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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조령산성(鳥嶺山城)

박동석 편집위원 | 기사입력 2008/02/03 [14:27]

문경새재

조령산성(鳥嶺山城)

박동석 편집위원 | 입력 : 2008/02/03 [14:27]
조령산성(鳥嶺山城)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명나라 측에서도 선조가 안주에 파천하여 있을 때 백상루에서 유원외가 선조에게 조령관 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에 따른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중국 산해관처럼 하자느니 조령만이 천험은 아닌데 다른 곳은 설관하지 않아 되겠느냐는 등 논의만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평안감사 이원익, 병사 신집, 우승지 유몽정, 주서 김상설, 검열 조유한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수집차 화공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이 중지되었다.
 
▲  홍예문
선조 26년 12월 영의정 류성룡이 성에 의지하여 승전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 설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류성룡은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의 조령지세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 계책에 대한 것을 듣고 선조 27년(1594) 2월에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조령은 나라의 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되고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수백리(漢江數百里)를 자연히 잃게 된다. 충주 사는 수문장 신충원이 조령지세를 잘 알고 있다.

조령의 영상(嶺上)에는 잡로(雜路)가 많아 막기가 힘들고, 영(嶺)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내려가면 깍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로 물이 흘러 행인들이 나무를 걸치고 건너야 한다.

이와 같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된다.
 
또 응암(鷹巖)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설관하여 적이 이곳에 이를 때 다리를 철거하고 물을 막았다 트면 감히 발붙이기가 어렵고 궁노(弓弩)와 능철화포 등을 쏘면 백여명이 지킬 수 있다.
 
 문경 동쪽에는 구로(舊路)가 있어 조령의 서쪽에 이르게 되나, 백년간 사용치 않아 산림이 울창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다니기 어렵고 문경 서편에도 소로가 연풍현의 동쪽에 닿으나 워낙 험준하여 여기도 수십인이면 지킬 수 있다.
 
 연풍읍과 수회촌의 땅이 기름지니 승군(僧軍) 산척(山尺) 백여인을 얻어 둔전경종(屯田耕種)하여 군량에 충당하고, 화약총포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정군(精軍)을 얻을 수 있으니 농자(農資)를 주어 파견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축성을 하였으니 선조 27년 10월의 일이다.
 
 용장에게 수백명을 주어 지킨다면 대병(大兵)이 쳐들어 온데도 전일 같이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충원이 성을 쌓고 난 후 죽령에도 축성케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것 같다는 상계(上啓)가 있었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시작하지 못했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징천인(徵賤人)이 축성의 거역(巨役)을 마쳤다고 포상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논의뿐이던 설관이 수문장에 의하여 완공되자 요새방어를 위하여 용장의 배치 건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경상좌도에서 방어를 맡으라는 등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선조 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 수구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守禦)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仁祖)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南關要衝)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영비(營裨) 손명대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소편(雜石小片)으로 쌓아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論罪)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성이 3곳의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 정상에 있어 충청, 경상 두 도의 경계를 이루며 조령관(鳥嶺關)이라고 하고, 하나는 응암에 있는데 신충원(辛忠元)이 쌓은 옛 성으로서 조동문(鳥東門)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이 있으며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천이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
 
제1, 2, 3관문은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며 높이 솟은 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주흘관에 있는 조령편람(鳥嶺便覽) 정묘(丁卯) 1927년 9월에 정규원 문경군수가 지은 현판에 의하면 선조 5년에 설진하여 570여명을 배치하였다고 하나 선조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설진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조령편람을 개첨한 것이 일제강점기이고 원귀 3년(元龜三年)이라는 일본의 연호가 있다. 이는 선조 5년부터 설진한 천험의 요새가 임란에 쉽사리 방어치 못했음을 강조하여 조선의 무방비와 일본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한 가증스러운 기록으로 생각된다.
 
문경현지에 의하면 영조 28년(1752)에 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축성 후 3년이 지난 1712년(숙종38) 5월에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며 수마석(水磨石)과 잡석(雜石)으로 쌓아 성의 과반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영남어사(嶺南御使) 여광주에 의하여 수보(修補) 논의가 제기되고 국가존망이 달린 막중한 곳이라 경성(京城)의 수보규칙(修補之規)에 따르자고 진언되나 시행하지 못했다.
 
 주흘관의 향우측(向右側) 성벽의 각기(刻記)에 의하면 별장 이인성이 1721년에 개축했다.
 
 그 아래의 각기에는 도석수(都石手)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이 있으니 앞의 성벽 각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개축 시 또는 축성할 때 기여한 도석수로 짐작이 된다.
 
주흘관 중수기에 의하면 1752년(영조28), 1772년(영조48), 1840년(헌종6)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주흘관의 향우측 성황사(城隍祠) 부근의 각기는 무진년(戊辰, 1748 영조24·1808 순조8) 3월에 별장(別將) 오해림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흘관 향좌측 성벽 각기에서는 1880년(고종17) 별장 심영식 등의 개축사항을 알 수 있으며, 주흘관 향우측 성벽 각기로 1886년(고종23)에도 별장 김순기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벽에 새긴 몇 자의 글이라 개축한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아쉽다. 박성호는 1880년에는 감역(監役)으로 1886년에는 감관(監官)으로 수성(修城)에 참여하였다.

그후 1923년~1926년 사이에도 제1관문이 수선되었으며 경진년(庚辰, 1940)에도 제1관문을 중수한 바 있으나 조동문 및 조령관의 수성기록은 찾을 수 없다.
 
조령편람에 의하면 2, 3관문은 1907년 의병(義兵)의 토벌대(討伐隊)에 의하여 훼손되었고, 제1관문인 주흘관만이 여러 차례의 보수로 옛 모습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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