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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의 ‘숭고한 정신’과 ‘토착왜구’를 해부한다! "

이하천 소설가 | 기사입력 2020/06/19 [15:20]

"윤미향의 ‘숭고한 정신’과 ‘토착왜구’를 해부한다! "

이하천 소설가 | 입력 : 2020/06/19 [15:20]

 

▲ 이하천 소설가     © 플러스코리아


[ "이용수 할머님은 30년간 거짓에 속아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일에 피를 토하고 세상을 뜨게 될 것이다. 새 판을 짜야만 한다. 시간이 없다. 이용수 할머님한테서 제일 훌륭한 언어가 나왔다. 이규연이 스트레이트에서 한 말 ‘경청’, 그렇다. 할머님의 말에 경청해야 한다. 할머님과 미국지식인들은 그 길을 알고 있다. 우리사회는 특히 어두움의 세계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기회를 엿보는 인식의 귀신들이 많다. 이 사안에 음모설, 배후세력을 운운하는 것은 그런 귀신들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게 무섭다는 것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과거 정서를 못 벗어던지고 거기서 파생된 진영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결론 중에서. 편집자 주]

 

"윤미향의 ‘숭고한 정신’과 ‘토착왜구’를 해부한다! "

 

 ‘나는 제사가 싫다’ 후 계속 가부장제의 실체를 추적하고 있던 나는 10년 전 내 손 안에 모아진 모든 언어를 들고 ‘이걸 어떻게 우리사회에 접목시키나’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왜곡된 강자의 논리와 새롭게 등장한 돈의 논리와 우리는 이 만큼 잘났다고 외쳐대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신난다를 외쳐 대고 있는 허망한 정신들과,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있는 진보 지식인 남성들의 거대증에 휩싸인 사회, 거기다 대고 우리 사회 내면의 상처를 봐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또다시 컴컴한 밤 내 앞에 나타난 거대한 에베레스트 산을 망연자실 쳐다보았다. 저건 뭐지? 저걸 넘어야 한다고? 이 밤중에?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기에 길도 없다. 겉 표면의 시스템을 얘기 하는 게 아니라 우리사회의 내면에 세워진 정서적 시스템을 얘기하고 있다. 이 정서적 시스템, 원리에 젖줄을 댄 훌륭한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사적정신을 기반으로 촘촘이 짜여진 이 정서적 시스템을 재편성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 화병이라는 심리적 병은 지속 될 수밖에 없고 약자들은 계속 곳곳에서 죽고 얻어터지고 조리돌림 당하고 지리산 토벌대들에게 처참하게 죽어나간 역사적인 빨치산들처럼 살해당할 수밖에 없다.

자, 그 이 이유를 알려면 한국인의 정신적 틀을 알아야 한다.

 

▲ 이용수 피해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윤미향사태.     © 플러스코리아

 

한국인의 정신적 틀

 한국인은 오랫동안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 속에서 살아왔다. 50대 이후는 다 이 정신적 틀의 피해자들이다. 40대 이하는 그 틀은 어느 정도 벗겨졌지만, 자신들이 앉을 정서적 그릇이 무엇이냐를 알아야할 입장이다. 왜 그 그릇에 앉으려면 불편하고 때론 아프고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서 알아야 우리사회가 이해가 될 것이며 그래야 자신이 앉을 정서적 그릇의 현 단계 주소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직 우리사회에서 정의란 강자에게는 차고 넘치고 약자에게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 말은 아직 우리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은 세워나갈 때이지 누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울러 말한다.

 

 물론 곳곳에서 그 틀이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직은 멀고도 먼 길을 걸어야만 된다는 생각이다. 그 틀 속에 갇혀 너무도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배적 언어(할 수 없다. 우짜노~)라는 무늬를 우리의 심리 속에 각인시켜 버리면서 뽕짝정서로 미화시켰다. 이 패배적 언어와 뽕짝정서는 윤미향 사태에서도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민다. 합리성에 기반을 둔 지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언어를 정의연과 윤미향과 진보진영에서는 쓰고 있다. 나는 그런 걸 시대를 뛰어넘지 못한 가여운 진영논리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이 가부장제는 어떤 식으로 한국인들에게 심리적 폐해를 입혔을까?

 가부장제는 한국인의 심리 속에 가정에서부터 제사를 핵으로 삼아 사적정신의 뿌리를 견고하게 키워나가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뿌리는 획일적인 질서를 타며 이 사회의 밑바닥부터 최고의 권력인 청와대까지 그대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그러면서 공적인 강자의 논리 대신 사적인 강자의 논리를 심어주면서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창피는 잠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다.’는 심리적 논리의 그림자가 곳곳에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부장제가 한국인에게 끼친 심리적 폐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보자.

 

▲ 일본군에 납치되기전 10대의 조선처녀. 영화 귀항 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첫 번째 폐해

 가부장제는 첫째 한국인의 심리에 왜곡된 강자의 논리를 심어주었다. 말하자면 공적인 강자의 논리를 심어주는 대신 사적인 강자의 논리를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갑질문화를 두껍게 껴안은 강자들이 곳곳에서 숨 쉬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정신세계에서 크고 작은 대 지진이 일어났었다. 세월호 사건을 시작으로 최순실 사태, 미투운동, 조국사태,  등은 그렇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각 판이 움직이면서 저 밑 집단무의식에 숨겨져 있던 상처의 모습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8년부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하고 정신병자적인 엽기 갑질 논란, 성인지 감수성의 실체를 드러낸 미투운동, 흉측하고 무서운 각종 범죄, 데이트 폭력으로 죽어나가는 여성들, 끔찍한 아동학대, 동물학대, 노인학대, 정신병원 문제는 다 이곳에서부터 그 뿌리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물론 어느 사회나 범죄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다는 것은 달리 봐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EQ(여성성)의 세계를 무시하고 IQ(남성성, 암기식)로만 교육을 시킨 폐해가 떠받들고 있다.)

 

 강자가 강자인 것은 강자답기 때문에 강자이다. 강자는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강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강자로 태어난 것은 한마디로 큰 복이다. 하늘이 또는 우주의 어떤 긍정적인 기운이 한 사람을 강자로 살 게 해주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는 것은 약자를 위해 또 이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라는 즉 보다 훌륭한 삶을 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이 뜻을 나, 나, 나, 내 가족, 내 고향, 나와 잘 아는 사람, 즉 학연, 지연, 혈연으로 잘못 이해하도록 한국인의 심리를 유도하면서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해 냈다. 결국 공적정신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공적정신이 있어야 훌륭한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품위, 자긍심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것이 시스템으로 정비된 곳을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그 시스템을 누가 만들었겠나. EQ와 IQ의 적절한 배합으로 균형감 있는 훌륭한 인간이 자라날 수 있는 배경을 가정과 사회에서 제공했고, 그런 가정과 사회의 튼튼한 심리적 기반 위에서 성장한 강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강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강자들을 사적인 이익에 날뛰도록 만든 것, 바로 가족이 원천배경이다. 공적정신을 가지면 가족도 고향도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훌륭한 인간은 어느 날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있다. 그 과정에서 배척하고 돕지 않는다면 그 한 인간은 훌륭한 인간으로 가는 과정에서 포기하고 주저앉게 되어 있다. ‘인습과의 싸움은 영혼을 갉아 먹는 일이다.’는 말은 실제 싸움을 해 보면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폐해

 가부장제의 두 번째 폐해는 한국인에게 한 사람이 두 가지 언어를 갖고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자 앞에서는 이런 언어를, 약자 앞에서는 저런 언어를 쓰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도록 유도했다는 얘기다. 독특한 나, 아름답고 복잡한 질서의 세계를 획득한 나로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언어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그런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는 허리를 15도 굽힌 언어를, 저 상황에서는 45도, 60도 90도, 또 몸이 완전히 얼어붙는 마비상태를 경험하면서 한국인들의 정신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밖에 없으면서 자신의 언어를 구축해 내지 못했다. 결국 한국인의 정신은 Super I(허상의 나)와 Real I(진실의 나)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런 사이 공적정신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사적정신 즉 개인의 이익을 채워 넣으면서 윤리성 확보에 실패했다. 정신의 자유로운 펄럭거림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칭찬하면서 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하는데, 강자들이 권력을 남용하면서 인색했다는 얘기다. 이 인색하고 무지하고 욕심만 가득한 에너지는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지면서 EQ 세계를 무시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휘두르면서 약자들의 앞길을 이렇게 저렇게 막았다.

 

 이런 부정성에 크고 작은 권력이 붙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이런 부정성은 이 사회에 ‘야박성, 천박성, 음흉성, 크고 작은 오만성, 악의성, 조악함, 고의적인 교활함, 거무칙칙한 색채, 윈윈이 존재하지 않는 파괴성, 나, 나, 나만 부르짖는 사적인 에너지... ’ 와 같은 부정적 개념들을 쫙~ 깔아놓으면서 흔들거렸다. 이런 정신이 결국 관피아, 정피아, 메피아, 모피아, 세피아, 철피아, 산피아, 법피아, 전시행정...  등등을 만들어 한국사회를 거미줄처럼 얽어맸다.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촘촘히 쳐진 이 거미줄에 갇혀 신음하며 심리적으로 병이 들어가고 있다. 갑들은 어떤가? 그들은 정말 신이난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갑들도 훌륭한 인간이기를 포기 하면서 얻어진 이익으로 인해 윤리성 획득에 실패를 한다. 자기 자신의 정신을 죽이는 행동을 함으로서 정신적 해방 대신 어두운 감옥에 자신의 정신을 가두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나 한 개인이나 70%이상의 윤리성 획득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다. 양진호(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적 수퍼 갑질행위는 대표적 예다. 양진호만이 아니라 이런 엽기적 행위는 우리사회에 너무 많다.

 

 그렇다면 부정성과 반대되는 긍정성에서는 어떤 색채들이 나올까? 긍정성에는 ‘보다 훌륭한 해결, 윈윈을 위한 선의적 해석, 사회상처치유적인 판단, 인간성 회복, 건설을 위한 파괴, 위대한 모성성의 부활, 밝고 아름다운 색채, 약자를 위한 헌신적인 삶, 부정성을 약화시키려는 에너지, 자신의 자리에서 정신의 일관성을 유지시킨 언어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공적정신...’과 같은 색채들이 아닐까 싶다. 병이 들어가는 우리 자신들의 정신을 위해서도 이제는 더 이상 방관은 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 육체만 가지고 난리를 하는 현 상황에서 육체와 정신은 한 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지 진지한 물음을 던질 때라고 생각한다.

 

▲ 10대의 조선처녀들. 영화 귀향 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  영화 귀향 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세 번째 폐해

 가부장제가 한국인에게 끼친 세 번째 폐해는 한국인의 마음 속에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심어줄 나이에 ‘무엇이 이익이냐 아니냐의 잣대’를 심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정성은 별 도움이 안 되고 이익만이 영원하다는 것이 무의식에 각인되어 버렸다는 것. 어학사전에 보면 자부심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 긍지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격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와 있다.

 

 이 시대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인 듯하다.

 해서 한국인들이 그토록 돈과 이익에 집착을 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싶다.

 긍지와 자부심이라는 땅에서 확실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출발을 해 보지만, 곧 이곳저곳에서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악, 어두운 에너지와 마주치게 된다. 분명 선량한 에너지와 악의적 에너지가 우리의 주변에 자신 속에 늘 상존하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선량한 긍지와 자부심은 늘 악의적 에너지로부터 방해를 받고 시험 당한다.

 

네 번째 폐해

네 번째 폐해는 국민들로 하여금 독서를 하지 않고도 삶을 살 수 있고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성착취물 동영상 범죄, 아동학대, 동물학대 학교 내 집단 왕따, 사이비 종교에 가서 엎드리는 젊은이들, 이런 것은 다 이곳에서 기인한다. 정해진 대로 제사나 열심히 지내고 학연, 지연, 혈연에 얹혀서 살면 칭찬 받는데 구태어 자신의 정신성장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독서의 문제를 설명하려면 너무 길게 해야 하기 때문에 잠간 첨언한다. 세계적인 인문학 서적을 우리사회에 그대로 풀어서 먹이면 안 된다는 결론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 간디의 말이다. 우리는 아직 생각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해야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해서 모든 인문학 서적은 한국의 독특한 인습을 통과를 하며 재해석해서 우리사회에 풀어놔야  자라나는 아이들의 영혼의 뿌리에 직접 물을 주게 된다. 나도 이 비밀의 열쇠를 찾아내기까지 수십 년 걸렸다. 그만큼 우리사회에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죽이는 거짓언어가 위대한 학문의 언어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사나운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그 인습에서 파생되는 거짓언어를 통과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그러니 쉽게 번역을 해서 내놓느라고 바쁘다. 그런 현실이 없는데 그 훌륭한 언어가 어디에 가서 뿌리를 내릴 것인가? 그러니 그 훌륭한 언어를 받아든 아이들이 현실에 나가 그 언어가 산산조각이 나는 걸 목격한다. 여기서 정신적 붕괴현상이 일어난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은 각 분야에서 정신적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시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 위의 논리로 윤미향과 정의연과 진보진영의 정신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저들이 왜 저러는 지. 이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자.

  

윤미향의 ‘숭고한 정신’

kbs 발굴 ‘만삭의 위안부 구출 당시 영상을 보면 한국인이라면 정신이 확 깨는 걸 느낄 것이다. 이 주제는 너무 세서 이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은 정신적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야말로 숭고한 정신으로 해야 한다. 국회입성 하루 전 기자회견에서 윤미향은 자신은 월급을 받으면 저축, 적금을 드는 게 습관화 되어 있다는 발언을 했다. 나는 드디어 핵심 심리적 증거를 잡았다. 저거였구나! 독립운동을 한다고 대외적으로 폼을 잡아 놓고 적금 들면서 한다?  쉽게 말해서 일제시대 독립운동 한다고 말 하면서 적금 들고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과 같다. ’꿈꾸는 자가 창조를 한다. 수를 세는 자는 재화를 쌓는다.‘ 이 말은 소설가 박경리의 말이다. 창조성이 필요한 이 일에 수를 세는 자의 정신을 접목시켰다. 그러면서 묘한 나무가 태어났다. 30년간 자랐으니 보통 큰 나무가 아니다. 그런데 대단히 볼썽사나운 기형적 모습이다. 왜일까? 이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저런 기형적 나무로는 30년간 했어도 핵심적인 일은 해결을 못할 수밖에 없다. 적금을 들지 말라는 게 아니다.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말을 하는 거다. 여기에 우리사회는 30년이라는 데 놀라서 다 넘어간다. 진보진영의 장수들인 김민웅, 김어준, 정청래, 김민희까지도. 국민들 대부분은 일생 동안 적금 들며 고생한다. 거기에 숭고한 정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숭고한 직업정신이 더 맞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 일을 직업으로 했다는 것. 이렇게 곳곳에 거짓언어가 덫을 놓고 한국인의 선량한 에너지를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나는 한국인의 내면에 있는 선량한 에너지를 덫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앞으로 계속 전진하게 하려고 이 작업도 하고 있다. 언제나 권력이 문제다.

 

▲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조선처녀. 영화 귀향 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기형적 나무

 

자, 이 거대한 기형적 나무가 어떤 일을 섞어치기 했는지 들어가 보자.

우선 그 당시 이 운동에 참여를 했던 운동가 김상미의 증언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후원금만 생각하는데, 위안부 사업구도를 보면 중소기업 이상이다. 2012년 설립된 마리몬드 굿즈(위안부 할머님들을 꽃으로 형상화한 패턴 디자인을 활용해 휴대폰 케이스, 의류, 가방, 문구류 등)는 지난해까지 정의연에 17억 기부, 후원 굿즈 판매업체 위원랩(작은 소녀상, 위안부 팔찌, 반지), 화장품 업체 이솔(후원활인 행사 및 영화 ‘김복동’상영회를 진행, 수익 일부분을 정의연에 기부), 굿즈뿐 아니라 희움 악세사리(에코백, 팔찌)도 사람들이 많이 샀다. 왜냐하면 아이유부터 연예인들도 막 홍보해서 대박쳤던 위안부 악세사리들. 기부의 방법은 너무나 다양했고 위안부 사업의 매출은 한 달에 수억이었다. 이 모든 곳에서 받은 후원금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걸로 드러난다. 이 외에도 책판매, 여성단체자녀들 장학금. 베트남우물사업. 위안부강의에 온라인 위안부 악세사리 쇼핑몰(위안부 팔찌)등 중소기업 이상인 위안부단체들은 위안부 간판으로 몇 백억에서 몇 천억이 도는데, 자신이 받은 1억 가지고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혼자 다 한 주인공인 할머니를 죽이려드는 이 상황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고 누구를 위한 일본의 보상과 사과를 받으려는 건지 국민들도 잊은 것 같다

 

나는 이 증언을 듣고 머리에 거대한 지진이 오는 것 같았다. 뭐라고? 

 

‘토착왜구’의 허구성을 해부해 보자

10년이 넘는 칩거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책 두 권 분량의 원고를 들고 돌아왔을 때 조국사태가 터졌다. 사실 그때 처음으로 이 ‘토착왜구’라는 말을 들었다. 검찰개혁을 해야겠기에 나는 뛰어들었다. 조국사태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마을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마을 전체가 그 호랑이를 잡으려 움직인 사건이다. 그런데 바로 다른 곳에 호랑이 100마리(검찰개혁)가 나타났다. 그러면서 우리사회는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야 한다, 호랑이 100마리를 잡아야 한다고 둘로 쫙 갈라섰다. 당연히 호랑이 100마리를 먼저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바로 호랑이 100마리를 잡는데 동참했다. 그러면서 처음 페북을 열었더니 더민주당 지지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하도 그 전쟁을 잘 치러내서 나는 이내 나의 입장을 관찰자와 응원하는 자로 정리했다. 그리고 놀랬다. ‘야, 이 사람들이 이 일을 해내겠구나’ 싶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상한 일은 문빠들이 욕해대는 것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던 내가 그 당시는 그들의 욕조차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중도의 특징은 싸움을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극성맞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과거 어두움을 벗겨내려면 이들의 힘이 필요했다. 물론 공수처가 설치되고 난 후에도 다시 욕설을 누군가 쓰면 보기가 거북했다. 그러던 더민주 지지 진영이 윤미향 사태로 쫙 갈라섰다. 나는 안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들이 이용수 할머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어느 정치집단에도 속할 수 없는 입장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순간 나의 정신은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잘하는 사람에게 지원하고 박수를 쳐야 하는 입장이란 걸 얘기하고 있다. 호랑이 100마리(검찰개혁)가 나타났기 때문에 다른 건 일단 다 패쓰였다. 그때 ‘토착왜구’가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런 거 저런 거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윤미향 사태 때 느닷없이 ‘토착왜구’가 또 등장했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거짓언어를 우리사회가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꿈 많은 10대들과 일본군에게 끌려가면서 자꾸만 고향집을 바라보는 소녀. 영화 귀향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토착왜구’를 만들어 낸 남성들의 심리적 무늬

그렇다면 왜 이들은 그런 언어를 만들어 냈을까? 그 언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다 남성들이다. 이 남성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남성이기에 가부장제에서 음으로 양으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 폐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하고 하지 않았다. ‘아, 나는 남자야, 나는 잘난 아들이야’ ‘나는 우리 가족의 희망의 등불이야’라는 잘남을 심리에 깔고 있기 때문에 겉으론 여성을 아는 척해도 모를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의 이권이 전부 기득권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그들도 거대한 어두움의 카르텔을 느꼈을 것이다. 그게 너무 심각하니 저걸 쳐야 민주화도 되고 저걸 쳐야 우리나라가 밝은 세계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은 백 번 맞다. 그런데 개념을 잡다 보니 정신적 틀로 들어가는 건 너무 어려우니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저건 토착왜구라고 프레임을 잡았다. 그런 프레임의 저변에는 반일민족주의가 깔려 있다. 말은 바로 하자. 지금 ‘토착왜구’가 어디에 있나? 사적정신의 폐해로 이익이 오면 미국에 붙었다 일본에 붙었다 하는 민족의 역적들인 지식인들과 기득권들이 있을 뿐이다. 사적정신이 이 모든 것 보다 상위개념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은 ‘미성숙이 악이다’라고 규정했다. 미성숙하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악에게 먹힐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잘못된 정신적 틀로 극심한 억압이 되면서, 원리가 엉망진창이 되니 정서적으로 미성숙할 수밖에 없고 그 정신이 악에 먹혀 버린 상태에서 형성된 인식의 귀신들이 있을 뿐이다. 미성숙의 원인은 간단하게 말해서 IQ만 강조되고 EQ는 무시된 암기식 우리교육과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단세포적 인간유형에 그 원인이 있다. 진보진영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이번에 그 실체를 들키고 말았다. 이제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갖다 대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시대정신을 따라잡지 못하고 민주투쟁을 하던 시기에 부르던 낡을 노래를 부르지 말라. 그런 것을 정신적 게으름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들이 TV에 나와서 정의에 대해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 모든 걸 생 까고 멀쩡하게 말하는 놀라운 장면을 봐야 하나? 윤미향 사태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고 다른 건 저렇게 말하는 것. 그렇게 두 가지 언어를 쓰면 곤란하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신을 혼란시키지 말라! 이 기회에 정신적 일관성에 대해서 생각하길 바란다. 그렇게 편리하게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시대는 갔다!

 

반격

이런 내 논리에 반격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여지껏 우리사회를 칭칭 동여매던 거대한 어두움의 세계를 진정 몰라서 그런 발언을 하느냐고. 맞다. 그들도 나도 누구보다도 그 극심한 폐해를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너희는 더 나쁜 놈들이니 우리도 조금은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 정의를 부르짖었으면 거기에 합당한 행동과 태도와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리사회가 변화되기를 온몸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훌륭한 정신으로 이끌어서 해방감이 들도록 만들어야지 저 쪽과 비슷한 짓을 하면서 지지자들을 후원금에나 열나게 사용하는 게 맞나? 조국백서를 내는데 3억이라는 거금을 모금했다. 책 하나 내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왜 필요 하나? 윤미향 하고 비슷한 논리다. 밤낮으로 고생하는 지지자들을 그런 일에 사용하지 말라. 대장들 중 돈 있는 사람도 많은데 같이 동참하는 게 의미라면 방법으로 10% 정도는 지지자들에게 참여하게 하고 자신들이 나머지는 내야 한다. 양심들이 없다. 정의를 빼고 하면 덜 혼란스러운데 정의를 내세우며 엉망진창으로 굴면 국민들은 누구를 믿고 사나? 더 믿고 더 희망을 보니 국민들이 177석이란 어마어마한 국회의원을 만들어 준 것 아닌가? 상황이 바뀌었으면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인터넷 댓글을 읽어보면 국민들은 이미 저만큼 가고 있다. 이렇게 느려서야 어떻게 저 빠른 걸음을 따라잡을 것인가? 집단지성을 이렇게 깔보다니!

  

거대한 거짓의 막

우리사회는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날 때 마다 역사적으로 집단무의식에 축적된 상처들이 솟아올라와 거대한 거짓의 막을 형성한다. 가부장제는 그토록 한국인의 심리에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었다. ‘나는 제사가 싫다’ 이후 나는 이 정신적 틀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왜곡된 모성성이란 에너지를 추적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집단무의식에 숨겨진 이 상처들이 대거 출몰해서 인격적 살인을 시작한다. 대창부대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나선다. 팬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권적 차원에서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막은 그냥 언어로는 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럴 때 역사성이 내포된 언어의 표창을 날려서 일단 그 막에 크랙이 가도록 만든다. 한 번은 천만명이 나에게 덤벼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핵심 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관점의 장문의 글로서 그 역사적인 상처들의 말로는 다하지 못할 횡포에 대적한다. 그럴 때 ‘그래, 극심한 상처가 있다는 것 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역사적인 상처까지 모두 합쳐서 한 인간에게 횡포를 부리면 되나’라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상대방이 윤미향처럼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 국민들을 속이면서 권력의 품으로 숨고 있다면 문제는 틀리다. 그런 경우는 정의를 세워야 하는 현 시점과 맞아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왜곡된 모성성이라기 보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잣대를 갖다 댄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심리적 역사의 측면을 깔고 바라보는 것으로 봐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에 씌워진 거대한 막은 어떤 재질로 만들어진 것일까?

우선 뽕짝정서가 맨 밑에 베이스로 깔려 있다. 미스터 트롯으로 기존의 틀을 깨며 밝음을 선사하는 것 말고 전 시대 ‘아, 우리는 슬프다’는 19세기 정서다. 딴지일보에 올라오는 윤미향 옹호 글을 보면 어김없이 그런 뽕빡정서를 깔고 국민들을 속이려 폼을 잡는다. 누군가 윤미향의 남편이 주로 쓴다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엄지 손톱으로 하늘을 가려라’ 인터넷에서 본 댓글이다.

 

 그 다음은 어떤 재질일까? ‘거대담론에 먹힌 정신을 가진 진보 지식인들, 반일 민족주의, 그 다음 저 위에 적은 부정성의 심리적 무늬가 몽땅 들어 있다.’ 이런 게 뒤죽박죽 섞여 있다가 그때그때 마다 이 줄을 잡아당겼다 저 줄을 잡아 당겼다... 바빴다. 이 심리적 막은 윤미향을 지금까지 이끈 심리와 맞닿아 있다. 나는 윤미향에게 말한다. 그 정신으로 그걸 해내느라고 얼마나 바빴고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정말 수고했다고. 그러나 미안하지만 저 보기 흉한 나무는 잘라내야겠다고. 안 그러면 길이 없다. 세상에 알리는 것에 30년을 허비한 것, 그것도 혼자서 한 게 아닌데 혼자 한 것처럼 설레발 친 것. 1년에 술값으로 4천만원 가까이 썼다는 것 (술집에서 도로 기부한 500만원을 포함) 하루 저녁 술값으로 900만원이라는 게 이 운동과는 맞지 않는다. 도로 500만원을 기부 받았다 하더라도. 아예 그런 틀을 잡은 게 독립운동 정신, 숭고한 정신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님을 내세우며 한국인의 선량한 에너지에 사기를 친 것이다. 사적정신과 미성숙의 극단적 폐해다. 정말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  

 
이해찬은 민주화의 겉껍질을 형성할 때는 적합한 인물이었지만 민주화의 내면화를 채워야 하는 현 단계에서는 한계를 드러낸 인물임이 윤미향 사태로 드러났다. 끝나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강자들이 약자들을 어떻게 정서적으로 또 실제 돈으로 착취를 해먹는가의 대표적 예다. 거대증에 걸린 남성 진보 지식인들은 이 사건을 제대로 볼 능력이 없다. 시대정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입을 열지 말라. 입만 열면 쓰레기를 토해낸다. 국민들이 그 쓰레기를 계속 봐야 하나? ‘수구 파시스트 세력’과 같은 언어는 지금 시대에 맞지를 않다. 지금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해 먹는 지를 밝히는 시대다. 안 그러면 민주화의 내면화가 채워지지 않는다. 왜? 그런 건 너무 시시한가? 위안부 할머님들 정도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죽여 버리겠다?  미안 하지만 나는 할머님들을 살려내야겠다. ‘민주당 내부 오렌지패거리들의 친목질’이라는 걸 댓글에서 봤다. 정말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다. 
 

반일민족주의는 국제적으로도 위안부 운동의 지지를 축소시킨다. 위안부운동은 한국에서는 반일민족주의와 결합돼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전쟁 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로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요구하는 운동이면서 여성인권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문재인 정권의 친미·반일 민족주의는 이같이 인류보편적인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운동 노선과 충돌한다.(김승호의 증언: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업을 짓다

사람들은 업이라는 걸 아주 우습게 안다. 그렇게 업을 지으면 반드시 본인이나 자손 대에서도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는 미국의 지식인들과 그에 걸맞는 교포들과 일본인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일을 해놓고 정부에서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19세기 언어를 쓰면서 21세기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게 내가 얻은 결론이다.

 

▲ 일본군에게 폭행과 성착취를 당하는 조선처녀. 영화 귀향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활동을 해 온 미주동포들은, 늘 미국정부의 공식 입장이 표명되는 "공공성"을 부여하는 방안, 결의안, 대통령 발언, 시나 카운티 공공부지에 기림비 건립, 공립학교 교과과정에 "위안부" 역사를 포함시켜 홀로코스트처럼 모두가 배우게 하는 일 등을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꼽아 왔으며, 이를 이루어 내기 위해 차근 차근 벽돌을 쌓듯 시간과 공을 들여 노력해 왔다. 이용수 할머님이 미국에서 큰 성과를 낼 때까지 순수한 의미로 도왔던 팀을 무시하고, 윤미향은 자기가 공을 뺏기 위해 평화 나비를 설립했다. 그 과정에서 두 팀으로 나눠져, 지금까지도 미국에 분란을 남겨 놓았다. (미국 교포의 증언 참조)

 

이 모든 문제가 정의연 윤미향이 운동의 모든 성과를 독점하고 해외운동까지도 정의연의 우산 아래 놓으려고 한 흉측한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더 잘할 수 있었다면 그런 욕심은 칭찬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욕심의 정체가 후원금 지원금 그리고 무엇보다 온라인 사업에 대한 독점욕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아이템을 독차지 할 수 있으니까. 미국에서 다 잘해 놓은 것도 방해를 해서 순수한 기류를 꺽은 것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30년 동안이라는 말을 자꾸 강조 하는데 그동안 뭐했나? 알리는 것을 했다고? 그걸 정의연 혼자 했나? 이용수 할머님은 그 노구를 이끌고 110번이나 비행기를 탔다. 놀랍게도 할머님과 이들은 윤미향으로부터는 한 푼 지원을 받지 못했다. 위안부 운동의 대모 김문숙은 사비를 털어 했다. 정신적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으면 미국의 지식인들이나 일본의 지식인들이 어떤 출구를 만들어 놓았으면 그대로 같이 뛰는 구조로 들어갔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빨리 해결되면 안 되는 구도에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해결되면 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방법이 있나? 그러니 여성인권운동으로 건너뛰었다. 위안부 할머님들 사후에도 계속 할 수 있는 틀을 잡은 것이다. 여성인권운동을 그 피맺힌 돈으로 하겠다?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그런 업은 짓는 게 아니다.

  

언어를 바로 써야 사회가 행복하다.

자꾸 이 개념과 저 개념을 섞어치기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이용수 할머님이 왜 30년이나 걸려서 이제서 입을 여는 지 의아해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사회에 세워진 미성숙한 정서적 시스템을 가장 잘 사용한 윤미향과 정의연이기 때문이다. 할머님은 이제야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것이다. 이제 모든 사업을 완성시켜 놓고 정의연을 계속 할머님들 돌아가시고 난 후까지 굴러가도록  만들어 놓고 낼름 국회의원 한다고 떠나니 그동안 긴가민가하면서도 질질 끌려 다니던 할머님께서 ‘너, 우릴 속였지’ 하며 발목을 딱 잡는 거다. 그런 걸 읽어내지 못하는 심리적으로 무식한 진보 지식인들은 배후설, 음모설에 더하여 반일 민족주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부터는 윤미향을 ‘국민 똘똘이’로 불러야겠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런 똘똘한 자를 따를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없다.

 

수구 보수세력은 빨갱이 논리를 앞세우며 이 정서적 시스템을 강화하는데 열을 올렸고 그리고 나서 아주 잘 사용해 왔고, 그 논리에 맞서 싸워온 진보진영은 정의라는 이름의 깃발을 내 걸고 이 시스템을 깨부수며 앞으로 나가는 척 하지만 일이 벌어지면 진영논리라는 게 작동하면서 사용되고 있다. 여지껏은 수구 보수세력의 큰 잘못이었지만 이제는 민주당도 그 레일 위에 교묘하게 올라타려고 폼을 잡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다 강자들의 잘못이지만, 그런 것을 허용하고 그 레일 위에 기회만 오면 올라타고 싶은 욕구를 가진 우리 모두의 잘못도 만만치가 않다. 이제 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작동하는 개념은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란 잣대이다.    

 

우리의 언어에 묻어 있는 수많은 미성숙 즉 악의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악을 미성숙으로 본 스캇 펙,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인가. 그리고 그는 ‘인간의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깨끗이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우리의 최대의 무기가 될 것’이며 ‘자신의 판단과 치유에서 시작하지 않는 한 우리의 판단은 안전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남을 비판하려면 자신부터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같은 물줄기를 놓고 여기서 ‘아’하고 저기서 ‘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정신적 일관성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성공을 위해

윤미향은 더 이상 민주당에 해를 끼치지 말고 무소속으로 남아 무죄판결을 받으면 돌아오는 것이 맞다. 그게 현 단계 국민들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께 누를 끼치지 않는 길이다. 나는 문재인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게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 언제까지 맨 날 패배하는 대통령을 봐야 하나? 문대통령은 “위안부 운동 자체를 부정하고 운동의 대의를 손상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고 했다. 비서들은 문대통령께 제대로 보고하길 바란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 담그는 걸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장을 담그더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더기들은 소금을 쫙 뿌려서 처리하면 된다.

 

나는 언어를 쓸 때 누구를 죽이는 언어를 쓰지 않는다. 다 살리기 위해서 쓴다. 그런데도 윤미향이 권력의 옷을 입고 권력 뒤에 숨으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해서 그 권력을 치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여러 자료를 검토한 바 윤미향과 정의연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정신적 틀이 없다. 정신세계라는 게 신비해서 사적정신을 가지고 권력을 잡으면 일정 부분까지는 되나 더 이상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직진을 못하고 다른 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적정신이 그토록 중요한 거다.

 

▲ 일본군의 성노예. 영화 귀향중에서     ©플러스코리아

 

▲ 그리고 죽임을 당하던 조선처녀들. 영화 귀향중에서     © 플러스코리아

 

결론

이용수 할머님은 30년간 거짓에 속아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일에 피를 토하고 세상을 뜨게 될 것이다. 새 판을 짜야만 한다. 시간이 없다. 이용수 할머님한테서 제일 훌륭한 언어가 나왔다. 이규연이 스트레이트에서 한 말 ‘경청’, 그렇다. 할머님의 말에 경청해야 한다. 할머님과 미국지식인들은 그 길을 알고 있다. 우리사회는 특히 어두움의 세계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기회를 엿보는 인식의 귀신들이 많다. 이 사안에 음모설, 배후세력을 운운하는 것은 그런 귀신들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게 무섭다는 것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과거 정서를 못 벗어던지고 거기서 파생된 진영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힘을 내라. 그때는 진영논리가 필요했다. 지금은 벗어던져야 할 헌옷이다. 그래도 할머님을 응원하는 50%가 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있다는 게 희망이다. 더민주는 이들과 같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제 국민들이 숨 좀 쉬자.

 

소설가이며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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