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회장대행
이상설 선생(1870~1917)은 민족의 선각자시며 우리나라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대한협동회」를 조직, 전국적으로 항일운동을 펼치셨으며 1906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일제의 대한침탈과 식민지정책의 부당성을 통렬히 꾸짖고 국권 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지지, 호소를 위하여 노력하셨으며 만국평화회의에서 「공고사」를 공표하셨으며 미· 불 ·독· 러시아 등을 순방하시면서 구국의 항일 외교활동을 펼치셨습니다.
1909년은 연해주 봉밀산(蜂密山)에 최초의“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셨으며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 최초의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하셨습니다.
1910년 한일병탄후 일제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토그에서 「권법회」를 조직하여 「한민학교」등 확장하셨으며 1913년 중국 나자구(羅子溝)에 독립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세우며 실제적인 독립운동을 펼치셨고 1914년 이동녕, 이동휘 선생 등과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셨으며 1915년 상해에서 박은식, 신규식 선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 본부장을 맡았으나 1917, 3,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코에서 향년 48세로 서거(逝去)하셨고 선생의 유언(遺言)에 따라 우스리스크 수분하 강가에 화장(火葬)되고 동지들을 위하여 문고(文藁)도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이에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는 경주이씨중앙화수회와 긴밀히 상의하여 이석형 당시 산림조합중앙회장을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지역, 전국 각계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이사회를 선임하고 2015, 11, 29 국회예산결산소위원회에서 기념관 건립 예산을 확보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외 제1, 2차 기본 및 실시설계가 완료, 납품되기 까지 지역은 물론 국가보훈처, 충북도, 진천군과 파트너십 구성까지 모두 이뤘습니다.
전체 예산 8,770백만원 중 국비 2,631백만원, 도비 1,462백만원, 군비 2,923백만원이 배정되고 국민성금(자부담)1,754백만원 확보를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競走)하였으나 자부담이 마련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에 봉착(逢着)하였습니다.
이의 타개(打開)를 위한 여러 노력들이 각 방면에서 추진되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 사업취소까지 이르게 되어 특단의 조처로 진천군수와 담판(談判)을 짓고 사업규모를 6,000백만원으로 다시 축소, 사업변경 승인과 함께 사업주체의 변경까지 모두 마치고 드디어 2024, 3, 31일 8년 여만에 준공, 그 낭보(朗報)을 전하게 되니 눈물이 앞섭니다.
양도, 양수계약서까지 쓰고 추진한 그 3년여 지난했던 과정을 하나 하나 다 설명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기념사업회 외 모두의 아픔이며 그 뜻과 정신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통한(痛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전국 각 대학 문, 사, 철 소장파 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상설 세계화FORUM 역시, 답보상태로 전락됐고 이상설수학캠프, 전국시낭송대회 개최와 이상설홍보관 상설 운영 등도 모두 중단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중국 밀산의 한흥동 이상설 선생 “항일무장투쟁운동기지”유적지 기념비 제막과 이상설 선생 “어록비”건립 등도 차례로 연기된채 보류되었음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때 모두는 크게 낙담하고 스스로를 나무랐습니다. 수원수구(誰怨誰咎)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과 노력의 부족을 나무랐습니다.
그렇게 많은 난제들과 재추진의 어려움을 겪고 진천군 중심의 새로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기존 추진위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습니다.
새로 출범한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와의 교류와 소통도 지극히 제한적이었음은 지역의 얘기대로 입니다.그러나 멀리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풍찬노숙 (風餐露宿)하신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顯彰)하는데 우선순위와 반대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기념관 건립의 사업 주체가 누구인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송기섭 진천군수님의 솔선수범과 추진력은 모든 중심에서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되었고 진두지휘를 통하여 자부담 확보에 건인차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는 민선 제 8기 지자체장의 귀감이 되었으며 외부와도 크게 공감이 되는 치적(治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까이 지역에서 부터 그리고 전국적인 응원과 성금의 기탁이 그 증거입니다.
돌이켜보면 2015,2,10 이재훈 부회장님 등과 처음 진천군을 예방,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이상래 회장님과함께 8월 여름까지 김구, 안창호, 김좌진, 윤봉길기념관 등의 답사와 진천군 기획실 신정호 팀장, 김상봉 군의회 의원님 등과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늦게까지 토론하고 격론을 벌였던 기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2015, 6, 5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는 이재훈, 이재춘, 이상래, 이상필, 이경희, 이상빈 제위 등과 새로운 조직, 구성을 마치고 기념관 건립의 기본계획서를 이사장 이재정 교육감에게 최종 보고하고 6월 26일 추진위 제 1차 준비위원회 회의가 중앙화수회 장학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진천군 관계자 외 당시, 이상근 회장을 비롯 이상훈, 이상빈, 이경희, 이상래, 이재용과 지역에서 백원평, 변해종 선생 등 각계 전문가가 참석하여 사업계획 보고서 채택과 국비 30%, 지방비 50%, 기념사업회 20% 등 예상 공사비 95,7백원을 최종, 확정했습니다.
기념관 건립은 그렇게 첫 단추가 꿔어졌고 국비 26,3억원 확보를 위하여 이상래 부회장과 단둘이 국회의원회관과 의원 지역구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때를 회상하면 꿈결같이 느껴집니다.
결국 2015, 7, 5 진천군 신정호 팀장을 중심으로 사업계획서 준비가 완료되고 토지 무상사용 요청과 사업신청서 접수를 마쳤습니다.
7월 9일은 드디어 충북도에 기념관 건립공사 설명보고회 및 예산 신청서를 제출하고 충북남부보훈지청에 기본적인 서류들을 접수했을 때가 어제 같았습니다.
그리고 2016, 4, 15 주)한인건축사사무소에 의뢰하여 기본설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출발이고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한 해는 국회, 국가보훈처, 충북도 외 각계 유관기관 및 관련단체들을 찾아 선생과 선생의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ON-OFF Line을 통한 국민성금 모금에 총력을 기울였던 때는 오늘 오후처럼 계절이 오고 가는 것도 잊고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 때 고맙고 함께 수고해 주신 여러분들의 열정에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2017년 선생 순국 제100주기를 맞아서는 숭렬사(崇烈祠) 편액(扁額)교체, 각 방송사 인터뷰, 프레스센터 내외신기자회견, 지방신문사 언론좌담회와 추모 전국학술대회, 한시백일장대회, 이상설수학캠프, 전국시낭송대회 개최 그리고 선생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쫒아 만주, 연해주 일대를 모두 탐방후 밀산(密山) 한흥동 유적지에 선생의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2년여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제막식 1 주일을 앞두고 박근혜 정부 “사드(THAAD)”4기 설치로 모든 공사가 중단된 사건들은 지금도 현기증(眩氣症)이 납니다.
기념비는 현재, 기단 아래 내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 공동 추진에 앞장섰던 맹고군(孟高君) 밀산시 부시장 일행은 흑룡강성정부 조사까지 받고 밀산시정부는 압수 수색을 받는 등 중국 현지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한 동안 시끄러웠습니다.2017, 8, 7 저녁 KBS 9시 뉴스가 보도한 내용 그대로 입니다.
그 간 KBS 이상설 역사토크쇼 개최, TJB ·대전MBC 방송대담, KBS· EBS· 충북방송 다큐멘터리 제작 전국 방영 등은 과거 정부에서 관심 밖으로 치부됐던 보재선생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만주, 연해주 일대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이 이뤄지는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주요 일간지의 기고와 컬럼, 소셜미디어 대외홍보 역시, 국가보훈부 등록 200여 사단법인 가운데 가장 치밀했고 체계화, 활성화 되었음은 각계의 지적이고 평가였습니다.
매년 4월 22일 개최되는 선생의 추모제례는 전국 행사로 자리매김 되었고 지난 정부 시절 사)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과 최근의 광복회 중심의 “독립운동단체연합”의 주도적 역할과 활동은 이상설선생기념 사업회가 가장 앞서고 돋보였다는 칭찬입니다.
향후 헤이그특사 세 분에 대한 평가와 만주, 연해주 일대 항일독립운동의 철저한 재조명은 이제, 우리 후세대들의 몫입니다.
지난 2015년 이후 이재정, 이석형 이사장 채계에서 가장 많은 활동과 사업을 추진해 왔음이 외부의 일반적인 평가라는데 여기에 이의(異議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기념관 건립 이후 국가보훈부, 충북도, 진천군, 대학 등과의 연대와 파트너십은 솔선수범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으면 영원히 고립될 수 밖에 없다는 주위의 경고(警告)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이는 기념관 건립의 관리와 운영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충북도, 진천군, 진천문화원 그리고 사)이상설기념사업회 간 교류와 협력은 직접, 관심과 참여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기념관 건립의 기초와 사업의 추진은 기념사업회가 앞장서 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 연계한 민, 관, 기업과 대학을 하나로 묶는 일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한 전, 현직 이사회 합동 개최와 이종찬 광복회장, 이재정 전)경기교육감, 이상배 전)서울특별시장, 이현우 경주이씨중앙회장 등 원로 및 선생 순국 제 100주기 고문, 자문위원과 해외동포 자문위원 모두의 연찬회와 연석회의 개최도 제안드리는 바입니다.
지금은 모두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선생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의 고혼(孤魂)은 1996, 12, 27 이 되어서야 비로소 러시아 소황령 수분하 강가에서 초혼제(招魂祭)가 치러지고 그 외로운 혼백(魂魄)은 만주와 연해주, 유럽과 미주대륙을 횡단하고 황해를 휘돌아 진천 생가로 돌아왔습니다.
사후 90여년 만에 고국을 찾은 그의 혼은 덕수궁에 연금되어 지독한 만년을 보내고 있을 고종을 알현(謁見)하고 황제의 특사로서 이루지 못한 사명을 보고하고 서로 부둥켜 않고 목놓아 울었으리라!
1997, 3, 2 이 되어서야 유해가 뿌려진 그 강가 모레를 가져와 부인 달성서씨와 합장하고 지역에서 뜻을 모아 퇴락한 사당 숭렬사를 다시 짓고 작은 동상까지 건립하여 축문을 짓고 읽는데 수 많은 사람들 중 울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죠?
율곡(栗谷) 이이를 조술(祖述)할 대학자로도 평가되었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풍전등화와 같았던 망국의 전과정을 하나하나 목도(目睹)하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새웠을지, 선생을 생각하면 더욱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충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대성중학(용정중학)의 “이상설전람관”은 윤동주박물관과 함께 2019, 1월 중국 정부에 의해 이미,폐쇄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전서숙”의 후신인 용정실험소학교는 출입 자체가 아예, 봉쇄되었습니다.
제 22대 총선을 앞두고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때 민족의 힘을 믿고 우리 내부에서부터 뭉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간 수고해준 장주식 추진위원장님과 추진위원 여러분들의 노고에도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추진위 운영위원으로서 함께 해주신 “전시기획소위원회” 여러분들의 노고에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특히 시공사는 물론, 정덕희 진천군 주민복지과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들과 충북남부보훈지청, 충북도의 수고에는 평생의 빚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성금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삼가 큰 절을 올립니다.
죽기로 맹세한 선생의 항일무장투쟁운동은 대한민국 미래 100년의 시대정신입니다.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
여러분 같이 하시지요? 이는 결코, 개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2024. 3. 15 원본 기사 보기:미디어저널 <저작권자 ⓒ pluskore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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