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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서,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이해-2

저자, 역사관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12/08 [14:08]

민족사서,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이해-2

저자, 역사관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입력 : 2012/12/08 [14:08]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단기고사를 지은 사람은 대진국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다. 대진국(大震國)은 서기668년 9월 21일에 평양성을 함락당하면서 고구려 제28대 보장제(寶藏帝)가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고구려의 장수이던 대중상(大仲象)이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면서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였고, 32년인 서기699년 5월에 붕하고 태자 대조영이 서기699년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였던 것이다. 즉 대진국은 고구려를 정통으로 계승한 나라가 된다.

 
3. 단기고사의 저자
 

대진국은 황제국(皇帝國)이다. 그리하여 그 아래 왕(王)을 봉한다. 반안군왕(盤安郡王)은 봉해진 왕의 하나이다. 즉, 대야발은 대조영 성무고황제의 아우로서 황제 아래 왕으로 봉해진 인물인 것이다. 반안군(盤安郡)은 군(郡)7)의 하나가 되는데, 군이라는 행정명칭은 이미 북부여시대에 존재하였던 것이 된다. 북부여 해모수 천왕의 작은 아들인 고진(高辰)8)은 고리군왕(高離郡王) 또는 고구려후(高句麗侯)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고리국이 원래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9)이고 후기 단군조선 시대 이후 고씨(高氏)의 구려(句麗)가 되어 고구려가 되는 것이며, 북부여 시대에 고리군(高離郡)으로 편입된 것으로 된다.

대야발은 대조영 태조 성무고황제의 아우로서 세조 대중상의 작은 아들인 바, 후대에 그 후손에서 대진국의 황제가 즉위하는 것으로 보아, 대야발도 황통(皇統)을 이은 것이 되어 대진국의 실질적인 시조는 대중상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진국은 서기668년부터 서기927년까지 폐황제를 포함하여 15대 259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대야발은 서기715년 3월 3일에 대조영 성무고황제가 찬한 삼일신고의 서문을 지었다. 즉, 서기714년, 천통16년 10월에 태조 성무고황제가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읽어 찬(讚)하고, 자완대부(紫緩大夫) 선조성(宣詔省) 좌평장사(左平章事) 겸 문적원(文籍院)의 감(監)이던 임아상(任雅相)이 명을 받들어 삼일신고주해(三一神誥注解)를 지었는데, 서기715년 3월 3일에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이 위 삼일신고의 서문(序文)을 썼던 것이다.

반안군왕 대야발은 태조 대조영 성무고황제의 특명을 받아 단기고사를 지었는데, 이에 대야발은 널리 사서를 수집하고서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완성하였다. 대야발은 석실에 있는 장서와 옛 비석과 흩어져 있는 사서들을 참고하였으며, 돌궐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고적을 탐사하여 단기고사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 단기고사에 대야발은 천통 31년(서기729년) 3월 3일자로 서문을 쓰고 있다.

단기고사(檀奇古史)10)는 단군조선(檀君朝鮮)과,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편에 해당하는 한씨(桓氏)의 번조선(番朝鮮)인 소위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역사를 엮고 있는데, 단군조선을 전 단군조선(前檀君朝鮮)과 후 단군조선(後檀君朝鮮)으로 나누고 별도로 기자조선(奇子朝鮮)을 기술하고 있다.11)
 

4. 단기고사의 역사관
 

(1) 단기고사 본문 구성의 특징

1) 양대 시대 구분

단군조선 시대의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전(前)단군조선과 후(後)단군조선으로 크게 나누고 있다.

전단군조선 시대는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1112년까지 25대 1222년간이 되며, 후단군조선은 서기전1112년부터 서기전238년까지 23대 875년간이 되는데, 합하면 중복되는 1대(솔나 단제)와 서기전1112년 1년을 제하고 47대 2,096년간이 된다. 이 47대 2,096년이라는 단군조선 역년은 단군세기의 역년과 완전히 일치한다.12)

2) 시대 구분의 기준 - 수도

단군조선의 시기를 전단군조선과 후단군조선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누는 기준은 수도이다. 즉 서기전1112년 7월 15일에 천도하였는데, 부여(扶餘) 길림(吉林) 평양(平壤)에서 영고탑(寧古塔)13)으로 수도를 옮긴 것을 기준으로 하여, 영고탑으로 이전한 이후를 후단군조선으로 나눈 것이다.14)

서기전1112년에 제25대 솔나 단제가 수도를 영고탑으로 옮기기 이전에 전단군조선의 수도로는 단군세기에 의하면 서기전2333년부터는 아사달, 서기전1285년부터는 백악산아사달이었는 바, 단기고사에서는 부여조선(扶餘朝鮮)이라는 국호에 어울리는 부여 길림 평양으로 하나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아사달은 지금의 송화강 하얼빈에 있어 당시 숙신(肅愼)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되고15), 백악산아사달은 지금의 장춘(長春:常春) 지역으로 부여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된다.

또, 후단군조선에 해당하는 시기에 서기전425년에 장당경을 수도로 하였다는 단군세기의 기록과는 달리 서기전1112년부터 서기전238년까지 줄곧 영고탑을 수도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서기전1984년에 우착(于捉)의 반란으로 상춘(常春)으로 피난한 것과, 서기전1345년에 영고탑에 이궁을 건립한 것과, 서기전1250년에 신독(神督,申督)의 반란으로 영고탑으로 피난한 사실은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있다.

3) 기자조선(奇子朝鮮)

단기고사는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말과 구분하여 강조하듯이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 하며 전단군조선 및 후단군조선과도 별도로 하여 제3편으로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기자는 한서여(桓西余)로서 전단군조선의 제19대 종년(縱年) 단제의 아우인 청아왕(菁莪王) 종선(縱鮮)의 증손이라고 기록한다. 기자 한서여는 전단군조선 제25대 솔나 단제 39이 되는 서기전1112년에 평양(平壤) 왕검성(王儉城)을 수도로 삼아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기자조선의 역대와 역년을 42대 1,093년이라고 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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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郡)은 큰 고을을 가리키며, 토지의 넓이로 보아 일반 제후국 단위의 크기가 된다. 대략적으로 가로 세로 또는 지름 100리의 땅이 된다.

8) 고주몽의 3대조 즉 증조부이다.

9) 구려(句麗)는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이자 부루단군의 아우인 부소(扶蘇)가 봉해진 군국(君國)으로서 지금의 적봉시에서 서쪽으로 대동부에 걸치는 넓은 지역이며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보아 동서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나라가 된다. 역사기록에는 고리(藁離), 고구려(高句麗)라고도 적히며, 신(新)의 왕망(王莽)은 고구려를 격하하여 하구려(下句麗)라 고쳐 불렀는데, 이때 하구려는 당시 고구려 본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원 발생지가 되고 단군조선의 군국이던 구려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10) 천통 31년에 완성하였다. 서기729년에 해당하며 광종 무황제 11년이 된다.

11) 1959년 정해박의 국한문본의 내용

고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512년 ~ 기원전 416년에 해당되며, 47대 2096년간 지속되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44년 7개월이다. 기록상 전단조선의 치세 기간은 1214년간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계산하면 1222년간이다. 기자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1291 ~ 기원전 194년에 해당되며, 42대 1097년간 지속되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26년이다.<이상 위키백과 단기고사 참조>

12) 제1대 단제 단군왕검에 관하여는 왕위 57년과 제위 93년을 합하여 15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제위 93년은 단군조선의 제1대 단제로서의 재위 기간으로서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단군왕검이 승하하신 150년은 서기전2241년 경자년이 되므로 서기전2390년에 탄생한 것이 되어 서기전2370년에 탄생하였다는 단군세기의 기록과는 20년 차이가 생기는 바, 왕위 57년은 서기전2357년부터 서기전2333년까지의 웅씨국의 비왕으로 24년간 재위한 것을 포함하여 서기전2370년부터 서기전2333년까지의 37년이라는 기간의 오산으로 인한 오기가 된다.

13)  대진국의 상경 현덕부가 있는 지역이며 영안(寧安) 이 확실함. 서기전1345년에 전단군조선의 이궁(離宮)을 두었던 곳이다.

14) 단기고사가 후단군조선의 수도를 영고탑으로 적고 있는 것은 서기전1122년에 망한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서기전1120년에 단군조선 서쪽 변방에 망명하여 정착하고, 서기전1114년에 서화(西華)에 은둔한 기자가 두문불출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이전부터 영고탑으로 천도하는 문제가 논의되곤 하였는 바, 실제로 서기전1250년부터 서기전1237년까지 신독의 반란으로 13년간 머문 사실도 있어, 대야발이 주체적 입장에서 대진국의 국가 정통성과 연관하여 그 역사적 연원을 국가의 중심지인 수도에 중점을 두어 상경 지역에 소재한 영고탑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15) 하얼빈은 길림의 정북쪽에 위치한다. 길림은 부여 중 동쪽 지역에 해당하므로 북부여 시대에 동부여라 불렸다. 단군조선 전기에는 수도가 숙신 땅에 있어 숙신이 전기 단군조선의 대칭이 될 수 있고, 후기에는 수도가 부여 땅에 있어 부여가 후기 단군조선의 대칭이 될 수 있다.

16) 실제 역사에서 기준왕(箕準王)이 위만에게 망한 때가 서기전194년이므로 1,093년을 역산하면 서기전1286년이 되는데, 이는 서기전1112년에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연대가 다른 바, 서기전1286년은 서기전1285년의 1년전으로서 소위 전기 단군조선이 끝나는 해가 되어 후단군조선의 시작 연대와 기자조선의 시작 연대가 결국 서기전1285년을 서기전1112년으로 오산 및 오기된 것으로 보인다.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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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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