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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의 '해'씨는 고구려 태조때 '고'씨로 변경"

"사상의 뿌리가 한민족의 경천애인-홍익인간사상의 줄기.."

윤복현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26 [11:21]

"해모수의 '해'씨는 고구려 태조때 '고'씨로 변경"

"사상의 뿌리가 한민족의 경천애인-홍익인간사상의 줄기.."

윤복현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4/26 [11:21]
높을 [고]는 해[태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해모수의 성씨 [해]씨와 같다고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앙집권강화로 고구려의 기반을 다지고 장수했던 태조왕때 성씨가 해씨에서 고씨로 바뀌는데, 이건 당시 한자가 대중화된 시대상황에서 순우리말인 <해>보다는 한자문화권인 중국을 겨냥하는 차원에서 높을 <고>를 성씨로 공식화한 것으로 봅니다. 즉, 고구려는 중국보다 높은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기위한 대외과시차원에서 말이죠. 고구려의 성장과 관련된 대목으로 봅니다.
 
해모수와 고추모의 조상은 단군왕검의 차남 부소 태자가 1대 왕으로 취임한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입니다. 고구려.고려.구리.고리가 다 이 [고리]국에서 온 말입니다. 고리국은 번조선의 영역인 요서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번조선의 제후국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요서지역은 중국문명의 시원지로 드러난 홍산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맥족이라고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문헌에 기록하기를 단군족의 후예인 부여.고구려는 맥족으로 요서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일으켜 요동지역에 살고 있는 예족에게 전파한 주역으로 수렵이나 사냥을 하는 유목민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족은 주로 바다나 강가에서 어로생활을 한 한韓국인들입니다. 한민족인데, 생활양식에 따라 예-맥-한韓족으로 중국인들이 구분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맥족은 유라시아 초원지역에 사는 한韓민족을, 예족은 큰 강이나 바다와 가까운 발해만.산동.만주.한반도 해안지역에 사는 한민족을, 한韓족은 농사를 짓는 한韓반도사람들로 보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고리국은 맥족의 나라이며, 단군조선.부여.고구려개국한 주체세력으로 중국-만주-몽골-한반도-일본열도를 지배한 고대 유라시아 역사의 주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자료]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초상 - 부루나 존자가 생존의 석가모니를 그린 그림이다. 고리족 출신의 석가모니. 석가모니 제자가 그렸다는 생전 얼굴모습.    


 
[보도자료] 현재 인도인들은 인도의 원주민들과 이주해 들어온 드라비다인들과 아리안족의 혼혈족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인도 북부에 살던 드라비다족은 인더스문명의 주역으로 중동에 정착한 슈메르인들의 갈래라고 보고 있다. 드라비다인들의 언어는 한반도사투리(특히, 전라도 사투리가 강하다)와 거의 유사하다. 인더스문명은 슈메르문명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이 드라비인들을 인도 남부지역으로 몰아내고 인도전역을 지배한 세력이 중앙 아시아지역에서 내려온 아리안족이다.
 
이 아리안족은 광명을 우주의 신으로 섬겼다. 즉, 아리안족은 광명을 숭상했던 고대 한국들의 갈래였던 것이다. 아리안은 아리랑과 같은 어원으로 광명의 상징인 알(해=태양)이랑이다. 아리안족은 아리랑족이다. 이 아리안족이 사용한 언어가 산스크리트어로 유럽어족의 조상어다.
 
즉, 유럽언어의 조상어가 한국어라는 말이 된다. 독일.프랑어를 가만히 들어보면 마치 한국말과 비슷한 발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어원자체가 한국어임을 알 수 있다. 인도전역을 지배한 아리안족은 지배족으로써 아리안족의 순혈주의를 유지하기위해 브라만교와 카스트제도를 만들어 특권의식을 유지하게 된다. 여기에 한민족의 광명사상에 뿌리를 둔 만민평등사상으로 대항한 인물이 또한 한국인 석가모니다.
 
석가모니는 벼농사를 짓던 동방족 출신이다. 석가모니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키도 약 1.87~1m90cm정도로 짐작되는 형상이다.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은 동방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 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고리족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동쪽에서 이동해 온 고리(고구려)족이라면 당연히 단군조선의 후예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석가의 출생 및 사망 시기는 확실치 않다. 20세기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나,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기원전 410년에서 400년 무렵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교보다 훨씬 후대인 기독경의 복음서들의 예수관련기록들은 대부분 불경내용과 거의 같다는 건 이미 사실로 드러난 내용이다. 기독경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는 13-30세까지의 미스테리 예수생애는 상인을 따라 인도에 와서 불제자 생활을 했다는  연구결과가 진실성을 더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이슬람교).불교.유교.도교 사상의 뿌리가 한민족의 경천애인-홍익인간사상의 줄기라고 하는 인류사적 배경이다.

 
 
한단고기 09/04/26 [16:49] 수정 삭제  
 


한단고기 원본
 

http://cafe.daum.net/khankorea/63Ky/2232




아래는 숙명여대 도서관 자료검색결과입니다.  이유립이 베껴서 썻다는 필사본이 아니라, 계연수가 1911년 편찬한 한단고기 원본과 동일한 책 - 자료유형: 단행본 - 서명/저자사항 : 桓檀古記 / 桂延壽 原著 ; 李沂 校閱 - 개인저자: 계연수, 이기 - 판사항: 影印本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倍達義t塾, 神市開天5876[1979]. - 형태사항: 137p. ; 26cm. - 원본주기: 원본 : 桓檀古記. [발행지불명] : [발행처 불명], 光武15[1911] - 분류번호: 951
→ 그런데, ‘대출불가’로 되어 있네..이게 대한민국 상황 
 
한단고기를 전한 계연수桂延壽선생은 이기李沂선생이 한단고기를 직접 감수監修했다고 밝히고 있음으로 스스로 고려말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배달Baedal 사상을 잇는 중요한 갈래의 한부분을 담당했음을 한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다.계연수桂延壽 선생이 묘향산 단군암에서 한단고기를 쓰는 비용을 역시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선생이 대어주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히고 있다.계연수선생은 이기선생의 단학회를 이어받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협조를 했다. 1920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피살되었다.그 다음 단학회의 한단고기의 전래는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 선생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침체되었다. 해방후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선생이 출옥하면서 평양에서 그 맥을 이었으나 기관지 태극에서 신탁통치반대론을 주장함으로서 태극의 주간 이유립선생이 구속되면서 단학회의 활동은 다시 중단된다. 그 후 이유립선생이 월남에 성공함으로서 단단학회를 세워 계연수 선생의 한단고기는 다시 세상에 전해질 계기가 생겨났다. 작고하신 이유립선생은 1979년 한단고기를 세상에 펴낸다.그러나 1982년 이 이유립선생의 한단고기가 한글로 번역이 되기도 전에 천만뜻밖에도 일본의 가지마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행을 해서 세상에 펴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라는 배달Baedal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를 하듯 서로 이어받고 그 가난했던 시기에도 자금을 대고해서 전해진 한단고기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소위 단군이래 가장 잘 살게되었다는 1980년대초에 어이없게도 일어로 먼저 번역된 것이다.자손만대를 위한 소중한 민족적 지적재산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는 수모를 우리 모두는 당한 것이다. 그 시대의 우리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이 단돈 몇푼의 출판자금이 없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를 살았던 한국인중 한사람으로 당시에 한단고기의 존재를 몰랐다해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한단고기에는 천부경, 삼일신고가 원문 그대로 전해지며 또한 366사는 참전계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이유립선생에 의해 전해진다. 한편 이 한단고기는 제대로된 증거조차 제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위서로 매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위서라는 보편타당성을 갖춘 주장을 아직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그리고 만일 제 2의 일본인 가지마가 출현하여 한단고기등에서 전하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참전계경)을 세계의 문화시장에 내놓고 이를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과거나 지금이나 일본인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지식정보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우리의 소중한 지적재산이 무언지도 모르는 이 기막힌 현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 2. 묘향산석벽본(妙香山石壁本) >천부경 81자에 대한 자료로 잘 알려진 묘향산석벽본은 1917년(丁巳年 正月 初十日) 계연수선생이 묘향산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탑본하여 당시 서울의 단군교 앞으로 서신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교부흥경략(1937년)에는 이 서신과 함께 천부경 81자가 전해지며 또한 삼일신고의 원문도 전한다.< 3. 최문창후 전집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최문창후전집의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跡에는 천부경 81자의 원문이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에는 한단고기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 81자와는 약간 다른 글자가 보인다. 析을 碩, 衍을 演, 動을 同, 昻을 仰, 地를 中으로 하는 등의 것이다. 이 두가지 출처의 내용은 음은 같지만 표기가 틀린것이 대부분이다. < 4. 삼일신고 >삼일신고는 발해의 석실본과 천보산 태소암본, 고경각의 신사기본의 세가지 이본異本이 전해진다.< 5. 366사(참전계경) >366사(참전계경)은 단군교팔리, 성경팔리상하, 단군예절교훈, 참전계경등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원- 한단고기 : 계연수저 임승국번역, 주해 1986년 정신세계사 - 단군교부흥경략 : 정진홍  1937년 계신당- 삼일철학역해종경합편 : 대종교 출판사 1992년- 한민족뿌리사상 : 송호수저 1991년 기린원- 커발한문화사상사 : 이유립著 1976년 커발한 개천각
역사왜곡 동북공정 09/04/26 [16:53] 수정 삭제  
  이런 자료들을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자료로 활용해야 한다!
 
[자료]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저우언라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 맞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제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결과 중공의 발언권은 지대했다. 당연히 이를 악용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백두산 등 북한영토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 일각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 생전의 저우언라이 총리. 그는 대국의 역사침공과 쇼비니즘을 경멸한 거인이었다. ⓒ연합뉴스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언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니스트'에 불과하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제발 우리 정부가 더이상 '굴종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저우언라이 문건' 전문을 싣는다.





◀ 저우언라이 발언록.
ⓒ연합뉴스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과 고리국 09/04/27 [10:10] 수정 삭제  
  중국이 발해(순우리말=밝해=태양)로 표기한 대진국의 황실은 서압록하에서 천제 지내는 것을 큰 행사로 여겼다고 하니, 이것은 뿌리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대진국본기에 “3월 16일에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를 지냈다. 서압록(지금의 요하지역)하는 고리(골=구리=고려=고구려)의 옛 땅이다”란 기록을 보면 대진국의 황족인 대씨 역시 고씨에서 오지 않았나 의심해 본다. 이 심증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은, 고리의 옛 땅에서 태어난 해모수를 일러 종실 대해모수라 하였음으로, 그 대해모수의 이름 중에서 대를 따서 대씨로 삼았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해모수를 일러 대해모수라 하였고, 고무서를 일러 소해모수라 하였다.

고씨의 시조는 누구일까? 삼국사기에는 중국측 기록을 들어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양씨는 황제헌원의 방계 후손이다. 그것은 중국측이 우리 역사를 폄하시키기 위하여 내놓은 술책이다. 고씨의 기원은 배달국 거발한 환웅천황의 신하인 고시례로 보아야 한다. 신시본기에 치우씨, 고시씨, 신지씨의 후손들이 그 공덕에 의하여 가장 번성하였다 기록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고시씨가 색불루 단군의 선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고향은 고리국[藁離國]인데, 이 고리국은 바로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이다. 그나라 임금을 군(君)이라 하였다. 단군조선의 대표적인 9봉후국 중의 하나[단군왕검의 작은 아들 부소를 봉한 나라]이다.

서기전1285년부터 고리국출신의 고씨들이 단군3조선의 대단군으로 즉위하게 되였는데 47대단군 고열가[44대물리단군의 현손, 고씨단군의 마지막 단군]의 종실인 해모수의 고향 즉 선조의 나라가 고리국이라는 것이다.

단군조선당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난하였다.고리국은 단군조선당시 구려하(九黎河) 건너 요동의 서안평을 가리킨다. 구려하는 서압록 즉 서요하이다. 서기전108년경의 구려하와 요동과 서안평이 어디인지를 알면 옛 고리국 즉 구려국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단군조선 시대 구려국은 묵자(예수.석가모니.공자를 능가하는 현실적인 광명사상가)를 배출한 고죽국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보이는데, 옛 서안평은 요나라 때 임황이다.

대진국 시대에 임황은 옛 서안평이며, 서안평은 구려하 건너 요동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구려하는 서요하이므로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에 붙은 요하가 아니라 그 보다 더 서쪽에 있었던 요하이므로 즉 서안평은 지금의 요동반도 바로 서쪽이 아니라 그보다도 큰 강을 건너 서쪽에 있었던 것이 된다.

즉 지금으로 따지면 북경의 북쪽과 요동반도 사이에 발해만 북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요하의 상류쪽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즉 단군조선 당시 번한의 북쪽 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고리국의 1대 왕으로 취임한 부소의 후손 중에서 흉노의 시조가 되는 색정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흉노의 기원도 바로 고리(고려.고구려)국이다. 중국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를 보고 흉노의 선우라고 말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흉노는 북방초원지대로 이동하면서 단군조선의 종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 흉노에서 분가한 종족이 또한 단군왕검의 차남 부소의 후손인 기후의 수유족이다. 대단군의 좌현왕이였던 기후는 본래 대단군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우현왕이였던 색불루(해모수.고추모의 조상 고등의 아들)가 반발하여 쿠테타를 일으켜 대단군으로 취임한다. 이에 기우여는 마한과 손잡고 색불루와 전쟁을 벌이나 계속 패하고 번조선 단군으로 취임하게 된다.

따라서 번조선이 기자조선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배경자체가 기자(기후=기우여)를 1대 단군으로 삼기때문이다. 그리고 주나라에게 망한 은나라의 신하 기자와는 동명이인이다. 은나라 신하 기자가 번조선으로 망명해온 시기는 기자조선 3대 솔귀단군때이며, 진조선 대단군 솔나단군때이다. 일부 사학계에서 부소후손 기자와 은나라 신하 기자를 동일한 인물로 규정하는데 잘못된 내용이다. [한단고기]만 잘 읽어봐도 구분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단군왕검 차남 부소의 나라 고리국은 단군조선의 대단군들을 배출하고 부여-고구려를 개국한 해씨(고씨)들이 왕족임을 알 수 있고,고리족은 유목민들로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한 주역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손권의 말대로 유라시아초원을 지배한 흉노.몽골 등 북방 유목민족의 기원또한 동방(만주.한반도)이며, 북방유목민족의 철기제조기술또한 동방지역에서 서방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고대 최첨단기술인 철제기술을 보유한 고리(구리.구려.고구려)족들이 지배종족일 수 밖에 없었다.
편집국 09/04/27 [11:21] 수정 삭제  
  플러스코리아는 진실은 반드시 밝히기 위하여 창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실을 숨기고 남과북이 대치되고 현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독자제위여러분들의 나서시어 이렇듯 댓글로써 진지한 대화와 사료를 바탕에 둔 진실을 알려 주시어 고맙니다.
본지도 최선의 노력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재정적 어랴움에 시달리고 있으며 필진들의 헌신적인 옥고로 보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래서 독자 제위여러분께 부탁말씀드립니다.
실명으로 기사를 보내 주시고/실명을 원치 않으시면 가명으로 보도하겠습니다.
전화번호와 실명을 원치않으신다고 표기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국운이 쇠퇴하고 민족적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의식도 없이 민족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의식 있으신 분들이 똘똘 뭉쳐서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홍산문화와 맥족 09/04/27 [17:40] 수정 삭제  
  요서지역 요하문명의 주인공들은 맥족이다. 현재 중국 역사학자들도 만리장성 동북지역을 미개한 오랑캐로 취급했던 중국의 문명이 만리장성 넘어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요하문명 중에 홍산문화가 바로 황하문명의 발원지다. 중국의 용문화도 바로 홍산문화에서 시작되었음이 홍산문화유적지에서 발견된 거대한 뱀모양의 돌무더기를 통하여 증명되었다.

홍산문화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은 한국과 몽골이다. 한국은 능하문화를 이었고, 몽골은 하가점 상층문화를 이었다. 일본과 터키는 방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능하문화를 이은 한국의 방계이고, 터키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방계다.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동북공정에 올바로 대응할 수 있다. 능하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는 어떻게 흥망을 거듭해왔는가.

능하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는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갑골문자를 만들어 한자를 발전시킨 것은 황하문명이므로, 능하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의 흔적은 황하문명이 남긴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보아야 한다. 능하문화는 그나마 한자를 빨리 도입해 역사시대로 들어갔으나 유목문화가 된 하가점 상층문화는 그것도 늦었다.

능하문화의 후예가 부여-고구려-삼국시대를 거치는 역사발전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기서는 하가점 상층문화 세력의 추이를 집중적으로 추적해본다. 주목할 것이 초원지대의 특징이다. 유목을 하는 초원은 발전에 한계가 있다. 인구와 짐승 수가 너무 많아지면 초지는 황폐해지고 그로 인해 가축과 사람은 동시에 아사(餓死)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위기가 닥치면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한 내부 투쟁이 벌어진다. 이 경쟁에서 패하거나 염증을 느낀 세력은 새로운 초지를 찾아 멀리 이동한다. 일부는 평야지대를 공격해 먹을 것을 빼앗아 오는 약탈전쟁을 벌인다. 약탈전쟁을 벌이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평야지대의 풍부함에 매료돼 눌러앉기도 한다.

고지 초원의 한계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원지대는 적정 인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철기 시대의 생산력은 왕성했기에 초원지대의 인구는 금세 또 적정선을 넘어섰다. 그래서 다시 쪼개지거나 평야지대를 공격한다. 평야지대의 공격은 여자와 아이의 납치를 수반하니, 이들의 세력은 금방 확장된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평야지대 사람들은 초원지대 유목민들은 배반을 잘 하고 알력을 자주 겪는다고 비난한다. 배신과 불화는 평야지대에도 있었다. 평야지대에서는 배신을 해도 평야지대 안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초원 사람들은 이동수단을 갖고 있기에 알력이 심해지면 완전히 헤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몽골공화국(외몽고)은, 몽골족은 물론이고 흉노와 돌궐족까지도 그들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흉노와 돌궐은 몽골 초원을 지배했다가 사라진 유목민족이다. 몽골이 조상으로 삼는 흉노와 돌궐(투르크), 몽골족은 언어학적 특징으로 볼 때 홍산문화에서 갈려 나온 것이 분명하다.

적봉지역에 남은 하가점 상층문화 세력은 초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성 때문에 일찌감치 둘로 나뉜 것 같다. 하나는 적봉에 남은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적봉을 떠나 서쪽으로 갔다. 적봉 동북쪽에는 대흥안령산맥이라는 거대한 준봉군(群)이 있으니, 유목민은 광활한 초지가 있는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동해서 새로운 영역을 찾는데, 새로운 영역이란 물과 소금이 있는 곳이다. 물은 빗물로 해결하고 소금은 암염(巖鹽)으로 해결한다. 몽골 초원에서는 암염이 있는 호수가 이따금 나타난다. 적봉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가운데 일부는 오르도스 지역을 활동 영역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인들이 ‘흉노(匈奴)’라는 흉측한 이름을 붙인 종족이다.

오르도스 일대는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이곳에는 노천 석탄광 등이 있어 지금 중국 광산업계는 이곳에서 많은 광물을 채취해가고 있다. 청동기 제작술을 갖고 이동한 흉노족은 오르도스에서 고도로 발달한 청동무기를 제작한다. 그리고 곧 오르도스 초원이 허용할 수 없는 인구 증가에 봉착한다.

오르도스는 황하 만곡부이니 황하를 따라 내려가면 화하족이 구축한 농경문화를 접하므로 흉노족은 화하족을 공격했다. 흉노족이 화하족을 공격한 것은 여러 차례인 것 같은데, 이 중 유명한 것이 ‘개 같은 융족’이라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견융(犬戎)’으로 표기한 흉노족이 서기전 8세기 주나라를 공격한 일이다.
고리국의 도읍지 09/04/30 [23:37] 수정 삭제  
  스스로 꾸준히 공부하고 자각하자!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뿌리가 약해 무너진다.
 
고리국 도읍지는 거란이 수도로 삼은 임황부로 오늘날 중국 내몽골자치부 치펑 시다. 대진국 개국시조 대중상도 서압록하에서 상제께 지내를 지냈고, 거란(요)도 서압록하에 도읍을 정한 것을 보면 요나라도 고리국 후예들임을 알 수 있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이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내용에서 고리국의 옛땅은 서압록하이고 서압록하는 임황현으로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선조의 나라 고리국의 도읍지는 바로 요나라 상경 임황부이며, 요나라 상경 임황부가 바로 서압록하이고 서안평임을 알 수 있다.
"거란지리지도"라는 제목의 지도이다.가로로 길게 표시된 것은 "만리장성"임이 분명하다.오른쪽 아래에 파도가 표시되어 있는 영역은 北海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의 "뽀하이" 즉 발해이다.봉우리가 셋인 산에는 갈석산(碣石山)이라 표시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燕京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그 위에 산과 함께 居庸이라 표시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古北口라는 지명이 보인다. 가운데 윗부분에는 上京이라 표시된 지명이 있다. 대궐과 동그란 성곽이 표시되어 있다.이곳은 거란의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로서 오늘날의 중국 내몽골자치구 치펑시(赤峰市)이다.위 지도 중 김나라 영역 중 임황이 바로 서압록하로 고리국 도읍지다고리국하고 고구려하고 일치시키면 분석이 왜곡된다. 고리국과 고구려를 일키시켜 고구려 도읍지를 서압록하로 비정하면 안되는 것이다. 고리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고, 해모수.고두막.고추모 선조들이 모두 고리국의 왕족이였다는 의미다. 동부여에서 대소세력의 추격을 피하여 북부여로 망명한 고추모가 고무서 단군의 둘째 딸(둘째딸은 자식이 없는 미혼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동부여 해부루의 손자의 우태의 부인이였던 소서노가 아님)과 혼인하고 북부여 단군자리에 취임했으나 결국 북부여의 토착세력에게 쫓겨서 남쪽지역으로 남하하여 계루부와 소서노세력의 도움으로 고추모가 개국한 고구려 도읍지는 지금의 환인지역으로 비류수가 흐르는 골본성이다. 환인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진정책으로 서안평을 공략하는 배경자체가 바로 선조들의 나라인 고리국의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였다.부여는 대무신왕때 동부여가 멸망했고, 북부여는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때에 이르러서 항복하게 된다. 구태백제를 개국한 구태는 이 북부여의 왕자로 남하하여 동아시아 해상국가를 건설하는 주인공이며, 백제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정한 배경이기도 하다.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구태백제를 개국한 시기가 바로 법치국가를 실현한 고이왕때부터다. 고이는 고리를 의미한다.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고리에서 나온 부여의 전통성을 두고 벌이는 패권전쟁이였던 것이다.대중상이 개국한 나라는 후고구려에서 대진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발해는 중국인들이 부른 국호임에 유의하라. 발해는 순우리말로 밝해로 태양을 의미하니 중국인들(당시 당나라)도 대진국을 태양의 나라로 높이 숭상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사학계는 중국인들이 표기하고 기록한 종족명과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흉노.거란.몽골 등은 모두 북방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동일한 한국국인들이지 전혀 다른 민족들이 아니다. 마치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진국으로 나라이름만 바뀐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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