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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한민국) 건국연대의 진실, 1만년!

5색 인종(9한)이 더불어 살았던 한인.한웅.단군시대

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10/02 [00:38]

한국(대한민국) 건국연대의 진실, 1만년!

5색 인종(9한)이 더불어 살았던 한인.한웅.단군시대

윤복현 기자 | 입력 : 2008/10/02 [00:38]
▲  대한민국 국화 - 무궁화 
우리 환민족의 고대사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역사였다.[한단고기]'태백일사 三神五帝本紀 弟一'에서 5색 인종으로 구성된 9한을 통합한 단군왕검과 3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단군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 구한의 삼한관경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의 예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갈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부여는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충성됨과 사악함과 살고 죽음은 필부에게도 같이 돌아오는 법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한 증거가 된다.
 
색족은 어떤 것일까? 황부인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이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갈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  9천여 전 안파견의 12환국 연방
[한단고기]를 통하여 당시 5색 인종으로 구성된 9한족은 동이족의 터전인 한반도.만주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단군조선의 문명과 통치권이 미치는 광역이 유라시아 전역임을 알 수 있다. 즉, 만주(진조선=진한)와 한반도(마조선=마한),그리고 중국의 산동.중원(번조선=번한)은 직접 통치지역이요, 나머지 지역은 간접 통치지역임을 알 수 있다.

 
10월 3일은 한인으로부터 천부경을 부여받은 한웅천황께서 하늘을 열고 배달국을 개국하였다는 개천절이다. 우리민족의 시원은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시대를 제외하고 한인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9천여 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리고,[부도지], [한단고기] 등 세계 어느 민족보다 건국에 관하여 사실적으로 기록한 문헌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 등 세계 어느 종교경전들보다도 과학적이고 우주적이고 생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민족경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헌들은 인류사와 인류정신사의 보고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의 국보로 선정해야 한다. 국보1호라면 불타면 사라질 유형문화재보다 정신적 산물을 삼아야 한다. 누차 강조하지만, 대한민국 국보1호는 인류사와 민족사의 진실을 담고 있는 [한단고기]로 삼아야 한다. [한단고기]를 부정하는 원인은 [한단고기]가 세계사의 뿌리로써 한민족사의 뼈대를 그대로 진실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역사를 상실하면 민족도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 알아야 하고 우리의 한글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이화세계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보통 개천은 BC 2333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날은 실제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었다. 개천 및 개국의 연대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들은 실제 개천은 단군의 개국보다 124년 앞선 상원갑자년(上元甲子年) 10월 3일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신화적 연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개천절이 경축일로 제정된 것은 1909년 중창(重創)된 나철의 대종교에 의해서이다. 이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8·15해방 후에도 이를 계승하여 개천절을 국경일로 공식 제정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로서 우리의 고유한 제천행사의 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1년 농사를 마감하고 수확한 곡식으로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부여의 영고·예맥의 무천 등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서도 국난 때마다 단군신앙이 부활되고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여러 지역의 민속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10월에 제천의 형식을 띤 동제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개천절을 10월로 정한 기본적 근거가 되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로 되어 있으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다."
 
얼마 전 한나라당 몇몇 국회의원들이 8.15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정하자는 법인을 국회에 제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는데,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거나, 친일파들의 후손들이거나, 일본 극우세력에게 정치자금을 받아먹은 자들일 것이다. 8.15는 잠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환국이 빛을 잃었다가 다시 빛을 보게 된 날이요, 10월3일은 한웅천황께서 하늘을 열고 배달국을 개국하여 무지한 인간들이 환한님을 만나게 한 날이다.
 
대한민국 건국절이라고 한다면 [한단고기]의 기준에 따라 12연방을 거느리고 통치한 안파견(아파치=아버지=아바지)의 [환국]을 기준으로 정해야 한다. [한단고기]에도 "우리의 환국의 건국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환국의 건국일을 건국절로 잡아서 국경일로 정해야 할 것이다. 한인의 환국이래로 배달국이니 단군조선이니 하는 건 건국이라기 보다는 개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의 통일이후에 국호도 마땅히 [대한민국], 국화는 무궁화로, 국기는 태극기로 정하는 것이 [한단고기]상으로도 맞다.
 
참고로 "임금,가운데,하나"등 20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한'이나 "환하다"라는 의미의 '환'은 동일한 의미다. '환'은 '한(칸=안=간)'에서 왔다. '한'은 인류문명의 고향인 '한반도'다. 한반도 사람들이 마문명을 가지고 북진하여 환국문명을 건설한 것이고, 동서대륙으로 이동하여 슈메르.이집트.마야.아즈텍 피라미드 문명을 건설했다고 보면 된다.
 
그럼, 개천절을 맞이하여 민족통일차원에서도 한웅과 곰족과의 융합으로 형성된 단군조선에 대하여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자.
 

▲ 고인돌 세계 분포도. 고인돌은 한반도문화 코드다
 
1.신화.설화에 대한 바른 이해

 
신화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을 상징화하여 시처럼 함축화한 쟝르를 의미한다. 따라서 허구나 추상적인 내용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을 다룬 그리스의 신화인 '호메로스 서사시'의 내용도 역사적 사실임이 터키지역에서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함으로써 증명되었다. 세계 여러 민족은 수 많은 민족신화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성서의 창세기 설화의 소스를 제공한 슈메르의 길가메쉬서사시부터 두 형제가 늑대젖을 빨고 자랐다는 로마의 건국신화, 예수의 처녀잉태신화,그리고 알에서 태어났다는 동명성왕 고두막한.고추모.박혁거세.김알지의 난생설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한 신화와 설화의 배경에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으며, 조금 더 성스럽고 위대하고 강인하고 신비함으로 포장하려는 문학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고두막한.고추모.박혁거세.김알지의 난생설화는 북방계가 지배족으로 농경지역으로 유입되는 내용이다.
 
▲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유적지'
문제는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처럼 그러한 신화나 설화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인식자체가 문제이며, 역사적 사실의 원형을 왜곡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신화나 설화를 왜곡하려는 행위가 문제일 것이다. 사실이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대서 그 진실이 규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단군신화]를 왜곡하려했던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단군신화]를 부정하려는 일부 재야 사학자들도 문제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단군신화의 상징적 의미를 역사적 차원에서 어떻게 사실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 대한 해답은 사실적으로 표현한 [한단고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관이 [한단고기]를 부정하려는 근본적인 원인자체가 바로 명확한 환국민족사에 대한 뼈대와 줄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2.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조선의 개국신화
 
그럼, 경주출신으로 고려 후기의 승려였던 일연이 전해지는 이야기를 모아 저술한[삼국유사]중 [단군조선]에 관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岳。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常祈于神雄。願化爲人。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虎不能忌。而不得人身。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疑其未實)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壽一千九百八歲。해석하면,
 
"「위서(魏書)에서 말한다.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었다.그는 아사달(阿斯達)[경전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땅에 있다.혹은 또 개성(開城)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다.요임금(堯:원문의 高는 고려 정종의 이름'堯'를 기휘하여 쓴 代字)과 더불어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 북한의 평양 강동군에있는 단군릉.  5대 구을단군과 연관성이 있는 단군릉으로 추정

일연의 단군신화내용은 단군이 도읍을 정한 아사달을 북한 개성,평양로 기록하고 있으며,환인에서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숫자와 문자를 전제로 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단군 한 사람이 1908살까지 사는 것 처럼 상징화해 버려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마치 한 사람의 단군이 마치 무병장수한 존재인양 도사인양 생각하게 표현했다. 따라서 신화라는 개념이나 이해없이 단순하게 내용을 수용하면 그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알 수 없으며, 일제가 수단화하기 좋은 대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화를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살려내는게 중요하며, 역사연구도 있는 그대로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영광스러운 역사나 수치스러운 역사나 모두 역사는 역사다. 영광스러운 역사만 부각시키고, 치욕스러운 역사를 은폐축소시키려는 행위 또한 동일하게 역사왜곡행위이며, 후손들에게 교훈을 줄 수도 없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국난을 극복하는 교훈을 찾을 수 없다. 예컨대, 조선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한 삼전도비를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일 또한 모두 역사적 교훈을 후손들에게 주기 위해서다.
 
단군왕검이 첫 도읍지로 정한 아사달의 위치는 아직도 명확히 규정되지 않아서 논쟁이 많으나, 단군조선의 지역을 3한으로 분할하기 전에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천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과 가까운 북한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볼 수도 있다.
 
마한지역을 상징하는 남방식 고인돌과 진한을 상징하는 북방식 고인돌이 혼재하고 있는 지역이 평양지역이기도 하다. 이후 도읍을 이전하고 3조선으로 분할후 평양이 마한의 수도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연구할 과제라고 본다. 참고로 평양 대동강은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마]문명인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건설한 고대 문화의 중심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중국문명의 시원인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의 시원은 백두산지역의 여명문화로 드러날 것이며, 백두산지역의 여명문화의 시원은 결국 한반도 문명으로 연결될 것이다.
 
▲  2만년 전 육지였던 서남해 지역.마고성으로 추정
박제상의 [부도지]의 내용이 증명하듯이 [마고성]에서 추방되어 율려를 복원시키겠다고 다짐하고 북쪽의 천산주(천산산맥)로 이동하여 도를 닦은 황궁씨의 아들 유인씨의 아들 한인씨족의 국통을 이어받은 한웅은 하늘을 중시하는 북방유목민족을 의미하고, 곰과 호랑이는 동물을 숭배했던 토테미즘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즉, 곰족과 호랑이족을 의미한다.
 
즉, 산에서 도를 닦던 한인씨의 도통맥을 계승한 한웅족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토박이들'에 해당하는 곰족.호족 중에 곰족과 융합하여 단군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이 상징적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실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고고학적 증거가 바로 요서지역의 홍산문화라 할 것이다. 홍산문화는 모계사회였으며, 옥.청동기 문화와 제천.용문화의 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이 홍산문화는 바로 중국문명의 시원이 된다.

 
▲ 세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동북 아시아 개들이라는 미국의 생물 교과서 내용. 진돗개는 동북 아시아 개들의 모든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마]문명인들은 바다가 되면서 개들을 데리고 이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3.고려 말 이암의 [단군세기]의 단군탄생 설화

 
[한단고기]에 편집된 [檀君世記(단군세기)]은 고려시대에 살았던 紅杏村(홍행촌) 李嵒(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1세 檀君王儉(단군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 古列加(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桓檀古記(한단고기) 檀君世紀(단군세기) 중에서 檀君王儉 誕生(단군왕검 탄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고기에서 말하기를 왕검은 아버지가 단웅이며 즉 한웅이며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다.신묘년(BC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밑에서 탄생하였다. 신령스러운 덕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14세 되던 갑진년(BC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 국사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년(BC2333년) 제요도당 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 나라의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일러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이며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사시기를 130세까지 사셨다."
 
이암의 단군왕검탄생설화는 단군왕검의 족보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신단수 아래서 태어났고 일찌기 덕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는 단군왕검은 신시배달국 18세 한웅의 아들이며, 외가인 웅씨족의 비왕으로 24년, 단군조선 1대 단군으로 93년간 제위하였고 130세까지 살았다로 기록함으로써 일연의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곰의 자식이라고 비하하며 민족적 열등감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일제의 식민사관의 단군신화에 대한 왜곡행위을 증명했다.
 
▲  단군왕검 존영

4.[삼국유사]단군신화에 대한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해석

 
앞에서도 말했지만, 보통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신화라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구전으로 내려오는 역사적인 사실을 함축하여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신화를 연구함으로써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알아 낼 수 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에 따르면, 고고학적으로 사회가 발전하는 단계를 보면 초기 사회는 유목 사회로서 식량 공급이 사냥과 채집이었다. 이 당시의 사회 구조는 씨족을 중심으로 씨족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때가 구석기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다음으로 발전하게 되는 사회가 농경 사회인데 초기 농경 사회는 아직까지도 사냥과 채집을 주로 하는 상태에서 농사가 식량의 보조 공급원인 상태이다.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은 농사가 더 많은 식량을 공급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기후 변화 등의 자연적 변화로 사냥과 채집이 어려워지게 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며 그 당시 진행되었던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냥과 채집에 의한 식량 공급으로는 부족한 식량을 메울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농사를 짓게 되면서 거주 지역을 자주 이동하기 어렵게 되고 이에 따라 사회 구조도 변화하게 된다.
 
이 당시의 사회구조는 부족사회라고 불리워지는 형태인데, 부족사회라는 말은 우리말에 근거가 없는 말로써 마을사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영어로는 Tribal Society 라고 한다. 마을 사회에서는 아직도 씨족이 중심이 된 정착 생활을 하는 형태이다. 일정한 장소에서 군락을 형성하고 농사를 지으며 익힌 농업 기술의 발달로 사유재산 개념이 형성된다. 이 때가 신석기 시대에 해당되며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어 있다.
 
또한 사유재산 개념이 발달하면서 권력자가 출현하게 되면서 정치 권력의 편중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서 땅의 소유에 대한 문제로 전쟁을 하게 되고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더 큰 권력 편중 현상이 발생하면서 초기의 국가 상태의 조직이 발생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발달로 볼 때 이 때가 청동기 시대에 해당된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우수한 재료를 바탕으로 사유 재산의 편중이 극히 심해지면서 이웃 마을들과 전쟁과 영토의 확장이 발생한다. 또한 이에 맞서기 위한 동맹체가 형성되고 이 것이 발전하면서 고대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대인들은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았다는 것을 볼 때 자연스런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자연물을 대상으로 신격화하여 자신의 씨족을 대표하였던 문화가 토템이즘인데, 예를 들어 곰을 숭배하던 족속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족속은 각각 자신들의 이름을 웅족과 호족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이 살던 땅의 이름도 그 들이 옮겨간 곳에 따라 변하고 있다. 실제적인 예로서, 고구려와 고려를 지칭하는 일본말은 "고마(곰)"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도저히 그 뜻이 통하지 않는 단어인데 이는 일본말이 고대 우리말의 원형을 많은 부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마"라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곰족속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단지파가 거주했던 팔레스틴 북부지역이 단이며,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예맥족은 호랑이를 신으로 섬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본래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이 통합된 호칭으로 동일한 동이족들인데, 예족은 주로 강가에 사는 동이족이고, 맥족은 주로 수렵하는 동이족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예맥족이 바로 요서지역에서 청동기문명을 발전시켜 요동지역으로 전파시켰으며, 이들 예맥족의 후예가 부여.고구려라고 중국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는데, 요서지역이 바로 홍산문화가 태동한 곳이다. 홍산문화는 [삼국유사]의의 단군신화와 [한단고기]의 단군왕검설화가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며, 홍산문화의 주역이 곰족.한웅족이 융합되는 단군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단군신화에는 첫째 한인에서 출발하여 한웅 그리고 단군으로 이어진다. 즉, 한인시대에서 단군시대까지의 장기간의 역사를 엑기스만 뽑아서 상징적으로 함축한 것이다. 환인이라는 의미에서 하늘을 섬기는 족속이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현에 대해 북방에서 남으로 이동해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우주선을 타고 북두칠성자리에서 바이칼 호수지역으로 내려왔다는 견해도 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현은 슈메르인들의 설화나 일본인들의 건국설화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건국설화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유사하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우주선을 타고 내려오지 않고 가야 등 한반도 사람들이 건너가 문명을 건설했다고 했을 때 하늘이란 우주를 의미한다보기 보다는 문명이 있는 곳에서 이동해 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맞다 할 것이다. 예컨대, 서울에서 부산을 가나, 서울에서 평양을 가나 내려려왔다고 말하는 이치와 같다. 중심지가 서울이기 때문이다.
 
물론,고대 문명과 우주문명과의 관계성을 전혀 부정하지는 않는다.8천년 전의 동굴벽화에 헬멧을 쓴 우주인들과 우주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우리민족의 3대 경전으로 치부되는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보노라면 1만여년에 가까운 환인시대부터 대진국(고려=발해)시대까지 계승되고 황제들에 의해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내용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과학서라고 할 수 있으며, 우주의식을 담고 있어 마치 우주인들이 주고 간 우주서적같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의 내용 중 100일은 한웅족들이 산에서 수도나 명상을 할 때 필요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고, 3은 하늘.땅.사람이 하나(1)이라는 북방 동이족의 사상을 상징하고, 7이라는 숫자는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북방 동이족의 샤먼이즘이 반영된 숫자라고 할 것이다. 그 당시는 이동사회이었다. 그러나, 환웅이 풍백, 운사, 우사를 거느리고 지상에 내려오는데, 이 풍백, 운사, 우사는 모두 농경 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농경 사회를 형성하면서 이웃 곰 씨족과 연합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단군 시대에 오면서 고대 국가의 탄생을 맞이하면서 우리 나라 건국의 시점을 바로 이 시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출토되는 유물로 판단할 때 단군 시대는 청동기 시대에 해당되며, 이는 고고학적인 사회 발전의 단계와 매우 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정확하게 과학적인 방법과 일치하는 내용을 "일연" 이라는 한 사람이 창작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단군 신화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비파형(만주)과 세형(한반도). 북한의 청천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비파형, 남쪽은 세형검이 주로 분포되어 있다.

다음으로 단군47대 재위기간과 관련,단군조선의 건국 연대에 관하여 [한단고기]는 2천여년으로 잡고 있고, [규원사화]는 기원전 1,000년으로 잡고 있는데, [규원사화]의 경우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삼국유사가 인용한 중국문헌인 [위서]에서도 기원전 2천여년으로 잡고 있고 있고, 이미 한반도에서도 BC 2500 년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형식면에서도 만주 지방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에 이러한 학설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실제로 단군조선의 활동 무대는 주로 만주 지방인데, 이 지방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시대 유물은 과거에 황하 유역에서 출토된 것보다 약 200년을 앞서는 것으로 판명되어 이미 중국에서는 모든 연표를 수정한 상황이다. 그러나, 유득히 단군조선을 한반도에 국한시키려는 반도사관에 찌든 일부 한국 학자들만이 이를 받아 들이기를 꺼려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의 정식 시조로 인정받는 고대 국가인 하나라는 BC 2200년경에 세워지는데 이는 단군조선보다 늦은 시기이다. 
 


그러면 왜 오랜 동안 황하 유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발상지로 알고 있을까? 그것은 중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하였던 시절에 고고학적인 발굴이 그 지역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져 왔었다. 이후 만주지역을 포함한 중국 변방 지역을 모두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면서 이런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중국인들의 용문화의 시원지도 만주지역의 홍산문화임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인들이 역사왜곡을 단행하는 근본원인이 바로 홍산문화에 있다. 중국의 시원지를 홍산문화로 규정함으로써 한민족의 단군조선까지 강탈하고 단군조선의 영역이였던 한반도지역까지 삼키겠다는 장기적인 전략인 것이다. 만주를 회복할 때까지 미국을 대중국 견제용으로 활용해야하는 배경인 것이다. 또한 만주 지역에서는 BC 2410 년경의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고 있으며, 최근 한반도에서도 BC 25 - 26 세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한반도가 고대 중국문명의 시원지인 백두산지역의 여명문화와 만주지역의 홍산문화의 고향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한반도가 인류문명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점점 드러날 것이다.
 
▲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회복한 영역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5.단군조선의 광역과 사회

 
고대 국가의 강역은 현대의 국가보다 휠씬 넓었다. 이는 복속되는 국가는 우수한 재료를 가진 국가에 대항하여 영토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한정 커지지 못하는 이유로서 강력한 통치 조직이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해당 지역의 실력자를 제후로서 인정하고 그 제후에게 모든 권한을 줌으로써 통치를 하였다. 단, 그 제후는 지배국이 가진 종교와 같은 종교를 가져야 했으며 제물을 공납하여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여야 했다. 이를 제후국이라 부르고 단군조선에서는 거수국이라 불렀다. 고리국(고구려)와 부여 등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다. 따라서 정치 형태는 지방 분권을 이루고 있었으면 중앙 정부는 통일된 종교와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통치영역은 직접적으로 단군3조선으로 대변되며, 한민족의 거주코드인 온돌이 분포된 지역으로서,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며 유럽문명의 선구자가 되었던 정통적인 동이족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만주.연해주.시베리아(진조선=진국)-한반도(마조선)-하북.산동(번조선)이고, 간접적으로 단군조선의 문명권아래 들어가는 지역은 아시아전역과 유라시아지역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한단고기]에도 단군왕검이 3한 관경으로 통치하는 9한은 5색인종으로 구성되었으며,단군조선의 풍습과 제도을 가지고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단군왕검은 신시 배달국 18대 거불단 한웅과 곰족의 공주 웅녀의 아드님
단군민족의 기원설은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특별한 근거도 없이 외래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선차적으로 명백히 잘못된 이해이다. 오히려 한반도와 만주에서 서쪽으로 동이족이 이동했다가 다시 동진했다고 봐야 맞다. 슈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중동지역으로 이동해 온 고대 한국인들이고, 인도유럽어족의 조상어가 한국어라는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우선, 이런 잘못된 믿음이 생긴 원인을 보면 우리 어족이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고 하는데서 올 수 있으나, 실제로 우리말을 우랄 알타이 어족으로 분류한 것은 서양 학자들이고 고대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 붙여진 것이다. 실지로 몽고는 자연 환경이 단군조선의 지역에 비해 대단히 열악하고 문화가 단군조선보다 늦게 발달한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원래 그 땅에는 단군조선의 지방장관이던 색정이라는 사람이 흉노시조로 기록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흉노(스키타이족의 후예.신라의 김알지 세력도 흉노족)라는 족속이 자리하고 있다가 중국에 의해 서쪽을 격퇴당한다.
 
그리하여 비워진 그 땅에 중요하게 자리 잡은 족속 중 가장 번성한 족속이 징기스칸을 배출한 몽골족속이며 우리와 매우 흡사한 종족이다. 이들은 만주 지역에서 그 빈 땅으로 이주하여 간 족속으로서 고대 부여가 있었던 지역으로부터 이주하여 갔다. 바로 몽골족은 부여족이였던 것이다.참고로 해모수의 부여.고추모의 고구려는 고리(구리족)의 후예들이다. 고리(구리)라는 말에서 이들은 고대로부터 쇠를 잘 다룬 족속임을 알 수 있고, 철제무기를 이용하여 전쟁을 누비던 무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로 황제헌원과 77번 싸워 승리한 치우천황은 신시배달국의 군인출신으로 고리(구리)족은 치우족임을 알 수 있다. 중국문헌에도 고리족은 치우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구려는 결국 치우족의 후손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이칼호수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고리족은 고대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용맹한 왕의 신하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아마도 치우천황에 관한 전설인지도 모른다. 번개와 구름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그리스의 제우스(치우->지우->제우)신화가 바로 치우의 신화임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청동기를 사용한 우수한 문명을 가진 국가였다. 청동기 자체만을 보더라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기에 비해 금속학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청동기였는데, 주석 비율을 조절하여 사용 목적에 따라 청동의 인성과 경도를 조절한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청동검은 경도가 다소 떨어져도 인성이 필요하여 주석 비율을 낮추어서 제작하였고 청동 거울은 경면을 위해 경도가 높아야 하므로 주석 비율을 높여 경도를 높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출토된 단군조선 유물 중에는 청동으로 0.2 밀리미터의 가는 실로 장신구를 만든 것이 있을 정도로 우리 종족은 기술적으로도 매우 유능하고 우수한 종족이었다.
 
또한 고조선의 유물 중 모직물을 보면 양털과 개털을 섞어서 짠 것으로 오늘날의 모직물의 질이 낮은 정도와 그 질이 같을 정도의 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많은 단군조선 특산물들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중국 기록에 보면 조선에서는 180도로 휘여 만든 만들어진 맥궁으로 표현되는 명궁이 나오는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활이란 유효사거리가 길어 대단히 위력이 있는 최첨단 무기로서, 적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맞추어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로 2km까지 비행하여 폭발하는  조선시대의 최첨단 무기인 신기전처럼 오늘날 미사일에 견줄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품질이 높은 무기가 단군조선에서 많이 생산되었다는 것은 매우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한 단군조선의 무기체계는 부여와 고구려를 통하여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강한 사회이었는데, 맹자의 기록을 보면 단군조선은 세금으로 20 분의 1을 거두었다고 한다. 5 % 라면 오늘날 기준으로도 매우 낮은 세금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50 % 혹은 80 % 이상의 높은 세금을 물리고 있었다. 이는 호화로운 궁궐과 집권층의 호사스런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단군조선에서는 집권층이 호화스런 생활을 자제하여 궁궐도 크게 짓지 않았고 선물도 하지 않는 등 쓸데 없는 허례를 자제하였다. 이는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을 정치와 사회에 실천한 좋은 예이다. 그런 이유가 있어 화려한 궁궐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을 오늘날 사람들이 문화가 떨어진 이유로 그런 궁궐이나 유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그릇된 생각이다.
 
단군조선 사회는 귀족과 평민 간의 신분 차별이 거의 없었다. 이는 기록에 나타난 제천의식 후에 벌어지는 축제에서 왕과 전체 백성이 함께 사흘 밤낮으로 노래와 춤으로 축제를 지냈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평등한 사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건 그 만큼 자신이 있고 당당하다는 심리적인 요인에 있다. 그러나, 억압하고 폐쇄적이고 차별한다는 건 그 만큼 상대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없다는 심리적인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차별하지 않고 상대를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덕이며, 조선이 군자불사지국-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송받은 배경이였던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칭송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례하고 무질서하고 부정부패한 국가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대인.군자'라는 표현은 한반도 사람들을 비롯한 만주지역의 한국인들을 부르는 말이였으나, 중국인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우리가 현재 좁다란 한반도에 산다 하더라도 마음과 의식까지 좁쌀만 하다면 고대 우리의 존재원형으로서 '대인,군자'의 주인은 영원히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경제가 단군조선을 매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사회로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아무리 군대가 있어도 군사 개개인이 나라에 대한 진정한 애국심이 없다면 그 군대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일 것이다. 애국심이란 각자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로마제국도 2천여년간 지속했는데, 로마제국의 기반이 농민들이였고, 로마시민들이였고 누구나 로마시민이 될 수 있었으며, 지도층들이 국가위기시에 제일 먼저 앞장섰으며, 로마시민들이 앞장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로마도 지도층들이 부패하고 로마시민들을 궁핍하게 하고 차별함으로써 결국 게르만족의 침입이라는 외부요인과 더불로 내부분열로 무너지고 말았다는 역사적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가장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크다고 하는데 이는 자유를 신봉하는 정신이 있으면 각자가 그러한 정신을 가진 나라가 진정으로 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 민주당의 버락 오마바는 미국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는 경제정책들을 공약으로 내걸고 새로운 에너지 개발사용으로 지구의 환경파괴를 막아 미국이 세계를 새롭게 주도하는 국가가 되자고 호소하던데, 대한민국도 새롭게 태어나야 할 때이다.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국민으로 대변되는 서민대중들을 구하는 경제정책들이 필요하며, 남북한이 공존하는 민족공동체 노선을 추구해야 하는 민족적 요구일 것이다.
 
전쟁에서 단군조선이 강국이란 증거는 여러 가지 문헌에서도 나타나는데,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런 시기에 오랜 실전 경험을 가진 연나라가 조선을 침범하였을 때에도 조선은 연나라를 물리치고 오히려 그 들의 땅을 빼앗았다. 이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오늘날에서도 핵심적인 가치관이 없는 민족이 선진국을 건설할 수는 없다. 우리의 민족적 가치관은 홍익인간 이념이며 이 이념으로 5색인종(9한)을 통합한 단군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국가의 시원을 단군조선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마치 단군민족 제일주의만 내세우고 5색인종들은 노예취급하는 오만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만큼 어리석고 홍익인간이념에 위배되는 사고는 없다할 것이다.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이념은 5색 인종이 모두 더불어 사는 세계실현이다. 그 주역은 물론 단군민족이여야 하겠지만. 고로 얼굴은 한국인들이지만, 사고는 비한국인들을 경멸하는 이유라 할 것이다. 덕이 없고 인류를 살리는 구체적인 홍익인간적 대안이 없는 민족은 인류를 리드할 수 없다. 단순히 히틀러같은 우월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인 역사관으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의 희망과 미래도 없다. 그러한 극단적 국수주의는 일제의 침략주의적 사유나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한국의 민족주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전제로 개방적이고 인류애적인 세계관이다.
 

이러한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가진 단군조선도 47대 고열가 단군을 마지막으로 중앙권력이 약화되며 붕괴 과정을 겪게 된다.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서 거수국들이 독립하게 되는데 이 당시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그리고 한반도 남쪽에 한국들(진한=신라, 마한=백제, 가야)이 출현하게 된다. 초기에는 이들 거수국들 끼리 서로 전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같은 민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모수나 고두막한처럼 그들은 중국의 한나라와 싸우면서 외부로 영토 확장을 하면서 발전하였는데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 중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북부여와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의 왕통을 계승한 고추모 단군은 다물정신으로 옛 단군조선의 영광을 부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반도 동쪽 모퉁이에 갇혀 고구려와 백제의 등살에 힘들어 하던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우리 나리는 중국 문화를 선진 문화로 받들기 시작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러한 쇠락의 과정을 밟는 사이 고유한 우리 문화는 외래 문화에 의해 눌리고 또 눌리어 이제는 바닥에 깔려 있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은 최치원이 표현한 '풍류도'다. 즉, "바람처럼 자유자재로 흐르는 도"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이 바로 단군조선의 선랑들이며,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이며, 신라의 화랑들이며, 백제의 사무라이들이며, 조선의 선비들인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았다. 어떠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상이나 종교교리로 규제될 수 없는 존재들이 풍류도인들이다. 이들이 갇힌 한반도를 대륙으로 열어제낄 도인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풍류도가 첫번째 수입된 불교 문화에 의해 내려가고 다시 그 위에 유교 문화가 자리 잡았고 이제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문화가 다시 그 위를 차지하고 있게 되었다. 이들 교리종교들의 문제는 결국 폐쇄성이며 집단의 독점욕에 있다. 고려 불교의 폐단이 그것을 증명하고, 이명박정부하의 기독교집단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런 쇠락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몇 가지를 들어 보면, 우선 지정학적인 폐쇄성, 홍익인간의 이념이 지배하는 극단적인 경쟁을 회피하는 문화 그리고 단일민족으로 대표되는 단일성의 결여 등이다. 한마디로 맥빠진 예족이라고나 할까. 맥아리(맥알=정신=혼)이가 빠지면 걷지도 뛰지도 날지도 못한다.

 
6.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이념과 21세기 대한민국
 
단재 신채호 선생은 중국의 유학이 들어오면 우리의 유학이 되지 못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우리의 기독교가 되지 못하고 불교가 들어오면 우리의 불교가 되지 못함을 통탄해 했다. 이것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에 대한 부재와 결핍을 통탄한 말이라 할 것이다.
 
미국의 금융위기 등 세계는 무척 빠르게 변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과 함께 한반도에 대한 노골적인 침략의욕을 드러내고 있다. 외래 문화의 유입이 점점 가속되어 간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주체적인 정체성과 문화가 없으면 언제든지 주변 강대국들에게 종속되고 만다. 민족을 상실하는 원인은 언어.역사에 대한 상실에 있다. 일제가 역사를 왜곡하여 민족을 비하하고 한국어를 말살하려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따라서 역사와 정신을 상실하면 물질 문명은 발달하겠으나 결과적으로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무엇보다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정립을 통한 정체성과 가치관 확립이 시급하다. 또한 종교적 갈등문제 등 대립적인 다양성을 모두가 만족하는 홍익인간이념으로 단일화해야 한다. 국가지원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활성화하여 세계화하고, 일부 서양의 무책임한 자유주의 사상에 물든 자들의 입김으로 만들어진 호주제폐지로 근친상간을 유도하여 유전자적으로 열등민족을 만들어내는 제도들을 막아내야 한다. 또한 남북대결양상을 지양하고 화해협력교류를 통한 민족통일로 세계평화와 민족번영의 씨앗이 되게 해야 한다.독도.간도.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남북이 민족적으로 공동대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민족의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남들과 교류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홍익인간이념를 세계화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새로운 환국문명이 한반도에서 창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역사 08/10/02 [19:39] 수정 삭제  
  그리스의 '제우스'는 동이 '치우'가 건너간 것.

그리스 신화가 유럽중심주의 (eurocentricizm)에 의해 왜곡 날조되었다는
'블랙아테나'출간은 본격적으로 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 같습니다.

'블랙 아테나'의 저자 버넬은 19세기 유럽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인의 인종적 기원을 논함에
있어 그리스 원주민을 '황인종'이라고 고백하며 번민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버넬은 19세기 유럽학자들이 그리스의 헬레네스인들을 셈족과 동양인의 혼혈로서 인식하고
또 그 원주민을 동양인이라고 한 것은 백인 우월성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해석하지만
현대 유전학이 밝히는 사실은 좀 더 복잡합니다.


그리스의 신화체계가 이집트와 동방 오리엔트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집트의 아시아적 파라오 힉소스의 왕들과 후리(Hurri)=쿠티(Khuti)=쿠리(구리=고리=치우족)왕조, 그리고 우라르트를 포함하는 소위 시노-코카시안(Sino-Caucasian)문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의 최고신 Zeus의 본질적 측면을 살펴 봅시다.

wikipedia에서는 Zeus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Zeus is the continuation of *Dyeus, the supreme god in Indo-European religion, also continued as Vedic Dyaus Pitar (cf. Jupiter), and as Tyr (Ziu, Tiw, *Tiwaz) in Germanic and Norse mythology.

==> 제우스는 인도-유러피언(아리안)의 신앙에서 디에우스(Dyeus)라는 최고신의 연속체이다.
또한 독일과 노르딕신화에서는 '티르', '찌우'(Ziu), '티우(Tiw), 티와쯔(Tiwaz)로 나타나며 베딕
(리그베다)에서는 '디아우스 피타' (쥬피터)이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현재까지 인정되는 아주 표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우스'(Zeus)가 유럽과 북구에서는 찌우(Ziu)/티우(tiw)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울러 노르딕의 신 Ziu는 신화학사전에 의하면 전쟁의 신(God of war)이며 불의 신 (God of Fire)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치우'는 우리 한겨레의 북방 방언으로는 '티우'에 가까왔을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평안도를 비롯해 서북사투리에서 'ㅈ'발음이 'ㄷ'으로 나타나는 구개음화현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고대음가(북방어기준)에서 'ㅈ'/'ㅊ'발음이 대개 'ㄷ'/'ㅌ'로 나타나는 것도 과거
'치우'의 옛 북방발음이 '티우'였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반면 남방어기준으로는 s/z 의 발음은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의 제우스와 우리 동이의 치우가 어떤 관계로 설정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와 이집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또 실제로 이들을 지배했던
히타이트의 신 "Siu"를 매개 고리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히타이트의 가장 원형적인 종족은 후리안(Hurrian)으로 불려지며 이들이 세운 미타니왕국은
비인도유러피언 문화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리(Hurri)인들의 언어는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도유러피언어와는 다른 교착어체계였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울러 18세기까지 유럽 사학자들은 후리인들을 코카서스 백인종이 아니라 동아시아계 몽골로이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우세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저 솔본의 글을 리뷰해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텍사스 오스틴대학의 언어연구소에서는 히타이트에 대한 온라인 강의가 있습니다.
이곳의 Sara E. Kimball 과 Jonathan Slocum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One of the culturally intriguing aspects of this text is the god Siu-summin "our god," or "Our Sius," a god who appears nowhere else in Hittite texts. The word sius, which is otherwise the generic word meaning "god," is derived from Indo-European *dyeus, the father god of the sky

- Linguistics Research Center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 (히타이트) 텍스트가운데 흥미로운 장면은 "시우-수민"(Siu-summin) 즉 "우리 하느님" 또는
"우리의 시우"라 불리는 신의 이름이다. 시우는 히타이트 경전에만 등장한다. '시우'라는 단어는
인도-유러피언어에서 신을 뜻하는 '디에우스' 즉 '하늘의 아버지'에서 비롯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킴볼과 슬로쿰은 히타이트의 신 Siu가 인도유러피언 어 Dyeus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꼭 마차를 말앞에 메어 놓은 꼴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스스로 히타이트어를 인도 유러피언어의 기원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런사유로 18세기와 19세기를 통틀어 방대한 신화와 상징의 자료를 정리한 러시아 학자
아리엘 골란은 단호하게 제우스의 인도 유러피언 기원설을 부정합니다.

아리엘 골란에 의하면 제우스는 인도 유러피언이 아닌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란은 제우스신의 기원을 인도 유러피언이전의 문제로 소급하고 있습니다.

제우스의 기원을 인도유러피언 이전의 소급문제로 가야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인도유러피언의 기원'
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인류학자 콜린 렌프류 교수의 목소리를 주목해야 합니다.

콜린렌프류 교수는 프로토 아리안, 즉 인도유러피언의 원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인도 유러피언들의 조상은 9천년전 중앙아시아 또는 아나톨리아로 이주해온 아시아계
사람들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이 현재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콜린렌프류 교수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또 이 '제우스'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리스와 이집트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히타이트와 그들의 선조 후리인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후리(Hurri)인들은 이집트를 정복한 '쿠티'Khuty/ kurri와 동일시 되곤 했는데 우리는 후에
중앙아시아 흉노의 수장들 이름에서 '구티'라는 이름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 후리인들이 왕조를 세울 당시 히타이트에는 '얄라-간'(Yala-gan), 쿠티간(guti-gan)등
칸의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 보겠지만 백제를 세운 '구태'역시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을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어쨋든 '후리'=쿠티='쿠리'로 연결되는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구리'의 신 '치우'가 유라시아를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Ziu, tiw, dyeus, Zeus로 발전해 나아갔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솔본-

[보충자료] 치우에 대한 노르딕 전승
동북아시아 샤먼니즘에서 오는 신의 사자 산타크로스의 원형은 유럽에 문명을 전해준 치우다?
고대에는 왕이 통치자이자,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였다는 점을 전제로 가능한 학설이다.
 중국문헌에는 신농은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치우도 쇠뿔을 달고 소의 발굽을 가졌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슈메르도 소머리에서 온 말입니다. 슈메르인들은 바로 환국문명을 이어받은 신농.치우의 후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Ziu /TiwTiw (tē`), Norse Tyr (tür), ancient Germanic god. Originally a highly revered sky god, he was later worshiped as a god of war and of athletic events- 켈트신화의 전쟁신이며 가장 높은 天神(sky God). 고대 독일방언으로는 '찌우'라고 불리며    켈트어로는 '티우'/Tiw(치우)라고 부르고 아사툴(Asatur)가운데  '튀르'(tyur)라고도 불림.   나중에 전쟁신으로 숭배받음. 화요일 Tuesday는 바로 Tiw's day에서 유래.This is Bull of Frost (Chys Khan), which is Yakutian colleague of Russian Grandpa Frost (Ded Moroz) and Santa Claus- '치스 칸'이라 불리는 야쿠트인들의 대샤먼이며 '숲속의 황소'라고 불림.    문화인류학자들 사이에서 이 '치스 칸'(치우스=제우스 칸)이 산타클로스의 원형인 것으로 논의되고 있음.
태양해 09/03/15 [15:41] 수정 삭제  
  중국의 한나라 때 양즈강을 넘어 들어간 종족이 지나족이다 이것이 중국역사의시작이다 그 전의 역사는 다 동이족의 역사다 현원의 반골정신 매국노의 종자가 힘없이 구겨져 있다가 한나라가 생기면서 지나족의 백성을 얻어 융합된 민족 화하족이다 진짜중국인 역사는 한 2000년정도로 동이족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중화민국을 세운 손문이 역사를 바꾸어치기 역사조작이 동북공정의 원조다 그바람에 강국까지 발전 한것이다 위대한 역사를 훔친 댓가가 강국이면 우리에 역사 일만년을 복원하면 제국을 호령할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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