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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95)

광복노선 갈등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5/03/02 [10:53]

반정(反正) 세계사 게재의 변(辯)- (95)

광복노선 갈등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5/03/02 [10:53]
         [홍익/통일/역사=플러스 코리아타임즈-안재세]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11. 대한광복운동 노선의 갈등

  기미년의  삼일독립만세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야수적 탄압을 자행하여 수만명에 이르는 살상자를 낸 제국주의 강도 왜구들은 국제적인 비난을 모면하고자 표면상으로나마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에 따라서 억눌렸던 언론사업이 갑자기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대한국인 자본으로 민간회사들도 설립되는 등, 겉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한 '대정데모크라시의 꽃'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왜구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대한국을 송두리째 털어가려는 것이었지, 대한국에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그 한계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동안의 초기단계적인 폭압이 약간 풀린 듯한 틈을 타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광복운동을 모색하는 지식인이나 지사들이 늘어갔다.

  공산주의 운동은 레닌의 쏘비에트 혁명이후 주로 식민지 사회의 공장노동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파고 들었다. 그들은 '인민의 정부, 인민의 나라'라는 유토피아적인 꿈에 부풀어 열성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쏘비에트정부가 식민지 국가 민중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젊은 노동자들과 지식층들을 통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쏘비에트 정부는 이미 자유시에서 대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수백명 학살하고, 그후에도 간신히 생존한 용사들을 영하 40도의 톰스크 수용소에다 쳐박아 넣었는데도, 바로 그 쏘비에트 청부가 대한국을 해방시켜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백일몽에 놀아났던 것이다.

  '인민의 나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식주가 보장되는 나라'라는 반쯤은 환상적인 허구의 관념이긴 했어도, 착취에 시달리고 있던 전 세계 식민지 민중에게는 꿀처럼 달콤한 속삭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서양이나 일본열도 따위에서는 어차피 '민중'만이 있었을 뿐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은 없었으니 '민중의 나라'나 '민중의 세상'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인류사상 둘도 찾기 힘든 반만년의 단일민족국가인 대한국은 민족을 떠나서 민중이 있을 수도 없고, 대한국민중은 곧 대한국민족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중과 민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통일적인 국권회복운동을 같이 수행해 나갈 수 없었다. 더우기 마르크스-레닌 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적대시하며, 오로지 '만국의 노동자'의 '인터내셔날'을 구가했다.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민족주의적 성향은 대한국 국내에서 자칭 민족지도자라고 일컫던 자들이 3·1운동이후 왜구들과 타협적이고 굴종적인 치사한 반민중적 행위를 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더욱 완고해져 갔다. 참다운 민족주의자가 아닌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그런 사이비 협잡꾼들이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면서 민중생존을 도외시하고 있던 현실에서 그러한 반민족주의적 성향이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민족주의자들까지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참민족주의자나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순수한 구국, 광복의 열망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나라 전체가 감옥인 조국내에서 참민족주의자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대종교를 중심으로 모인 참민족주의자들의 대부분은 국내에서의 살인적 탄압을 피하여 간도에 모여 있었고, 과감한 광복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리하여 참민족주의자가 고갈되어 버린 한반도에서는 사이비 협잡꾼들이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며 박쥐같은 삶을 더 잘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차례의 국내 파업과 선전활동으로 조직을 다져간 조선공산당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게 성장하자, 그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대한국광복을 위한 투쟁세력의 단일화를 꾀하기 위한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공산주의자들과 자칭 민족주의자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합조직인 신간회는 2년여간 존속되었으나, 그나마 때마침 일어난 광주학생운동때 보여준 신간회의 잠재력에 주목하게 된 왜구들의 이간질과 방해책동에 의하여 이탈자가 속출하여,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자칭 민족주의자들을 더욱 경계하게 되어 끝내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여 운형 등 지도자들은 강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공산주의의 장점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폭 넓은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문화정치'를 선언하고 나선 왜구두목 사이또의 십여년에 걸친 수탈행각은 대한국 민중, 특히 농민들에게는 아비지옥이나 다름없는 궁핍을 강요했다. 곡물수탈·가축수탈·그 외의 모든 수탈적 행각에 의하여, 마침내 대한국 말기까지도 먹고 사는 것만큼은 별 걱정이 없던 대한국 농민들 중 120만 호에 달하는 소작농들이 이른바 상습적인 '보리고개'에 시달리는, 누렇게 부황이 뜬 춘궁민(春窮民)으로 정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문화정치' 기간 중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열도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수만명 대한국인들의 찢겨진 육신들은, 왜족들의 대정데모크라시와 문화정치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왜구들이 떠들던 문화란 바로 '대한국의 지옥화를 뜻하는 저들만의 특수용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일차대전때 왜구들은 약삭빠르게 '연합국'의 하나로 참전하였고, 특히 왜족에 대한 미합중국의 배려는 각별했기 때문에, 대한국에 와 있던 일부 미합중국 출신 선교사 등이 왜족의 악랄한 만행들을 본국 정부에 알렸어도 대답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러한 왜족의 둘도 없는 우방국인 미합중국에 대하여 과대한 기대를 걸고 독립을 구걸하러 다니고 있었던 얼빠진 지도자도 있었던 것이니, 한민족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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