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길 역사소설 옥전여왕(玉田女王)] 난징을 향하여 15회
옥전여왕이 남경 특사로 가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로 한창 바삐 움직이고 있을 때 한 여인이 옥전여왕을 찾아왔다. 탁순국 서정공주였다. “아, 서정공주로군요. 미안해요. 진작 찾아보고 이야길 나누려 했었는데 나라일이 바쁘고 복잡해서 겨를이 없었어요. 그래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었습니까? 옥전여왕이 서정공주의 손을 꼭 잡았다.
서정공주는 옥전여왕보다 세 살이 어리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라국과 탁순국을 오가며 같이 뛰놀았기 때문에 여느 자매와 다름없이 친한 사이였다. 더구나 오빠 문룡왕자가 사랑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오빠가 살아있었더라면 다라국의 왕비가 되어 왕실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같이 지낼 인연 깊은 여인이었다.
“아닙니다. 정신이 산란하다보니 여왕님 즉위식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죄송할 뿐입니다.” 서정공주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그렇지 않아요. 내 어찌 공주의 아픔을 모르겠습니까? 이 몸이 겪고 있는 아픔에 열 배는 넘을 것입니다.”
옥전여왕이 서정공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부탁드릴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서정공주가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하면서 청 하나를 들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말해보아요. 들어드리지 못할 부탁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바마마께 들은 바로는 여왕님께서 이번 남제 황제 즉위식에 특사로 가신다 하셨습니다. 그 사절단 일행에 동행하게 해주십시오.”
서정공주가 간절한 표정으로 함께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가는 길이 고행길일텐데 괜찮을는지?”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인데 지금 이 처지에 어떤 길이 고행길이 되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구중궁궐 깊은 곳에 새처럼 갇혀 고뇌에 허덕이느니 탁트인 세상에 나가 훨훨 날아보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으리라 싶습니다. 출항은 이번 달 보름 고차국 고성항에서 출발할 예정이니 행장을 갖추고 그곳 특사와 함께 나오면 배에 태워 드리지요.”
옥전여왕은 정답게 서정공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금시 돌아올 것이니 그동안 비어 있는 자리를 잘 메꾸어 주십시오.”옥전여왕은 병천왕에게 다라국을 맡기고 남경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옥전여왕과 사절단을 실은 배는 순풍을 타고 칠일만에 상해에 닿았다. 상해는 중국의 해상교통과 무역의 주요 요충지로 대국의 항구답게 수많은 배들이 줄지어 있고, 배마다 가득히 상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얼굴 빛이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이 짐을 끌고, 내리며 부지런히 선적과 하적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들은 바 그대로군.”
옥전여왕은 장관을 이룬 세계 제일의 항구를 돌아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이보다 더 큰 항구가 들어설 날이 있을 거야.”
옥전여왕은 아직은 이곳에 비해 초라한 가야의 항구를 생각하며 미래의 가야를 꿈꾸어 보았다. 상해에서 짐을 내린 사절단 일행은 대열을 정비하고 남경을 향해 갈 길을 재촉하였다. 사절단 맨 앞에는 상해에서 구한 길잡이가 말방울을 울리며 일행을 인도 하였고, 그 뒤를 사절단 일행과 짐수레들이 뒤를 따랐다. 길잡이는 중국인이었지만 상해에는 많은 외국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므로 외국어에 능통한 길잡이들이 많은데 사절단이 구한 길잡이는 가야어도 얼마간 알고 있었다.
상해는 중국의 남쪽 지방이라서인지 아직 봄임에도 불구하고 가야의 어느 여름 못지 않게 무더웠다. 논밭에는 푸르른 곡식과 채소들이 풍성히 자라고 있고, 무더위 속에서도 농부들은 열심히 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나라와 사람은 다르지만 그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같은 모양입니다.”
옥전 여왕 옆을 따르던 책사가 들녘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평화로운 모습이지. 저들은 황제가 바뀌었는지. 나라가 패망했는지도 모르고 살 거야. 그저 일 년 농사나 걱정하며 살아가면 될 테니까.”
뒤따르던 역사도 세월의 흐름에 관계없이 농사일에 정신을 몰두하고 있는 농군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잡이의 말로는 삼일 정도면 남경에 닿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절단 일행은 하루를 걸어 우시에 닿았다.
“날이 저물었으니 이곳에서 하루를 묵도록 합시다.”
옥전여왕은 언덕아래 평평한 땅을 골라 일행을 쉬게 하고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였다. 우시는 사백 여 호가 사는 농촌 마을로 농토가 정갈하게 깔린 것으로 보아 부촌인 듯 싶었다.
“모처럼 농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이곳 인심은 어떤지 마을 어른 하나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옥전여왕이 중국인 역관에게 마을을 대표할 어른 하나를 불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후 역관이 육십쯤 되어 보이는 중늙은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비단 마괘자를 입고 장죽을 든 노인은 얼마전까지 이 마을의 촌장이라고 했다.
“어느 나라에서 온 사절이신지요?”
노인이 먼저 옥전여왕에게 물었다.
“얘, 우리는 동방예불지국 가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옥전여왕이 예를 갖추어 말하였다.
“무슨, 나라에 큰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노인이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묻는 노인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 보였다.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이곳 중국에 새로운 나라 남제가 탄생하여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러 가는 중입니다.”
역관이 미소를 지으며 일행이 이곳에 온 뜻을 말해주었다.
“남제라?”
노인이 한 숨을 길게 쉬었다.
“뭐,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역관이 노인을 향해 불편한 곳이 없는가 물었다.
“있지요. 우린 송나라 사람입니다. 일개 장군이 황제를 참하고, 그 자리를 찬탈한 것을 보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늘이 노할 일이지요.”
노인은 심히 마음이 괴로운지 장죽을 들이켜 길게 연기를 뿜어내었다.
“몰랐습니다. 그런 아픔을 가지고 계신 줄. 다만 나라의 흥망성쇠란 하늘에 달려있는 일이라서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일이지요. 저희도 근래까지 송나라와는 교역도 하고 문화도 나누면서 돈돈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송이 멸하고 남제가 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야를 둘러싼 나라들도 늘 다툼이 심하여 나라와 임금이 바뀌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국파산하재란 글귀가 있듯이 나라는 망하지만 산하는 여전히 예와 같습니다. 우리 가야가 송만을 생각하여 남제를 무시해 버린다면 이는 국제간의 신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역성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생각을 돌려 예의를 지키는 것이 나라간의 관례입니다. 우리의 사절단을 나무라지 마시고, 그동안 송과 가졌던 관계를 더 긴밀히 하고자 여기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세월이 흐르면 잊혀 질 것이니 마음을 평안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옥전여왕이 노인의 마음을 달래려 하였다.
“글쎄요? 세상을 사는 동안 잊혀질 수 있을는지......”
노인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세상살이가 편치 않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군요. 과거를 빨리 잊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면 좋으련만…….”
노인의 표정을 읽은 옥전여왕도 마음 한 구석이 울적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제일 마음에 상처를 입는 건 백성들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옛 왕조를 못 잊어 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남제 역시 건국한 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국정이 미칠 때까지는 얼마간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새 나라 새 황제가 필요했던 가를 백성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책사는 흉흉한 민심을 하루 빨리 가다듬어 나라가 안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황제의 첫 임무라고 말하였다. 시에서 하룻밤을 보낸 가야 사절단 일행은 일찍이 일어나 다시 행군을 계속하였다. 중국은 땅덩이가 넓어서 몇 발 건너 언덕과 산자락을 만나는 가야와는 달리 끝도 없는 평야가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한 낮을 걸은 것 같은데 언덕하나 보이지 않는군. 우리도 이런 땅을 가졌다면 양식 걱정 없이 배불리 살 수 있을 텐데…….”
옥전여왕은 드넓은 평야를 보며 부러워하였다. 가 서산에 기웃 할 때 쯤 강이 나타나고 강을 둘러 듬성듬성 언덕이 나타났다.
“인가가 보이질 않는 걸 보니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나보군.”
요동을 치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학사가 얼핏 말문을 열었다.
“여긴 농사지을 땅도 마땅치 않고, 물결이 험해서 고기도 잡을 수 없는 곳이랍니다. 그래서 이 강 상류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하지요.”
역관이 길잡이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였다. 변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던 일행은 양편에 높은 언덕이 솟아있는 계곡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계곡 중간에 이르렀을 무렵 계곡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터지더니 사람들이 튀어나와 일행의 주위를 둘러쌌다. 삼백 여명이 넘어 보이는 이들은 모두 험악하게 생긴 장정들로 손에는 각기 도끼나 쇠스랑, 낫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다. 목숨이 아까우면 물건을 고스란히 놓고 되돌아가라.”
험상굿게 생긴 털북숭이 하나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농기구를 들고 나선 것을 보니 강도나 도적떼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역관 그대가 나서서 우리가 가려는 곳과 임무를 알려주게.”
대가야의 특사 질지가 역관에게 명하였다. 말에서 내린 역관이 군관 하나를 데리고 두목에게 다가갔다. “우린 황제 즉위식을 축하하러 남경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다 건너 멀리 가락국에서 왔으니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역관이 예의를 갖춰 두목에게 무사히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황제 즉위식이라고? 우린 그런 황제 둔적이 없다. 모두 말에서 내리고 물건을 내려놓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라.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역관이 되돌아 와 두목의 말을 전하였다.
“어제 그 노인도 송나라의 멸망을 가슴 아파 하더니 노인이 보낸 사람들인가?”
옥전여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대장 그대가 가서 우리는 여기서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고 설득해 보게.”
호위대장 연수장군이 부장 윤복대장에게 명하였다. 장이 말고삐를 채어 두목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나라의 명을 받아 이곳에 온 사람들이요. 이 자리에 뼈를 묻더라도 돌아 갈수는 없소이다. 무엇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얼마간 드릴 테니 길을 비켜주시오.”
부대장이 두목에게 길을 터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린 도적이 아니다. 송나라 사람일뿐. 나라를 찬탈한 자에게 선물이라니. 그건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두목은 요지부동 고집을 꺾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숫자는 적지만 나라에서 골라 뽑은 정예군들이오. 부딪히면 손실이 클텐데,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이오?‘"
부대장은 은근히 겁을 주었다.
“겁을 준다고 우리가 물러날 줄 아느냐. 너희가 여기에 뼈를 묻든 우리가 묻든 개의치 않는다. 이미 우리는 송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들이다.”
두목은 조금도 뒤로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밀어 붙이는 수밖에는.......”
부장이 돌아와 호위대장에게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권하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군. 기병이 앞서고 전투병들은 여왕님을 둘러싸 보호하라. 나머지 일꾼들도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집어 들고 자기 몸을 보호하도록.”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들리던 한적한 골짜기에서 일촉즉발 살육전이 벌어질 찰나에 있었다.
“중지하라!”
이때 골짜기 입구 쪽에서 말을 탄 사나이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명분 없는 싸움을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달려온 사람은 어제 저녁 옥전여왕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 노인이었다.
“안 됩니다. 도적질 해서 나라를 빼앗은 자에게 선물이라니요. 이것은 순박한 백성이라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나이들이 소리쳤다.
“이보게들 자네들은 농군이 아닌가? 농군에게는 농군대로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네. 우리농군은 늘 <해뜨면 농사짓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라며 격양가를 부르며 살아왔지. 나라가 수십 번 바뀐들 우리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삽과 곡괭이는 싸움에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파서 농사를 지으라 있는 걸세. 나도 그대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란 걸 깨달았네.”
노인이 농군들을 향해 간곡히 말하자 농군들이 하나 둘 들었던 농기구들을 땅에 내려놓았다. 말을 마친 노인이 옥전여왕 앞으로 다가왔다.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그저 농사나 지으며 사는 순진한 백성들입니다. 갑자기 변한 나랏일에 울컥 마음을 잡지 못하여 뛰쳐나온 사람들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여왕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제가 전후사정을 소상히 이야기 하여 이들의 마음을 진정 시키고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은 옥전여왕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골짜기 밖으로 사라졌다.
“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순박한 사람들이니 심적 고통도 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소 세 마리와 곡식 서너 섬을 보내 조금이나마 위로하도록 하십시오.”
옥전여왕은 일꾼을 시켜 소와 곡식을 농군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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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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