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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본 ‘참 언론인의 역할’이란?

군주제,봉건제에서도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라"고 했던 언관

정운현 시사칼럼 | 기사입력 2013/11/25 [10:13]

다산 정약용이 본 ‘참 언론인의 역할’이란?

군주제,봉건제에서도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라"고 했던 언관

정운현 시사칼럼 | 입력 : 2013/11/25 [10:13]

▲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편집부

[민족/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진실의길 공유기사] 미관말직에 있을 때도 신중하고 부지런하게 온 정성을 다해서 맡은 일을 다 해야 한다.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을 때는 아무쪼록 날마다 적절하고 바른 의론(議論)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이 널리 알려지게 하며 더러는 잘못된 짓을 하는 관리들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언관의 직책을 행사하여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음탕하며 사치하는 일에는 당연히 손을 써서 조치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의리를 인용해서는 안되고 자기 편만 편들고 다른 편을 공격해서 엉뚱하게 남을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된다.

벼슬에서 해직되면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며, 아무리 절친한 벗이나 동지들이 머물러 있으라고 간청을 해도 절대로 들어서는 안된다. 집에 있을 때는 오로지 독서하고 예(禮)를 익히며 꽃을 심고 채소를 가꾸고 냇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돌을 모아 동산을 쌓아 선비생활을 즐기도록 한다. 가끔 군(郡)이나 현(縣)을 맡아 외직으로 나갈 때는 자애롭고 어질게 다스리고 청렴결백하도록 힘써서 아전이나 백성 모두가 편하도록 해야 한다. 나라가 큰 난리를 당했을 때는 쉽거나 어렵거나 꺼려 말고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켜야 한다. 이런 사람을 임금이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미 존경한다면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관중(貫中)의 관계나 한(漢)나라 소열황제(소열황제 : 劉備)와 제갈공명의 관계는 이와 다른 경우다. 그런 경우는 천년의 오랜 세월 동안 두어 사람 있을 법한데, 그런 관계를 만나기 쉽겠느냐? 공신이나 외척의 자제들은 안으로 임금과 결탁되어 있어 한 집안처럼 양육하는 듯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피해야 하므로 조용하게 임금을 모실 수 없게 된다. 이는 신하 된 사람으로서 불행한 경우이니 누가 공신이나 외척의 자제가 되기를 바라겠느냐?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요즘 시대 언론은 크게 관영(官營)과 민영(民營)으로 나뉜다. 방송을 예로 들 경우 흔히 공영방송으로 불리는 KBS가 관영이라면 개인소유의 SBS 같은 경우 민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인 요즘은 개인이 언론을 소유할 수 있지만 전제 군주시절인 조선시대만 해도 언론은 공직(公職)의 개념이었다. 중국 신화통신이나 북한의 노동신문 등은 현재도 국영이며, 이곳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모두 공무원 신분이다.

따라서 언론은 소유구조 형태를 떠나 공공성(公共性)을 띄고 있으며, 언론을 공기(公器)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언론의 역할은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민간에 이양된 셈이다. 다산은 현대판 언론인인 언관(言官)의 역할을 두고 “날마다 적절하고 바른 의론(議論)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이 널리 알려지게 하며 더러는 잘못된 짓을 하는 관리들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의 역할은 그때나 지금이나 만고불변(萬古不變)인 셈이다.

그러면서 다산은 언관은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언관의 직책을 행사하여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음탕하며 사치하는 일에는 당연히 손을 써서 조치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의리를 인용해서는 안되고 자기 편만 편들고 다른 편을 공격해서 엉뚱하게 남을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모 거대 신문사의 사시(社是)가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고 들었다. 제대로만 지킨다면 언론사의 사시로서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겠다 싶다.

공직자의 진퇴(進退)와 관련해 다산은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발탁되면 벼슬길에 나아가 봉사하고) 벼슬에서 해직되면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독서하며 선비생활을 즐기도록 하라”고 했다. 더러 벼슬아치 친구들이 좀 더 기다려보라고 간청해도 뿌리치고 낙향하라고 했다. 권력자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충실하라고 했다. 만약 지방수령 같은 외직(外職)에 보임될 경우 “자애롭고 어질게 다스리고 청렴결백”하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땐 난이(難易)를 가리지 말고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키라고 강조했다.

이 글은 다산이 1810년에 쓴 것이니 200년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도 언론인과 공직자들이 금과옥조로 삼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기사출처: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wh_jung&uid=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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