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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주년 추모]아직 끝나지 않은 제주4.3

다시는 외세에 의한 고통과 아픔,동족상잔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편집부 | 기사입력 2008/04/03 [18:27]

[60주년 추모]아직 끝나지 않은 제주4.3

다시는 외세에 의한 고통과 아픔,동족상잔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편집부 | 입력 : 2008/04/03 [18:27]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정의 틈바구니속에서 미국은 이승만과 친일매국세력을 앞세우고 일본기 대신에 성조기를 걸고, 남한을 점령하고 소련은 김일성세력을 앞세우고 태극기대신에 소련기를 내걸로 북한을 점령했습니다. 당시 이승만과 김일성은 자신들의 정권세우기에 혈안이 없었기 때문에 온 몸으로 민족분단을 막으려 했던 김구.여운형 등 민족주의자들은 힘의 역학관계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미국의 남한점령을 반대하며 일어난 민족자주 항쟁이 바로 제주도의 4.3민중항쟁이였습니다.

4.3항쟁에 참여한 대다수 수 많은 이름없는 민중들은 민족을 외세의 지배로 부터 벗어나게 하기위한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참여했고, 이러한 4.3항쟁은 당시 북한과 남한의 권력집단들에게는  수단화 되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이승만 친미정권은 조병옥을  책임자로 내세워 무참히 진압하면서 민족주의 세력 숙청과 함께 친일매국세력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구실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4.3항쟁이 애매모호한 4.3사건으로 불리울 수 없는 이유이며, 헌법을 무시한 정치 군인들의 반민주적인 쿠테타에 저항한 80년 광주화 민주화항쟁이 모호하게 광주사건으로  불리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들의 아픔은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로 계승되야 하며,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명예, 그리고 보상이 국민화합과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보내며, 다시는 이 땅에 외세로 인하여 빚어지는 고통과 아픔, 동족상잔의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편집자 주]


 

4월, 그 슬픈 아우성

4월 3일, 오늘은 제주역사를 피로 물들인 4.3제주민중항쟁이 일어난지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도 지천에 떠돌며 잠들지 못하는 4.3영령들의 넋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쓴다. 비운의 역사를 또다시 마주하는 심정은 한마디로 침통하다. 숨죽여 왔던 통곡의 역사, 우리 민족사의 참극은 59년이 지난 오늘에도 슬픔만이 가득하다. 샛노오랗게 꽃망울을 터트린 유채꽃에도, 새하얀 속살을 드러낸 눈부신 벚꽃에도 그날의 아우성은 살아있다.

어디 그 뿐이랴. 마을마다 지키고 서있는 팽나무에도, 구멍 숭숭 뚫린 돌담에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 집터에도, 한라산 자락 중산간 곶자왈 지대에도, 온섬에 흩어져 있는 제주오름 기슭에도 통한의 역사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비명에 간 영령들도 잠들지 못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붉은 화산섬 제주땅도 평화를 잃어왔다.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에는 아직도 제주4.3은 슬픈 현재진행형이다. 산천을 떠돌며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통곡하지만, 애달픈 우리들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해 달라고, 왜 우리가 죽어갔는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밝혀 달라고 몸부림치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지만, 아직도 역사는 말이 없다.

 

제주4.3민중항쟁, 그것은 피빛 삶의 기록

1948년 4월 3일 자정, 드디어 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섬사람들의 남로당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00여 명과 이를 따르는 1,000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면서 피어린 제주4.3항쟁은 시작됐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조선사람이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매국매족노를 거꾸러 뜨려야 한다...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시민 동포들이여!..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제주4.3항쟁은 외세를 몰아내 완전한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전투였다. 이것이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제주 4월의 역사를 이끌어온 '4월 정신'이다. 분단조국의 사슬을 끓고 진정한 해방의 길로 나아가자는 반미구국투쟁이기 때문이다. 제주민중들은 3·1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자 했고, 5.10 단독선거에 의한 단독정부 구성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조국의 자주와 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립무원의 섬에서 대량학살을 감행한 미국과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에 대항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군경토벌대가 제주 섬사람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미국과 이승만 친미정권이 휘두른 총칼에 제주민중들은 피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광기로 점철된 제단에 모두 몸을 바쳐야 했다.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의 죽음이었다.

제주섬은 온통 피빛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섬사람들의 아비규환, 국가권력의 총칼에 죽어가면서 흘렸던 붉은 피, 불타는 마을의 저 붉은 원한들로 화산섬 제주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가 되고 말았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3만에서 5만명의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미군과 국가공권력은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섬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육지부에서 증파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이 합세하여 제주도민을 모두 좌익폭도로 내몰아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월리엄 제임스의 말대로 제주섬은 '피의 목욕통'이 넘쳐 피의 바다가 돼버렸다.

제주도를 '빨갱이섬'이란 딱지를 붙인 미군과 이승만 정권은 기어이 화산섬 제주, 그 민중의 뿌리를 대량학살의 광풍으로 뿌리채 뽑아버렸고 짓이겨 버렸다. 특히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전개된 '초토화 작전'은 중산간 마을을 싹쓸이했다. 제주 4.3에서 가장 참혹한 민중학살과 마을파괴는 이때 벌어졌다.

강경진압작전으로 예로부터 지켜오던 중산간 마을 37,000여 초가가 불에 타 사라졌다. 조사자료에 의하면 4.3사건으로 39,285채가 불에 타 없어졌고, 이중 95%가 초토화 작전 4개월 동안에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 4.3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작전'으로 한라산 기슭은 그야말로 공포와 죽음의 상징이 돼 버렸다.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자 생활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여명은 토벌을 피해 입산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 4.3에서 '입산자'는 곧 발각되는 대로 처형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들 입산자와 해안부락으로 소개되어 내려온 입산자 가족은 이른바 '빨갱이 가족=도피자 가족'이 되어 다시 죽음으로 내몰리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자기 가족 대신 죽는 대살(代殺)로 많은 섬주민들이 해안부락에서도 아무런 죄없이 죽어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섬주민들의 분노와 공포가 어찌 사그라질 수 있었으랴.

제주4.3과 제노사이드

제주 4.3이 발발하여 대량학살이 이루어 지던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는 모두 19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the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을 92개국의 찬성으로 체결했다. 협약 제2조에서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른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제주4.3민중학살은 한마디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범죄였다. 59년 전 제주섬에는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원칙이 철저히 무시됐다.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살상했다. 군경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죽음의 덫을 씌웠고, 어린이와 여성,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살의 범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또한 제주의 학살이 명실상부한 내전이나 국가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4.3희생자가 치열한 교전의 결과 발생한 불가피한 희생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었다는 사실, 희생자 가운데 대부분이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는 사실도 제노사이드 범죄를 말해준다. 4.3을 통해 제주도민들이 경험한 물리적·정신적·경제적 파괴와 죽임의 사례도 이미 제노사이드로 공인된 다른 사례들과 큰 차이가 없다.

4.3 당시 가해자를 결속시키고 희생자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논리였다. 학살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던 절대적 논리다. 이 논리는 학살자로 하여금 법적·도덕적 부담을 벗겨내는 데도 일조했다. 빨갱이 논리는 본질적으로 르완다의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해 갖고 있던 종족주의 감정이나, 터키인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종주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제주 4.3은 제노사이드 범죄이다.

 

미국에 제주4.3민중학살 책임을 묻는 이유

제주 4.3민중을 대량학살한 책임은 미국(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과 이승만 친미정권에 있다. 미군정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38선 이남의 유일한 법적 정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 귀속돼 있었다. 그 권한은 1949년 6월 30일까지였다. 제주양민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또는 최종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군에 대한 주한 미군사령관의 작전 통제권은 단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됐다. 그리고 6일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포고문'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강경진압작전을 벌인다는 신호탄이었다. 한마디로 이 포고문은 살육작전명령이었다.

미군은 사전에 초토화작전 (대량살육작전 : A Program of Mass Slaughter)을 계획하였으며, 1948년 5월 9연대장 김익렬에게 그 시행을 지시한 바 있다. 미군 보고서는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9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을 '성공적인 작전(successful actions)'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9연대장 송요찬을 선정해 제주에 파견시켰던 장본인은 다름아닌 로버츠 고문단장이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 직전까지 '괴잠수함 출현설' 등을 흘리며 살육작전의 당위성을 사전에 조작했으며,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정찰기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도 적극 지원했다. 또한 미군은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국가폭력기구를 동원하여 좌익을 '청소(cleansing)'하는 작업을 지휘하기도 했다. 초토화 작전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 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제주민중학살의 일차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다. 미국은 제주 4.3을 좌우익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몰아갔다. 미국이 한반도에 반공의 방벽을 튼튼히 쌓기 위한 냉전정책의 일환이다. 미국을 떼어내고 제주 4.3의 진실을 가려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국가 공권력과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제주민중을 학살한 제노사이드 범죄는 이미 드러났다. 이제는 미국의 학살 책임을 명징하게 규명하는 일만이 우리 역사의 큰 숙제로 남게 됐다. 59년의 세월동안 잠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4.3영령들의 해원과 영면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아직도 제주4.3은 끝나지 않았다.



"비명에 가신 제주4.3영령들의 넋을 추모하며,
머리숙여 서러운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

[추모 음악 : 잠들지 않는 한라산]
[자료:조병옥과 4.3]조병옥은 흔히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야당의 거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에게 그리고 민족적 양심으로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여겨지고 있다.

조병옥은 4·3 당시 최고의 물리력을 휘둘렀던 미군정 경무부장이었다. 당시 경찰은 가장 조직적으로 훈련되고 최고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총관한 사람이 바로 경무부장인 조병옥이었다. 4·3의 강경 진압 역시 조병옥의 독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야당의 거목'이라는 이미지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해방 직후 정국을 주도했던 통일운동 세력이 미군정에 의해 거세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 동안 밀월 관계를 가졌던 조병옥(한민당)과 이승만은 권력의 분배과정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은 이승만에게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야당의 길을 걷게 된 것이며 그로 인해 그는 야당의 거목으로,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극우세력 내부에서 만들어낸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자취는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 이전에 미군정 당시 경무부장으로서 수많은 양민학살을 주도했던 면모에서 찾아져야 한다. 특히 그는 제주 4·3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어서 제 9연대장 김익렬은 "조병옥 씨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에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4·3체험세대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는 사실적 자료나 조사에 근거하지 않은 채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부쳤고, 4·3을 국제공산주의와의 연계 속에서 발발한 것으로 단정지었다. 또 도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남긴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투입시켜 강경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했다.

4·3의 도화선이 되는 3·1절 발포사건으로 인해 총파업이 일어나자 조병옥은 3월 14일 제주도에 내려와서 경찰발포에 대한 사과는커녕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내용의 협박 연설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때 기존의 3백30여명의 경찰보다 더 많은 4백20명 규모의 응원경찰을 육지부로부터 파견하면서 파업주도자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1948년 4·3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4·28평화회담이 성사되면서 평화로운 해결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초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발하면서 그는 다시 무력 진압을 강경하게 고수하였고 이 때문에 4·3의 희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48년 5월5일 제주읍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최고 수뇌부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조병옥은 평화회담의 주역인 9연대장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부치면서 강경 토벌 일변도로 사태를 끌어갔다. 그로 인해 다음날 김익렬은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고 '선선무 후토벌'정책도 폐기되었다. 그에 따라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집단학살 등 강경 진압이 시작되었다.

김익렬은 생전에 남긴 유고에서 "당시 제주도감찰청장이나 제주도 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 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서 한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며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 봐 진상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다고"라고 조병옥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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