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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性…모진 폭풍우 드세게 몰아쳐도"

<연변 토요수필> 수필가 리경자 억새풀

수필가 리경자 | 기사입력 2010/09/12 [17:02]

"母性…모진 폭풍우 드세게 몰아쳐도"

<연변 토요수필> 수필가 리경자 억새풀

수필가 리경자 | 입력 : 2010/09/12 [17:02]
리경자 프로필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어머니수필회 회원
작품집 "비바람 이겨낸 민들레" "연변녀성"잡지 응모작품 금상. "한백컵"백일장 대상 

 
대학입학꿈을 바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녀석의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나와 남편은 점박이와 누렁이를 3년동안 모든 심혈을 들여 길렀다.

그런데 하늘의 풍운조화를 예측키 어렵다고 점찍어놓고 기르던 두 마리의 소가 간밤에 감쪽같이 잃어졌다.

하늘이 노랗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였다. 허탈감에 아침밥을 대충 들던 남편은 이제는 목재판에 들어가서라도 그만한 돈을 건져야 한다며 애간장을 태우는 나를 위로했다. 이렇게 남편은 한겨울의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면서 목재부업을 떠나갔다. 그러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소는 고사하고 송아지새끼 살만한 돈도 못쥐고 도리여 굴러내리는 목재에 허리를 다쳐 돌아올줄이야. 정말로 화는 홀로 오지 않는 법인가보다.

어려운 생활이였지만 항상 든든한 남편이 곁에 있어 만사가 대수롭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활의 중임을 나 홀로 져야 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났다. 원망과 저주로 며칠밤을 지새우다가 끝내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이제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남편의 치료비와 아들의 대학입학금을 내 손으로 장만해야 했다.

 이튿날부터 나는 왕복 십오리를 매일 걸어다니면서 하루에 13원씩 받는다는 동명태 손질하는 일에 나섰다. 다른 여자들이 자기 집 따뜻한 온돌에서 텔레비죤을 켜놓고 앉아 화투장이며 트럼프를 칠 때 나는 온하루 차디찬 물속에 손을 잠그고 명태를 손질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허리와 다리가 저리고 마비되여 제대로 걸을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한달동안 이악스레 벌어 모은 돈으로 시장에 가서 노란 병아리를 백여마리 사놓고 갓난애기 보살피듯 밤낮없이 보살폈다. 다행히 백여마리 병아리중 어질거리던 몇놈이 죽고는 모두가 삐약삐약거리며 잘도 자랐고 대문어구의 돼지우리에는 까마반지르르한 12마리의 새끼돼지들이 어미돼지 품에 매달려 걸탐스레 젖을 빤다. 그것들을 지켜보면서 이 -동물은행-만 잘 지켜내면 아들녀석의 대학입학금과 남편의 병치로는 별로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뿌듯한 가슴을 안고 백여마리 병아리에게 배추잎을 탕쳐서 옥수수가루와 섞어 주고난후 어미돼지에게 보드라운 벼겨에 두병을 보드랍게 부셔넣고 푹 끓여 하루에 대여섯끼니씩 먹이면서 바삐 돌아쳤다.

농사차비를 할라, 욱실거리는 -동물은행-을 보살필라 매일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다. 너무 힘겨워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새끼돼지들이 이제 한달만 더 자라면 목돈을 쥘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힘이 부쩍부쩍 나기도 했다.

어느덧 오곡이 소리치며 자라는 8월이 돌아왔고 자나깨나 손꼽아 기다려오던 아들의 대학입학통지서도 날아왔다.

이제는 대학입학금을 마련하는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장날을 맞추어 포동포동 살찐 12마리의 새끼돼지들을 수레에 싣고 속으로 수판알을 튕겨가며 십여리나 되는 시장으로 달려갔다. 생각밖에도 얼마전까지만도 새끼돼지 한 마리에 일백오륙십원씩 하던 시세가 팔십원으로 뚝 떨어졌을줄이야. 허망 밑진것이다. 며칠후에는 또 무럭무럭 자라던 중닭들이 하루에도 십여마리씩 쓰러져나갔다.

이리저리 뛰여다니며 페니실린, 정통편을 구해다 먹이면서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모진 고생하며 몇 달 키워온 몇십마리의 닭들이 이렇게 나흘만에 몽땅 땅속에 파묻히고말았다. 며칠사이에 돼지새끼와 닭에서 이천원이란 뭉치돈을 잃은것이다. 나는 또 한번 쇠망치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였다.

무심한 하늘은 그토록 살아보려고 애쓰는 나를 외면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이 비비꼬이기만 했지만 나는 아들의 대학입학금과 남편의 병치료를 위해서라는 하나의 오기앞에서는 한치의 망설임이나 갈등도 있을수 없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을라니 하물며 열심히 뛰는 나한테 솟아날 구멍이 없을라구.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어떻게 할가 생각을 하다 무심히 앞산을 바라보았다. 순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앞에 바라보이는 산, -록색은행-이 있지않는가! 힘만 들이면 본전도 들지 않는 좋은 돈벌이구멍인걸 왜 진작 몰랐을가?

이튿날 첫 새벽에 일어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놓은 나는 신들메를 조이고 주먹밥과 물병을 허리춤에 차고 산에 올랐다. 이슬 머금은 숲속을 헤가르며서 솔버섯이며 참버섯 그리고 산열매에 이르기까지 하여간 돈이 될만한 것들은 죄다 따서 광주리에 담았다. 매일 아침마다 빈 광주리로 나왔다가 저녁때가 되면 광주리 넘쳐나게 이고 들어가는 멋에 신나기도했다. 날이 감에 따라 어설프게 쥐던 저울대도 제법 틀이 잡히면서 그만큼 돈잎도 불어갔다.

그리고 여름밤의 시간도 쪼개쓰느라고 눈을 집어뜯으면서 침대보, 덧양말과 같은 삯뜨개질까지 하면서 돈을 모으기에 모지름을 썼다. 돈이 모여지는 재미에 피곤함보다 마냥 즐거운 마음이 앞섰다.

보슬비 내리던 어느날 나는 푼돈이라도 더 만들려고 양산만큼 큰 광주리를 이고 기차까지 타면서 도심에 있는 시장으로 갔다가 한마을에서 살던 영철이 엄마를 만났다.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으니 말이지 전혀 알아볼수 없게 그녀는 변해있었다. 집을 뛰쳐 나온지 4년 세월이 된 그녀는 완연 도시티를 내고있었다.

쌍겹눈수술이 잘못 되었는지 눈이 떼꾼하게 변해버린 그녀는 내앞에 놓인 버섯광주리를 보더니 이까짓거 돈 몇푼이 나온다고 그렇게 헤매며 사는가 하면서 입을 삐쭉하고 눈까지 찡그렸다. 내가 떳떳하게 대학생엄마가 되어서 괜찮다고 했더니 그녀는 이 세월에 자식이 뭐 소용있는가고, 개울집 아무개네만 봐도 부모에게까지 피해를 입히지 않았는가 하며 횡설수설 늘여놓더니 인제는 나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면 등을 돌리는것이였다.

꽃너울 쓰고 결혼해 남편과 깨알이 쏟아지게 십여년을 같이 살던 그녀는 귀신에게 홀리운듯 남편과 아들을 매몰차게 버리고 시내로 진출했다. 줄 끊긴 연처럼 살고있는 그녀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흙내음 물씬 풍기는 내 모습보다 더욱 가냘프고 처량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뙤약볕이 자글자글 내리쬐는 그날은 내가 개암을 따던 닷새째 되는 날이였다. 땡볕을 머리에 이고 한나절 산비탈이며 산마루를 메주 밟듯 훑던 나는 부리처럼 쑥 내민 산모퉁이에 시선이 멎었다. 크고작은 개암나무들이 심어놓은듯 모록이 서있었다. 


▲ 내 인생의 가치는 자식의 뒤바라지에 있고 가장 큰 환락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데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있다.

나는 무거워진 개암마대를 내려놓고 멜주머니를 목에 건채 탐스럽게 오롱조롱 가지에 달린 개암떨기들에 발목을 잡혀 살갈퀴넝쿨에 살갗을 긁히우는것도 헤아릴새 없이 위태로운 모퉁이에서 탐욕스레 개암을 뜯었다.
 
<재수 좋은 날이구나.> 흥이 난 나는 개암뜯기에 정신이 팔렸다. 헌데 높은 가지를 후려잡고 발뒤축을 잔뜩 드는 순간 그만 몸의 평형을 잃고 깊숙한 웅뎅이에 굴러떨어지고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의식을 바로잡으며 간신히 눈을 뜨니 뿌연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참으로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의 참뜻을 페부로 느끼는 짧은 순간이였다. 일어나려니 몸이 천근돌에 눌리운듯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질거리는 머리를 두손으로 싸쥐고 싱갱이질하며 겨우 일어나 앉았다. 아픈 감각을 따라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보니 무릎마디와 허벅다리에 커다란 피멍이 져있었고 거무스레한 종아리에서는 선지피가 흘러내려 발뒤축을 적시고있었다. 

엉뎅이가 아파 앉아 뭉개면서 옷깃을 찢어 상처를 싸매고는 불룩하던 그 개암주머니부터 두리번두리번 찾았다. 내 혼신을 빼앗기라도 하던 그 개암송이들을 절반나마 토해낸 개암주머니가 저켠에 엎어져있는것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후-하고 긴숨을 몰아쉬였다. 오늘까지 닷새동안 뜯은 개암에서 이백오십여원은 실히 나올듯해 돈이라는 물건도 마음먹기에 달린게로구나 하며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 늑장을 부릴 때가 아니였다.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며 흩어져있는 개암송이들을 주어담고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끌면서 기다싶이 산기슭을 에돌아 대암이 들어찬 나의 -보배마대-를 향해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는 진땀이 돋았고 입안에서는 겨불내가 확확 풍겼지만 호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강의함과 끈질김이 있어야 아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원만히 할수 있다는 단 하나의 굳은 신념이 디딤돌이 된 덕에 끝내 원자리까지 올라올수 있었다. 

 그러나 1미터 60센치 되는 키에 체중이 80근도 안되는 나는 내 몸체보다 두배나 더 큰 개암마대를 강마른 잔등에 지고 일어서려고 모지름을 썼지만 도무지 일어설수가 없었다. 낮에는 소방목을 나온 남정들도 드문드문 보이더니만 이제는 저녁이 되어어둠이 깃든지라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고 그 조바심덕에 무섭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창 애간장만 태우면서 뱅뱅 도는데 홀연 오십메터밖에 있는 무덤이 어슴푸레 안겨왔다. 평시에 무섭기만 하던 무덤이 이 순간에는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나는 무거운 개암마대를 힘겹게 끌면서 그 무덤앞까지 간 다음 홀쪽하게 들어간 배에다 무진 힘을 주며 개암마대를 떠밀어 무덤우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잔등에 개암마대를 지고 이를 악물며 아득바득 용을 써서 겨우 일어났다. 개미가 이사짐을 지듯 개암마대에 짓눌린 나는 땀벌창이 되었도 얼굴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팍팍 났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별들이 먼 산우에서 하나 둘 떠오르며 나를 향해 깜박이고있었다. 후들거리는 두다리를 지팽이에 의지하며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희열로 가득차있었다.

나의 신근한 노력과 피땀으로 어렵게 모아진 4천원에다 맘씨 착한 이웃들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아들의 대학입학금 6천원이 해결되였다. 그리고도 아들의 매달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철에 따라 터밭에 심어놓은 싱싱한 남새를 뜯어 이고지고 시장으로 가고 겨울이면 몇백근 되는 콩으로 구수한 토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가정보모로 들어가 식물인이 된 80세 로인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까지 꺼리지 않고 다했다. 뿌린만큼 거두어들인다고 착한 아들녀석은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도 받았고 오라지 않아 대학도 졸업하게 된다.

여기까지 오고보니 끈질기에 살아온 내 자신이 스스로 놀랍고 대견하다. 고생하던 일이 즐거운 추억으로 된듯싶고 또 인생공부를 하고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동안 남편의 몸도 좋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초중2학년생 딸애가 또 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나를 두고 안타까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결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가치는 자식의 뒤바라지에 있고 가장 큰 환락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데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있다. 억새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노라면 이제 우리 가정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은 흩어지고 찬란한 해살이 비쳐들것이다. <2002년 고모님을 모델로 쓴 글임.>
 
 

 



 


원본 기사 보기:jb-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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