>

부산출생. 
한국예총 <예술세계> 수필 등단
2008. 제5회 영농신문주최 농촌문학상 작품상(시 부문) 수상
2008 한국 육필문학 주최 타고르 문학상 작품상(시 부문) 수상
2005. 한국 문화원 연합회주최 창작시 공모 금상(문화관광부 장관상) 수상
예술시대 작가회 회원.
농촌문학 회원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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