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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7만년-176]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9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8/02/08 [00:50]

[홍익인간 7만년-176]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129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역사

천산태백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8/02/08 [00:50]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천산태백] 서기전280년 신사년(辛巳年)에 위(魏)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위(魏)나라는 서기전225년에 진(秦)나라에 망하였는데, 55년전인 서기전280년에 단군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이로부터 12년후인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위세(威勢)를 보여 주었던 사실이 있다.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를 방문한 단군조선(檀君朝鮮, 東夷)의 사절단(使節團)이 위세(威勢)를 보여주었다고 기록한 글로는, 위(魏)나라 사람이던 공빈(孔斌)이 쓴 홍사(鴻史) 서문(序文)이 있다. 이 홍사 서문에서는 단군조선과 배달나라를 동이(東夷)라 기록하고 있다.

 

서기전280년경의 위(魏)나라 왕은 안리왕 바로 전의 왕인 애왕(哀王)이 되는데, 위나라가 왕을 칭한 것은 서기전319년 애왕 때가 되며, 애왕 이전의 혜왕(惠王)은 일명 양혜왕(梁惠王) 또는 위혜왕(魏惠王)으로서 추존(追尊)된 경우가 된다.

 

[연나라가 번조선에 조공하다]

 

서기전276년 을유년(乙酉년)에 연(燕)나라가 번조선(番朝鮮)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을 바쳤다.

 

이해에 풍년이 들고 동해(東海)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

 

연(燕)나라가 번조선에 조공을 하였다는 것은 당시에 연나라는 번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모셨던 것이 되며, 이때는 연나라 소왕(召王)의 아들인 혜왕(惠王) 3년이 된다.

 

여기서 동해(東海)는 지금의 동해(東海)이기도 하다. 서기739년에 대진국(大震國)의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지은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서기전2333년 당시 단군왕검께서 강연하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동해(東海)에서 고시(高矢)가 캐어온 청석(靑石)에 신지(神誌)가 새겼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동해가 곧 단군조선의 동해(東海)로서 역사상 변함없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동해(東海)인 것이다.

 

[위(魏)나라에 사절단을 보내다]

 

서기전268년 계사년(癸巳年)에 위(魏)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위세(威勢)를 보였다.

 

위(魏)나라가 서기전280년에 단군조선에 사절단을 보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되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이 아닌 진조선(眞朝鮮)에 사절단을 보낸 것이 분명한 바,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에 파견한 단군조선의 사절단은 진조선(眞朝鮮)의 사절단이 될 것이다.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은 단군조선(東夷)는 비록 대국(大國)이나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나라라고 그가 지은 홍사(鴻史)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신원함(伸寃函) 설치]

 

서기전265년 병신년(丙申年)에 각처에 신원함(伸寃函)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투서(投書)하도록 하였다.

 

단군조선 전기인 서기전1946년에 이미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역사가 있기도 하다. 신원목은 신문고(申聞鼓)와 유사한 장치가 된다.

 

[암행어사(暗行御史) 파견]

 

서기전256년 어사(御使)를 시켜 백성들의 사회를 몰래 다니며 부정한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았다.

 

소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하여 사회부정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도록 하였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의 천왕들께서 미복(微服)차림으로 백성들의 삶을 살펴서 제도를 고치거나, 하(夏)나라와 주(周)나라의 정세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연나라가 새해 인사를 올리다]

 

서기전252년 기유년(己酉年)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 왔다.

 

이때 연나라가 상국(上國)인 진조선(眞朝鮮)에 사신을 보내어 고열가(古列加) 천왕께 새해 인사를 올린 것이다. 연나라는 번조선(番朝鮮)도 상국(上國)으로 모시며 수시로 조공을 바치고 예(禮)를 올렸다.

 

연나라는 서기전323년에 이왕(易王)이 주나라 천자(天子, 王)를 무시하고 함부로 왕(王)을 칭하였는데, 진조선(眞朝鮮)은 번조선(番朝鮮)의 상국(上國)이며 번조선은 연나라에 대비하여 연나라가 왕을 칭한 같은해인 서기전323년에 왕(王)을 칭하였던 것인 바, 연나라가 번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데서 진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연(燕)나라 대부(大夫)의 망명]

 

서기전251년 경술년(庚戌年)에 연(燕)나라 대부(大夫) 형운(荊雲)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서기전255년에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이때부터 진(秦)나라가 서서히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연나라 대부 형윤이 단군조선에 망명한 것은 시대를 읽은 것이 아닌가 한다.

 

서기전227년에 연나라에 형가라는 유명한 자객이 있었는데, 형운과 같은 씨족인(氏族人)이 되는 셈이다.

 

고대중국의 땅에 변란이 있을 때 동쪽으로 피난하여 우리나라에 망명귀화한 사례가 역사속에 수없이 나타난다.

 

[일식]

 

서기전248년 계축년(癸丑年)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북막(北漠)이 요청한 연나라 정벌을 거절하다]

 

서기전248년 겨울에 북막(北漠)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燕)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천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후 북막(北漠)은 단군조선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229년에는 북부여의 서쪽 변두리를 습격하여 크게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보을(普乙) 천왕의 묘를 세우다]

 

서기전248년에 선단제묘(先檀帝廟) 즉 보을(普乙) 천왕의 묘(廟)를 성(城)의 남쪽에 세웠다.

 

고열가 천왕이 바로 앞 천왕인 제46대 보을 천왕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을 장당경(藏唐京)의 성(城)의 남쪽에 세운 것이다. 고열가 천왕이 보을 천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고열가 천왕이 선대 천왕의 묘를 세움으로써 스스로 그 정통성을 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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