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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서,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이해-3

내용개관, 미래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12/08 [14:25]

민족사서,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이해-3

내용개관, 미래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입력 : 2012/12/08 [14:25]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전단군조선과 후단군조선의 구분을 동일한 임금이 수도를 이전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아 전후의 정통성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된다.17)

 
(2) 단기고사 본문 내용 개관

1) 전단군조선과 후단군조선

전단군조선의 수도가 부여길림평양이고 후단군조선의 수도가 영고탑인 바, 부여와 길림은 단군조선 이후 줄곧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의 영역이며, 특히 영고탑은 전단군조선이 이궁을 두었다가 후기의 수도로 삼았다는 사실과 대진국의 상경이 자리하였던 사실로 보아, 대진국이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적통계승 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된다.

기술된 내용을 보면, 단군조선 시대가 종교, 정치, 철학, 과학, 학문 등의 고도의 문명시대였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다만, 사용되고 있는 문구가 근대술어로서 현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출간경로에서 밝히고 있듯이 반드시 그 근거가 있는 데서 이해하기 쉽게 현대적 술어를 사용하였다 하고 있으므로, 그 근거된 역사적 사실은 실재하였다고 이해하여도 된다.

2) 기자조선18)

기자조선이 전단군조선에서 파생된 나라이며, 후단군조선을 상국(上國), 모국(母國)으로 대우하는 내용으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기자(箕子:子胥餘)가 주 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와 요수가에 머물렀는데, 기자조선의 제3대 솔귀 왕이 기자(箕子)를 요서(遼西)의 한 모퉁이에 거주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은나라 왕족 기자는 기자조선의 제후격이 된다. 또, 서기전1089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제6대 마밀(馬密) 왕이 아우 마립한(馬立罕)을 대마도(對馬島)의 왕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한다.

기자조선 시대에 대한 기술 내용도 위 전후의 단군조선 시대 역사적 내용과 함께 종교, 정치, 철학, 과학, 학문 등의 고도의 문명시대였음을 표출하고 있다.

(3) 역사관

서기1949년에 번역 출판 때에 출간경로에서 김두화 선생과 이관구 선생이 밝히고 있듯이 문구에 근대술어가 많은 것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고 있다.

이에 앞서, 원저자인 대야발은 태조 대조영 성무고황제의 명을 받아 사해에 널린 사서를 수집하고 여러 역사적 평론을 참고하여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완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단기고사의 내용이 근대적인 술어로 인하여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위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도 할 수 있으나, 위작을 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이 없다고 할 것이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근대적인 술어를 사용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 대야발이 기록한 용어를 근거로 번역한 것이 된다.

대야발은 의심되는 것을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였다라고 하는 바, 서기729년에 대야발이 편찬한 단기고사의 기록은 실재 존재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며, 서기827년에 중간한 황조복의 한문본 또한 대야발의 단기고사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고, 이 한문본의 필사본을 근거로 하여 근대술어를 사용하여 국한문본을 펴낸 것이 되어, 단기고사의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적 근거를 잃는 것은 아니게 된다.

1) 단군조선 정통계승국이자 기자조선(奇子朝鮮) 정통후예국

단기고사가 대야발 선생이 밝힌 것처럼 있었된 일 그대로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역사적으로 전단군조선과 후단군조선은 대진국의 정통 선대국이 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대진국은 전후 단군조선의 적통 정통 계승국이 되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기자(奇子)조선은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 파생된 나라이자 단군조선을 모국(母國) 또는 상국(上國)으로 모신 나라이므로 기자조선의 역사도 또한 대진국의 선대 역사가 되는 바, 대진국은 기자조선의 역사적 정통성도 계승한 것이 된다.

2) 고대중국과의 대등관계?

단기고사에서 고대중국의 당뇨(唐堯), 하(夏), 은(殷), 주(周)가 단군조선과 대등한 나라로 묘사되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특히 은(殷)나라를 동등한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19) 이와 관련하여 기자(奇子)조선은 주(周)나라를 대등한 나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후단군조선을 모국(母國)이나 상국(上國)으로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에서, 주나라는 단군조선의 하국(下國)이 되는 셈이 된다.

3) 고도의 문명시대

정치 제도 학문 등에서 사용된 용어로는, 총회, 사도(司徒), 도량형(度量衡), 정전법(井田法), 삼신전(三神殿), 국문정음(國文正音), 태수(太守), 조국문자(祖國文字), 수상(首相), 대부(大夫), 접빈관, 혼천기(渾天機), 국법전서(國法全書), 의사원(議事院), 참정권(參政權), 민권(民權), 자문기관, 신원함(伸寃函), 천문대, 감성관, 금강율령(金剛律令), 만국박람회, 병역(兵役), 국민개병제, 수호통상, 지방자치제, 법정학교(法政學校), 유위자의 도론(道論), 국립대학, 총인구 1억8,000만, 조세율, 정법원론(政法原論), 우주원리론, 태양력, 팔괘상중론, 군관학교, 정치원론, 정치론, 신주역서, 태양태음설, 현공설(懸空說), 지수설(地水說), 정법원리론, 정치형법서, 유성설(遊星說), 성리학, 심리학, 의학, 화학(化學), 천문지리학, 도덕경(道德經), 치국요람, 종교론, 천리경(天理經), 지리학, 광물학, 논리학, 동물학, 식물학, 사상의학, 백과서, 이재학(理財學), 대동율령, 양생론, 이기일원론, 의학대방(醫學大方), 자본론, 건축학, 종수학(種樹學), 정법통편(政法通編), 국민독본(國民讀本), 치국경법(治國經法), 경제원론, 재정학, 상업학, 백과통서, 천문학, 성학(星學), 천하여지승람, 성선설 성악설 무성설(無性說), 의학총서 48권, 대동벌률, 고시(考試), 감찰, 오원제(五院制), 법정대학, 농학교, 동의대감(東醫大鑑), 도덕요람(道德要覽), 단서(丹書), 염세주의, 유묵선(儒墨仙)의 삼합도(三合道) 등을 들 수 있다.

과학적 용어로 사용된 예로는, 서기전1836년 발명품20)으로서, 황룡선, 양수기, 자행륜차, 경기구, 자발뇌차, 천문경, 조담경, 구석편, 자명종, 경중누기, 연적, 발뇌동용기, 소금, 천리상응기, 목류마, 진천뢰, 어풍승천기, 흡기잠수선, 측천기, 양해기, 양청계, 측우기, 측한계, 측서계, 양우계, 측풍계 등이 기록되고 있다.

또, 주조발행된 화폐로는, 원공패전(서기전2133년), 자모전(서기전1680년), 패엽전(서기전1426년), 방공전(서기전642년) 등이 기록되고 있다. 그 외 닥종이, 칡베, 지남차, 목행마, 유황발사총 등이 발명되고, 정(鄭)나라에서 누시계(漏時計) 등을 들여왔다라고 기록된다.

위와 같이 사용된 문화적 용어와 시기에 맞지 아니하는 용어 사용으로 인하여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야발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반드시 그 근거가 있는 것이므로, 단군조선 시대는 고도의 문명사회임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5. 단기고사의 미래


1) 단기고사가 위작으로 의심받는 이유

단군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내용에서 국한문본이 근대술어를 사용하여 이해를 도우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근대술어가 현대교육을 받은 독자들로부터 의심을 사는 빌미를 주게 된다. 특히 사람 이름으로 기록된 석자장, 나염연, 범경빈, 소나벌, 방민백, 황포덕, 을지선, 연천석, 진무경, 관기을, 팔부루, 윤파노, 온백, 을성문덕, 한작(寒爵), 이사금, 정지선(鄭知先), 박달마(朴達摩), 김내물(金乃勿), 부분석(扶芬錫), 장자학(張子學), 마속량, 개서문(蓋西文) 등의 이름과, 지명이나 국명으로 기록된 서비로(西非路), 흉노, 지백특, 몽고리, 돌궐, 장백산(長白山), 달단, 가락(駕洛) 등의 명칭에서 후대 역사상 동일하거나 유사한 이름이 보이는 바, 그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21)

이렇게 근대 용어의 등장이나 시대에 맞지 않는 기록 등 여러 가지 모순으로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자료로 채택되지 않는 것이 된다.

2) 역사서로 인식하는 열쇠

우선, 단기고사의 서문 중에서 사실만을 기록하였다는 원저자 대야발의 글과 서기1949년에 작성된 출간경로에서 밝히고 있듯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근대술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3) 단기고사의 미래

근대용어의 사용과 후대의 역사상에 나타나는 유사한 인명이나 지명에서 여전히 위작의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 된다. 지명은 단군세기의 기록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필사하는 과정에서 번역상 발생한 문제로 일단 추정된다.

앞으로 단기고사가 사실적 역사서임을 입증하기 위하여서는 국한문본 이전의 한문원본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와 삼한관경본기의 번한세가 하편의 기록과 비교 연구함으로써, 단기고사의 기록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연대기적으로 역사시기적으로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22)23)24) 그렇게 함과 아울러 과학, 철학, 종교학, 정치학, 의류학 등 역사와 관련된 주변학문을 연구하고, 다른 나라의 역사도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역사인식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한 후에, 단기고사의 기록을 재차 검토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가 서기668년 9월 21일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평양성이 불타면서 함락당하여 아마도 그대 귀중한 사서들이 모두 소실되거나 당나라가 탈취해 간 것으로 추정되는 바, 대야발이 온 천지를 돌아다니며 답사하고 기록을 검토하여 의심되는 것은 빼고 사실적인 것만을 기록하였다고 하는 밝히고 있는 사실에서, 기록된 내용이 연대상으로 어긋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다. 그러함에도, 전단군조선과 후단군조선의 제왕 명호와 역년이 단군세기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과, 기자조선의 역년이 1,093년이 번한의 후기가 되는 번조선의 역년이 1년 차이로 일치하는 사실에서, 큰 틀에서 단기고사의 역사성은 인정하여 주어도 무방하다고 보며, 구체적인 내용은 단군세기나 번한세가 하편의 내용과 비교검토하여 시기는 다르나 동일한 사실은 그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부디, 국한문본의 내용이 결론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음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서기1949년에 발간된 국한문본의 저본이 된, 이 이전에 존재한 한문 원본이 발견되거나 출현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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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단군세기에서는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 색불루가 군사력을 기반으로 소태 단군으로부터 결국 사후 선양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색불루 단군은 전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음을 마한 여원흥에게 시켜 음력 3월 16일 삼신맞이 천제(天祭) 때 하늘에 고하게 한 백두산서고문(白頭山誓告文)에서 밝히고 있다.

18) 단기고사의 기자조선에 관한 기록은 한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편의 기록과 왕명에서 많은 일치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194년까지 1,092년간의 역사로서 그 역년(歷年)일치하는 것이 된다.

19) 번한세가나 마한세가에 의하면 하은주는 제천행사를 도운 것으로 기록되는 바, 번한, 마한과는 동등이하의 지위가 된다. 즉, 번한과 마한이 단군조선을 상국으로 모신 것과 같이 하은주가 단군조선(진한, 진조선)을 모두 상국으로 모신 것이 된다.

20) 단군세기에는 서기전1846년에 해당 기록이 있음. 이는 서기전1846년에 시작되어 서기전1836년에 새로운 발명품에 대한 시상(施賞)을 한 것으로 된다.

21) 흉노, 몽고리, 지백특 등은 단군세기에도 동일하게 기록되고 있다.

22) 천문 기록의 연구에 관한 글 소개 <위키백과 단기고사 참조>

국한문본 《단기고사》에 기록된 10여 건의 천문 관련 기록의 실현 여부를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문의 내용과 반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장 - 오성취합은 250년에 한 번 정도 일어나는데, 기록과 실제 현상은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썰물 기록도 200년 사이에 가장 큰 썰물이 4년의 오차로 기록되었다. 이는 매우 적은 확률이며, 따라서 기록이 임의로 조작된 것일 확률도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반론 - 논문은 국한문본 《단기고사》가 위작일 경우 막연하게 꾸며내었을 것을 가정하고 있지만, 동양 천문학의 지식이 있다면, 특히 천체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된 조선 세종시대 이후라면 옛 천문현상을 예측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연구의 기준으로 쓰인 연대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음을 가정한 것이며, 《환단고기》의 연대를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단기고사》의 연대로 같은 작업을 실행할 경우 200년 가까이 오차가 생기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오성취합은 20년에 한 번 일어나는 현상으로 1년의 오차를 생각한다면 1/6 정도의 아주 높은 확률이다. 


23) 북조선의 연구<위키백과 단기고사 참조>

단군조선을 47대의 왕조로서 기록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지나치게 긴 재위 연대에는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근대 이후에 사용된 용어 등 많은 부분이 후대에 가필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단기고사》 초략본(백산본)을 별도로 주목하였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의 기록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조선·후조선의 구분은 채택하였다.

24) 내용상의 모순을 지적한 글 소개 <위키백과 단기고사 참조>

서지 사항(출간 연도와 원본)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한문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1949년 간행본은 구할 수 없고, 1959년의 국한문 번역본 이전의 것은 없다. 1990년에 공개된 한문초략본은 국한문본과 다른 내용이다.

1907년에 공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김교헌이나 신채호의 글에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국한문본에서 1907년에 씌여진 이경직의 서문에 1910년부터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가 등장한다.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씌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고, 뒤이은 무왕은 ‘인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및 어휘 미술관, 지구성, 원심력, 만국박람회 등의 근대에 등장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기구와 전화, X-레이와 잠수선이 등장하고, 신하가 임금에 서양의 칸트-라플라스가 주장한 성운설의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회기(會期)를 정하고 백성에게 참정권(參政權)을 허락하여 매년 8월 1일 정기회의 날짜로 정했다.’라는 기록 등 근대적 용어와 개념이 사용되었다. 재위 연도의 모순 단기고사에는 고조선이 2096년에 모두 47대로, 기자조선이 1097년에 42대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수는 비슷한데 다스린 연수가 2배의 차이가 난다. 단기고사에 기록된 왕들의 평균 재위 연대는 45년 가까이 되어 상식과 어긋난다(후반부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된 기자조선은 41대 1052년으로 기록되어 평균 재위 연대가 26년으로 계산된다.). 북한의 학계에서는 이 점을 들어 단기고사의 기록을 불신하고 있다.

《단기고사》에 따르면, 기자조선이 전단조선 19세 단군 종년(규원사화는 구모소 임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1097년간 계속되었다. 위만조선의 시작 연대를 일반적인 기원전 194년으로 가정하면, 전단조선의 시작 연대는 기원전 2512년이 된다. 일반적인 기원전 2333년과는 179년의 차이가 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기원전 2333년이 고조선의 시작 연도로 기록되어 있다.

박병섭의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검토〉에서는 후단조선과 기자조선의 동일 내용에 대한 시대 불일치로 자체의 기간 정합성이 없음이 지적되었다.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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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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