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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의 그 사람은 무사할까?"

표명렬장군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5] 암흑의 시대, 잊히지 않는 기자"

이성민 기자 | 기사입력 2010/04/23 [02:43]

"삼청교육대의 그 사람은 무사할까?"

표명렬장군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5] 암흑의 시대, 잊히지 않는 기자"

이성민 기자 | 입력 : 2010/04/23 [02:43]
▲ 표명렬 예비역 장군     ©
[표명렬 장군은 예비역 준장이자 육군 정훈감 출신으로 제대 군인들의 모임인 ‘평화재향군인횐’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표 장군(본지에서는 장군으로 호칭 함)은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군으로 제대해 중도적인 견지에서 진보를 지향하며 활동하는 인물이다. 표 장군은 군사정권때의 “잘못된 권위주의적 군대문화 인성 파괴적인 공포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며 지난 군 시절을 회상하고 군 후배들과 후손들에게 강력한 군 개혁으로 군대문화의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천명했다.


특히 최근 한미연합훈련 중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해군 ‘천안함’ 침몰로 인해 '한미방위동맹'이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표 장군은 2005년도에 이미 군작통권과 한미방위동맹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군의 의식을 형성하는 군교육 시스템을 (손에서) 놓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우리가 진짜로 논쟁해야 할 문제는 작통권 환수가 아니라 한미방위동맹을 새로 짜는 것”이라고 밝히고 “(노 대통령이) 작통권 환수문제를 주제로 던졌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미국도 그걸 안다. 한미방위동맹을 새로 해야 한다. 그건 전략적 유연성과 관계된다. 한미방위동맹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맺는 모법인데 그게 완전히 잘못됐다. 그 정신에 따라 작통권도 다 줬다.”며 ‘한미방위동맹’의 모순성을 지적해 주권국가의 민족자존성을 되찾으려 애쓰는 장군이다.

표 장군의 정신이 대한민국 정체성을 찾고 남과 북의 민족동질성 회복으로 평화적인 순리에 따라 통일을 이룩하는데 일조하도록 본지가 앞장서 보도하여 장군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활동해 주기를 바라며, 배달겨레의 건국이념인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리화(在世理化)'로 민족자존심을 되찾는데 일조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편집자 주]
 

출처 :http://blog.naver.com/mjs2118?Redirect=Log&logNo=80039152352

     
강원도 현리에서 '귀양살이'하던 시절엔 이래저래 눈물 흘린 날이 많았다. '사나이가 무슨 놈의 눈물이 그렇게도 많은가'라고 자주 핀잔을 들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 일생 동안 가시밭을 헤치며 걸어와서인지 고난이 닥칠 때는 오히려 마음이 단단히 무장돼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특히 어머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오늘 아침에도 내 글 '장군이 다 뭐다냐? 광주에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디!'를 다시 읽다가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보잘것없는 아들을 하늘처럼 끔찍이 여기며 평생을 사신 어머님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 3군단 '귀양살이' 시절(가장 오른쪽 표명렬 예비역 장군).     ©


눈물을 많이 흘리면 마음이 한결 가볍고 맑아진다. 술기운이 올라 있을 땐 세상 사람이 모두 불쌍하게 느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소리 내어 우는 때가 많았다.

험난한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는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해도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난 늘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막연하지만, 그분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 해야 한다고 다짐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항에 맞닥뜨렸을 때,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미약한 힘만 지닌 난 용기 없는 비겁자일 수밖에 없었다.

삼청교육대 앞에서 침묵한 우린 공범자였다

강원도 현리 시절, 군단 관할 지역엔 삼청교육대가 두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정훈참모이던 내겐 그들에게 정신 교육 특강을 하라는 임무가 부여돼, 난 그곳에 자주 다녀왔다. 꼬불꼬불 흔들리는 비포장 길을 지나 그곳에 다다르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포로수용소보다 더 으스스한 풍경이 나왔다.

완전히 딴 세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하늘만 보이던 그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얼굴은 깡마르고 광대뼈는 튀어나왔으며 체구는 왜소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모아다 놓은 전시장 같았다. 가난에 쪼들리고 세파에 시달리며 구박받으면서 살아온 천덕꾸러기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의 집합소 같은 느낌이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주동자들이 어떤 짓인들 못하랴마는, 이른바 '민주국가'에서는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살인적 만행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게르만족이 유대인을 학살할 때의 광기와 살기를 내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혼이 나가버린 로봇처럼 조교들의 악다구니에 절대 순응했다. 인간 도살장 같은 지옥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기계처럼 움직였다. 잡혀온 사람들은 거기서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대접과 노예보다 더 극심한 강제 노역을 견디면서 끊임없는 폭력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지막지한 노동을 강요당했고, 채찍과 몽둥이에 얻어맞고 군화 발질에 걷어차여 온몸에 피멍이 맺히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들을 완전히 짐승 취급했다. 아니, 짐승이라도 당장 죽이지 않을 바에는 그렇게까지 무지막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목도한 우리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는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가느다란 고동소리일 뿐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말리지도, 정면으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목사님도, 법사님도, 신부님도 "저들이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요"하며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그렇게 우린 범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공범자였다.

조직화한 거대폭력 앞에서 우리의 힘은 참으로 미약했다. 아니 그보다 나 자신이 너무도 비굴했다. 그들은 3군단으로 밀려오게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내 입을 조용히 닫게 만들 수 있었다. 난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 더 큰 일을 위해 참노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치만 살피면서 불안에 떠는, 가엾기 그지없던 사람들의 표정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부가 사회정의를 어지럽히는 사회악이라며 힘없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철퇴를 휘두른,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3군단 참모 시절(오른쪽).     ©


 
기자에게 삼청교육대원의 사연 적은 쪽지 건넸으나...

잡혀온 사람 중엔 성경구절을 줄줄 암송하고 찬송가도 잘 부르며 자연스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감정을 넣어 막힘없이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강의를 하기 위해 천막 안에 들어서면 천막을 날려버릴 듯이 큰소리로 박수 치고 목이 터져라 찬송가를 불러댔다. '당신은 우리 속사정을 알 것 아니오! 제발 좀 도와주시오!'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산전수전 다 겪고 막다른 곳까지 온 그들에게 내가 무슨 정신교육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난 그나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신앙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경험이나 말 대신, 성경 구절을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보안대 등에서 내 강의 내용에 꼬투리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설교하러 온 목사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고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지, 억울하게 잡혀왔다고 호소하는 내용을 깨알만한 글씨로 적은 쪽지를 남이 볼세라 번개처럼 내 바지 호주머니에 넣은 사람도 있었다.

그 무렵, 마침 전방 2사단 사령부 지역에 신문사 간부와 기자들이 대거 방문했다. 육군본부 정훈감실 주관으로 열린 최전방견학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들과 칵테일을 마시던 시간에 난 당시 이름을 날리던 한 유명 기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힘들게, 삼청교육대의 문제점에 대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내 호주머니에 자기 사연을 적은 쪽지를 넣은 분의 하소연을 전하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 기자는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우다가 이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틀림없이 관심을 보이리라고 기대하고, 벼르고 별러 이야기를 꺼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참 실망스러웠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름 있는 기자가 기자 정신을 묻어버리고 현실에 영악하게 타협하는 모습을 보며 통탄했다.

물론 민주화를 위해 정의의 편에 서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지조를 지킨 훌륭한 언론인도 있었지만, 그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당시 많은 언론인들은 양심에 거리끼지도 않는 듯 독재 정권을 비호하며 권력의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광주학살에 대해 정론을 펼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기대했던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른 셈이었다. 양심을 팔아먹는 일부 기자들이 반란 도당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며 반역을 성공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그 기자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뿐 아니라 일부 공보장교도 문제였다. 몇몇 공보장교들은 기자들과 "형님, 동생"하며 어울리고 뒷바라지하며 환심을 사기도 했다. 또한 지휘관한테 판공비를 뜯어내어 기자 접대를 잘 하는 사람이 유능한 공보장교로 평가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암흑의 시대였다.

나를 피해버린 그 기자를 보며 나라가 참으로 암담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깡패'들의 천하가 이대로 굳어지는구나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나 혼자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말을 안 할 뿐이지 대다수는 나와 같은 심정일 거야'. 울적한 마음을 달래느라 그날은 잔을 사양하지 않고 연거푸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절망의 설움에 북받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노래를 불렀다.

원통 쪽으로 넘어오는 좁은 비포장도로에서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난 계속해서 "울밑에 선 봉선화"도 부르고 "사나이 가는 길 앞에 눈물만 있을소냐"도 불렀다. 사랑하는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부르던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사이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은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도 되풀이해서 불렀다.

세상은 이미 광주학살을 자행한, 의롭지 못한 권력의 편에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데도 마지막까지 정의를 이야기해야 할 기자들까지 안일한 불의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으니, 추운 겨울에 귀양살이하는 내 신세가 노랫말의 주인공인 것 같아 울고 또 울며 불렀다.

어찌 보면 나도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사람들하고 다를 바 없는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에 쫓기며 공포에 떨고 있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를 믿고 쪽지를 전해준 그 분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무사히 지옥 속을 헤치고 나왔을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위 글은 2008년 1월 20일 '평화재향군인회'에 표명렬 장군이 직접  작성해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 http://pcorea.net/bbs/view.php?id=pyo_column&no=94]

 표명렬 장군 약력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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