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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시집도 안가고 어머니를 봉양한 효녀 지은

이형주 기자 | 기사입력 2020/07/01 [05:47]

[조선력사 인물] 시집도 안가고 어머니를 봉양한 효녀 지은

이형주 기자 | 입력 : 2020/07/01 [05:47]

 

력사에 이름을 남긴 조선녀성들 (12)

 

시집도 안가고 어머니를 봉양한 효녀 지은

(9세기말)

 

자식이 부모를 끝없이 존경하고 잘 공대하는것은 우리 인민의 고상한 미풍량속이다.

9세기말 후기신라때 한기부(경상북도 경주 동촌일대)의 백성인 련권의 딸 지은은 어머니공대를 잘한것으로 하여 력사에 알려져있다.

9세기말로 말하면 신라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봉건적착취와 압박으로 말미암아 전국각지에서 농민폭동군이 들고일어나 통치체계와 질서가 걷잡을수 없이 무너져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다고 자연재해가 해마다 들이닥쳐 백성들은 입에 풀칠조차 할수 없는 형편에 처해있었다.

경주에서 살던 지은이네도 봉건통치배들의 착취와 압박이 극심하여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궁색한 살림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어머니를 잘 모시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시집갈 나이에 이르렀지만 시집을 갈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시집을 가버리면 앓는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때문에 그는 하루도 어머니곁을 떠나지 않고 병구완을 하였다.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다른 처녀들은 16살이 잡히기 바쁘게 시집을 갔지만 그는 32살이 되도록 시집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은 지은의 효성에 감탄도 하고 동정도 하면서 적은것일망정 나누어먹으며 지냈다.

지은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건만 어머니병은 조금도 차도가 없이 심해가기만 하였다.

그래서 지은은 매일 금산을 비롯한 경주주변의 여러 산들을 찾아다니며 좋다는 약초들은 다 구해다가 어머니를 구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는 약초를 찾으려는 한가지 생각에 몰두하던 나머지 길을 잃고 헤매이다가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고있었다.

지은의 어머니는 겨우 몸을 운신하면서 집마당가의 울타리에 의지하여 딸을 기다리고있었다.

자정이 훨씬 지나서 지은이가 들어서자 어머니는 왜 이렇게 늦었는가고 다그쳐물었다. 지은이는 《어머니의 병에 좋다는 약초를 찾아 헤매다가 이렇게 늦었사와요. 다시는 어머니가 근심하지 않게 일찍 오겠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약초를 얻지 못하여도 좋으니 제발 빨리 돌아오너라. 처녀가 혼자서 다니다가 무슨 일이 생길가봐 두렵다. 내 병이야 기울어진 운명이니 더는 걱정하지 말어라.》

《어머니, 제발 그런 말 말아주세요. 부모를 봉양하는것은 자식의 응당한 도리인데 제가 어찌 어머니의 건강을 저의 안일과 바꾼단 말이예요.》

지은은 어머니를 위안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와 얼른 식사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약을 끓여가지고 어머니를 대접하였다.

숙성한 딸을 말없이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였다. 32살이 되도록 어미때문에 지은이가 시집을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어미된 마음이 미여지듯 쓰리고 아팠던것이다.

어머니는 지은의 손목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애야, 너도 어서 출가를 해야지.》

그러자 지은은 방긋이 웃어보이며 《어머니, 별말씀을 다 하세요. 어머니는 혼자인데 누가 돌보겠소이까. 이 세상에 나를 키워준것은 어머니뿐이오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소이까. 그래서 나는 절대로 시집을 안가기로 결심했소이다.

처녀는 때가 되면 시집을 가야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달리 할수도 있지 않소이까. 옛날에도 처녀들이 시집을 안가고 부모를 봉양한 일이 있대요. 나도 그 효녀들처럼 그런 처녀가 되겠소이다.》라고 말했다. 지은의 말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그후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 지은의 노력은 더욱 커갔다.

피곤을 무릅쓰고 산속을 다 뒤지며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다.

그러나 딸의 정성에는 아랑곳없이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안타까와 어쩔바를 몰라하던 지은은 마지막이라도 어머니에게 흰쌀밥을 지어드릴 생각을 하게 되였다.

평생 생활에 쪼들리다보니 어머니에게 흰쌀밥 한번 변변히 해드리지 못한게 한스럽고 마음에 내려가지 않았던것이였다.

그래서 밤새껏 생각다 못해 쌀 열섬을 받고 지주집에 들어가 일해주는 종이 될것을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지은은 낮에는 해가 지도록 지주집에서 일을 해주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흰쌀밥으로 어머니를 대접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머니의 병세에도 차도가 생기였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이상한 느낌이 갈마들었다.

그전에는 입에 풀칠도 못하던 우리 처지에 어떻게 매일 흰쌀밥이 차례질가?

어머니는 생각키우는것이 있어 지은을 불러앉히고 조용히 말하였다.

《전에는 잡곡밥이라도 꿀맛 같더니 요즘에는 흰쌀밥이라도 오히려 구미가 동하지 않으니 웬일이냐? 이 흰쌀이 어디서 났는지 에미를 속일 생각말고 솔직히 말해보아라.》

지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하였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때문에 너로 하여금 종이 되게 하였으니 차라리 빨리 죽는것만 못하구나!》라고 자기의 처지를 탄식하였다.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저들의 팔자를 한탄하며 울고 또 울었다.

이 정상을 보는 사람들은 물론 이야기를 듣고난 경주사람들은 모두 그들모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게 되였다.

그때 효종이란 사람이 그 집을 지나다가 그 광경을 직접 보고 크게 자극되여 가만있을수가 없어 그길로 집에 돌아와 부모들에게 자기의 느낀바를 말하였다.

그리고 부모의 승인을 받고 자기 집의 곡식 백섬과 옷 등을 실어다가 지은에게 주었다. 또 지은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몸값을 보상하여주어 그가 종의 처지에서 벗어나 평민으로 되게 해주었다.

지은의 처지와 효성에 감동된 많은 주변사람들도 각각 곡식 한섬씩 내여 지은의 집에 보내주었다.

이리하여 지은은 그것으로써 어머니를 잘 봉양할수 있게 되였다.

그후 지은이가 살던 마을을 《효양방》(효성을 다해 봉양한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은 《삼국사기》 (권48 렬전8 효녀 지은)에 반영되여있다.

9세기말 효녀 지은의 비참한 처지는 무너져가는 신라봉건사회의 일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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