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97년만의 국적회복은 반쪽짜리

나 홀로 국적회복으로 유족들과의 연결고리 아직 없어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15 [16:57]

독립유공자에 대한 97년만의 국적회복은 반쪽짜리

나 홀로 국적회복으로 유족들과의 연결고리 아직 없어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4/15 [16:57]
일제치하에서 이 나라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은 항일항쟁승리(해방) 62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조국으로부터 국적도 부여받지 못한 무국적자였다. 그들은 황국시민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일제가 식민지배를 위해 시행한 ‘민사령’에 불복하여 호적 등록을 거부했고, 처자식을 놔둔 채 만주 등으로 떠나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호적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무국적자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난 정부까지 그들의 국적회복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이들 독립유공자들은 지금까지 무국적자로 남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무국적자로 확인된 독립유공자가 약 600여분이다. 그 외에 확인 안 된 독립유공자가 훨씬 더 많으리라 본다.

당시 가장(家長)이던 그들이 호적등록을 거부했기 때문에, 부인은 미혼모로 남게 되었고 자식들은 아비 없는 사생아로 남게 된 것이다. 부인과 자식들은 외가의 호적에 올려지거나 친척의 도움을 받아 호적이 올려졌기에, 독립유공자와 그들의 처자식은 법적으로 아무 관련 없는 호적상 이산가족도 아닌 완전한 남인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선생의 친형이며, 전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씨와 이종걸의원의 조부가 바로 독립운동가 이회영선생으로 그 분도 지금껏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  독립유공자 이회영선생의 친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 그도 조부가 무국적자였는지 모르고 있었다 한다. 우당기념관에서 우당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도 역시 지금까지 무국적자 상태로 되어 있었다. 참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가 할 일을 제대로 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러한 무국적 상태인 독립운동가들의 국적회복을 위해 유가족들은 정부에 숱하게 청원을 내고 관계기관에 호소했지만 지금까지 외면되어 왔고, 외로운 법적 투쟁을 수 십년째 했으나 허사였다.  이 운동에 가장 앞장 선 유가족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66)여사이다.

단재선생의 아들에게 시집왔던 이덕남여사는 남편의 호적이 이상한 것을 보고 (즉 남편이 사생아로 호적등록이 되어 있음)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여사는 청춘을 다 바쳐  국가청원과 법적투쟁을 해오면서 언론에 호소하여 드디어 참여 정부 때 독립유공자들의 국적회복을 이룰 뻔 했으나 당시 실세였던 천정배 법무장관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  단재 신채호선생의 가묘와 며느리 이덕남여사. 대전에서 출생하고 아버지 고향인 충북 청원군에 묻혀있는 신채호선생은 분명 대한민국 국민이건만 얼마 전까지도 무국적자였다.

금년 4월 13일 이명박정부는 1차로 62분의 독립유공자의 국적을 회복시켜 주었다. 실로 97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국적이 회복된 것이다. 이제야 국가가 국가의 본분을 다한 것 같아 보인다. 이 쾌거(?)의 일등공신은 여러 사람이 있겠으나 이석현 법체처장과 김양 보훈처장 그리고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들 수 있다. 유가족들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부여받은 국적회복은 여전히 반쪽짜리 국적회복이라는 지적이 있다. 아직도 독립유공자 본인과 그 가족들의 연결고리는 없게 되어있다. 아래 사진에 있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가족관계 증명서’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신채호선생은 1880년 11월 7일 부친인 신광식과 모친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명기가 되어 있어 대한민국 국민으로 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부인과 자식들이 명기되어 있지 않아 태어났다가 총각인 상태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가족도 없는 나 홀로 상태인 것이다. 여전히 신채호선생의 부인은 미혼모이고, 아들인 고 신수범씨는 사생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을 호적으로 바로 잡으려면 먼저 신채호선생과 부인이 사실혼을 했다는 증명을 내야하고, ‘관계확인 인지소’라는 소송을 법원에 제출해 인정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남아 있다. 또 다른 법적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실혼을 증명할 서류를 만들어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이미 시어머니는 사망했고 남편도 사망한 상태에서 너무도 긴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의 국적회복을 위해 평생을 법원과 소송으로 씨름해야 하는 이덕남여사의 처지가 옆에서 보기에 딱해 보인다.


▲  신채호선생의 출생지는 충남 대덕군이고, 사망장소는 여순감옥이다. 
▲  신채호선생은 태어나 총각으로 살다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인과 후손들과의 연결고리가 없는 나 홀로 국적회복이다.  부인과의 사실혼 증명이 있어야 소송에서 이겨 인정을 받을 수 있을텐데 그 서류를 유족들이 만들 수 있을 지 그것이 문제이다. 부인은 이미 작고하셨고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인인 히딩크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이루어냈다고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은 히딩크에게 서울시민이라는 시민권을 쉽게 부여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의 국적회복에는 지난 정부들이 왜 이다지도 인색했는지 모르겠다. 

▲  히딩크에게 서울시민권을 부여한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그러나 그때까지도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들에게 국적회복을 시키지 않았다.

언제쯤 되어야 이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국가 정의를 제대로 실천 못하는 국가의 미래는 없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국민들에게 일깨워주는 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의 후손들은 부유하게 살고 고위직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데, 목숨을 바쳐 나라의 광복을 이루어 낸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은 아직도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며 일용직 근로자로 전전하는 세상을 정부가 조장하면 안 된다. 국가 정의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나라가 다시 한번 100년 전과 같은 누란을 맞게 된다면 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 이번의 반쪽짜리 국적회복이나마 정부에 고맙기는 하나, 여전히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독립유공자들에게 아직도 부끄럽고 뒷맛이 씁쓰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왼쪽에 있는 문구인 "광복투사 후손은 3대가 망하고 부일민족반역자의 후손은 3대가 망한다."라는 표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