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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였던 예수.석가모니.묵자는 다르지 않다

우주는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지구촌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윤복현 종교문화 칼럼 | 기사입력 2010/08/14 [22:37]

불제자였던 예수.석가모니.묵자는 다르지 않다

우주는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지구촌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윤복현 종교문화 칼럼 | 입력 : 2010/08/14 [22:37]
기독경은 예수사후 복음서들을 저술한 예수의 제자들과 유대교에서 예수교로 개종한 바울과 예수교를 로마통합이념으로 삼기위한 차원에서 예수교를 공인(콘스탄티누스황제)하고 국교화(테오도스우스황제)한 로마의 교부들이 예수교를 변론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리서(케리규마)로 기술하고 구약시대와 관련한 책들과 예수관련 수 많은 책들 중에서 66권을 채택된 책들입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참여한 321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하여 인간 예수보다는 예수를 신격화하여 하나님과 성령과 동일시하는 3위1체 교리로 지금의 기독교를 탄생시킨 것입니다.물론 신격화를 거부하고 인간예수를 강조한 세력은 로마권력에 의해서 이단시되어 동방지역으로 거점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로마권력이 주도한 나케아 종교회의는 이성이 로마권력의 통치이념에 짓밟히는  순간이였고, 로마와 결탁한 기독교가 부패하기 시작한 순간이였습니다. 이성이야말로 믿음의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상실되고 반이성적인 광신이 지배하게 되면 인간이성은 진보를 정지당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그 대상을 추종하는 세력이 이성을 상실하고 광신적으로 빠져 버리는 의식를 '빠돌이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광신적인 빠돌이 의식들이야 말로 비판과 문제제기를 가로 막는 이성의 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신학에 반기를 들고 복음서의 예수어록과 행적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고 로마에 탄압받았지만 원시 공산주의형태를 뛰었던 예수공동체를 통하여 예수운동을 바로 세우려하니 이들을 오늘날 교리신학에 의해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되는  민중신학.해방신학.진보신학.민족신학.통일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의심하는데서 더욱 성장하는 법이다. 믿음이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이성의 강고함을 의미합니다.여러 나라의 언어로 변역되고 한국어로 번역된 기독경 내용이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식의 어거지 논리로 주입세뇌시킴으로써 기독경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써의 기독경의 형성배경이 전제되지 않는 문자주의적 해석으로 인간을 속박시키는 미국의 굴종신학(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을 전파시킨 박형룡세력의 신학을 의미한다)에서 탈피하여 고대로부터 하나님을 신앙해 온 한국인들에 의한 주체적인 한국신학을 표방한 김재준(마니산의 참성단 제천단을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으로 이해함)으로 시작으로 김정준.문익환.안병무.서남동.홍근수 등 한신대(한국신학대) 계열의 민족주의 신학입니다. 이후 텍스트(문서내용)와 현실의 관계분석과 조합을 통한 변혁을 실현하겠다는 이러한 민족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과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이끌어 온 기반이 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창조설화를 담고 있는 창세기 등 기독경을 소위, 개독교인들처럼 그 무슨 과학서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우리 인생살이에 어떠한 의미와 교훈을 주는지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독경과 관련하여 창조설화.에덴동산설화.노아홍수설화.바벨탑설화 등은 모두 바빌로니아 포로기 상황에서 팔레스틴지역으로 귀환할 때에 이스라엘 사가들이 슈메르인들이 남긴 길가메쉬 서사시 등을 비롯하여 슈메르인들의 문헌들을 가지고 이스라엘민족사관에 맞게 수정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시편.잠언.욥기 등이 모두 슈메르인들의 문헌을 토대로 편집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전국체전 때마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제천단)에서 강화 칠선녀에 의해 성화가 채화된다
 
슈메르인들은 서양의 인류학자들도 이제는 중동지역의 원주민들이 아니라, 아시아지역에서 이주해 온 고산숭배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이 증명하듯이 높은 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높게 쌓은 피라미드도 산을 대신한 제단입니다. 슈메르인들의 지구라트(바벨탑)가  바로 제단을 의미합니다.중동지역으로 이주해 오니 산이 없이 벽돌을 쌓아 산모양을 만든 것입니다.고대에 하늘은 태양이 비추고 비가 내리고 천둥을 치는 공간입니다.고대인들에게 하늘은 두려움의 대상이였던 것입니다. 또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하늘은 농사를 결정짓는 대상이였던 것입니다.그래서 농사를 시작하는 봄철이나 추수를 하는 가을철에는 반드시 <제사장=천군:마조선=한머리땅>이 주관을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한반도지역은 고대로부터 비옥한 지역으로 농경문화가 일찍 발전하였습니다. 충북 청원군에서 1만5천년전의 볍씨가 발견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고인돌이 세계에서 최대로 밀집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인들에게 하늘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제천의식이 일찍 발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농경지역이다 보니 소들도 많았습니다. 일제식민지 이전까지만 해도 흙소 등 아홉 종류의 한우들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조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해 온 배경으로 역사열등감에 빠진 일제의 한우말살로 누런색으로 대변하는 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 슈메르인들이 제천의식을 행했던 지구라트
 
슈메르는 그 어원이 소머리입니다. 소머리는 한반도지역의 토템의식입니다.소머리족은 한반도인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반도지역을 떠나 만주를 경우하여 12한국말기에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경유하여 중동지역에 도착한 고대 한국인들이 슈메르인들이라 해야 맞습니다.슈메르 초기 유적지에서 편두을 한 몽골인종의 유골들이 발견되고 씨름조각상이 발견되고 한국어와 유사한 어휘가 발견되는 것이 배경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조는 아브라함입니다.아브라함은 슈메르인입니다. 갈대아 우르가 아브라함 고향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모리산에 올라가 양을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 한민족의 제천의식에서 비롯된 풍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백인종과 혼혈이 되다보니 이민족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한민족못지않게 유대인들이 두뇌가 뛰어난 이유입니다.그러나 현재 한민족의 두뇌보다는 못합니다.그것은 피의 순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자기 조상들의 뿌리를 알려 주게 되면 한민족을 선조들로 섬길  수 밖에 없으며, 한국을 위해서 자신들의 금융자산을 기부하거나 투자할 수 밖에 없습니다.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민족사를 바로 인식하는 일과 세계에 바로 알리는 일이 그래서 인류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론에서 얘기가 많이 샜건 같습니다.예수논쟁과 관련해서도 고대의 신화적 전승구조로 복음서에 기록된 포장되고 박재화된 <교리적 예수>가 아니라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한 인간으로 살았던 <역사적 예수>문제연구가 더 중요한 이유라 할 것입니다.
 
로마에 저항하다가 투항하여 [유대사]를 집필한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라는 이름은 많았습니다. 성령잉태설로 포장된  마리아의 임신설과 관련하여 마리아가 혼전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예수인데, 기독경 복음서에 12세이후부터 공생애이전의 예수기록은 부재한 것으로 보아 12살까지 팔레스틴에서 살다가 [동방박사들]과도 연관되는 내용으로써 일찌기 인도상인들을 따라 인도로 와서 불법을 배워서 다시 팔레스틴지역으로 돌아와서 대중운동을 펼친 것 같습니다. 불경내용과 복음서내용들이 유사하다는 것은 문헌고증으로 다 밝혀진 사실입니다.
 
Bible에는 예수가 12살 때에는 사원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에는 요르단 강가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17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흔히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라고 불리는, 이 17년 동안 예수는 ‘지혜와 정신적 능력을 키워왔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으며 불교의 고승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1887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이 전해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기록서(원본은 서기 2세기 이전의 팔리어로 기록되어 랏사[신들의 장소]근처의 한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불문학 박사인 민희식 한양대 교수가 신문지상(주간중앙 1986. 10. 26)에 ‘예수는 한때 불교고승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보면 그 내용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민희식 교수는 84년 펜번역 문학상, 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은 바 있는 석학으로서 특정 종교의 신자(信者)가 아닌 학자로서 발표한 내용인 만큼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비장(秘藏)된 채 공개되지 않던 것을 민교수가 입수하여 알린 내용으로써 ‘예수가 원효대사와 같은 불교의 고승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家長權)을 갖고 결혼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났다. 이사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예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이어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大師)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간음한 여인의 예)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예수가 이렇게 동양으로 구도의 여행을 다닌 사실은 리바이 도우링이라는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방법인 아카샤(akasha)라는, 우주심(宇宙心)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기록(아카식 레코드)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제3의 복음서 『보병궁 복음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천재적인 목사 리바이 도우링(1911. 69세 사망)이 쓴 『보병궁 복음서』(성약성서)에는 4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출생과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 등 4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보병궁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인도에 가게 된 동기는 인도의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했다가 총명한 예수를 보고 인도로 데려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당시 예수는 12살이었고,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 승려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인도의 최고가는 명의(名醫) 우도라카의 제자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치료법을 배우며 베다 및 불경을 공부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승려들의 정죄에 걸려, 죽음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습니다. 그 뒤 성인 피자빠찌의 소개로 밀교(密敎)의 대성자인 멩그스테에게 찾아가서 제자가 됩니다. 여기서 이 절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을 그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읽었으며 이 곳을 떠날 때 광명의 부처라는 찬사를 받은 예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24년 전에 자신을 찾아준 동방박사 3인의 마기교 승려를 찾아 뵈었습니다. 이윽고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 온 예수는 어머니의 애정어린 환대를 받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환대를 받지 못합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 미리암에게만 지난 날 구도의 과정에서 겪었던 사연많은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희랍으로 떠납니다. 희랍의 교사 중에서 아폴로라는 성자와 함께 교사들을 가르치며 희랍의 정신세계를 들었습니다.

25세에 다시 이집트 조안에 가서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이라는 신전에 입회하기를 원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 생사의 문제, 또한 태양계 바깥의 비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자의 방에서 일을 마친 뒤에 ‘보랏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시험을 이겨내어 ‘그리스도’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이상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인데, 인도에서의 행적 등 학자들의 연구내용과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藁離族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藁離族,九黎族=고구려의 선조)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尊者>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바로 석가모니가 몽골인종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석가모니를 배출한 석가족은 코리족(고구려 선조)이였습니다. 22대 색불루 단군천황부터 단군천황들은 모두가 고리족 출신입니다. 부여를 개국한 해모수와 부여를 접수한 동명성왕 고두막, 그리고 해모수의 직계손자로 고구려를 개국한 고추모, 몽골족을 통합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동서교역과 교류을 확대하여 동서문명발전에 기여한 유라시아 경영자 징기즈칸이 코리족 군장으로 코리족 출신입니다. 징기즈칸의 혈족으로 인도지역에 세운 무굴제국도 코리족의 나라이며, 중앙 아시아에 개국한 티무르 제국도 코리족의 나라인 셈입니다. 백제를 개국한 온조가 고추모의 아들이니 고리족입니다. 물론 소서노와 동부여 시조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사이에서 낳은 비류도 코리족입니다. 국가주의로 한일감정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민족사적으로 보면 현재 일본은 멸망한 백제황족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세운 나라이니 백제황실이니 코리족의 나라인 것입니다.
 
우주는 열려 있습니다. 지구촌은 지평융합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모두가 영향을 주고 받아 왔습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고 불교와 유교가 다르지 않고 유교와 도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들만이 인정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최치원이 말한 유불선을 융합한 '풍류도'의 실체를 말입니다.'풍류도'란 바람처럼 어디든 날아가는 도입니다. 풍류도인들은 종교를 초월합니다.풍류도인들은 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하고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하지 않는 자유인들입니다. 속박하거나 구속하는 울타리를 언제나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종교교리로 세뇌된 인간들의 뇌구조는 절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고로 벽을 치는 종교교리의 울타리를 벗을 때만이 종교인들이 구원을 얻는 날입니다. 결국 고대 슈메르인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예수는 인도로 와서 불교를 매개로 하는 한민족의 도를 배우고 티벳을 거쳐 팔레스틴 지역으로 와서 대중운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주만물은 유기체적으로 연결된 하나라는 불교사상, 즉 한민족의 <한>사상을 배운 예수는 이미 만물들이 서로 다르지 않고 모든 종교들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종교다원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남긴 계명은 한민족의 경천(하나님 숭배)+애인(이웃사랑)에 불과합니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당대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예수가 이런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요한의 신앙사상에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변화없는 조직은 반드시 부패하고 무너집니다. 세례요한은 속박된 공동체에 속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율법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에세네파보다 폭넓은 계층(가난한 사람, 죄인)을 대상으로 설교했습니다.세례요한과 인간 예수의 공통점이라면 어디에도 속박당하거나 얽매이기 싫어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과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며 즐거워 했던 자유인들이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뒤 한참 지나서 갈릴리와 트랜스요르단 동편 중부지역을 다스리던 헤로데안티파스에 의해 투옥되었습니다. 그것은 요세푸스가 전하는 대로 지루한 도덕 설교 때문도 아니었고, 복음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그가 설교를 통해 정치를 비판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헤로데는 첫째 부인(인근 아랍족 나바테아 왕국의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한 뒤 자신의 이복동생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법상 불법행위였습니다. 요한이 이 결혼을 비판하고 나서자 헤로데는 자신이 다스리던 유대 백성과 반(半)아랍 백성이 연합하여 자기를 반대하는 위기에 직면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요한을 처형한 것은 35~36년 아레타스 왕이 헤로데를 공격하여 승리하기 전이었음이 분명한데, 이 패배는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데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졌습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죽었다. 그가 죽은 시기를 아무리 정확하게 추산한다 해도 그것은 예수가 사역하고 죽은 연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요한의 추종자들은 그의 시체를 찾아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의 것으로 전해져온 '살림 근처 애논' 인근의 세바스테(원래는 사마리아)에 있는 묘지는 360년부터 그의 묘지로 공인되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대중운동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수가 사후에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탄생-고난-십자가죽음-부활-승천이라는 구조로 전승되어 온 고대신화들의 구조로 완벽하게 신격화된 책들이 복음서들이라 봅니다.  예수후손들이 프랑스에 존재하고 그 후손들이 족보들고 나와서 영국에서 종교재판이 열려서 승소했습니다.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사라지고 있습니다.그것은 예수를 신비주의로 믿지 말고 우리와 같은 밥을 먹고 똥을 싸고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었던 인간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고로, 포장되거나 신격화되기 전의 예수라는 인간이 당시에 어떤 의식을 가지고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 간 인간이였나를 연구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홍익인간이 되면 그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한민족의 동학이 내세우는 '인내천(사람이 곧 하나님이다)' 사상의 실체입니다. 3신1체 하나님의 피를 받았으면 당연히 하나님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태양처럼 보이지 않는 음침함과 답답한 어둠을 비추어 환하게 드러내는 하나님은 인류만민속의 양심으로 존재합니다.양심은 빛입니다. 빛은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인류만민은 그래서 평등하며 우주만물은 동등한 존재들인 것입니다.고로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불교.유교.도교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단지, 종교의 영향력있는 존재들을 인간들이 종교교리로 포장하여 신격화를 하다보니 분리되고 집단적으로 벽을 치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 온 것입니다.
 
예수숭배자들은 예수가 최고입니다. 석가모니 숭배자들이 석가모니가 최고입니다.공자숭배자들은 공자가 최고입니다. 김일성숭배자들은 김일성이 최고입니다.이승만숭배자들은 이승만이 최고입니다.김대중숭배자들은 김대중이 최고입니다.노무현숭배자들은 노무현이 최고입니다.그러나 구체적으로 뜯어 보면 치부와 문제점이 한 두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예인 팬클럽처럼 추종자들은 최고의 존재들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조로 최고의 영도자들은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처한 고난과 시련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는 가장 불쌍한 존재들이면서 절대로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을 절대 금지시키며, 자신의 중대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며, 모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기 전까지는 절대 호화스러운 음식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으며, 백성 앞에 겸손하고 백성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까 고심하고 준비하며, 자주국방으로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며 주변 나라들과는 서로가 유익하게 교류협력하는 동반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는 신뢰를 통한 합의와 합의이행을 통하여 하나 하나 만들어 가는 지도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소수라도 이성과 양심과 진실을 주인삼아 그러한 유혹의 속박을 벗은 주체적인 사람들이야 말로 위대한 존재들이라 할 것입니다. 보기에도 어색하게 고상하고 거룩한 척 하는 위선적인 종교인들이나, 중대한 과오와 잘못에도 자기합리화와 변명으로 일관하며 완전한 신적인 존재들인 양 행동하는 인간들은 자신들도 어색하고 부담스럽거니와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연은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때가 되면 꽃이 지고 열매가 맺습니다. 물은 올라가지 않고 끊임없이 낮게 흘려 정화시키며 결국 바다로 흘러 갑니다. 자리는 군림하는 위치가 아닙니다. 섬기는 자리입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요. 양심을 속이지 마십시요.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요. 높은 자리일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포용하십시요. 유능한 인재들의 능력을 키워 주십시요. 불의와 부패와는 타협하지 마십시요. 타협하는 순간 공든 탑은 무너져 내립니다.
 
삶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었느냐에 두지 않고 무엇을 했느냐에 있습니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도 무엇을 하고자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을 하고자함입니까?하느님은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는 기독경의 내용도 있습니다만 하느님은 병들고 죽어 가는 생명들을 최대한 살려 보려는 기운이기 때문에 약자들의 신음소리에도 귀 기울리시고 그들의 호소를 해결해 주시려고 하시는 기운이십니다. 고로 구조악에 고통받는 생명들과 이웃들의 신음을 듣고 해결해 주면 그가 곧 하느님의 심성을 가진 홍익인간(하느님)입니다. 광명의 님, 태양과 같은 님을 의미하는 환한님은 하느님.하나님으로 발음되는 말로써 천지인합일의 율려를 실현한 한민족의 시왕모 마고와 함께 환인천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고나 환인속에 3신1체 우주광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환한님이 되신 것입니다.
 
자신의 찌든 의식을 일신우일신 청소하면서 때론 조금은 거칠다하여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진솔한 모습으로 불의와 싸우고 사심없이 의롭게 신나게 애국애족 인류평화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박수를 쳐 주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와 과학은 그들에 의해서 발전해 왔으니까 말입니다. 

▲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동양사상연구가 기세춘, 신학자 홍근수 목사의 『예수와 묵자』. 기독교계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출간된지 1년만에 절판된 <예수와 묵자>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묵자와 예수가 한 목소리로 전한 평등과 평화, 그리고 민중 해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갈등 해결과 생명 살림의 출발점을 찾아내고 있다.  
묵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고죽국의 무인이자 철학자이며 노동자이며 혁명가였습니다.묵자는 초나라와 월나라 등 여러 곳에서 봉토를 주겠다고 하며 초빙을 받았으나 귀족의 신분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노동자의 검은 옷을 입고 전쟁반대 운동에 목숨을 걸었으며, 평등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운동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런 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 천하를 주겠으니 그 대신 네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느냐?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목숨보다는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 한 마디로 서로 죽이기도 한다. 이는 의義가 목숨보다도 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사는 의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하니 그 의라는 것이 혼란되어 있다.
 
하느님의 뜻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큰 가문이 작은 가문을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하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天之意 不欲大國之攻小國也 大家之亂小家也 强之暴寡 詐之謀愚 貴之傲賤 此天之所不欲也)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힘을 가진 자는 서로 도와주고 도리를 가진 자는 서로 가르쳐 인도하고 재물을 가진 자는 서로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欲人之有力相營 有道相敎 有財相分也)"
 
▲3신1체를 의미하는 한민족의 3태극과 고구려 삼족오
우리는 고대 한국인 묵자의 말에서도 인도에서 불교사상을 배운 예수의 하느님이나 석가모니의 부처(하느님)나 묵자의 하느님이 결코 서르지 않고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에서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묵자의 말을 보아도 당시 우리 단군조선이 얼마나 뛰어난 정신문명을 가지고 홍익인간 나라를 건설하고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조상이 한국인이였던 공자가 살고 싶다고 했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우수한 하느님의 유전인자를 소유한 한국인들인 것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유전인자를 깨우고 복원하고 성육신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태양처럼 환하게 비추어 주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기운으로 일하고 활동하는 홍익인간들입니다. 하느님을 의지하면 마음이 텅빈 0가 됨으로 인간의 교만이 죽고 탐욕이나 과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샘솟습니다. 하느님의 실체인 양심이 지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멀리서 찾지 말고 인간자신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최제우 선생은 <인내천>이라 했습니다. 사람(살리는 홍익인간)이 곧 하느님인 것입니다. 양심을 상실한 인간에게 하느님은 죽었습니다. 하느님은 얼입니다. 얼이 죽은 인간은 더 이상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본성이 누구인지 각성하지 못한 인간에서 각성한 홍익인간이 되는 일이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홍익인간이 되면 너와 나와 너는 3신1체 공명(우리)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전 것은 다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의 말씀이 지구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사랑 10/08/15 [23:30] 수정 삭제  
  요한게시록, 예언서이지요
예언은 과거에 미래를 예측하는 겁니다.
시계의 톱니를 아시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시계는 돌아갑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을 표시합니다. 약간의 오차는 있겠지만...
전 경외감을 갖습니다. 님의 말처럼 누군가 임의로 기록한 것이라면, 시계의 톱니처럼 이토록 정교하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할수 없을 것이라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계시다면,그의 말씀이 아니라면 이토록 정교하게 이루어 질수 없는 요한계시록등의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두려움과 경외감을 어찌 설명할수 있겠는지요?

윤복현씨,아직, 인천에 계시죠?
저도 인천이니 한번 만나서 토론해봅시다.
semicon21@paran.com--메일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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