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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44)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제조명을 위하여

뜨거운 감자 - 서양 종교의 폐해와 교안 사건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6/07/28 [13:29]

대한정통사(44)대한제국 고종시대사의 제조명을 위하여

뜨거운 감자 - 서양 종교의 폐해와 교안 사건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6/07/28 [13:29]

[플러스코리아타임즈 = 안재세]  대한국의 급격한 사회적 변동을 야기한 외부로부터의 충격 중에서 서교의 교세 확장을 빼놓을 수는 없다.

 

▲ 명례방 김범우의 집 강학회 상상도    

 

개구(開口) 초기까지만 해도 서교의 교세는 미미했으나, 4219년(서1886)에 프랑스와의 조약체결에 따라 천주교가 선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종교의 전파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 명동성당 1898 (김범우의 집터)    

 

그러나 오랜 전통적 생활양식과 풍속에 만족하며 살아오고 있던 조선사회에서 서양의 낯선 종교가 쉽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특히 서양종교는 서구열강의 위세를 배경으로 교세를 확장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서양종교와 민중과의 마찰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국제역학적 관계 속에서 얽혀 돌아갔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심각한 외교분쟁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포함외교에 힘입은 빠리외방선교회의 공격적 포교방식은 각 지방에서 현지 민중과의 분쟁을 자주 불러 일으켰다.

 

  4222년(서1889) 3월 9일에 내부 지방국장 정 준시와 조선교구장 뮈텔 사이에 9개 조항으로 된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된 직후인 4223년(서1890) 6월에, 전주에서는 향촌지도층인 풍헌(風憲) 두 사람이 주민들을 불러 모아 보두네 신부를 위협하고, 신부의 시종들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겨울에 전남 장성에서는 베르모렐 신부를 유숙시킨 교민을 마을 사람들과 장성군수가 추방해버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와 같이 천주교의 전파는 각 지방마다 잦은 충돌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4227년(서1894)에 충청도 신창군에서는 박마지아라는 교인이 프랑스공사가 보낸 대인(大人)이라고 자처하고, 양반인 오모씨에게 금전을 강요한 사건도 있었다. 이에 지역 향반 층에서는 통문을 돌려서 삼천여명을 모아 천주교 배척운동을 벌였다. 4232년(서1899)에는 함경남도 안변에서 동심계(同心契) 회원들이 안변 일대 천주교 공소 13곳을 습격하고 블라두 신부를 강원도 평강으로 쫓아버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교폐가 극심했던 경우에는 제주도에서처럼 민란으로 발전하는 경우까지도 생겨났다.

 

  금강 하구의 큰 포구인 강경포에서도 천주교도들과 지방민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강경포 지역에는 4230년(서1897)에 뮈텔 주교의 명을 받은 베르모렐(Vermorel)신부가 나바위에 있던 전 여산 군수의 집과 인근 전답을 저렴하게 구입하면서 포교거점이 마련되었다. 프랑스 신부들은 조약에 의하여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보장받고 있었는데, 양대인(洋大人)이라고도 불리운 그들은 일반교민들에게까지 그들의 특권을 확대 적용함으로써 교민들의 호감을 샀다. 심지어는 그러한 권세를 바탕으로 교인들이 불법행동을 자행하는 경우도 잦았다. 저들은 일반 민중의 전답․돈․곡식은 물론 광산이나 어장도 수탈하고, 지방관의 행정에까지 간섭했으며, 살인 후 성당으로 피신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국법질서 및 향촌질서 위배행위에 대해서 교인들은 면제받고자 했던 것이며, 프랑스신부들은 저들의 방패막이 구실을 해 줌으로써 자신들의 위신을 세우고, 나아가서 교세를 더욱 확장해 갈 수도 있었다. 즉, 자주적 부국강병 정책에 필요한 재원의 국내조달을 위하여 가중되어 갈 수밖에 없는 세금의 징수 등에 지쳐 있던 일부 민중은, 교회의 보호를 받아서 재산상의 이익을 지키려는 방편으로 입교하는 예가 많았던 것이다.

 

강경포에서도 결국 그런 교회의 폐단들과 전통적인 향촌사회 운영원칙이 갈등을 빚게 된 것이며, 그 처리과정에서 천주교회 측은 프랑스군함의 위세까지 동원하는 등, 백여년 전의 황사영 백서사건 이래 또다시 교세확장에 외세를 불러 들이는 식으로 포교방법상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4234년(서1901)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민란도 기본적으로는 프랑스의 위세를 믿고 설치던 교민들이 향촌사회에서 방자하게 교만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재수의 난’으로도 알려진 이 사건으로 제주도의 천주교도 수백명이 격노한 민군에 의해 피살되었으나, 일제침략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으로서의 프랑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한국정부군에 의해 난은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대부분 처형당하고 말았다.

 

  같은 4234년 7월에는 전라남도의 지도(智島)에서 징세문제로 천주교 신자 9명이 10여명의 관속들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도 사건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프랑스세력을 의지한 빠리외방선교회와 대한국정부간의 외교적 분쟁으로 비화되어 갔으나, 결국은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사태가 마무리지어졌다. 그에 따라 대한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교회의 그늘에 안주하려는 몽매한 민중의 많은 수가 급속하게 교인으로 변해 가는 등,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제주도 민란의 실패를 끝으로 대한국 향촌사회에서의 교폐에 대한 민중적 봉기는 종막을 고했고,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종교들은 창궐할 수 있는 기반을 굳힌 셈이 되었다. 즉, 서양종교가 대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회세력의 하나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막강하게 성장해 간 서양교회들이 대한국의 진정한 발전이나 차후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 위세에 걸맞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달  수밖에 없다.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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