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대한정통사(54)세기적 사기극

노일전쟁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기사입력 2017/03/15 [21:16]

대한정통사(54)세기적 사기극

노일전쟁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 입력 : 2017/03/15 [21:16]

제 3 편  세기적 사기극

1. 노일전쟁

 

▲ 일본의 함포사격으로 화염에 싸인 러시아 아서항의 정유시설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안재세]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을 개시한 일본군은 7,8개월간 총병력 13만 4천여명 중 과반에 달하는 6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악전고투 끝에 서기 1905년 1월 1일에 마침내 여순을 함락하였다.

 

그에 반하여 '패전'했다는 러시아 측은 총병력 4만 4천명 중 전사 10,800명과 전상자 19,600명으로 12,700명의 잔존병력이 있었다. 한편 그보다 수개월 앞선 서기 1904년 9월에 일본군의 저돌적인 공격으로 요양을 함락당한 바 있는 러시아는 일본군의 군수보급이 제대로 안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총사령관 쿠로파트킨장군의 원대한 작전계획에 따라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다.

 

  쿠로파트킨장군의 작전은 탄약과 의복 등의 보급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일본군을 하얼빈까지 유인하여 북만주의 엄동설한 하에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함으로써 몰살시키려는 러시아특유의 ‘동장군’작전이었던 것이다.

 

국력이 이미 소진될 대로 소진되어 자체적 능력만으로는 러시아와의 장기전을 감당한 능력이 없었던 일제로서는 속전속결을 치루어야만 했으나, 쿠로파트킨장군은 바로 그러한 일제의 약점을 간파하고 겨울을 이용한 장기 전략을 구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러시아로서는 북만주로 후퇴할수록 오히려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손쉬워지는 반면에, 일본군은 점점 더 길어지는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로때문에 전투수행에 커다란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요양에서의 패배소식을 들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크게 노하여 일본군을 즉시 격퇴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쿠로파트킨장군의 원대한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의 존망을 걸고 악다귀로 덤벼드는 일본군을 남만주 사하(沙河)에서 맞이한 러시아군은 저돌적인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쳤으나, 일승일패를 거듭하면서 결국 사하에서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서기 1905년 1월 6일부터 1월 29일까지 거의 한달간 계속되었던 러시아군의 대공세때는 러시아군 10만 5천명과 일본군 5만 4천명 중에서 러시아군 측에서 12,000여명, 일본군 측에서 9,4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끝날 기약없는 소모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여순을 점거한 일본군이 북상하여 2월초에는 사하에 집결하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병력을 32만여명으로 증강하고 일본군에게 맹렬한 반격을 가하였다.

 

  이 때 이미 일본군은 정예 병력이 소진되고 포탄마저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양상이었으나, 러시아군의 보급로인 북만주로부터의 철로를 점거하려고 봉천북방의 공략에 사활을 건 일본군의 저돌적인 공격에 직면한 쿠로파트킨장군은 그로 인하여 막대한 전투력손실이 야기될 것을 우려하는 한편, 원래의 작전이었던 북만주로의 유인작전을 다시 진행하기로 하고 3월 8일부터 미련없이 작전상 총퇴각을 실시하였다.

 

일본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공격할 능력조차 이미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초반전에 일본군에 밀림으로써 서구열강들로부터 망신당했다고 대노한 러시아황제는 깊은 생각없이 봉천으로부터의 후퇴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쿠로파트킨장군을 소환하고 리네위치대장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설욕전을 벌이려 하였다.

 

  남만주에서 육전이 벌어짐과 함께 전황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러시아는 세계 제2위의 막강한 해군력을 투입하기로 하고, 우선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함대로 일본군의 해상보급선을 끊으려 하였으나, 일본해군에 의하여 주력함이 파괴당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러시아는 서기 1904년 4월 30일에 러시아의 최우수 정예함대인 발틱함대를 극동에 파견하기로 하여 10월 15일에는 북해를 떠나 지구를 반바퀴 도는 긴 여로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영국은 그 긴 항로에 널려진 영국관할의 항구들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함은 물론 다른 나라(프랑스·청국)들에게도 압력을 넣어서, 발틱함대에 대한 보급이나 정비 등에 지대한 장애를 일으키게 하는 등 철저히 방해함으로써 러시아사병들이 피로에 시달리는 등 발틱함대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우여곡절끝에 서기 1905년 5월 26일에야 간신히 극동에 도달한 발틱함대는 수개월간 현지에서 맹렬한 해상연습을 실시하여 온 동향(東鄕:도오고 헤이하찌로)의 기민한 전술에 걸려들어서 대패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순전투가 끝난 후인 서기 1905년 2월에 이미 러시아와 일본 두나라 정부는 전쟁을 종료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으로서는 이미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었으므로 일단 목적을 달성한 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이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에 한계를 느꼈고, 러시아에서는 1월22일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함으로써 내정이 심히 어지러워졌으므로 후방의 불안으로 인하여 전쟁에 전력투구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혁명적 분위기는 러시아왕국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여순에 대한 선제공격 후 지구전의 능력이 전혀 없었던 일본측은 남만주지역에서 압록강도하작전과 금주성 점령에 성공한 직후인 1904년 5월에 이미 강화교섭을 하려고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강화교섭을 알선해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양국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강화교섭에는 별 진전이 없었으나, 여순이 함락된 후에 이르러 노일 양국이 함께 휴전을 원하던 분위기를 간파한 루즈벨트가 러시아 측에 양국간의 강화회담을 알선해주겠다는 뜻을 전하였지만, 복수의 일념에 불타던 러시아 측에서는 일단 일본의 기세를 꺾고 전세를 만회해 보려고 즉시 응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봉천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북만주로 유인하려고 작전상 총퇴각하자 일본 측은 주미공사를 통해서 다시 루즈벨트에게 강화회담의 구체적 조건을 제시하면서 가운데서 알선해 주기를 의뢰했으므로 루즈벨트가 다시 러시아황제에게 강화를 권했으나, 러시아로서는 하얼빈에 백만대군을 집결시키며 일대반격을 준비하는 동시에 발틱함대가 극동으로 향하여 일본군을 고립시키고 일본열도를 점령한다는 가히 세기적인 대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별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를 못했다.

 

  문제는 러시아 내부에서 발생한 2월 혁명이 확산일로에 있어서 그 수습이 시급하게 되어 총력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던 점이다. 거기에다가 뜻하지 않게 발틱함대가 패배당하고, 독일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가 또한 강화를 권유하게 되어 러시아황제도 강화의 뜻을 굳혔고, 그에 따라서 루즈벨트는 6월 10일에 노일 두 나라에 대한 화의(和議)권고를 공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기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일본군은 사할린에 상륙하여 7월 중에는 섬 전체를 점령해 버렸다.

  강화회담에서 일본 측은 과다한 요구사항들을 제시했으나 러시아 측이 강경한 태도로 다시 일전을 불사할 수도 있을 것임을 내비치자, 국력이 이미 소진될 대로 소진되어 더이상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던 일본은 다시 루즈벨트를 통하여 공작을 벌인 결과 사할린의 남반부를 러시아가 할양해 주는 것으로 일단 결말을 짓게 되었다.

 

참고 1.

노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가 대한국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무력침공하여 굴욕적인 의정서를 강요하자, 광무황제는 4237년(서1904) 3월중 함경도사령관인 지 명환에게 밀명을 내려서 러시아군을 도와주도록 지시했다. 그에 따라서 원산에 있던 600여명의 대한국군은 러시아군에게 총을 쏘지 않고 자진해서 포로가 될 것을 결심했다(이는 명청 교체기에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 홍립의 병력이 명측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하여 누루하치 진영에 투항한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보임).

 

  광무황제는 또한 7월중에 함경도 일대 대한국군에게 마초와 식량을 러시아군에게 공급하라는 밀령도 내렸는데, 함흥·무산·원산·회령·경성·훈춘·길천 등의 주민들이 러시아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특히 대한국군 고위장교인 김 인수는 러시아군을 돕는 데 큰 활약을 했으며, 이 범윤 산하의 대한국의병도 왜구들에 맞서 싸운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의 국제상황에서 그나마 왜구들의 대한국 침략야욕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실세는 러시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왜구들은 다음 해에 러시아군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많은 대한국인을 처형하기도 함.

 

참고 2.

2월 혁명의 배후에는 일본의 공작이 크게 작용했다고 함. 즉, 4235년(서1902) 8월에 러시아주재 일본공사관의 무관으로 부임한 명석(明石;아까시, 후일 조선통감부의 헌병대장 겸 경무총장이 된 밀정정치의 창안자)은, 일본이 군사력만으로는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내의 문젯점들을 최대한 악용해서 자체붕괴시키고자 하는 계략을 꾸몄다. 그는 일본 참모본부로부터 100만엔(서1991년도 기준 한화 약 500억원에 해당)에 달하는 거액을 수령하여 러시아의 반정부과격파를 선동하는 데 썼으며, 노일전쟁이 벌어지자 스톡홀름으로 공작기지를 옮기고 러시아의 반정부과격파 데모대에게 소총 2만여정과 탄약 4백만발 이상을 밀송하여 전국적 무장봉기를 부추겼다. 그리하여 시베리아철도가 파괴되면서 만주의 러시아군은 군수품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우세한 병력과 잠재적 전쟁수행능력에도 불구하고 휴전에 이르게 되고 만 것임.

 

참고 3.

뉴욕의 유태계은행인 쿤로엡 회장인 야곱 쉽은 4237년(서1904)에 일본측의 요청을 받아 들여서, 노일전쟁에 의한 부채 2억5천만엔(당시 화폐가치)을 한 손으로 인수해주는 등 커다란 호의를 베풀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일본정부로부터 2등보국훈장을 받았다고 함. 이는 유태인의 세계적 전략에 있어서의 일본의 역할이라는 면에서 깊이 고찰되어야 할 사항임.

배달민족 역사와 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시골의사 입니다.
서울중고-연대 의대 졸
단기 4315년(서1982)부터 세계 역사,문화 관심
단기 4324년(서1991) 십년 자료수집 바탕으로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 저술
이후 우리찾기모임, 배달문화연구원 등에서 동료들과 정기 강좌 및 추가연구 지속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포토뉴스
메인사진
[포토]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1/23
연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