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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 역사 -111]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64

조선(朝鮮) 제7대 한율(翰栗)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4/22 [00:55]

[홍익인간 7만년 역사 -111]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64

조선(朝鮮) 제7대 한율(翰栗)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4/22 [00:55]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서기전1994년 이전에 마한(馬韓) 궁호(弓戶)가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선대에 마한(馬韓)이었던 두라문(杜羅門)의 아우가 되는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이 제7대 한율(翰栗) 천왕의 명(命)을 받아 마한(馬韓)을 계승하였다.

[마한(馬韓)에 막연(莫延)을 봉(封)하다]

마한 궁호(弓戶)는 제8대 마한이며, 제4대 마한 두라문(杜羅門)의 아우가 두라시(杜羅時)이고, 두라시의 증손이 막연(莫延)이다. 마한 두라문은 서기전2179년부터 서기전2176년까지 다스렸으며 단군조선 제3대 가륵 천왕 시대 사람이 된다.

마한 궁호가 후사가 없었으므로 막연이 단군조선 제7대 한율 천왕의 명을 받아 마한(馬韓) 땅의 마한(馬韓)이 된 것이다.

마한(馬韓)은 사람으로서 비왕(裨王)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며, 마한 땅 즉 마한(馬韓)이라는 나라(國), 관경(管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이나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의 삼한(三韓)에는 국(國)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은 원칙이 아니다. 즉 국(國)이라는 글자가 경계가 있는 나라를 가리키므로 경계가 없는 나라에게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한인천제의 한(桓)이나 한웅천왕의 단(檀)이나 단군의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경계가 없는 대제국(大帝國)이므로 국(國)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한단조선(桓檀朝鮮)의 일반 제후국에 해당하는 소국(小國)들에게 국(國)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경계가 있으므로 이치에 맞게 된다. 마한과 번한은 소국을 넘어서는 대국(大國)으로서 경계가 없다고 보아 국(國)이라는 글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다.

후대에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이 되던 한반도에 생긴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도 각각 수십개의 소국(小國)들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국(國)을 붙이지 않는 것이 맞으나, 일반칭인 국명(國名)으로서 국(國)자를 붙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단군조선 시대에는 소국(小國)이 되는 제후국(諸侯國)이나 성읍(城邑)의 나라가 국(國)이라 불리는 것이다. 즉 봉건제후국(封建諸侯國)이 국(國)이며 중앙조정(中央朝廷)은 천조(天朝)로서 천국(天國) 또는 상국(上國)이라 받드는 것이고, 일반적인 국(國)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된다.

한편, 제후국이 대국(大國)으로서 다시 제후를 봉한 경우가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나라로서 단군조선의 천왕격(天王格)의 나라인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이 있으며, 천자국(天子國)인 고대중국의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가 있다.

단군조선 천왕이 봉한 군후국(君侯國)으로는 단군조선 초기에 봉해진 천왕격의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의 삼한(三韓)과, 천군국(天君國)인 청구(靑邱), 남국(藍國), 구려(句麗), 진번(眞番), 부여(扶餘), 몽고리(蒙古里), 고죽(孤竹) 등이 있으며, 그리고 후에 봉해진 낙랑홀(樂浪忽), 엄독홀(淹瀆忽), 남선비(南鮮卑) 등이 있고, 일반 제후국으로는 숙신(肅愼), 예(濊), 개마(蓋馬), 옥저(沃沮), 졸본(卒本), 비류(沸流)와 그후에 봉해진 청아(菁莪), 서옥저(西沃沮), 맥성(貊城) 등이 있다.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지금까지는 기록상 밝혀진 바는 없으나 단군조선 본국과는 별도로 제후국(諸侯國)을 봉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한 땅이 되는 한반도 내에 평양(平壤)에 있던 마한 본국 외에 제후국들이 수십개, 수백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또 마한의 관경에 속하던 지금의 일본(日本) 땅인 구주(九州, 큐슈) 등지에도 제후국들이 산재하였던 것이 된다.

번한(番韓)은 단군조선의 서쪽이자 남쪽을 보좌한 나라가 되는데, 번한 자체에서 별도로 봉한 제후국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기전1766년에 번한이 고죽국(孤竹國)의 왕인 묵태(墨胎)를 은(殷)나라 시조 탕(湯)에게 보내어 즉위(卽位)를 축하하였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죽국은 번한의 관경에 속하였던 군국(君國)이 되는 것이다.

위치상으로 번한(番韓) 관경에 속한 나라로는 산동지역에 위치한 청구(靑邱), 남국(藍國), 엄(淹), 서(徐), 회(淮) 등이 있으며 발해만 서쪽에 위치한 고죽국(孤竹國), 기후국(箕侯國)이 있다.

마한과 번한의 관경 외에 있던 단군조선의 군후국은 모두 단군조선 본국 즉 진한(眞韓)에서 봉한 것이 된다. 즉, 구려, 진번, 부여, 숙신, 옥저, 개마, 예, 졸본, 비류, 서옥저 등 마한 땅의 압록강 이북과 번한의 북쪽에 위치한 군후국들이 진한(眞韓) 또는 진조선(眞朝鮮)의 군후국(君侯國)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번한관경에 속하였던 영지(令支)는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로서 위치상으로는 고죽국의 수도가 되는 고죽성(孤竹城)의 서북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는데, 고대중국의 기록으로는 영지국(令支國) 등으로 국(國)이라 적고 있는 바, 성(城)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독립적인 나라(國) 즉 제후국(諸侯國)으로 본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의 성(城) 단위에 지나지 않는 영지(永支)는 중국의 제나라나 연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에게 버금하는 독립적인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서기전650년경 제(齊)나라와 연(燕)나라의 팽창으로 고죽국(孤竹國)과 은(殷)나라의 망명자 기자(箕子) 서여(胥餘)의 나라가 되는 기후국(箕侯國)이 망하여, 이곳의 주축세력들이 동쪽으로 이동하거나 남하하였던 것이 되는데, 특히 기자(箕子)의 후손으로서 번한(番韓) 땅으로 들어간 수유족(須臾族, 기자 서여족)의 무리인 기후(箕詡)가 서기전323년에 번한(番韓)을 차지하여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기도 하였고, 일부는 남하하여 전국시대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 사이에서 선우 중산국(鮮于 中山國)을 세우기도 하였다.

▲ 죽기 전 이병도의 자백-"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국조"     © 조홍근 편집위원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대한 최태영 박사 증언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 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 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내용)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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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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