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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65)

청나라의 발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4/07/31 [13:36]

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65)

청나라의 발전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4/07/31 [13:36]
  [민족/통일/역사=플러스 코리아타임즈-안재세]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 아편전쟁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8. 대청국의 문명발전

  어린 순치제를 보좌하여 대청국의 기초를 굳건히 다지는 데 성공한 황숙(皇叔) 도르곤은 모든 면에 있어서 능률위주로 사업을 처리해 나아 갔다. 실력있는 자라면 심지어 서양신부를 기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좋은 예로는 흠천감(欽天監:즉, 천문대) 책임자로 발탁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들 수 있다. 그의 정확한 천체 관측 능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대청국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특이한 황위계승법 덕택에 황제자리를 둘러 싼 권력투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점이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각 황제 후보자들이 심신을 연마하여, 스스로가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후보자가 매우 어린 상태인 때는 섭정을 두어 황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끊임없는 교육을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그러한 우수한 황위계승 제도는 모든 면에서 출중한 유능한 인물이 황제다운 선정을 베푸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여진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한족의 그것보다 못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폐와 사치·향락에 빠져들기 쉬운 번거롭고도 화려한 중원지방의 풍속을 보다 야만적이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비판했다. 그들은 한족에게 동화되기는 커녕 한족들을 순박하게 교화시키려고 애썼으며, 그 노력의 결과는 지나지방 역사에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장구한 태평세대의 출현으로 구체화되었다. 처음에는 한족의 문화에 심취했던 순치제(청 세조)도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반성하였고, 이러한 여진인들의 기풍은 제4세 대청국 황제로서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대제(康熙大帝) 시절부터는 찬란한 동양문화의 금자탑을 이룩하며 인류문명의 꽃을 피워 갔다.

  한편, 순치제 당시인 3971년(서1638)에는 여러 칸국(汗國)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러시아의 야만적 식민주의자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지방의 원주민들을 악랄한 수법으로 탄압·정복하면서 마침내 오호츠크해 연안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이 자들은 농경지로 부적합한 툰드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살기 좋은 땅을 찾아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그 살기 좋은 땅에는 배달의 자손들이 수천년간 자자손손 번성해 오고 있었고, 촌푼(寸分)의 빈 땅도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탐욕은 그렇다고 해서 수그러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마침내 16년 후에는 흑룡강 중류지방에서 대청제국의 영토이자 단군조선 이래의 배달민족 고토이기도 한 풍요한 만주지방을 엿보고 침공을 기도했다.

  원래 동부시베리아 일대는 러시아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대청국의 잠정적인 판도에 속해 있었으므로, 대청국의 감시가 소홀한 북방 시베리아지방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온 것 자체가 '도둑놈들의 소행'이외의 다른 표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청국으로서는 북방에 관한 한 국경설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으며, 구태여 그런 번거로운 것이 없어도 모든 동부 시베리아의 땅은 당연히 대청국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혹독한 추위와 관리상의 번거로움 때문에 원주민들의 자율적 운영에 맡겨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직 탐욕에만 눈이 어두운 음흉한 유럽지방의 식민주의자들은 순박한 원주민들을 무지막지한 무력으로 진압하고, 선세 이래의 자유를 누려오던 원주민들을 저들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 저주스러운 침략의 촉수가 드디어 배달민족의 유구한 영토적 중심지였던 만주지방까지 뻗쳐 왔던 것이다.

  순치제는 러시아의 야만인들을 격퇴하기 위하여 만주지방 수비군을 출동시켰으나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야만인들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북쪽 변경을 약탈하고 돌아다녔다. 순치제는 조선 효종이 강력한 정예군을 양성하고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대청국과 조선의 공동 영토이기도 한 만주를 협조적으로 방어하면서 동족간의 우의를 다지기 위하여 효종에게 만주출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일찌기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심양과 북경 등지로 청태종과 함께 다닌 적이 있던 봉림대군으로서, 허약한 소현세자가 사망하고 인조임금도 붕어한 이래 조선의 임금이 되어 있었다. 그는 대청국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정예군을 확보해 놓고 있었으나, 틈을 보이지 않고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발전해 가는 대청국이 그 민심마저 안정되어 가자, 북벌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단지 내실을 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선정세를 눈치챈 순치제는 동족국가인 양국이 볼썽사납게 싸우는 대신, 두 나라가 서로의 무력을 합하여 러시아의 오랑캐들에게 공동 대처하려 한 것이었다. 조선을 어디까지나 동족국가로 보고 우애롭게 대하려 했던 누루하치의 뜻은 대청국 전반에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 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3987년(서1654)과 3991년(서1658)의 두 번에 걸쳐서 조선의 용맹한 수백명 최신예 부대와 대청국의 만주수비군은 흑룡강에서 러시아 침략자들의 함선을 격침시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무인지경처럼 시베리아를 횡단해 쳐들어 왔던 침략자들은 힘으로는 두 문명대국에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북쪽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남쪽으로는 서양의 해적들이 선교사들과 앞뒤를 다투어 몰려오고, 북쪽으로는 더욱 무지막지한 러시아 침략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대청국은 북쪽에 확실한 경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황제인 강희대제때는 드디어 러시아와의 국경 협정이라는 것을 맺게 되었다.

  끝없는 러시아 침략자들의 야욕을 최소한의 선에서 만족시켜 주고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그 조치는, 그러나 세계 역사상 최고의 명군주의 하나인 강희제로서는 하나의 오점을 기록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아예 처음부터 원주민들과의 협조하에 시베리아 전역에 대해 강경한 러시아 침략자 토벌조치를 취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 번 탐욕에 맛들인 서양오랑캐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상대방이나 자기 스스로가 멸망에 이르기까지 언제까지고 탐욕을 추구해 마지않는다는 것을 당시에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유증은 약 이백여년 후에 가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강희대제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양오랑캐들을 인간의 기본 양심이라도 있는 종족들로 오인했던, '오랑캐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9. 강희대제의 천하평정

  순치제를 이어 대청국의 황제가 된 강희제도 불과 8세로 등극하였으나, 추호의 야심도 없는 4명의 훌륭한 중신(重臣)들이 잘 보좌함으로써 대청국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인류 최고의 문명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어린 황제를 우습게 여긴 운남왕 오삼계는 인접한 복건·광동지방의 실력자들을 충동질하여 감히 대역(大逆)의 반심(叛心)을 품었다. 오삼계는 일찌기 산해관을 수비하다가 청태종에게 투항한 후 많은 공을 세웠으나, 간교한 자신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드디어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헛된 꿈까지 꾸게 된 것이다.

  오삼계는 대청제국을 뒤엎으려는 명분으로 명나라를 복구하겠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명나라의 최후 혈통인 계왕(桂王)을 살해한 경력이 있으므로 반란의 명분조차 제대로 서질 않자, 무조건 배만복명(排滿復明)을 부르짖어 대며 한족들의 맹목적인 적개심을 부추자서 평지풍파를 일으켜 갔다. 오삼계 일당은 한 때 중원지방의 남·서부를 석권하여 대공세를 펼쳤으나, 명분도 시원치 않은 데다가 한족(漢族)의 고질이기도 한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흐지부지 흩어진 끝에 평정되고야 말았다.

  대청국은 오삼계의 운남왕국을 평정한 지 2년 후에는 대만까지 정벌하여 복속시켰으므로 남부지방에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원래 대만문제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였던 것으로써, 대만이 완전히 대청국의 판도에 편입되기까지는 60여년 간에 걸친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 대만은 중원지방에서 바다를 격하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고산족(高山族)을 비롯한 섬 원주민들만의 자유로운 세계였다. 그런데 극성스러운 서양 네덜란드의 해적들이 3955년(서1622)에 남지나해역을 침략하면서 대만 서쪽의 팽호도를 강점해 버리자, 복건지방의 명나라 수비군은 이를 공격했는데, 수차례 고전끝에 네덜란드 해적들과 타협을 하게 된 명나라는 팽호도를 다시 찾는 대신에 관심밖에 있던 대만을 해적들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말았다. 사실은 대만섬과 명나라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으므로 명나라로서는 대만섬을 양보할 권리 자체가 없었다. 또한 자기네 영토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양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노략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서양해적들은 대만섬이 공짜로 자기들에게 굴러 들어 온 줄 알았으나, 원주민들은 낯선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므로, 해적들도 무력을 휘둘러서 해안지방부터 강제로 점거해 나갔다. 주로 대만섬의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해적들은 제엘란디아성과 프로빈키아성이라는 두 개의 유럽식 요새를 구축하고 버티었는데, 3959년(서1626)에는 스페인해적들이 필리핀 열도로부터 대만북부를 점령하고 들어왔다.

  두 서양해적들은 꼴사납게도 자기들 나라와는 지구 북반구의 정 반대편에서 서로 싸움질을 했는데, 결국 네덜란드의 해적들이 스페인해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대만섬 전체가 네덜란드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작물재배를 위한 농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협조적인 원주민들보다 복건지방으로부터 명나라의 농민들을 불러들이는 방법을 썼다. 명나라는 그 말기에 내란의 와중에서 썩을대로 썩어 있어서 농민들은 기아선상에서 헤매고 있었으므로, 많은 농민들이 먹을 것이라도 구해 보려는 가냘픈 희망을 안고 대만섬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한 명나라 말기에 복건지방 출신의 명나라 백성이면서도 왜구들과 함께 연안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정지룡(鄭芝龍)은 한 때는 무려 삼천여척의 선단을 지휘하는 등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는 왜열도에 근거지를 두고 왜녀(倭女)를 처로 두었고, 왜열도의 히라도(平戶)에서 아들 정성공(鄭成功)을 얻었다. 일곱살때 가족을 따라서 복건지방으로 옮겨 간 정성공은 명나라에서 주로 교육을 받았는데, 명나라에서는 정지룡의 막강한 실력을 역이용하기로 하여 그에게 관작을 부여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정지룡은 실리를 취하여 새로운 세력인 대청국에 협조하기로 했으나, 정성공은 살부보국(殺父報國)이라는 패륜적인 기치를 내걸고 명나라 부흥을 도모했다. 정성공은 심지어 왜열도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도 하면서 한때는 남경까지 공격하는 위세를 보였으나 마침내 역부족으로 밀리게 되었다. 곤경에 처해 있던 그에게 대만섬에서 통역관 노릇하던 자가 대만섬 내부의 불안한 정세를 알려 주자, 그는 지체없이 500여척의 함선과 25,000여명의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대만섬으로 공격해 들어 갔다.

  그는 3994년(서1661) 4월에 이르러 네덜란드의 두 요새지를 정복하고 대만섬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했던 그는, 계속적으로 명나라 부흥 운동을 시도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가 죽고 나자 운남왕국을 정벌한 막강한 대청국군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마침내 대만섬까지 복속시켰다. 곧 이어서 강희대제는 몽골지방의 분열을 선용(善用)하여 전 몽골지방까지 확실하게 통일함으로써, 인도지방을 제외한 천산 이동지방과 중앙아시아 전 지역을 대청국 영도하에 두는, 신시 이래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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