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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 인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임진미 기자 | 기사입력 2020/05/20 [15:00]

[조선력사 인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임진미 기자 | 입력 : 2020/05/20 [15:00]

조선의 력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일제가 조작해 만든 조선사35권의 식민사관과 이병도일당이 조작해 만든 대국사관의 반도사관을 중심으로 한국사와 국사교과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반면, 북은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을 탈피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남과 북은 역사의 특징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지에서 "조선을 바로 알아야 통일이 가까워 집니다"라는 신념으로 북조선이 가르치는 '조선력사'를 인터넷매체 조선의 오늘이 공개한 게시물을 여과없이 게재한다.  

▲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그의 이름은 주몽, 추모, 증해이고 왕호는 동명성왕이며 아버지는 해모수, 어머니는 류화이다. 사진=조선의오늘     © 이형주 기자

 

▲ 동명왕릉에 그려진 해모수.     © 플러스코리아

▲ 동명왕릉에 그려진 류화부인     © 플러스코리아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반만년의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사에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그 이름 빛나고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은 고구려국가를 세우고 점차 강대한 나라로 발전시킬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주몽, 추모, 증해이고 왕호는 동명성왕이며 아버지는 해모수, 어머니는 류화이다.

해모수는 구려(졸본부여)부근의 한 귀족문벌출신이였고 류화는 그 이웃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자인 하백의 딸이였다. 

해모수와의 관계로 하여 부여왕실에 가서 나그네살이를 하고있던 류화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보통사람과 달랐고 커가면서 제손으로 활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하였다고 한다. 부여, 구려지역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주몽》이라고 불렀다.

그는 뛰여난 재능과 함께 무술도 겸비하였다. 하루는 부여왕의 일곱왕자가 부하 40여명을 데리고 주몽과 함께 사냥을 하였는데 주몽이 혼자서 수십마리의 짐승을 잡는 사이에 그들은 겨우 사슴 한마리밖에 잡지 못하였다.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하여 큰 나무에 꽁꽁 묶어놓은 다음 그가 잡은 짐승을 빼앗아가지고 돌아갔다. 그런데 주몽은 큰 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전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를 통하여 주몽이 남달리 뛰여난 재능과 무술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또한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칼쓰기 등 무술련마를 생활화하여 그 어떤 침략자들도 범접 못하게 한 고구려사람들의 상무기풍을 뚜렷이 엿볼수 있다.

문무를 갖춘 주몽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부여왕과 그 아들들은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주몽의 어머니는 《네 재간을 가지고 어디가서 무엇을 못하겠느냐? 여기에 머물러 욕을 당하기보다는 멀리 가서 큰 일을 하는것이 낫다.》고 하면서 부여를 떠날것을 권고하였다.

오이, 마리, 협보 등 뜻이 같은 벗들과 함께 부여를 떠나 엄호수에서 추격해오는 군사들을 쳐물리치고 남쪽으로 내려간 주몽은 구려에 이르러 그곳 봉건세력과 함께 B.C. 277년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그때 동명왕의 나이는 22살이였다.

나라를 세운 후 봉건적인 국가사회체제를 갖추면서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여 령토를 넓히고 경제, 문화를 발전시켜나가는 등 고구려의 강화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동명왕은 B.C. 259년 40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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