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글창제의 최대 공로자 과연누구인가?

훈민정음창제 최고의 공로자는 '세종대왕'아닌 '신미대사'이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07/11/27 [02:39]

한글창제의 최대 공로자 과연누구인가?

훈민정음창제 최고의 공로자는 '세종대왕'아닌 '신미대사'이다

편집부 | 입력 : 2007/11/27 [02:39]
▲   내달 출간을 앞두고 있는 소설 '끄리' 책 표지  © 플러스코리아

 
 2007년12월 중에 연합뉴스에서 나올 예정인 소설 '끄리 1,2,3권(저자 한치선)'을 앞두고 기존학계와 재야 학계에서의 적지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소설 속의 내용이 기존 한글관계 소설들과는 달리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한글창제의 진실을 밝히는 구성으로 되어있는데 그 중에 상당부분이 한글에 대한 종전의 학설과는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몇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훈민정음창제 최고의 공로자는 세종대왕이다? 
아니다. 공로자는 '신미'라는 예상 밖의 존재다.

근거; [복천선원연력]이라는 속리산 복천사의 연력서에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 속리산 복천사의 연혁이 기록된 복천선원연력     © 플러스코리아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 한 끝에 신미선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 범서가 모음과 자음으로 구성되었음을 참고하여 18개의 자음(子音)과 10개의 모음(母音)을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 토(吐)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였다. 대왕께서 우리글이 만들어 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 번 지어 보라 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의 노래를 지었다.”(신미에 관한 기록 중 일부)
 
또한 영산 김씨의 족보에 신미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한글 간행서인 수릉엄경 10권에 세조와 신미의 발문을 보면 신미가 한글서 간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초의 한글간행물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이다?

그렇지않다. 
한글창제 시점이 현재 인지되고 있는 시기보다 무려 최소 8년 이상 앞당겨진다.
즉, 최초의 한글간행물이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이 아니라 '원각선종석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 27년에 편찬되어서 28년에 간행, 원각선종석보는 세종 20년(명나라 연호로는 정통3년)에 발행되었다. 원각선종석보는 총 5권으로 된 불서(佛書)로서 원래 해인사의 일타선사가 중국의 고서점에서 구하였던 것으로 돌아가신 후 그 분의 상좌에게 전해졌다. 그 중 제 1권은 경상대 명예교수인 려증동 교수가 소장.

*나머지 네 권을 찾아내어 그 내용을 세상에 밝히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다. 원각선종석보 5권은 훈민정음해례본이나 용비어천가 못지않은 국보적 가치가 있다고 사료된다.

▲ 그림 2) 원각선종석보 내용 중 끝부분. '정통3년 천불사'라는 글이 보인다    

▲ 위 표지는 사본의 표지를 스캔한 것이다.  위 책이 바로 최조의 한 글로 된 불교의 계보를 담은 서적이다. 이 책이 한글을 만들기 전 중죽 명나라 연호 정통  3년 세종 20년 (1438년)에 출간된 책이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됨에 따라 창제사실을 일제식민지시대 식민사학자와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던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친일사학자들은 더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며 국민적 성원으로 민족정기와 역사 바로세우기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불교는 실질적으로 평등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모든 중생 그대로 부처라는 민본주의의 핵심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 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완성된 한글을 만들어 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인의 대단한 역사적 자긍심의 원천이라 할 만하다. 



 [한치선 소설가는 본지 고정 필진입니다. 수년간에 걸쳐 방대한 자료수집과 근거에 입각해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아름다운 어휘로써 장장 전집 3권을 출간함을 진심으로 축하 드리고, 역사적 진실 알리기 일환으로 역사소설 '끄리' 출판 기념회에 전 국민적 성원이 잇따를 것으로 기대되며, 나아가 국민 필독 도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 드립니다.]
단순 흥미물보다는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와 전문성, 시사성을 담은 글을 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헌식 07/11/28 [10:38] 수정 삭제  
  충격적인 내용이네요. 궁금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논리와 이론을 소설로 인정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독자 07/11/30 [06:39] 수정 삭제  
  정확히 밝혀 줄 책인 것 같에여
빨리 봤으면 좋겟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김봉규 07/12/03 [09:25] 수정 삭제  
  (1) 세종20년(1438)에 세종글자로 된 《원각선종석보》1,2,3,4,5권이 판각 출간되고 나서
(2) 5년 뒤인 세종25년(1443) 12월 30일에 세종님금이 "내가 글자를 만들었다"고 신하들 앞에서 공개하기 직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으며,
(3) 그 이후 세종28년(1446) 9월에 세종님금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보였을 직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세종님금이 조선문자를 만들겠다는 극비의 중대사업은 6단계로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계획설계단계 - ㉡추진실행단계 - ㉢검증확인단계 - ㉣발표공개단계 - ㉤보완수정단계 - ㉥실용보급단계

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종글자 연구력사상 최초”로 이 6단계를 설정하고 ※≪세종글자 창제 6단계 프로젝트≫※라 이름하고 있습니다. 추진과정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 배달겨레가 써 왔던 고조선말기의 사각형문자[古篆字](가림토문자) 38개는 차이나글자에 비해 획수가 간단하여 선명하고 글자 수가 적어 안성맞춤이었기에 이를 본따서[字倣古篆(字)] 조선문자를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에서 무슨 소리든지 적을 수 있으려면 글자가 더 있어야 함을 알았기에 가림토문자에 없는 글자는 더 만들고 필요없는 것은 버려 소리 나는 위치와 방법, 기(氣)와 긴장의 유무, 발음기관 모양 등을 본따 소리 운용체계를 합리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1)이지만 미리 로출되면 복잡해지기에 궁 밖에서 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나머지 둘째딸 정의(貞懿)공주에게 시킨 것입니다. 공주는 부왕의 명을 받고 남편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실행했던 것입니다. 안맹담은 집안에 불당을 짓고서 10여 명의 스님들을 거느린 불도자였기에 외부와 단절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실험보고서가 조선문자책《원각선종석보》1, 2, 3, 4, 5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왕은 너무나 기뻐하여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하였는데 그때가 세종 20년(1438)이었습니다.

세종님금이 정의공주를 귀여워했다는 기록이 《성종실록》에 “정의공주...연창위 안맹담이 혼인을 했다.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력산을 풀어내었다. 세종이 그를 아꼈다(貞懿公主...延昌尉安孟聃尙之 公主性聰慧 解曆算 世宗愛之: 성종 8년 2월)”로 나타나 있고, 죽산 안씨세보 정의공주(貞懿公主) 조에도 “공주가 조선글자 만들기에서 부왕인 세종을 도왔다”라 적고는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土着 猶未畢究 使大君解之 皆未能 遂下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세종님금이 고민한 것은 조선말을 차이나글자로 적을 수 없음에 있었다. 비로소 훈민정음을 만드셨으나 변음(어미활용)과 토착(어간)을 다 살피지 못하여 대군에게 풀어보라고 시켰다. 대군 모두 풀지를 못했다. 드디어 공주에게 명을 내렸더니 공주가 곧 연구하여 풀어서 바쳤다. 세종님금이 크게 칭찬하고 상을 내렸는데 그 상이 노비 수백 명이었다.-글쓴이 뒤침)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풀었다고만 할 경우는 로써 끝나지만, 은 글이든 책이든 “물건을 드린다”는 이 됩니다. 세종님금은 정의공주가 진상한 실험결과보고서인 판각본《원각선종석보》 1, 2, 3, 4, 5권을 보고서 조선문자의 실용화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내놓았다가 밀어닥칠 온갖 어려움을 고민하던 끝에 5년 뒤인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에 비로소 신하들 앞에서 낱글자들이 쓰이는 용례와 뜻[例義]을 괘도에다 그려서 걸어[偈] 보이며[示] 설명(브리핑)한 것이 ㉣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종님금이 혼자서 극비리에 추진한 일이었습니다.

(2) 이후부터 (3)은 ㉤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세종님금은 공개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신미대사는 이때(1443-1446년)부터 4년간 기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 때에 불경을 세종글자로 뒤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세조5년(1459) 2월 9일(임술)에서야 “김수온”은 일찍이 행직으로서 성 임과 함께 우선당에 출근하여 ≪월인석보≫를 선사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세조 6년(1460) 5월 28일(계묘)에 례조에서

≪훈민정음≫은 선왕(세종)겨옵서 손수 지으신 책이오 ≪동국정운≫≪홍무정운≫도 모두 선왕겨옵서 찬정(撰定)하신 책

이라 했습니다. “손수 짓다[親制]”와 “갖추어진 것을 정하다[撰定]”는 뜻이 다른 말입니다. 때문에 신미대사가 (1)(2)에서부터 세종글자를 만들었다고 함은 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올 로 인하여 세종글자가 만들어지고 난 뒤인 세조 때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2) 이후부터 (3)은 보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과 (2) 사이 5년(세종20년부터 세종25년)은 신미대사의 참여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1)의 직전까지 있었던 일은 ≪원각선종석보≫1-5권을 모두 살핀 뒤 관련잇는 모든 력사자료를 검증해야 그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이라는 력사적 증거물과 (2)라는 확증물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입니다. 입니다. 때문에 을 바탕하더라도 라 함이 올바른 판단일 것입니다.

위 기사 내용처럼 에 있다는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한 끝에 신미선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 범서가 모음과 자음으로 구성되었음을 참고하여 18개의 자음(子音)과 10개의 모음(母音)을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 토(吐)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였다.”(위 기사)

를 보더라도, 신미대사가 세종글자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세종25년(1443)부터 세종28년(1446)까지 4년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종20년(1438)부터 세종24년(1442)까지 5년간 세종글자 창제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위 기록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대왕께서 우리글이 만들어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 번 지어 보라 하여 과 , 등의 노래를 지었다.”(위 기사)

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종24년(1442) 3월 1일에 ‘세종님금은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태조가 왜구를 소탕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라고 전지한 것은 ≪룡비어천가≫를 짓고자 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27년(1445) 4월 5일에 ‘의정부 우찬성 , 우참찬 , 공조참판 등이 ≪룡비어천가≫ 10권을 지어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을 때 신미대사가 관여했는지 안 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의 이라는 말에 기대어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세조14년(1468) 5월 12일에 님금이 사정전에 나가 종친, 재실, 제장과 담론하며 각각 술을 올리게 했습니다. 영순군 에게 명하여 8기생에게 조선말노래[=언문가사]를 주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 노래가 세종님금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이었다고 했습니다.

≪왕조실록≫이란 세세로 이어지는 력사서이기에 자세한 사항까지 기록하지 못했거나, 기록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대체(大體)는 일관됨이 마땅합니다. 또한 령산김씨 세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그의 아우 이 집현전 학사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곳들이 있을 뿐입니다.

세종글자로 간행한 책 ≪수릉엄경≫ 10권에 세조와 신미대사의 발문이 실린 것으로 보아 신미대사는 세조 때 와서 비로소 세종글자로 된 책을 간행하는 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각선종석보≫1,2,3,4,5권을 신미대사가 세종20년(1438)에 지은 것으로 단정하기란 어렵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미대사가 지었다면 아니면 와 가까운 절에서 간행했어야 함이 순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 어디 있었던 절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신미대사가 지었다면 어딘가에 ≪원각선종석보≫라는 책이 한 권은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었다는 말이 있거나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 책 1,2,3,4,5권은 한 때 서울지방의 어느 고서점에서 ○○원에 판매되기도 한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이라 한 데다 380여 매의 음화(淫畵)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고서점에서 판매되었던 그 책과 일타선사가 보내준 이 책(짐계선생본)을 비교한 다음, 과연 하여 지은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원각선종석보≫1,2,3,4,5권은 국보가 될 만한 가치가 높은 문헌자료입니다. 이를 보충 증명하려면 이 책에 대한 지은이부터 먼저 명증해야 할 것입니다.
seegreem 07/12/05 [10:22] 수정 삭제  
  현재 여증동교수님이 소장하신 1권이야 세상에 약간은 내용이 공개되어있으나 중요한 것은 마지막 5권일듯 싶습니다. 책 뒤에 발문이나 그런 것을 통해 중요한 것이 밝혀질지도 모르지요. 해인사 일타스님의 유품을 이어받은 스님께서 어서 그 책을 공개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국보로 등록해도 될만한 가치가 있겠지요.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글창제비밀 관련기사목록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완도 약산 해안 치유의 숲, 지난해 대비 방문객 3배 늘어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