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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열/협객

박동석 편집위원 | 기사입력 2008/02/09 [19:52]

독립운동가 박열/협객

박동석 편집위원 | 입력 : 2008/02/09 [19:52]
독립운동가 박열/협객                                                        

 박열(朴烈.1902.2.3∼1974.1.17) 

무정부주의 계통의 독립운동가. 초명은 준식(準植) 또는 혁(爀). 본관은 함양(咸陽).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21년 김판국(金判國)ㆍ조봉암(曺奉岩) 등과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공산주의 계열과 분리, 무정부 주의자들을 규합하였고, 23년 비밀 결사단체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여 일본 천황 히로히도를 암살하려고 일본인 애인 ‘가네꼬’(金子文子)의 협조로 폭탄으로 거사하기 직전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6년 3월 사형을 언도받고 4월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8ㆍ15 광복으로 22년만에 석방되었다. 해방 후 [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재일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948년 귀국하여 장학사업을 하던 중 6ㆍ25 때 납북되었다. 

  무정부주의 계통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함양(咸陽). 초명은 준식(準植) 또는 혁(爀). 경상북도 문경 출신.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오스기(大杉榮)·사카이(堺利彦) 등과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ㆍ김약수(金若水)ㆍ조봉암(曺奉岩)ㆍ서상일(徐相日) 등 20여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창설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분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黑濤)], [불령선인(不逞鮮人)], [현대사회] 등을 발간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ㆍ25 때 납북되었다. 

 독립운동가/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으며,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 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검거되어 해방 때까지 징역을 살았다. 해방 후에는 일본으로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만들고 단장을 역임하면서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일제하의 조직 활동】

  본관은 함양. 초명은 준식(準植), 일명 혁(爀). 아버지는 영수(英洙)이다. 함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으나 2학년 때 3ㆍ1운동과 관련되어 퇴학당했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을 다녔다. 1920년 1월 일본에 있는 조선이 고학생들과 노동자 사회의 상부상조를 표면상의 목적으로 하는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김약수ㆍ원종린(元鍾麟)ㆍ김사국ㆍ조봉암ㆍ종태성ㆍ김판권(金判權)ㆍ권희국(權熙國)ㆍ임택룡(林澤龍)ㆍ장귀수(張貴壽)외 10명과 함께 재일한인 사회주의운동단체의 효시인 [흑도회]를 창립했다. 당시 그와 김약수는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오스키 사카에[大衫榮]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흑도회는 박열과 김약수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1921년 12월 해산해 김약수 등의 공산주의 조직인 '[북성회(北星會)]와 박열 등의 무정부주의 조직인 [풍뢰회(風雷會)]로 분리되었다. [풍뢰회]는 곧 [흑우회(黑友會)]로 개칭하고 잡지 [큰 조선인(太の朝鮮人)]과 [현사회(現社會)]를 발간했다. [큰 조선인]은 '불령선인'(不逞鮮人)과 발음이 비슷해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그 무렵 일시 조선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이강하 등과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단체인 [흑로회(黑勞會)]를 조직하고 도쿄[東京]로 돌아갔다고도 한다.  

  한편 1922년 김약수ㆍ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동우회가 '고학생 및 노동자의 구제기관임을 버리고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기관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개된 문서로는 처음 계금투쟁을 선언한 것으로 국내의 젊은 지식인들과 학생층에서 큰 사상적 충격을 주었다.  

【대역사건】

  1923년 4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육홍균(陸洪均), 최규종(崔圭淙) 외 몇 명이 도쿄에서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동지규합과 직접행동의 기회를 노리던 중,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검거되어 [흑도회]와 [불령사]도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대역사건', '왕실에 대한 불경죄 사건' 등으로 불렸으며 그와 그의 애인이자 동지인 가네코의 이름이 1926년까지 국내 신문에 오르내릴 정도로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재판정에서 죄인 대우를 하지 말 것, 조선의 조복(朝服)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할 것, 재판정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재판부와 협상했으며, 사형이 선고되자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라. 그러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기개를 보이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도쿄 경시청은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 17명을 검거하고 심문한 결과 만주의열단으로부터 폭탄 50개를 들여와 테러 활동에 사용할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밝혔으나 이것이 조작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926년 3월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1945년 해방으로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해방 후 활동】

  출옥 후 1946년 1월 20일에 열린 [신조선건설동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의 강령은 민주주의적 건국의식ㆍ사해동포ㆍ세계협동ㆍ민족자주, 근로대중의 동지 등으로 어느 정도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가진 중도우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해 10월,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등 우익단체들을 흡수ㆍ통합하면서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단장이 되었다.  

  민단은 태평양 연합군 사령부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 세력과 연계해 재일동포문제의 해결에 나섰고, 북한 쪽과 연결되어 있는 [재일 조선인 총연합]과 대립했다.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했다.  

  그 후 10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테제를 발표하고,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정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8년 재정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정부수립 축전에 참석하고, 이듬해 5월 다시 귀국해 서울에 머물다가 6ㆍ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74년 북한에서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당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회장이었다고 한다.  

【저서】<신조선혁명론> 

<일본인 연인, '나도 그와 함께 죽여 달라'>  

  1923년 가을, 자금의 일본 임금의 아버지요 당시 왕세자였던 소화 일왕(昭和日王)의 결혼식이 약정돼 있었다. 한데 이 시기에 때맞추어 폭탄을 해외로부터 입수하려고 물색하는 한국 청년이 있다는 제보가 일본 경찰 당국에 들어왔다. 제보자는 니야마(新山初代)라는 일본 아가씨다. 그녀의 한국인 연인인 김중한(金重漢)이 독립 사상을 품은 한 한국 젊은이의 부탁으로 폭탄 입수의 일을 진행 중이라고 밀고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왕과 왕세자를 폭살하려고 음모했다는 소위 박열 사건의 발단이다.  

  주모자인 박열은 경북 문경 점촌(店村) 태생으로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3ㆍ1운동을 겪고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작심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오스기(大杉榮)의 무정부 운동에 동조하여 그 산하에 한국인 동지 16명을 규합, [불령사(不逞社)]라는 결사를 했다. 바로 고자질을 한 김중한과 니야마도 그 결사의 같은 동지였다.  

  ‘불령’이라는 말은 일본 당국이 독립 사상을 품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지칭하는 ‘불온(不穩)’이란 뜻으로 결사 이름부터 반항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직업을 물으면 법정에서까지도 ‘불령업’이라고 대꾸했을 정도로 민족 의지가 투철했다. 박열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의회란 국가라는 이름의 대강도단의 소두목 회의요, 국가란 강도단의 소두목을 거느린 대두목이다.”  

  박열은 1922년 두 번 서울에 가, 의열단의 한 사람인 김한(金翰)에게 폭탄을 의뢰했고, 이 두 사람의 연락을 서울의 기생인 이소홍(李小紅)이 맡아 했는데, 암호 편지로 내왕했다 한다. 한데, 때마침 서울에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폭탄 사건이 일어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또한 그가 우편배달부로 임시 고용되어 일본 임금이 사는 궁성 내부를 드나들며 내부 구조를 익히기도 했다. 곧 범죄 예비는 했을망정 폭탄을 입수하거나 실행한 구체적 행동은 없었다.  

  이 박열 사건을 이해하고 진행하는 데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빼고는 불가능하다. 일본 발음으로 부르지 말고 ‘금자문자’로 불러달라던 박열 열사의 연인이다. 박열이 금자문자를 만난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이는 오뎅집이었다. 그 집에서 막심부름을 하던 그녀의 생각이나 지성이 너무 진보적이고 날카로우며 풍부한 데 반한 것이다.  

  박열을 만나기 이전까지 그녀의 인생 역정은 어떤 통속소설보다 기구했다. 아버지는 첩을 들여놓고 어머니를 밤낮으로 패길 일삼았다. 어머니의 출타 중에 한 집에 살던 이모를 겁탈하는 아버지를 숨어 본 것은 금자문자가 여섯 살 때 일이다. 끝내 문자를 업고 가출한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호구를 했는데, 니카무라라는 사나이와 동서생활하면서 문자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방이 하나라 추잡한 일을 할 때면 엄동설한에 밖에 내쫓기기 일쑤였다.  

  이 귀찮은 존재인 문자를 조선 경상도 김천에 동양척식회사의 개척이민으로 가 사는 외삼촌 집에 맡겼다. 후에 쓴 ‘옥중기’에 보면 조선에서 살았던 6년간은 매일처럼 철로변에 나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뛰어들까 말까 하는 추억밖에 없다 했다. 그는 도쿄에 돌아와 허리에 방울을 달고 달랑대며 신문팔이를 하면서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들어가 중등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 문예반에서 알게 된 것이 박열을 대역(大逆)이라는 어머어마한 혐의로 고자질한 니야마다.  

  그녀의 일생을 살았다고 가정하면 이 세상 어느 누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으며 허무주의자가 되지 않고 배겨났겠는가. 박열을 만난 금자문자는 이 부조리에의 억한 심정을 무정부운동의 열정으로 쏟았다. 그들은 결사의 기관지를 편집하며 과격 논설을 싣는 등 의기투합하여 심신을 같이하는 동서생활을 일본 빈민가 게다집 셋방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 셋방에서 박열은 왕족 폭탄 살해 음모죄로, 금자문자는 그 공범으로 잡혀든다.  

  박열이 과격한 반일 항일주의자인 것만은 틀림없고 일본국의 수장인 일왕을 폭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일본 법정이 밝힌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는 근거가 박약하며 따라서 조작설이 유력하게 나돈 채 의혹으로 남아 있다. 박열로 하여금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할 정치적 배경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지방의 대지진이 온상이다. 이때 있었던 한국인 대학살은 그 처참함이나 무도함으로 온 세상을 경악시켰고 일본이 궁지에 빠지게 한 사건이었다. 일본 ‘자경대’라는 민간단체에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돼 있지만, 일본 정부나 군부, 경찰이 배후 조종했다는 사실은 저희네 조사로도 엄연한 사실이 되고 있었으며, 외국에서도 그 사실을 알아 날이 갈수록 외교적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었다.  

  이 학살의 정치적 조작을 한 배후로 당시 일본 내무대신이요 3ㆍ1운동 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한국통 미즈노(水野鍊太郞)가 지목되기도 했다. 그는 관동대지진 이전에 일어났던 일본 각지의 쌀 파동의 무서움을 체험해 알고 있는지라 대지진 후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식량 파동에 겁을 먹고 있었다.  

  시어머니한테 호통맞은 며느리가 부엌에 들어와 무고한 강아지 배때기를 차 깨갱거리게 하여 스트레스를 전위시키듯이 팽배한 일본 민중의 욕구불만을 한국인으로 향하게 하여 분출시키는 불만 전위(轉位) 정책을 쓴 것이다. 한국인이 난리 틈에 일본인을 습격하고 샘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루머를 퍼뜨려 대량 살상을 야기시킨 것이다.  

  이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학살 사례가 구미 각국에 외교 채널과 신문 보도로 알려지자 열강에서 항의 규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 주재 외국 대사들이 연서명하여 한국인 학살을 항의하는 것을 필두로 세계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에 대한 정치적 음모 하나를 진행시킬 필요가 생기고 이것이 바로 박열 사건인 것이다. 곧 일본인이 재일 한국인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 수밖에 없는 골치아픈 한국인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한국인이 일본 왕을 죽일 뻔했다는 연극을 조작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열과 금자문자의 옥중 괴사진(怪寫眞)도 이 조작 선상의 한 작품이다. 괴사진이란 판사의 예심 조사실에서 박열이 앉아 있는 무릎에 금자문자가 태평스레 책을 들고 있는 사진이다. 뿐만 아니라 취조하던 다치마쓰(立松) 예심판사는 피의자인 박열과 금자문자를 취조실에 놓아두고 변소 가는 척 오랜 시간을 비워 두곤 했다 한다. 당시 일본 우익은 괴사진을 두고 춘화(春畵)라 표현하고 사법권의 문란이라 하여 당시 와카키(若槻) 내각의 사퇴를 들고 나오기까지 했다. 

 끝내는 박열과 금자문자가 옥중 결혼을 했다는 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당시 조선일보에 보면 옥에 갇히기 전 1년 남짓을 동거한 사이로 굳이 옥중결혼까지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당사자들이 부인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사법 사상 전례 없는 옥중결혼을 시킨 것이라 하여 떠들썩했다. 이 괴사진과 옥중결혼은 그들의 공작대로 피의 사실을 자백케 하기 위한 유화 정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판이 열리기 전에 박열은 면회갔던 조선학우회의 조헌영(趙憲泳)에게 자신과 금자문자가 한복을 입고 재판받게 해 달라 부탁해서 한복을 차입했다. 공판정에 입정한 박열은 쌍학교비(雙鶴交飛)하는 혼례복에 사모를 쓰고 관대를 둘렀으며 태극선을 든 채였고, 금자문자는 흰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공릉치마 차림이었다. 일본 왕을 대표하는 재판관이라면 나는 한국 민족을 대표하기에 한복을 요구함이며, 재판관석과 피고석의 높이를 동등하게 하라고 요구함이며, 나는 한국말을 사용할 테니 통역을 딸려라고 말함이며, 심문에 재판관이 꿀릴 만큼 기개가 당당했다. 

  그는 지구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일본 제국을 쓸어버리는 일이라는 등 보도하지 못하게 한 ‘아(我)의 선언’ 등 극단 발언이 많았다. 형법 73조인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규를 적용, 사형을 언도하자 박열은 태연히 웃음을 띠었고, 금자문자는,

  “박열과 나를 한 교수대에서 같이 목매어 죽여 달라. 그리고 죽은 백골도 더불어 묻어달라.”

고 진술했다. 1926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한데 10일이 지난 4월 5일에 무기징역으로 특사를 받는다. 특사를 받은 지 넉 달이 되는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금자문자가 수인(囚人) 작업인 마닐라 삼끈을 꼬다가 그 끈을 창살에 매어 목매어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소설보다 더 기구한 한많은 25세의 삶을 그렇게 맺은 것이다.  

꼭 그 시기에 죽을 이유도 없고 또 작은 심경 변화에도 글로 써 나타냈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자살이라면 유서를 남겼을 텐데 흔적 없이 사라진 게 또 하나의 의혹이 응어리진 것이다. 그 무렵 박열의 형인 박정식씨가 금자문자를 면회코자 신청을 했으나 이유 없이 거절당한 사실이 복합되어 더욱 그러했다.  

  옥에서 일어난 일이라 추측이 만발했는데 그 중 유력한 추측이 임신한 것이 외형으로 드러났고 옥중임신이 알려지면 사법부가 또 한번 곤욕을 치러야 하기에 낙태수술을 하다가 치사한 것을 자살로 변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년의 옥살이를 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출감한 박열은 한국거류민단장을 하다가 6ㆍ25전쟁 때 납북된 것이다. 그 후 금자문자는 경북 문경읍 마성면 격리 박열씨 집안의 선영에 이장되어 한국 땅에 잠들어 있다.  

- 이규태: <박열 열사 이야기>(조선일보.1999. 11. 19) - 
  
<박열과 가네코>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사를 훑어보면 부부가 함께 투쟁한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좀 특이하다. 물론 여자가 독립운동을 한 예는 많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 여자는 미혼이었거나 아니면 남편과 사별(死別)한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여기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을 한 특이한 예가 있다. 바로 박열(朴烈)이 그런 경우에 속하는데, 박열의 아내는 일본 여자였다는 점에서 또한 엉뚱한 데가 있다.  

  1902년 경상북도 문경의 오천(梧泉)에서 태어난 박열은 함창에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독립 운동을 했다는 죄로 퇴학을 당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유학했는데, 이때 동갑내기인 일본 여자 가네꼬(金子文子)를 만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사상에 심취했다. 이들은 사상이 같고 또한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서 1922년 결혼을 했는데, 이제 갓 스물이 된 이들 부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한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일본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 광부들의 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이때부터 박열 부부는 무정부운동에서 조선 독립운동으로 투쟁 노선을 바꾸었다. 박열의 투쟁이 너무도 과격한 데 놀란 일본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알선했지만 박열은 이를 거부했다.  

  박열이 21살이 되던 1923년 이들 부부는 천황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준비하던 중 계획이 발각되어 동지 1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오랜 예심과 하급심을 거쳐 1926년 대심원에 나온 박열은 공판에 앞서 5 가지를 요구했는데, 첫째 공판시에 피고니 심문이니 하는 용어를 쓰지 말 것, 둘째 나는 조선 사람이니 한복을 입도록 해 줄 것, 셋째 나의 의자는 재판관과 같은 높이의 것으로 줄 것, 넷째 나의 최후 진술은 선언서로 대신토록 할 것, 다섯째 우리가 비록 부부라고는 하나 아직 법적 절차를 밟지 못했으니 공판 당일 재판정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허가해 줄 것 등이었다.  

  이어서 가네꼬는 우리는 부부요, 모든 일은 함께 추진했으니 사형이든 무기 징역이든 형량을 똑같이 해 주어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재판장은 박열의 요구 사항 중 첫째 항목 이외의 것을 승낙했다.  

  1926년 1월 16일, 일본 대심원(대법원)에서는 사모관대를 한 박열과 원삼 족두리를 쓴 가네꼬의 결혼식과 더불어 언도 공판이 있었다. 언도는 가네꼬가 원했던 대로 두 사람 모두 사형이었다. 그 해 7월 가네꼬 여사는 몸에 태기가 있어 일본 법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녀는 옥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27년 박열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였는데, 그가 복역한 22년 2개월은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의 복역 중 가장 긴 기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출옥한 박열은 그 후 초대 재일 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가 1948년 근 30년만에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북으로 납치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박열의 독립 투쟁사를 보면, 하나의 극적인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조국이 있고 애틋한 사랑이 있으며, 미움이 있고 참지 못할 수모가 있으며, 또한 영광이 있고 비참함이 줄무늬처럼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1900년대 초반의 한국사를 대변하는 한 편의 드라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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