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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42)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제조명을 위하여

황성개조사업과 제국익문사 운영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05/23 [10:52]

대한정통사(42)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제조명을 위하여

황성개조사업과 제국익문사 운영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05/23 [10:52]

 

* 황성 개조 사업(皇城改造事業)

 

  개혁사업과 더불어 광무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한 일은 수도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한 황성개조사업이었다. 아관파천 후 추진된 이 사업은 독립국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염원하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초대 주미공사 박 정양과 그의 휘하였던 이 채연이 상재이종하 등이 자신들의 견문과 지식을 최대로 발휘한 사업이었다.

 

서울은 원래 조선 초기에 도읍으로 정해질 당시에 간선도로의 폭이 5080척으로 설계되는 등 근대적인 도시계획에 입각해서 건설되었으나, 서기 18세기 이후 상업발달과 인구증가로 가건물들이 도로상에 난립하면서 무질서한 양상을 보여 왔다.

 

황제는 정조임금 무렵부터 대두되어 온 도시정비안을 백여년만에 실현하면서 능률적인 계획도시로서의 모습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4229년(서1896) 9월 28일에 내부령을 하달하면서 가건물들의 철거를 시작했고, 11월까지는 도로보수공사도 대강 마무리지었으며, 그 후 계속해서 황성개조사업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업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물들의 신설과 정비사업이 포함되었다.

 

  첫째는 도로 및 하천의 정비로서, 기존도로를 정비함은 물론 경운궁 안에 방사상(放射狀) 도로를 신설하고, 개천과 우물 등을 정비했다.

 

  둘째는 경운궁·독립문·환구단 등 중심적인 건축물들을 새로 축조했다.

 

  셋째는 독립공원·탑골공원 등 새로운 공원을 조성했다.

 

  넷째는 전기·수도·전차·철도 등 근대적인 사회기반 시설들을 도입했다.

 

  다섯째는 각종 관영공장 등 산업시설을 용산 등지에 설치했다.

 

  독립문도 광무황제의 강력한 독립국 건설 열망을 반영하여 건설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환구단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들이 머물던 남별궁(南別宮)자리에 건립했다. 따라서 독립문과 환구단은 당당한 독립제국으로 새 출발하는 대한국의 상징적 기념물이기도 했다.

 

  황제는 융성하고 있는 서구 열강들의 능률적인 도시계획을 참조하여 중심가에 독립공원·탑골공원 등을 조성하고 도로를 정비하였다. 황제는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 등과 공동출자 형식으로 한성전기회사를 세우고, 한성판윤 이 채연을 사장으로 삼았다. 회사는 서울의 전차·전등·수도·전화 등 각종 최신 서양문명의 시설들을 마련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황제는 갑오년 이래 국가적인 혼란의 와중에 이미 미국인과 일본인에게 부설권이 넘어간 경인선과 경부선은 어쩔 수 없어도 나머지 철도노선만큼은 자력으로 건설하려 했다. 또한 이미 조선 후기 이후 상공업수공업이 발달되어 온 용산 일대를 공장지대로 개발하기로 하여, 전환국·인쇄국·양잠소·발전소·정미소·총기제작소 등을 차례로 설립했다.

 

  이와 같은 황성정비사업을 통하여 황제는 전통적인 정치사상을 한 단계 더 현실적으로 펼쳐 나가는 계기로 삼는 한편, 부국강병을 위하여 서양의 발달된 근대문명을 수용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국내외에 알린 셈이 되었다. 이로써 한민족의 정통국가 대한국은 그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제는 은자의 나라로서의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세계열강에 뒤지지 않는 근대적 문명을 갖추어 가기 시작하는 역동적인 나라로 인식되어졌다.

    

* 항일정보기관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

 

  대한국이 광무황제의 강력한 영도력에 힘입어 여러 가지 근대적 개혁들을 성공적으로 이루어감으로써 독립국으로서의 기틀을 잡아가자 가장 당황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자(일제)들이었다. 일본 자신의 제국주의적 발전을 목표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한반도 병탄을 꾀하고 있던 일제는, 광무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가만히 눈뜨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제는 대한국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고 내간(內間)과 외간(外間)을 총동원하여 대한국의 기밀을 탐지하고 이간책을 쓰는 등 할 수 있는 모략을 모두 써 보려 했다. 물론 대외적으로도 열강 등에게 대한국을 중상모략햐는 악선전을 일삼는 짓도 빼놓지 않았다. 황제는 일제의 그런 책동들을 크게 우려하여 그에 대비하는 맞불작전을 사용했다.

 

그러한 황제의 의지는 제국익문사 설립으로 나타났다. 맹렬한 양국간 첩보전이 벌어진 것이다.    제국익문사는 특별히 황제 직속기관 형태를 취했다. 익문사의 총책은 황제가 신임하는 인물로 하고, 사무(司務)·사기(司記)·사신(司信) 등 3개 분장(分掌) 직책을 두었으며, 61명 이상의 활동원을 두었다. 그들은 국내외의 주요 도시들과 각 항구들 및 중요한 외국공관과 거류지 등에서 활발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정부고관들의 움직임은 물론, 서울주재 외국공관원들의 동정, 해외에 망명한 국사범 및 외국인들의 대한국인 매수행위나 간첩행위, 기타 각 사회단체들의 반국가적 행위 여부 등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수집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익문사의 주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불순한 책동을 탐지하고 방지하는 데 있었다. 일제는 간접침략의 일환으로 대한국의 황제정을 붕괴시켜 대한국의 구심력을 약화시키고 혼란에 빠뜨린 후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목적에는 당연히 친일파들을 이용했으며, 독립협회 초대 회장인 안경수는 이미 4227년(서1894)부터 일본공사관에 포섭되어 비밀리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황제는 민권운동을 빙자한 일제의 이간책을 막기 위해서 민회(民會)들에 대한 경계도 풀 수 없었다. 광무황제는,

 

"지금 나라가 자주독립을 유지하려면 민권보다 부국강병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

 

는 국권론(國權論) 우선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대한국을 둘러 싼 모든 국내외적 정황들을 분석해 볼 때 지극히 올바른 판단이었으며, 황제의 애국적 결단을 전적으로 믿고 합심하여 자립적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대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국론분열을 올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음흉한 간접침략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농후한 민간 단체들의 무분별한 난립이나 활동을 견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익문사도 그러한 기능의 일익을 담당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zz 16/05/29 [10:49] 수정 삭제  
  주원장 아들 영락제(주체)를 이방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뇌가 정상인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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