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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서,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이해-1

편찬, 판본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12/08 [13:50]

민족사서,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이해-1

편찬, 판본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입력 : 2012/12/08 [13:50]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전에 대진국(大震國:발해)에서 쓰여진 우리의 상고사이다. 대진국 시대 초기에 13년간이 걸려 저술된 책으로 단군조선의 2,000년 이상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단기고사는 한단고기(桓檀古記, 환단고기라고도 읽음)와 규원사화와 함께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민족사서(民族史書)가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 관한 역사 연대기 면에서 한단고기와 별 차이가 없어 같다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단기고사의 내용으로 볼 때, 현대적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고 현대적인 과학기구 등이 기록되고 있어 위서(僞書)라고 몰아 붙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고 주장하지만1), 실제 출간되고 있는 단기고사에는 대진국 초기 태조(太祖) 대조영(大祚榮)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의 아우인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서문(序文)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독사신론 등을 지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중간서(重刊序)가 있고, 서기1949년에 김두화 선생과 이관구 선생이 번역 출판하면서 문구에 근대술어가 많은 것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무조건 위서로 단정하기에는 실로 아까운 사서이며, 현대적인 용어가 기록된 연유가 밝혀져 있으므로 사서로서의 가치성을 인정하는 데 절대 미흡하지 않다고 본다.

한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말기의 이암(李嵒)선생이 지은 것이고,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조선시대 중기의 이맥 선생이 태백일사를 지을 때 합본한 것인데, 단기고사는 이들 사서와는 다른 경로로 전해진 것이 되어, 상호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어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 단기고사의 편찬


단기고사는 대진국의 대야발이 천통(天統) 31년에 저술한 책이다. 천통은 대진국 태조 대조영 성무고황제의 연호인데, 서기699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천통 31년은 서기729년으로서 인안(仁安) 11년 즉 제3대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의 11년에 해당한다.

대조영 성무고황제는 삼일신고를 찬할 때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서문을 짓게 하였고, 특히 명을 내려 단기고사를 편찬하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야발은 널리 사서를 수집하고서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완성하였다. 대야발은 석실에 있는 장서와 옛 비석과 흩어져 있는 사서들을 참고하였으며, 돌궐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고적을 탐사하여 단기고사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 단기고사에 대야발은 천통 31년(서기729년) 3월 3일자로 서문을 쓰고 있다.


2. 단기고사의 판본


1) 대야발본(서기729년)

단기고사의 원저자는 대진국 반안군왕 대야발이다. 대야발이 대조영 성무고황제의 특명을 받아 천통 19년인 서기717년부터 13년간에 걸쳐 서기729년에 완성한 역사서이다. 대야발이 지은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대야발은 서기929년에 원본은 임금(광종 무황제)에게 진상하였으며, 목판에 글자를 파서 국서고에 두고 다시 그것을 베껴서 백성들을 가르쳤다라고 적고 있다.

2) 황조복본(서기827년)

처음에는 대진국의 문자로 발행되었으나, 제11대 성종(成宗) 선황제(宣皇帝:서기820년~서기830년)의 건흥 8년인2) 서기827년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옮겼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황조복 한문본은 끝내 찾지 못하고 있다. 황조복의 중간서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역사기록이) 사라져 없으므로, (태조 고황제(대조영)께서) 야발(대야발)에게 명하여 단기고사와 고구려와 백제의 유사(遺史)를 편찬하게 하니, 선생(대야발)께서는 명을 받은 이래로 이른 밤에도 근심하고 두려워 하며 혹시라도 고황제께서 부탁하신 것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어명에 상처가 갈까 두려워 하여, 13년간 마음을 기울여 주력하여 처음으로 편찬을 완성하게 되었다.

무릇 전해오는 계통을 밝히니 모두 그 근거가 확실하므로 그것을 편집하고, 정말로 그 생각한 바를 적은 것이 상세하므로 그것을 속편으로 엮었으니, 올린 글 등의 엮은 것에 부합되며, 노예로 찌든 역사를 훨훨 벗어던지니, 엄연한 독립사상을 보이는 도다!

후세에 읽는 자들로 하여금 신(神)의 기운이 왕성하게 되게 하고, 대문호로 하여금 손수 법(法)을 편찬케 하며, 속인과 선비들로 하여금 능히 이르게 하는 바로다!

나는 한번 읽으니 신기(神氣)가 왕성하게 되고, 두번 읽으니 더욱 왕성하게 되어 천년의 열성조(列聖祖)를 알현하는 것과 같은 까닭으로 스스로 활발히 움직이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중간(重刊)하게 되었도다!

앞으로 후세의 독자들로 하여금 일독(一讀)으로 신기(神氣)가 왕성하게 하고, 이독(二讀)으로 신기가 더욱 왕성하게 함으로써, 능히 우리 부여족(扶餘族)이 옛 신성(神聖)시대의 영토를 광복할 수 있게 하여, 천하에 왕노릇 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노라!

건흥(建興) 8년 4월 그믐. 산양(山陽) 황조복(皇祚福)이 기록함.

(...命野勃而編纂檀奇古史及麗濟遺史先生受命以來夙夜憂懼恐付託不效以傷御命故十有三年間傾心注力始克成篇以明夫相傳之系統蓋其據之也確故其編之也正其考之也詳故其續之也符至於上書等篇逈脫奴隸之累態以示嚴然獨立之思想使後之讀者神氣猶爲之旺大文豪之編纂手法0俗儒之所能及也余一讀神氣猶爲之旺再讀愈爲之旺如謁千載列聖之前故自不勝活潑0之心以爲重刊將使以後之讀者一讀而神氣爲之旺再讀而神氣愈爲之旺而則能使吾扶餘族可以光復古聖代之版圖而王天下可計日而待也 建興八年四月晦日 山陽皇祚福 識)3)

3) 한문 필사본 (서기1907년 이전)

서기1912년에 신채호 선생의 동지이던 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 선생이 말하기를, “문인(文人) 유응두(柳應斗)는 고금의 일을 널리 통하여 아는 것이 많은 석학인데, 일찍이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서점에 들어가 이 책을 얼핏보고 마음에 기쁜 감동을 느끼기를 천금을 얻은 것이나 같았으며, 이에 유응두가 이 책을 사가지고 와서 문하(門下:유응두의 제자) 용암(庸菴) 이윤규(李允珪:이관구의 아버지) 등에게 수십권을 베껴 쓰게 하여 장차 다시 출간할 예정이다.”라고 하였던 사실이 있다.

한편, 서기1907년에 단기고사 중간서를 썼던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이 이윤규 선생으로부터 단기고사를 받았다라고 하고 있다.

위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경직 선생이 중간서를 쓰기 이전에 이윤규 선생이 단기고사 한문본(필사본 확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되는데, 이는 황조복본이나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한 것이 될 것인데, 황조복이 살았던 시기로부터 약1,100년 남짓 흘렀으므로 연대로 보아 필사본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4) 이경직 중간서(重刊序:190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학부(學部) 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은 우리 역사를 연구하면서 대야발이 지은 사서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실사(實史)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는 중국인 왕상춘(王常春)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며 “이 책이 귀국의 역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는 듯하니, 혹 참고가 된다면 그리하라.”하였는데, 이때 이경직 선생은 그 책을 상세히 살펴보니 책 모양이 너무 오래된 데다가 앞뒷장이 떨어져 남아 있는 것이 가운데 부분 몇장뿐이므로 저술자와 저술연대를 알 수 없었으며, 기사로 보아 조선의 역사임에는 틀림없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후 이윤규(李允珪) 동지가 책 한권을 가지고 와서 “이것이 단기고사이니, 학부에서 출간하여 세상에 공포하라.”하기에, 이때 이경직 선생이 상세히 고찰해 보니 저술자는 대야발, 중간한 사람은 황조복(皇祚福), 주역(註譯)한 사람은 장상걸(張上傑)인데, 그 책 모양이 먼저 왕상춘이 가지고 왔던 책과 서로 같으므로 몹시 이상하게 여기고 차례로 자세히 읽어 보았던 것이다.

이에 이경직 선생은 서기1907년(광무 11년)에 단기고사를 인쇄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여 중간서(重刊序)를 썼으나,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출간에 이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5) 신채호 중간서(重刊序:1912년)

서기1907년인 대한제국 광무 11년에 학부에서 출간계획을 세웠다가 중단된 일이 있은 이후 서기1912년에 만주에서 신채호(1880~1936), 이관구(1885~1952) 두분이 펴내려 하다가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중간서(重刊序)가 있다.

임자년(壬子年)인 서기1912년에 신채호 선생이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렀을 때 동지인 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1885~1952:이윤규의 아들, 목은 이색의 20세손)가 고서(古書) 한권을 가지로 와서 장차 출간할 마음으로 서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는데, 이때 이상히 여겨 그 책을 받아 두세번 읽어보니, 발해의 반안군왕 야발이 편찬하고, 발해의 대문호인 황조복이 다시 발간한 책이었던 것이며, 책 모양은 비록 오래 되어 헐었으나 진본(眞本)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 유래를 물었다.

이때 이관구 선생이, “문인(文人) 유응두(柳應斗)는 고금의 일을 널리 통하여 아는 것이 많은 석학인데, 일찍이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서점에 들어가 이 책을 얼핏보고 마음에 기쁜 감동을 느끼기를 천금을 얻은 것이나 같았으며, 이에 유응두가 이 책을 사가지고 와서 문하(門下:유응두의 제자) 용암(庸菴) 이윤규(李允珪:이관구의 아버지) 등에게 수십권을 베껴 쓰게 하여 장차 다시 출간할 예정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채호 선생이 만주에서 출간하려 중간(重刊)의 서문(序文)을 지었으나 출판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6) 국한문본(서기1949년) - 김두화 이관구 이시영 본

광복후 서기1949년에 김두화(金斗和:海菴:불교 학승), 이관구 선생 두분이 국한문으로 번역하고 이시영 선생의 교열과 한재용씨의 찬조로 비로소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김두화 선생은 박학한 불교의 학승으로서 이관구 선생이 일본 경찰을 피하여 암자에 숨어 지낼 때 가까워진 사이이며, 이에 단기고사를 함께 번역하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출간경로(出刊經路)라는 서문에서 번역출판인인 김해암 선생과 이화사 선생은, 문구에 근대술어가 많은 것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는 바, 단기고사는 해석된 용어를 제외하고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사실성 있는 역사기록이라고 할 것이다.

국한문본의 저본인 한문본은 찾을 수가 없다. 이관구 선생이 소장하였던 한문본은 서기1950년 6.25동란 때 서울 성북동 집에 놔 두고 피난하였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또 김두화 선생이 소장하였던 한문본은, 김두화 선생이 광복 후 1년 남짓 충북 청원군 강내면에 소재한 김재형 선생 집에 머물렀는데, 이후 그의 맏아들 이영희씨는, 끼니가 어려울 정도였던 김두화 선생이 고서가 많이 든 궤를 지고 충북 영동쪽으로 떠난 후 영영 소식이 없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7) 국한문본(서기1959년) - 정해박(鄭海珀) 본

1949년 간행본을 구할 수 없게 되자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국한문본으로 복원하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이 복원본이라고 한다.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은 출간 및 책 내용과 관련된 자료와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간 및 책 내용과 관련된 자료로는, 보충자료로서 역대총계표, 각종 기사, 역대약기, 전단제. 후단제. 기자조선 지도의 순으로 되어 있고, 단기고사중간사(김재형), 단기고사중간서(정해박), 본사출간경로(김재형, 정해박, 이종국) 등 출간정보 싣고 있으며, 다시 보충자료로 국조단군칙어, 원본국가, 천부경을 싣고, 단기고사재편서(발해국 대야발), 단기고사중간서(이경직), 단기고사중간서(신채호) 등을 싣고 있다. 본문은,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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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과 1990년에 복원된 한문초략본(백산본)이 확인되고 있으며, 국한문본은 그 내용이 각 시대의 상황과 맞지 않아 일반적으로 국사학자들은 구한말 이후에 만들어진 위서로 평가하기도 한다.<위키백과 단기고사 참조>
2) 건흥은 대진국(발해) 제11대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의 연호로서 서기820년이 원년인 바, 8년은 서기827년이 된다. 이때는 신라의 제42대 흥덕왕 2년이 된다.
3) 코리안스프릿-홍익문화>문화>포토뉴스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33609참조 <자료제공=조준희 소장> 참조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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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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