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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스터 섬', 완도 여서도

문화부 | 기사입력 2008/01/31 [12:50]

한국의 '이스터 섬', 완도 여서도

문화부 | 입력 : 2008/01/31 [12:50]
돌과 바람의 나라


완도항을 출항한 섬사랑 3호는 청산면의 여러 섬들을 거처 여서도로 향한다. 여객선은 완도와 여서도 사이를 하루 한번 왕래하는 정기선이지만 난바다의 드센 파도로 결항이 잦다.

떠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배다. 완도에서 여서도까지 직항로는 40여 킬로. 여객선은 쾌속선으로 50분 남짓이면 족할 거리를 세 시간에 걸쳐 항해한다. 여서도는 완도군의 200여개 섬들 가운데서도 낙도다. 육지의 오지처럼 바다의 낙도를 가리는 지표는 거리가 아니라 접근성이다. 소모도와 대모도, 장도, 청산도 등의 기항지를 돌고 돌아 여서도에 입항한 배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서둘러 회항한다.

무엇일까. 나그네를 섬으로 데려온 것은. 돌집들, 민가의 담장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 이 섬은 돌과 바람의 나라다.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섬은 마치 사라진 잉카나 이스터 섬의 유적처럼 경이롭다. 이스터의 거석 문명은 붕괴했지만 여서도의 돌 문명은 현존한다. 돌들이 나그네를 섬으로 이끌었다. 이런 섬의 모습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나그네는 길을 잃기 쉽다. 이 나라 어느 마을, 어느 섬에서도 나그네는 저토록 장대한 돌담들을 보지 못했다. 궁궐의 담장도 이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돌담들에 둘려 쌓인 마을은 마치 거대한 성곽 도시 같다. 작은 섬에 어째서 이토록 큰 요새가 필요했던 것일까. 왜구나 해적들도 사라진 바다에 막아야 할 어떤 적이 더 있는 것일까.

흩어져 있는 돌들을 불러 모은 것은 누구일까. 바람이었을까. 바람의 침략 앞에 섬은 늘 불안한 것일까. 섬에서 해적보다 무서운 것이 바람이다. 바람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돌담을 저토록 높이 쌓았다. 돌담들은 거주 공간을 분리시켜 주는 동시에 하나로 굳건히 연결되어 섬을 보호 한다. 높이 5미터가 넘는 돌담들은 아무리 큰 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철옹성이다. 바람을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이 큰 바다를 앞에 두고 산비탈에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섬의 지형이 이런 주거문화를 만들어 냈다.

▲  성벽처럼 높고 튼튼한 돌담 덕에 섬은 무사했다
여서도를 찾는 여행자는 희귀하다. 외부인은 대부분 낚시꾼이거나 공사장 인부들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밭에도 돌담이 있다. 사람이 떠난 뒤 집을 허물고 밭을 만들었으나 돌담은 남겼다. 바람으로 인해 돌담은 소멸을 면했다. 바람은 자기 적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돌담이 없는 곳은 마대 자루를 이어 붙여 바람막이를 했다. 고장 나 못쓰게 된 텔레비전조차도 담장으로 쓰였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 돌집들은 요새처럼 견고하다
북향한 섬 마을, 겨울 해는 짧다. 어두워가는 골목,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어느 집 대문간에 연기가 자욱하다. 할머니는 마른 풀을 태워 아궁이 불을 지핀다. 금새 사그라드는 불길을 뒤쫓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산에 나무가 울창해도 땔감을 하러갈 힘이 없어 장작불은 엄두도 못 낸다. 가마솥 안에는 소먹일 여물이 끓는다. 여서도의 소들은 소막에서 키워지거나 산에 방목된다.


"아저씨는 자망하고, 나는 소 키고. 나가 핵교도 안댕기고, 암 것도 몰라라우."

노부부가 할아버지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할머니는 소를 키우며 산다.

"시킨 일만 하고 부모네 밑에서 살아나서 나는 참말 암 것도 몰라라우. 말도 배와야 하제. 할지도 몰라라우. 우리 애들은 고생도 징하게 했고. 씨어머니, 씨어머니 모시고 삼시로 애들 겔친디 한번도 못 가봤어라우. 밥 한 끼 못해 줬어라우."

시어머니 모시고 외딴 섬에 사느라 뭍에 나가 공부하는 자식들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했던 것이 할머니의 평생 한으로 남았다.

"딸 다섯, 아들 둘인디, 다들 잘 사는디 큰 아들만 학굘 댕기다 말아서 군산에서 배하고 산다우. 저는 배 안타면 좋겠다고 합디다마는 지가 공부 안했는디 인자 후회 하면 머 하꺼시오. 안산서는 딸 하나가 산디, 노화도 사람하고 살어라우. 노화 대당리."

낯선 말소리에 할아버지가 뒤 안에서 나온다.

"요새는 당최 도미가 안와요. 전에는 감생이(감성돔)도 많이 들었는데. 아주 안와. 고기 잡으면 완도까지 싣고 가서 경매 하는디, 우리 배로 왔다갔다 하면 세 시간, 딸뿍딸뿍 하면 세 시간 반이 걸리고. 아주 숨이 왔다갔다 하지라우."

풍랑이라도 거센 날이면 물고기를 싣고 완도까지 내왕 하는 뱃길이 저승의 문턱처럼 위태롭기도 하다. 예전에는 제주 해녀들도 많이들 물질하러 왔었다. 그래서 '제주 처녀 여서도 들어가면 애 배야 나온다'는 말도 생겼다. 할머니는 그 시절이 꿈 속 같다.

"물질은 제주서도 오고 여그 사람도 하고 그랬어라. 그때가 사람 사는 것 같았지라우. 그래도 제주서 들어와 산 사람은 두사람 밖에 없어라우. 큰 제주 작은 제주가 살았었는디 지금은 모다 돌아 가셨지라."

큰 제주는 먼저 시집와 산 사람이고 작은 제주는 나중에 시집 온 사람이었다. 외딴 섬이지만 여서도는 지금보다 옛날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어장에 고기가 말라 이제 더 이상 외지 배들이 오지 않는다. 완도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바람막이가 없는 난바다의 섬인지라 바다 양식도 여의치 않다. 그러니 섬에 들어와 살려는 젊은 사람도 없다. 섬은 적막하고 섬은 아주 늙어버렸다. 요즈음은 섬의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사람이 죽어도 산이 아니라 완도로 간다. 매고가 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 나이 들고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찾아 뭍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생애와 하직한다.

"다 내 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 빌고 가제라우."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린다. 섬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어더지요. 어서 가씨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라고 할머니는 등을 떠민다.

▲  밭의 곡식들도 돌담의 보호를 받고 자란다
바람이 묻어온 이야기


밤새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오늘은 들어오는 배도 나가는 배도 없다. 오후 늦게라도 바람이 잔다면 내일은 배가 다시 뜨겠지만 그것을 누가 장담하겠는가. 완도에서 전기 공사 자재를 싣고 왔던 화물차도 발이 묶였다. 기사는 차에서 밤을 새웠다. 밖은 춥고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기사는 종일토록 차에서 지낼 것이다. 폭풍주의보에도 수천, 수 만 톤의 큰 배들은 끄떡 없이 제주해협을 오간다. 하지만 저 배들은 여서도에 정박하지 못한다. 정박할 수 없는 배는 현실의 배가 아니다.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이 출토되었을 정도로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는 길다. 하지만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경이다. 그때 처음 먼 바다를 건너 섬에 정착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갈 곳 없어 숨어들어온 외딴 섬. 섬이 숨어 살 만하다 생각 했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열흘도 못 갔을 것이다. 섬은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갇혀 지내야 하는 곳이다. 숨고 드러냄은 선택이지만 갇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옛날 이 난바다의 섬에서 바다를 건너는 일은 곧 생사를 건너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때문일까 뭍에서 먼 섬일수록 사람들의 세계관은 숙명적이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직선으로 가면 제주도 조천이 40여킬로 거리다.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킬로, 완도나 제주보다 가깝지만 서로 왕래하지 않는 두 섬은 전혀 다른 세계의 섬들이다. 옛날에는 여서도를 작은 제주라 했었다. 거리도 가깝고 풍토도 비슷했던 까닭이다. 여서도의 정정석 이장은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했던 선친을 옆에서 지켜본 탓에 6,70년대 여서도의 생활상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선친이 여서도 이장을 할 때는 이장을 보좌하던 이 서기까지 있었다. 그는 80년대에 완도로 이주 했다가 5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 왔다.

여서도는 여서리 200-1번지에서 시작되어 500번지에서 끝난다. 한때 이 작은 섬에 300가구까지 살았다는 증거다. 인구가 줄어 193세대였던 1968년도만 해도 여서 국민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지금은 학생이 둘 뿐이다. 옛날의 여서도는 제주와 육지의 중간 기착지였다. 여름에는 제주에서 수박이나 과일들을 싣고 가던 풍선(風船)들이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가을이면 전라도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온 풍선들이 바람을 기다렸다. 제주의 고기잡이배들도 많이 들락 거렸다. 심지어 그 뗏목처럼 위태로운 테우(떼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와 자리돔을 잡아가는 제주 어부들도 있었다.

▲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 했던가
완도 본토가 완도군 섬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68년 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대도시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60~70년대 여서도 사람들은 완도로 나다니지 않았다.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로 고기를 팔러 다녔고 여수에서 생필품을 사들여 왔다. 보길도와 소안도, 노화도 등 완도 '서삼면(西三面)' 사람들의 생활권 또한 완도가 아니라 목포였다. 섬사람들은 완도-목포간, 완도-여수간 정기 여객선을 타고 여수나 목포로 나가야만 서울이나 부산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여서도 사람들이 지닌 동력선만 50여척이 넘었다. 섬 사람들은 잡아온 갈치나 고등어를 '염장질' 해서 경상도 충무와 삼천포까지 팔러 다녔다. 멸치는 젓갈을 담아 강진 사초리나 장흥 삼신포 등에 내다 팔았다. 귀항 길에는 지붕 이을 볏짚과 쌀, 보리 등 겨울 날 곡식을 사왔다. 봄보리 나올 때까지는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갈치 낚시 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장비를 직접 가지고 들어와 빵이랑 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박물 장사들은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물물교환 해 갔다. 인천의 배들까지 갈치 잡이를 오곤 했다.

▲   바람은 이 통로를 지나며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묻어갔을까
섬사람들에게는 바다 일 못지않게 농사도 큰 일이었다. 작은 섬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산밭을 개간하여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농사철이 지나면 섬사람들은 약초를 캐다 약초수집상들에게 팔았다. 이장은 오래된 사진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사진 속의 여서도에는 집들이 빼곡하다. 이제 막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의 모습이 어제 같다. 이장은 여서도의 역사를 증거해 줄 자료집이라도 만들어 후세에 남길 생각이라 한다.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렵고

돌담길을 따라 동쪽 능선을 오른다. 이 섬도 위성 안테나 덕분에 텔레비전 시청이 편리해 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 구형 안테나를 장대에 매달았다. 바람을 피해 여러 가닥의 끈으로 안테나를 붙들어 두었으나 위태롭다. 안간힘을 써도 안테나가 잡을 수 있는 전파란 기껏 한 두 개다. 이 길목에는 사람의 집보다 밭이 더 많다. 많은 집들이 폐가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돌담길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낯설고 신비롭다. 현세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간 속을 걷는 듯하다. 당 숲을 지나 마을 서쪽 길로 접어드니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에는 돌다리와 돌우물이 온전하다. 뭍에서라면 이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의 집들을 가르는 경계는 돌담이지만 그 돌담은 또한 이웃과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돌담 중간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다. 물건을 주고받고 소식을 나누던 생활의 통로다. 저 통로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바람은 통로를 지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묻어갔을까. 돌담들이 없이도 이 섬에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돌들은 섬의 수호신인 동시에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다.내연화력 발전소를 지나 섬의 서북쪽 산정에 있는 등대로 간다. 무덤들, 산 속 유택들의 경계를 가르는 것도 돌담이다. 돌담과 함께 이 섬을 지켜온 또 다른 공로자는 방풍림을 이룬 상록수들이다. 길 가의 동백나무 노거수 한 그루는 이제껏 나그네가 본 동백나무 중 가장 크다. 동백나무는 야물고 단단해서 성장 속도가 아주 느리다. 어른 두 사람이 둘러도 다 못 품어 안을 저 정도의 크기라면 오백년이 아니라 천년은 족히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나무들은 섬사람들을 지켜 주었으니 이제 사람이 나무들을 보호해야 할 차례다.

▲  처음 이 바다를 건너, 섬으로 숨어들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동백나무뿐이겠는가. 섬 전부를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두렵다. 이 섬의 보물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릴 것이 또한 두렵다. 그러나 끝끝내 숨길 수 없고 숨긴다고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면 드러내서 모두가 함께 지킬 방도를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섬 자체가 문화재인 이런 섬은 자치단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보호 관리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주민들의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섬의 문화유산 보존이 주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비전만 있다면 반대할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산정에 오르니 멀리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가깝고도 먼 것이 섬들 간의 관계다. 바로 붙어 있는 듯이 보이는 저 섬들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섬들은 제각각 육지만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등대로 가는 길목에서 '고래' 한 마리를 만난다. 바위는 금방 바다 속을 헤엄치다 숨 쉬기 위해 솟아 오른 고래 같다. 고래바위라 이름 붙여 준다. 고래는 실눈을 뜨고 입을 벌려 깊은 호흡을 한다. 나그네도 막혔던 숨통이 비로소 트인다.

여서도 앞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태양광으로 작동되는 무인 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쇠 울타리가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거셌던 것일까. 건너편 산은 정상까지 밭이다. 지금은 모두 휴경중이지만 비탈 밭은 섬 살이의 고단함을 증거 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비탈 같은 삶이 섬뿐일까. 삶의 비탈은 세상의 도처에 널려 있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잠잠해진다. 내일은 다시 배가 뜰 것이다. 이제 나그네는 섬을 떠나 또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어디를 가든 사람은 결코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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